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공동체 강단교류주일

 

신앙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

(시편 118:22-24; 사도행전 5:29-32; 요한묵시록 1:8; 요한 20:24-31)

 

임 보 라 목사

 

시편118편은 감사로 시작을 합니다.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요즘과 같은 극악무도한 시절을 지나며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선하심과 인자하신 주님이 너무 멀리서만 바라보고 계신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3년 만에 향린의 주일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이 사회에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리에서 많이 뵙기도 했지만 오랜 만에 주일예배를 드리자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언젠가 향린교회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복사기를 급하게 써야했는데, 사무실 문이 잠겨있어서 조 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 자물쇠 패스워드를 받아 사무실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문인데, 그제서야 암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막상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이 참 조심스러웠습니다. 것 참 이상하네... 남의 집 들어가는 기분이네... 했더니 옆에 같이 계셨던 분이 남의 집 맞잖아요.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진 : 섬돌세움 3주년 예배

 

201317일 향린에서의 세움과 나눔 예배를 드린 후, 1월 둘째주일부터 섬돌향린교회의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로 섬돌세움 3주년을 맞았습니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만날 기회가 다양하니, 여러 경로로 섬돌의 이모저모에 대하여 들을 기회도 많으셨겠지요. 섬돌세움주일 축하를 위해, 그리고 청신, 희청, 청년여신도회, 성평등위원회 등에서 섬돌주일예배에 함께 해주신 적도 있습니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 섬돌향린교회를 지켜봐주고, 늘 기운을 보태주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고, 함께 예배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들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마의 3년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분가하면서 알았습니다. 섬돌은 교인, 재정, 목사, 그리고 안정된 공간을 토대가 있었기에 일반적인 개척교회에 비하면 탄탄한 기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분가선교의 장점입니다. 100교회가 세워지면 그 중 75개는 3년 내에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풍토입니다. 그러나 섬돌향린교회는 초기부터 단단한 힘을 갖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다하는데 집중하면서 3년을 지날 수 있었기에 지난 3년은 저를 포함한 섬돌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고, 새로운 도약을 바라보고 꿈을 꾸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섬돌향린교회의 근황을 여러 통로로 들으셨을텐데, 어떤 분들은 걱정을 하시기도 하고, 반대로 직접 와보신 분들은 안심을 하시기도 합니다. 아마 들은 이야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이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섬돌은 1월에 분가한 후, 몇 달 지나지 않은 4월경 홈페이지 게시판이며, 사무실 전화, 이메일 등에 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의 제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난리통에도 방송을 들으셨던 분들 중 지방에 사시면서 섬돌의 준회원으로 꾸준히 교제를 나누고 있는 분도 계시니, 오히려 덕을 보기도 했습니다.

 

노은아님의 딸 해루님이 8개월이 되었고, 민경인/김유석님의 딸 단하님이 2돌을 앞두고 있습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섬돌님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출석은 어려우시지만, 늘 섬돌을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말씀하시는 80대 이영희님, 그리고 그 연세가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 며칠 전 배낭여행을 떠나신 이영욱님에 이르기까지 연령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성이 공존하는 교회로 3년간의 바닥 다지기 작업을 마쳤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섬돌 역시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여러 교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성별, 정치적 의견, 민족이나 사회적 출신, 재산, 장애, 나이, 국적, 혼인과 가족상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건강상태, 거주장소, 사회적 지위, 인종과 피부색 심지어는 종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 있는 분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종교는 무교이지만, 섬돌예배에는 기회가 닿는대로 오고싶어하는 분들이 계심)

 

최근 교인수가 좀 더 늘기는 했지만, 정회원 준회원 합치면 150명이 넘고, 기장총회에 보고한 1월 중순까지의 통계로 볼 때 정회원은 91명입니다. 어린이를 포함한 세례교인이 72, 비세례교인이 19, 40대이상이 47, 40대 이하 청년이 31, 청소년 4, 어린이 9명입니다. 2015년 결산이 1억하고 700여만원이었는데 일반지출과 특별기금 지출을 포함하면 선교비 지출은 30프로가 넘습니다. 작은 교회들은 목회자 사례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선교비 비율이 높은 것은 그만큼 내부 살림을 알뜰하게 하는 여러 고마운 손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향린공동체의 다른 교회들에 비해 교인들 중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 또는 준활동가로서 살아가는 분들 수가 가장 많을 것입니다. 전반적인 평균연령도 4교회 중 제일 젊습니다.

