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곧 평화의 복음 선포

118:1,21-24; 65:17-25; 10:34-43; 20:1-3, 11-14,18-20

 

[부활의 증명은 어떻게?]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명은 생전에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 가나 혼인잔치에 참여해서 포도주를 마셔 보았던 사람들, 혹은 인적 드문 들판에서 떡과 물고기를 먹어보았던 5천명의 사람들, 혹은 한주 전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하실 때에 길가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던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예수를 직접 심문했던 대제사장 혹은 헤롯왕 혹은 빌라도에게 나타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그들 중 한명이라도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돌연사를 했거나 아니면 바울과 같이 예수의 제자로 돌변을 했더라면 보다 분명한 증명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습니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 예수는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도 나타나셨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이 장소가 어디였는지를 말하고 있지 않고 자신이 그 오백 명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 않아 이는 소문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 자신이 만났다는 부활 예수의 기록을 보면 함께 했던 일행들 중 아무도 바울을 제외하곤 바울이 들었다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거나 아니면 그 빛보다 부활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얘기는 부활의 객관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바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것은 약간 아쉬운 대목입니다.

 

부활 사실 기록에 있어 복음서는 바울의 증언보다는 훨씬 더 제한적입니다. 4복음서를 다 합친다 하더라도 서넛의 여성 제자들과 열한 제자 그리고 루가복음의 엠마오도상의 두 제자와 요한복음의 사랑하는 다른 제자 모두 합쳐 20명을 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들이대밀 수 있는 객관적인 입증 자료로서는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과거 인간 역사의 모든 사실을 입증 자료를 통해 다 증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자연 화석을 통해 수백만 년 살았다고 하는 공룡을 추정하듯이, 어떤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갖고 그런 사실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자 도망을 갔던 제자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했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스승 예수 부활 외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내기는 매우 힘듭니다. 한두 명이 잠시 그럴 수는 있겠지만, 권력의 계속되는 박해와 회유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예수를 따라 순교했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부활 예수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부활의 사회성]

 

오늘 본문에서 요한복음서는 부활 예수의 제자들의 체험을 통해 역사적 증명을 시도하고 있고 다른 세 본문은 모두 부활을 삶의 다른 차원에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 집 짓는 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고백은 죽은 자의 부활을 노래하는 신앙은 아니지만, 별 볼일 없는 변두리 인생들이 새로운 나라에서 역사의 주인으로 나서는 민중주체의 역사를 설파한다는 점에서 신학적인 연계는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 새로운 역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다시는 부르지는 울부짖음이 없을뿐더러 며칠 살지 못하고 죽은 아이나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노인도 없는 모두가 제 수명을 다하는 살육이 없는 세상, 그리고 제가 지은 집에 남이 들어와 살거나 제가 가꾼 과일을 남이 따먹는 침략이 사라진 세상, 곧 약자와 강자가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그리는 세상 늑대가 어린 양과 같이 먹는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고 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는 늑대와 사자와 뱀이 본래 갖고 있는 육식성 위의 구조가 초식성 위의 구조로 바뀔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평화는 강자가 약자에게 핵포기를 선행 조건으로 요구해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강자가 먼저 핵을 포기하는 회개가 선행할 때, 평화의 공존이 가능한 것입니다. 제국이 군산무기산업이라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육식성 산업구조를 사람의 목숨을 살려내는 의료나 환경과 같은 평화산업으로 개조할 때 비로소 이사야의 꿈은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갈릴래아 예수에게서 출발한 평화의 복음으로 설명합니다. 복음(福音) 곧 희랍어로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본래 당시 로마제국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뜻하였습니다. 수많은 노예들과 진귀한 보물 탈취를 통한 이득을 두고 기쁜 소식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뒤집어 복음은 평화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의 복음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넘어 예수가 그러했듯이 사람을 피부색이나 성이나 이념이나 출신이나 국적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일이며 좋은 일을 베풀며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고쳐주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악마는 로마제국의 힘에 근거한 폭력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2016년 고난주간]

 

올해의 사순절 마지막 주인 고난주간은 제게 있어서는 참으로 뜻 깊은 한 주간이었습니다. 월요일에는 기장 총회 소속 목사님들과 신도들의 고난 받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대한문에서 있었고 이어 순례 행진이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청광장을 지나자 3백 명의 숫자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도로 1차선을 내어주지 않자 저희들은 이를 강력히 요구하며 연좌 농성에 들어갔고, 급기야는 본래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성찬식을 시청 뒤 도로 한가운데에서 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불과 1,2분이면 지나갈 차도 위에서 한시간을 머물렀고, 그 와중에서 경찰과의 충돌이 여러 차레 있었습니다.

