십자가: 낮아짐인가? 저항인가?

50:4-9a; 시 31:14-16; 2:5-11; 22:25-26; 35-36; 23:4-5; 33-35; 44-46

 

지금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총선입니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모름지기 나라의 번영과 지역 발전을 위해 누가 더 좋은지를 뽑는 선거인데, 공천과정을 보면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여 오고 있고 당선이 확실시 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박 친노라는 진영논리에 의해 공천에 탈락을 시키고 지역과는 전연 무관한 사람들이 청와대 친정 식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언제쯤이나 이러한 계파간의 야합밀실정치가 사라지고 진정으로 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정치구조가 만들어질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런데 투표에 가장 적극적이어야 할 청년층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이런 정치 현실에 식상을 해서 투표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외면을 하는 경우 자기보다 미련한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외면하면 할수록 점점 더 무식하고 악한 사람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선거를 통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길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설사 정치인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야 말로 예수께서 주기도에서 말씀하신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하는길임을 깨닫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정치의 역학관계]

 

종교에서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 나눔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웃을 돕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이 가진 물질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부가 이들을 돕도록 복지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바로 만들면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총선 뉴스에 밀려 버렸지만, 두 개의 중요한 뉴스가 언론에 떴습니다.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저인 12.5%에 달한다"는 것과 "남한의 소득불평등 비율이 아시아에서 최악으로 상위 10%가 소득의 45%를 차지한다."는 뉴스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적으로 풀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실업률 문제는 대기업이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고 있는 대한민국 1년 예산에 해당하는 삼백조원의 돈을 고용 투자에 쓰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수밖에 없고, 소득불평등 또한 부자세를 통해 상위층이 독점하는 소득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전의 아날로그 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날수도 있었고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필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디지털 사회에서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식들과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식들은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바른 정치란 이러한 수저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공정한 규칙을 만들어내고 상호 도움을 통해 사회구성원 최대 다수가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손바닥헌법책}이 있는데, 헌법 7조에 보면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고 어떠한 차별도 없이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돈이 있으면 무죄 돈이 없으면 감옥을 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칙이 적용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종교와 정치가 함께 추구하는 공동목표인 것입니다. 흔히 정치는 정치인들끼리 하도록 놔두고 우리 종교인들은 믿음생활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종교인들 또한 정치 참여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힘써야 하고 정치권력이 사유화 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4월 총선이 불러올 소용돌이]

 

현재는 야권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다음 달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승리는 거의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관심사는 소수정당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180석을 넘어 설 것이지 아니면 영구집권을 가능케 하는 개헌가능 200석까지도 넘어설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경우 앞으로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몰아칠 것입니다. 테러방지법으로 이미 칼자루를 쥔 청와대와 국정원 세력은 사이버테러방지법 통과를 통해 모든 국민들의 입과 귀에 재갈을 물릴 것이며 재벌과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정리 해고하는 노동악법을 통과시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길거리 천막농성, 광고판 고공 농성자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고통을 견디다 못한 자살자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노무현정권 시절 31위였던 국제언론 자유지수는 이명박 박근혜정권 이후 날로 하락하여 현재 60위가 되었는데, 이 순위는 더 하락하게 될 것이고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다시금 뒤집어쓰는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지금 박근혜정권은 아버지 박정희가 그랬듯이 일본의 자민당과 같은 영구 집권을 꾀하고 있으며 이 나라를 전쟁광기의 군국주의 국가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의 보수 자민당의 아베 정권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과거의 전쟁과 침략 식민지 지배에 대한 죄책 고백은 하나도 하지 않은 채,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이라는 미명아래 평화헌법 9조를 폐지하고 미국과 손을 잡고 군사재무장을 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아베정권은 일본교과서 검정제도를 통해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다.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이 기술된 역사책을 2014년에는 초등학생에게 2015년에는 중학생에게 이제 2016년에는 고등학생에게까지 가르치도록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절반 이상의 교과서에 이미 이런 내용이 실려 있고 이 비율은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나 강제징용에 관련한 기술은 점점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일본 학생들은 한국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민족적 수치와 분노를 갖게 될 것이고 얼마 있지 않아 자신들의 땅인 독도를 찾겠다며 무력행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일본정부를 향해 독도에 대한 왜곡된 역사교과서 시정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만, 이는 단지 정치적 쇼에 불과했고, 위안부 관련 기술이 줄어드는데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정교과서 강제 시행을 통해 친일 역사를 왜곡하려는 이 정부가 같은 역사 왜곡을 하려는 일본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난하는 것과 같이 우스운 꼴입니다. 지금 우리는 일본이나 남한 그리고 북조선 중국 미국 모두가 점점 핵무기를 비롯한 신형무기로 무장하는 신군국주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각성하고 평화를 위한 행동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의 행진: 우연인가? 계획의 산물인가?]