 

향린에서 분가를 했어도, 서로 접할 기회가 적었던 분들이 새로이 알아가는 과정에 더하여 섬돌의 출발과 함께 교인이 되신 분들, 교인으로 계셨던 분들 중, 해외와 지방이주, 여러 이유로 떠나기도 했고, 그만큼 또 새로이 오신 분들도 있고, 이런 여러 층위들이 있다 보니 친밀감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지난하기도 했고, 또 그만큼의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목회자인 제가 보기에 섬돌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들도 많지만, 3년을 지나면서 축적된 저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 특징들이 있겠지만, 3년을 지나며 제가 경험한 섬돌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교회에 청년들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요즘, 섬돌에는 청년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앞선 세대보다 못살게 되는 최초의 세대, 전후 가장 희망 없는 세대, 절망세대, 흙수저 등으로 청년세대를 일컫는 말들이 많습니다. 실제 학자금 융자, 학업과 알바, 단체 활동, 거기에 교회활동까지 열심히 살기 위해 애쓰는 분들의 일상을 보노라면 마음이 늘 무겁습니다. 학비 걱정 없이, 알바비는 오롯이 나의 여가생활과 스펙쌓기에 쓸 수 있는 청년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며칠 전 오마이뉴스에서 청년세대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에서는 청년세대를 '유토리 세대'라고 부른다 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2000년대에 주입식 교육을 개혁해서 조금 여유로운 교육(유토리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라는 것인데요, 이들은 1987년에서 1996년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일본 기성세대는 이들, 유토리 세대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약하고, 쉽게 좌절하고, 꿈이 없고, 규칙을 준수하여 시키는 것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한국사회에서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을 바라보는 편견어린 시선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청년들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은 사회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주체성을 가진 한 신앙인으로 보기보다는 중고등부의 연장선상에서 청년들을 바라보고, 필요시 노동대체 인력으로, 필요시 끼워주는 악세사리 정도로 취급을 하는데, 그에 비해 섬돌에서는 주된 연령층이다 보니, 목회운영위원회와 같은 주요의사결정구조에서도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부터 현재 4명이 소속되어 있는 청소년부도 시작되어 10대들이 자신들의 모임을 인디고, independent, go!go! 독립적으로 가는 10대들이라고 부릅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거울-촉각 공감각자라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말로 풀어볼까 합니다.

 

거울-뉴런(mirror neuron)’이라는 것이 뇌에 있다고 합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반응하고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하는 조직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누군가 손을 대는 것을 볼 때 자신의 몸에도 같은 느낌을 갖는분들이 계시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는 아마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거울-촉각 공감각자라고 하는데, 이런 분들은 일반인보다 거울 뉴런의 반응이 훨씬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촉감 뿐 아니라 얼굴 표정에 대한 인식도 일반인 보다 더 잘 인식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목회자가 보기에 섬돌에는 촉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울-뉴런의 반응이 강한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분들, 또는 일반인보다도 둔감한 분들도 계십니다. 뭐 그게 특징이냐, 어느 공동체나 마찬가지이지.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반응에 대한 솔직한 표현들도 자주 오고가다 보니, 때때로 그로 인해 느껴지는 갭으로 인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픔이 기쁨을 앗아가는 이 시대에 나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각까지 느끼며 산다는 것은 피곤하다 못해 사람을 참 지치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픔은 고통을 줍니다. 사람의 몸에서 고통을 느끼는 부위를 통점이라고 합니다. 피부 1cm2100-200여개가 있는데, 통점이 있음으로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자본과 후치무안, 아전인수 정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통점의 기능이 마비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통점 뿐 아니라, 뇌의 거울-뉴런도 어떠한 반응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 자체가 힘드니까 무디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사회에서 권력과 재력, 혹은 빽 이런 것들이 있는 사람들은 혹시 애초부터 이런 기능을 갖지 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공감각을 상실했고, 더 무서운 일은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 특히나 종교계의 리더 라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손바닥 크기만한 기득권이라도 이것을 쥐고 있는 사람은 내가 요만한 기득권일지라도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어떤 이득을 얻어왔는지 성찰하지 못한다면 무딘 감각은 되살아오기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섬돌향린교회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 사회에서 무디어진 통점과 공감각을 살려내는 사명이 주어졌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에는 부활사건 후 예수를 만난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도 담겨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갖고 있던 두려움의 강도는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는 표현에 잘 담겨 있습니다. 언제 잡혀갈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안으로 숨어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면서도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짠~하고 예수가 나타나서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말을 건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금새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바로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실제, 누가복음에는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마가복음에는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본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마태에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다면 우리 역시 금새 그렇게 기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하면 안 된다고 뭐든지 믿고 아멘 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도마가 가졌던 의심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확실히 알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도리어 말도 안돼 라며 돌아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해보는 것, 마치 철썩 같지 변치 않을 믿음을 갖고 있는 체 하다가 그 끝은 부정, 불신이 되는 것보다 훨씬 건강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는 말이 이렇게 오랜 세월 의심많은 본받지 말아야할 대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을 도마가 알았다면 좀더 있어보이는 말을 할 걸 하고 후회를 했을는지 모릅니다. 소위 요즘말로 하면 안티가 이렇게 기록해놓은 것일 수도 있어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에 사로잡히면 이성을 잃습니다.