 

제가 그간 거리에서 성찬식을 수없이 해보았지만, 차도 한가운데에서서 경찰들이 둘러싼 가운데 성찬식을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결국 참가인원이 계속 늘어나자 도로를 내주어 무사히 행진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이어 화요일 저녁에는 청녀신도회와 사회부가 주관이 되어 1000여일 째 농성 중인 사회보장정보원 해고여성노동자 한분과 함께 촛불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갑작스럽게 예정에 없었던 일로 유성기업 해고노동자 한분이 국가와 회사의 노조파괴공작을 견디다 못해 6일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에 함께 했던 분들이 시청 광장에 추모하는 분향소를 세우겠다는 것을 경찰이 막아 연좌농성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방문하여 연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목요일 저녁에도 유성 기업 농성장을 방문하여 짧은 기도회를 갖고 이어 미대사관 옆으로 가서 전쟁연습반대와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목요촛불기도회와 성찬식을 사회부 주관으로 갖고 20여명에 불과했지만, 정부청사까지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하였습니다. 연 나흘을 계속 거리기도회를 드렸고 이번 주에는 성찬식을 다섯 번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또한 이 땅의 약자들을 위한 부활절연합예배가 광화문에서 있고 우리 교인들은 그곳까지 가면서 군데군데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현장의 증언]

 

이 시간에는 시청 옆 전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10층 옥상 광고탑 좁은 공간에서 근 열 달 가까이 농성중인 두 분과 전화로 연결하여 현장의 아픔의 소리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향린교회 여성 신도 두 분이 각각 화요일, 수요일에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여 전달하고 계시고 일요일에는 저희들이 먹는 음식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인권위 전광판위에서 291일째 고공농성 하고 있는 최정명 한규협 입니다.

부활절 예배에 저희들을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규협동지가 몸이 좋지 않아 제가 대표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참 잔인한 세상입니다.

법이 판결한대로 정규직화 하라고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하는데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110조의 현금을 쌓아놓고도 돈이 없어 못한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현대 기아차 정몽구회장을 보며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인지 정말 잔인한 인간이라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돈 있고 권력이 있으면 법 위에 군림해도 되고, 사람 위에 군림해도 된다는 권한을 누가 줬습니까?

 

300일이 다가오니 이제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리의 핍박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하는 향린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을 보며 저희는 힘을 얻습니다.

매주 올려주시는 따뜻한 집밥 도시락을 먹으며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얻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에게는 여러분들이 '예수'입니다.

약한 자 의 고통에 온몸으로 함께하는 신앙인들을 보며 예수를 느낍니다.

저나 한규협동지는 마흔살에 얻은 늦둥이 막내딸이 있습니다.

사실 몸이 아픈 것을 견디는 것보다 아이들이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더 힘이 듭니다.

잔인한 세상,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지만 이렇게 응원하고 연대해 주시는 그 마음 새기며 나쁜 마음 먹지 않고 건강하게 승리해서 내려가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향린교회 그리스도인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부활 신앙은 단순히 나 개인이 영원히 살아간다는 차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성서의 어떤 구절도 부활을 개인의 영원한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 증언은 개인과 현재의 삶을 넘어서서 지금 다가오고 있는, 아니 이미 와 있는 역사 저편의 시각, 곧 정의의 심판자로서의 신의 눈에서 바라보라는 것이고 오늘 예수 부활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런 역사적 시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찬양인 것입니다. 굳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부활을 얘기한다면 이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 그럴 줄 알았으면 나 이렇게 살지 않았어야 했는데,’ 라고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럴 줄 알았기에 난 이렇게 살아왔다.’라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인생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날은 야훼의 날이며 우리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