 

오늘은 부활주일을 한주 앞둔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흔히 종려주일이라고 불립니다. 이는 이천년 전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해서 붙여진 별칭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호하고 옷을 벗어 길에 까는 일은 본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로마 황제나 장군들을 위한 환영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영의 과정을 예수에게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전쟁의 승리자가 아닙니다. 단지 역사의 변두리에 밀려 살아가던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들 곧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저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련한 많은 말씀을 들려주시고 저들이야 말로 도둑처럼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주역들임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깨우침의 과정에서 저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수많은 기적을 행함으로 백성들 사이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나사렛의 그 예수가 드디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유월절 혹은 과월절이라 불리는 해방절 축제 첫날이었습니다. 약 천오백년 전 자신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 야훼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해방을 주셨는데, 바로 그 출애굽의 해방을 기념하는 8일간의 해방축제 첫날에 예수가 온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혹독한 지배 아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구해줄 것을 위해 우리가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듯이 자나 깨나 독립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안에는 순례자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예루살렘 성 입성 날짜는 우연일까요? 아니면 계산속에서 선택한 날일까요? 선택을 했다면 무슨 이유일까요?

 

성서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이 첫날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기병부대가 독립만세운동을 꾀하는 젤롯당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 입성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일찍 홀로 기도를 마친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뽑아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저기 벳파게 마을에 가면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가 한 마리 있을 것인데, 이를 끌어 오너라 혹 주인이 뭐라고 얘기하거든 내가 쓴다고 하면 줄 것이다. 이미 예약해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예수는 올리브산을 넘어 이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옵니다. 물론 같은 시간 성 반대편에서는 말을 탄 로마부대가 긴 창과 칼을 번뜩이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정치 조롱 패러디]

 

로마군이 들어오는 종로 큰길가에는 총독과 헤롯왕을 비롯한 대사제는 물론 내노라 하는 사회의 지도자들과 부자들이 길에 나와 겉옷을 벗어 레드카펫을 만들고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Pax Romana! Pax Romana!’ ‘로마의 평화는 영원하리라. 가이사 황제 만세 황제 만세!’를 외쳤던 것이고, 그 반대편 왕십리 길가에는 종로통 환영 일파에 낄 수 없는 가난한 민중들이 예수 일행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들 또한 변변치 못한 옷이었지만,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아 레드카펫을 대신했으며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하며 이전 다윗 왕이 이룩했던 정치적 영광을 들먹이며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한을 달랬던 것입니다.

 

이때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보지 못한 어린 나귀는 청년 예수의 몸무게를 버거워하며 이리 비뚤 저리 비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걸었습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 껄껄대며 마음껏 웃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새끼나귀를 타신 이유는 스가랴서 9장에 선포된바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는 예언의 성취로서 선택한 상징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한에 가득 찬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로마의 지배자들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는 정신적인 해방공간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요즘 유행하는바 독재 권력자들을 비웃는 일종의 정치적 조롱 패러디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십여년동안 향린교회를 섬기면서 종려주일을 맞아 몇 번에 걸쳐 광대 옷을 입고 이러한 패러디를 재연하여 왔습니다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은 종려주일이지만 루가복음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일어나는 월요일부터 목요일 저녁까지의 나흘간의 예수 행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 말씀은 22장과 23장 두 장 전체입니다. 너무 길어 핵심 사건을 설명하는 몇 개의 구절만 선택해서 읽었습니다. 떡과 잔을 나누는 마지막 주의 만찬, 가롯 유다의 배반과 예수의 체포 그리고 예수가 빌라도와 헤롯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장면들입니다. 사실, 하나의 사건만 갖고도 한 시간 설교가 가능한데, 제가 오늘 중점으로 다루고자 하는 구절은 2235절로 38절까지의 체포 직전 제자들과 함께 나눈 말씀입니다.