 

요즘 일부 한국교회가 끊임없이 조장하는 이슬람혐오, 성소수자혐오 등도 마찬가지이지요. 결국 사실도 아닌 거짓된 정보를 가지고 사진도 조작하고, 영 딴 내용을 끼워 맞춰놓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 목사가, 장로가 보내준 건데 이게 거짓말이겠어?라고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를 실체화하고, 실제 공격당할 위협에 당장 노출되어 있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분위기로 몰아가면 마치 실제 경험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제자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는 실제 박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소수자들이었던 만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국에는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섭니다. 산 사람들이 늘 맞닥트릴 수 밖에 없는 죽음을 넘어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허상이 아닌 실제요, 현실에서 그리 살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여건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여건은 더 나빠졌지만 한계 상황을 넘어서고 나니 도리어 두려움과 공포에서 해방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존 쉘비 스퐁의 부활사건에 대한 의미부여도 비슷합니다.

부활 사건은 그들로 하여금 부족적/(민족적) 정체성을 넘어서게 했으며, 새롭게 거룩한 날을 설정한 것이 선언하듯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적 한계를 넘어서게 했으며, 또한 그들의 부활 언어가 명시하듯이 부활절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넘어서게 했다.

 

하나의 뜻, 의미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공동체입니다.

 

오늘날의 신앙공동체는 이 부활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실제적인 경험이 전승으로 이어져오면서 기억되고 기려야 할 것들을 공유하는 가운데 형성 되었습니다.

 

기억되고 기려져야 할 것들이 온전히 공유되기까지는 무엇이 진실인지, 또 그 경험으로 인해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는 그 기억을 토대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 것인지, 기억, 경험, 그리고 믿음을 공유하는 것이 신앙공동체입니다.

공유되고 기억되고, 전승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2030절에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표준새번역은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적을 내용들이 많은데 여러 이유로, 다 못 적고, 이만큼만 적었는데, 이렇게라도 적어 둔 목적은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절한 죽음을 경험했는데도, 거기서 생명을 보았고, 경험했고, 그렇기에 이를 기록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 생명을 얻어라. 경험해라. 라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리고, 공감각을 키워가고, 경험을 쌓아가는 것,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동전의 양면인 생명을 보는 것. 그래서 죽음을 직면할 용기를 갖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떻게 나 혼자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게다가 주변의 위협이 늘 존재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신앙공동체의 결속력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죽음 너머에 생명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런 다짐을 함께 하는 것, 이러한 신앙고백이 나오기 위해서는 공감각을 기반으로 한 관계 맺기가 든든해야 하는 법입니다. 관계맺기는 그냥 나옵니까? 씨줄과 날줄이 엮여가는 과정에서 있을 수 밖에 없는 마찰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나면 서로 단단하게 엮여있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됩니다.

