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패러다임의 전환

시편 23; 9:36-43; 7:9-17; 10:22-30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하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인간의 자유를 폐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

 

이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한 말입니다. 2차 세계대전과 레지스땅스 저항의 경험을 통해 국가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알아차리고 이미 오래 전 미국과 소련의 세계패권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사회주의를 제창했는데, 오늘의 유럽연합은 그러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르트르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알제리를 비롯한 제3세계 해방운동의 주창자였으며, 그러한 그의 외침은 60년대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흑인신학과 여성신학 태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980년대 남한이 사회변혁의 격동기를 겪을 때 그의 책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대학가 운동가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지만, 이를 거부하여 더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사르트르하면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별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얘기이지만, 지금으로부터 85년 전 1930년대 초반에 전통적인 결혼 제도를 거부하고 배우자 외의 사랑의 자유까지도 허용한 이 실험 결혼은 세계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스캔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히피 스타일의 자유 분망한 삶을 추구하는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쉽게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당시 국가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1,2등을 차지한 최고의 지식인들이었고, 보부아르는 21세의 최연소 합격자로 미래가 촉망받는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20년 후에 펴 낸 2의 성이란 책 또한 사르트르의 신 부재 선언 이상으로 세계에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책에서 자신의 성 경험뿐만 아니라 창녀, 레즈비언 등 각계각층의 적나라한 성생활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오던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를 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버렸던 것입니다. 지금은 보부아르는 페미니즘의 선두 주자로 사르트르는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사회주의의 선두 주자로 우리가 그들의 실천과 이론에 동의하고 있지만, 당시 유럽 교회 금서목록에 오른 매우 위험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자유에의 외침]

 

사르트르는 그렇다면 왜 신의 존재를 거부했을까? 실존주의 철학자인 그에게 있어 자유는 절대적 명제였습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구원이라는 단어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고 심판과 종말이라는 단어로 세계 역사를 결정짓는 신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야훼라는 신의 명칭 자체가 신의 자유를 선포하고 신은 우리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였기에 인간은 애초부터 자유의 존재라고 하는 성서의 주장을 알았더라면 이런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가톨릭 교권 아래 놓여 있었기에 그의 자유에의 저항은 당연한 외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말씀에서 예수는 절대자 신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신을 저 멀리 하늘 공간 끝에 계신 절대적 존재가 아닌, 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 대화하는 아버지라는 친밀한 존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천년 전 이러한 신 이해는 이천년 후 사르트르가 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크게 반발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치질 않고 한발자국을 더 나아가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신과의 합일 곧 인간의 초월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사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초인성은 이미 예수에게서 출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이다라는 이 초월선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신인합일 선언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선언이고 우리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선언일까요? 요한복음 저자의 숨은 의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마태오 마르코 루가 모두 예수의 말씀을 통해 각자의 독특한 혁명적 신앙을 말하고 있는데, 요한 또한 이들에 못지않은 어떻게 보면 이들을 뛰어 넘는 매우 혁명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유언의 말씀이 14, 1516장 석장 전체에 매우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14장 서두에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향린교우 여러분! 정말 잘 들어 두십시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에게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기 때문이다.”(14:12,13)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여러분 이 말을 믿으십니까? 아마 믿기 힘들 겁니다. 저도 사실은 믿기 힘듭니다. 내가 마치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신성불가침의 죄를 저지르는 전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연 신의 아들 성자 하느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나의 전 현존, 인간됨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제 마음 속에는 너는 목사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너의 신앙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언가? 하는 질문이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묻는 유다인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을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준다.’ 나를 보지 말고 내가 하는 일을 보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일을 율법의 세세한 조항으로 간추렸고, 예수는 이에 대해 조항실천이 아닌 사람의 아들(인자)로서 내가 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이라고 주장하였는데, 문제는 예수가 하는 일마다 율법의 조항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율법이 더럽다고 그래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세리와 죄인들과 부정한 여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먹고 마셨고, 부정한 땅이니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곧 당시 사회에서 불법으로 규정한 일들을 예수께서는 행하셨고 이것이 하느님 어버이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바 너희들은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목자와 양: 오늘에도 여전히 타당한가?]

 

여기까지가 오늘 하늘뜻펴기의 서론입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갑니다. 오늘의 세 본문 시편 23편과 요한복음과 요한의 묵시록의 공통된 중심 단어는 목자와 양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 전제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 고백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목자라는 야훼 신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니 누군가가 야훼를 대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야훼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성서의 말씀에 귀를 기우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 말씀 해석에 자격증을 갖고 있는 목사들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다른 목사는 저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 교회에 가면 이 목사님이 옳고 저 교회에 가면 저 목사가 옳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한참을 고민하던 한 신자가 옳지! 기도를 한 다음 성서를 펴서 첫 눈에 들어오는 구절의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생각을 한 다음 조용히 기도를 하고 성서를 폈는데, 첫 눈에 마태복음 275절 말씀이 들어옵니다.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목자와 양의 비유. 우리는 야훼께서 우리의 목자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1성서 시대에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사무엘 이후 성전 사제들이 야훼를 대신했듯이 오늘날 신부나 목사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를 대신하여 성찬식을 행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목자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목자는 아니겠지요. 그러면 양입니까? 물론 하느님과 예수 앞에서는 양입니다. 그러면 목사와 교인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양들 가운데 앞서가는 우두머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들은 걸어갈 때, 30센티 이상은 볼 수가 없기에 앞의 양들의 엉덩이만 보고 무조건 쫓아갑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그렇게 무조건 따라가나요? 목사 혹은 장로 신도회 회장 목운위원장 제직회장의 말에 무조건 복종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성서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전연 맞지 않습니다. 목사도 목자가 아니고 교인도 양이 아닙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교인들은 목사가 예수를 대신하는 목자라고 생각하고 있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들을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목사가 설사 잘못했더라도 목사를 비판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여 무조건 순종합니다. 심지어 어떤 부흥목사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목자가 양을 기르는 이유가 뭐냐? 양의 털을 깎기 위함이고 다 크면 잡아서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하느님 말씀의 종인 목사를 위해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다른 교회에서는 아멘!이 터져 나오는데...) 목자와 양이라는 성서의 전통의 틀 안에서 보면 그리 잘못된 해석이 아닙니다. 그런데 상식의 눈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해석입니다.