 

[옷을 팔아 칼을 사라]

 

먼저 베드로가 죽음까지라도 스승 예수와 함께 하겠다고 맹세를 하자 오늘 새벽닭이 울기 전 너는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에 내가 너희를 보낼 때 돈주머니나 식량자루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느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와는 전연 반대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자루도 가지고 가거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가지고 가거라.”

 

저는 그간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라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배가 고파 애통해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라고 외쳐왔는데, 오늘은 돈주머니와 식량 주머니를 준비하십시오. 가능하면 큰 것으로 준비하십시오.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라고 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느 말씀이 더 좋으세요? 그동안 예수의 참 제자가 되려면 가난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복음 선교를 위해 돈주머니도 식량주머니도 필요하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돈주머니와 식량주머니는 그런대로 따라 할 수 있겠지만,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가지고 가거라는 명령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어느 아버지가 여행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데 해석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소매치기나 어두운 골목길에서 강도들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저는 강도를 당해본 적은 없지만, 소매치기는 여러 번 당했습니다. 다행히 그때그때마다 순간적인 지혜가 생기고 뜻하지 않은 주변의 도움으로 지갑을 잃어버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가야 할 때 비상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칼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질 때는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의 칼을 사가지고 가라는 명령을 이런 각도에서 이해한다면 전연 이해 못할 명령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칼을 갖고 다니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기 때문입니다. 강도들은 당연히 무기를 소지하고 접근할 터인데, 외국 여행객 노인네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칼을 꺼낸다 한들, 그들 앞에서는 장난감에 불과할 것이고,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폭력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작은 폭력은 큰 폭력 앞에서 무력할뿐더러 오히려 폭력을 정당화시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칼을 사라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해석의 일관성(一貫性)]

 

물론 문자적 해석이 어렵거나 경우에 맞지 않으면 당연히 비유나 은유적 해석 혹은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도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칼만 은유나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같은 문단속에 있는 돈주머니, 식량주머니, 신발, 겉옷 또한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일관성이 있는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필요나 이해 정도에 따른 자의적인 해석은 옳은 해석 방식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 또한 칼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같은 말을 루가는 이라는 단어를 로 바꿔서 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이 두 복음서는 모두 이 얘기 바로 다음에 예수와 복음으로 인해 가족 간에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다고 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가 칼을 언급한 것은 평화의 반대 개념으로 곧 루가가 말하는 불과 분열에 해당하는 상징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해석의 일관성을 벗어나는 일이기에 여러분 개개인이 그렇게 해석할 자유는 있지만, 적어도 학문을 한 목사가 공적인 자리에서 할 해석은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로 본 구절을 다루는 목사나 신학자들이 이 칼을 대부분 자의적 방식의 은유나 비유로 해석을 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논리적인 해석은 바로 이어지는 말씀 그는 악인들 중의 하나로 몰렸다는 예루살렘 권력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만한 죄목을 주기 위해 칼을 준비하도록 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칼에 대해서는 가능한 해석일수 있지만, 돈주머니와 식량주머니와 신발에는 전연 연계가 되지 않는 결함을 갖고 있습니다.

 

[칼을 사야할 특수상황]

 