 

오늘은 향린공동체 강단교류 주일입니다. 오후에는 이 네 교회가 뭉치면 제일 잘해낼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인 거리기도회로 남대문경찰서 앞에 모이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하나의 공동체가 든든히 서있어야 향린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공동체도 든든하게 설 수 있습니다. 또 그래도 제일 규모가 큰 향린이 든든한 울타리로 서 있어야 나머지 교회들도 그 든든함을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향린의 신도회든 어떤 소모임 단위든 강남, 들꽃, 섬돌에 가셔서 예배드리는 기회를 꼭 한번은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세 교회에는 향린의 방문으로 기운을 얻기도하겠지만, 제가 보장하건데 방문하시는 분들의 신앙에 양분을 제공할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고백은 입을 움직여서 틀리지 않고 읊조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슴과 몸이 그 신앙고백대로 움직여지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심히 아프고 고통스러운 상태라면, 적어도 이 상태를 알아봐줘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비단 종교적인 신앙공동체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울타리가 그래야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입니다. 거울-뉴런이 무뎌지다 못해 중지되어 자기 살 파는 것인줄 모르고 이웃의 고통을 후벼파고, 상처난 곳을 더 쓰라리게 만들려고 작정을 한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쫓겨나는 철거민들에게, 장애로 등급까지 타의에 의해 정해져야 하는 장애인들에게, 마치 병균덩어리요, 이제는 살인마와 같은 존재로 까지 호도되고 있는 성소수자들에게, 가난한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갖은 모욕을 견뎌내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라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방팔방에서 야만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 시대에, 날마다 좌절할 수 밖에 없는 하루하루 속에서 신앙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정의, 평화, 생명의 소중함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여러 세대, 다양한 경험, 저마다 처한 상황, 감수성 갭, 신앙의 색깔 등 꼭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가면서 매주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모인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입니다.

 

섬돌이 작년부터 심리분석을 원하는 분들에게 검사지를 제공하고 해석상담을 해주는 심리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분석하시는 분 말씀도 여러 섬돌님들의 심리분석을 하신 후, 이렇게 3년을 지나올 수 있다는 것은 기적! 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분노가 들끓을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탓에 울화, 분노, 우울, 불안 등이 쌓여가는 것은 당연한데, 공감각까지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한사람, 한사람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섬돌만 기적이 아니라, 향린공동체에 속한 네 교회가 지나온 발걸음, 그리고 복잡한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미 기적은 매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놓치고 있다보니, 서로의 존재자체도 소중한 줄 모르기 일쑤이죠.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거울-촉감 공감각이 완전히 고장나 있습니다. 그저 시혜적으로, 대상화시킨 자신들이 그것도 범주화시킨 이들에게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공감하는 척을 합니다. 척을 하다보니 앞뒤가 안 맞고, 여기서 이 말, 저기서 저 말을 합니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듯 하지만, 뒷통수를 후려치고, 금새 극악스럽고도 표독한 표정이 되어 잡아먹으려 듭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신앙공동체로서 향린공동체, 그리고 특색있는 각 교회의 향기를 품고 있는 네 교회의 모습은 우리 스스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 투성이고, 어떤 면에서는 감추고 싶은 치부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이 시대 한국교회에 등을 돌리고 마는 사람들에게는 힐링이 되는 면도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냅다 도망갔던 베드로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향린공동체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증인, 역사의 증인입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이 잘 보려하지 않는 공권력의 포악함, 잔인함, 비열함, 정권의 극악무도함 동시에 쫓겨나고 내몰리고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가진 것 많은 높은 자들이 아니라, 낮고 천한 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통해 예수는 오늘도 살아 숨 쉬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향린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 신앙고백으로 가슴이 움직이시거든 속으로 아멘 열 번 하시고, 이제 침묵 가운데 오늘의 말씀을 새김질 하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맘속에 간직한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귀 기울여 당신을 격려하는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소망을 나누십시요. 우리의 일상 가운데 경험한 하느님을 서로 이야기합시다.

창조주, 그리스도, 위로자를 기억하며 항상 당신의 노래를 부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