이런 전제 하에서 일단 상식적인 접근을 해보십시다. 겉옷은 추위를 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할 따름입니다. 겉옷 열 벌을 껴입었다고 해서 생명을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칼은 위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물론 칼을 든 강도를 물리치려면 자기가 가진 칼로 강도를 죽여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상황윤리 문제로 비화하게 되는데, 지금은 곁길로 나갈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미국 도시 슬럼가에 사는 흑인들은 자주 일어나는 길거리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갖는 일이 일상화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비싼 겉옷 대신에 총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지금 5년째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 사람들은 옷을 팔아 무기를 소지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겉옷을 팔아 칼을 사거라는 예수의 명령은 폭력이 난무하는 특별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평화 시기에는 필요하지 않았던 돈주머니와 식량주머니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구절을 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고 행하는 사람도 없고 또 그렇게 지킬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대로 따를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했다고 해서 오른뺨을 맞으면 늘 왼뺨을 돌려대거나 강도가 겉옷을 달라고 하니까 속옷까지 벗어주어 빨게 벗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 말씀 배후에 담겨 있는 정치사회적 해석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들은 악한 권력자들 앞에서 복종이나 굴종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악한 지배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악행을 뉘우치게 만드는 저항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복음서는 예수 사후 50년이 지나 기록이 되었으며 특히 유대의 독립항쟁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초토화되고 나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게릴라들에게만 시행했던 십자가 처형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희망의 대안으로 예수를 설명해야 했던 복음서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역사 그대로 기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했다간 로마당국의 제재로 인해 선교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영혼치유자 혹은 기적행위자로만 기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귀 있는 자만이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모호한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상은 무려 50가지가 넘습니다. 우리 모두의 예수상이 다 다릅니다.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에 따라 예수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상이한 이해]

 

십자가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챤에게 있어 십자가에 대한 이해는 오늘 필립비 본문에 나와 있는 바울의 해석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종의 신분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셨고,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를 순종의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죽음 자체에 대한 순종인지 아니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 곧 갈릴리에서의 민중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저들을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하느님 나라 활동과 오늘 종려주일에 보여준 로마의 지배에 대한 정치 조롱 패러디로서의 저항까지를 함께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는바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했으니 바울이 말하는 순종은 십자가 죽음 자체이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포함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옷을 팔아 칼을 사거라는 예수의 역사성 있는 말씀은 바울의 십자가 해석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십자가: 낮아짐이냐? 저항이냐?} 라는 대립적인 두 단어를 병렬해 놓았습니다. 오늘 루가복음 외의 세 본문 말씀은 모두 십자가를 낮아짐과 순종,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루가복음 본문은 여러 곳에서 이와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예수께서는 체포 직전 겟세마네 기도에서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는 자신은 역사 변혁의 구경꾼으로 남겠다는 자기 포기의 선언인가요? 아니면 의로움이 결국은 승리한다는 역사 인식에 바탕을 둔 자기 고백인가요? 저는 이 기도는 자기 포기의 선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후에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 이 승리는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찬양하는 고백의 기도로 이해합니다.

 

[십자가와 역사 변혁]

 

순종과 저항은 문자의 뜻으로만 본다면 대립적인 단어요 하나로 합쳐지기 어려운 단어이지만, 예수께서 하느님의 자리에서 사람의 자리로, 사람의 자리에서 사람의 아들이 되는 종의 자리에로 낮아지는 순종과 정치권력의 횡포와 사회 불의에 대한 저항은 십자가 안에서 하나로 통섭(統攝)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옷을 팔아 칼을 사라는 명령은 포악한 시대를 이겨나기 위한 저항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저항은 잘못하면 더 큰 참화를 불러오게 됩니다. 예수는 바로 그런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죽음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때는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는 명령은 역사 변혁에 구경꾼이 되지 말고 직접 참여자가 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히틀러독재 하에서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얻어진 값비싼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일종의 배교행위라고 본훼퍼 목사는 설교했고 젊은 나이에 수용소 형장에서 사라짐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선구자인 신학자 크로산은 말합니다. “지난날에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역사 개입을 기도하며 기다렸지만, 지금은 하느님이 신자들의 적극적인 역사 개입을 기다리신다.”.

 

평화란 기도한다고 해서 저절로 굴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 이를 이루기 위한 분명한 의지를 갖고 투쟁의 현장에 참여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죽음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는다고 해서 절로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투쟁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자는 것 그것이 십자가가 말하는 바이며 부활이란 우리가 싸우다 죽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닌 그 희생은 하느님의 선한 역사를 믿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일어서도록 하여 끝내 승리의 역사를 이룩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부활의 아침이 교회의 절기로서가 아니라 여러분 각자의 구체적인 삶에서 되살아나는 역사 변혁의 주역으로 다시금 나서는 카이로스의 첫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