 

[신앙 패러다임의 전환]

 

제가 서두에 사르트르의 얘기를 한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목자와 양의 비유에 대해 조금 더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미 신의 부재가 오래 전에 선포되었고, 만들어진 신, 무신론적 이해라는 제목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오늘의 시대에 목자와 양이라는 비유는 시대착오적인 비유입니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이미 60년 전에 토마스 쿤에 의해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용어가 등장을 했습니다. 전통적 사고의 기본 틀로는 오늘의 현상을 더 이상 해명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목자와 양이라는 기본 틀로서는 오늘의 교회를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을 갖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자와 양이라는 제목을 달고 설교가 진행됩니다. 인공위성이 온 우주 공간을 향해 날아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교회는 천동설의 세계관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양은 여러 동물 중에서도 매우 수동적인 동물입니다. 자기 방어 수단이 전연 없는 동물입니다. 목자의 도움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과거 노예사회의 전제군주 시대에는 이런 목자와 양이라는 패러다임 신앙이 필요했고, 또 전통과 권위가 통하였기에 이는 전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시대요,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개인의 자유가 무한히 요구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이런 신앙고백은 개인의 신앙고백으로는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있어는 기독교는 순종을 가장한 노예의 종교요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종교로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사실 저는 그래서 양을 대체할 만한 다른 단어는 없을까? 다른 동물은 없을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우리는 00. 00는 목자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어떤 자유가 보장된 동물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떠오르는 어떤 동물이 있습니까? , 목자의 의도에 따라 양을 몰아가는 세퍼드가 있습니다. 영국에는 세퍼드 경기가 있습니다. 들에 풀어 놓은 양들을 가장 짧은 시간에 우리 안으로 몰아넣는 개가 우승을 하는 경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목자와 양 그리고 세퍼드라고 할까 생각을 했는데, 우리가 개가 된다는 것도 좀 이상해서 제목으로는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야훼가 우리의 목자요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양을 몰아가는 세퍼드라면 양은 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현세의 물질과 세속 욕망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상통합니다.

 

야훼는 우리의 목자 우리는 세퍼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의 기르시는 양물론 이 문장도 약간의 어폐(語弊)가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모두가 세퍼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이고, 자기의 몸을 태워 빛을 발하고 자기의 몸을 녹여 짠 맛을 내는 소금의 역할을 기피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면 여전히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 양에 불과할 것입니다.

 

[미친 운전수와 신도의 책임]

 

지난 49일은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했던 본훼퍼목사께서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한 날입니다. 목사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겠지만, “미친 운전수가 버스를 인도로 몰아가는 상황 하에서 수많은 선량한 행인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 미친 운전수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반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행인 가운데 내 자녀가 포함되어 있다면 상황은 더욱 달라질 것입니다. 본훼퍼목사님은 그래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값싼 은혜의 신앙인으로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값비싼 은혜의 신앙인으로 구분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값싼 죽음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값비싼 죽음으로 만들 것인지는 악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야훼께서 나의 목자시니, 부족할 것 없어라.”에서 멈출 것인지 더 나아가 죽음의 골짜기에 까지 더 나아갈 것인지는 우리들의 선택인 것입니다.

 

본훼퍼목사의 어록입니다. “평화를 위한 안전한 길은 없다. 평화는 도전과 모험으로 얻어진다.” “예수는 반대자들에 둘러싸여 살았고, 끝내는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혼자였으며 군중들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예수는 바로 이 하느님을 적대하는 자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수도원 안의 고립된 삶이 아닌, 세상 안의 적대하는 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보다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 담대한 용기를 갖는 사람이다.” “우리가 침묵(silence)을 배우는 것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약자(the voiceless)들의 목소리(voice)를 내기 위함이다.”

 

사르트르 또한 단순히 교회 전통과 신에 대한 반역으로서 무신론을 주창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책임을 담당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목자 되시는 신이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라는 책임회피(責任回避) 내지는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야훼라는 책임전가(責任轉嫁)에 대한 비판으로서 신의 부재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인간이 신의 역사개입을 기다려 왔지만, 이제는 신이 인간의 역사개입을 기다리고 있다는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지구는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어머니가 아닌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악마로 변한다고 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창조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과정신학도 있지만, 17세기 중반 프랑스의 니콜라 망브랑슈라는 사제는 신은 결코 완벽한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인간들은 신이 선사한 이 세계를 수정 보완해야 한다. 신의 행위가 낳은 결과를 더 좋게 고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다.”(자크 아탈리 인류는 어떻게 진보하는가?책담 2016. 91)라고 말하며 창조의 동반자로서의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오흘로스의 저력]

 

지난 주 우리 모두는 20대 총선 결과에 모두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신앙인들은 천심(天心) 곧 야훼의 마음은 민심(民心) 곧 오흘로스, 민중을 통해 드러난다는 진리를 재확인하였습니다. 야권 분열의 어려움 속에서도 야당이 제1당이 되고 동시에 1,2당을 견제하고 조정하는 캐스팅보트의 힘을 갖고 있는 3당이 출현하였습니다. 이런 예상 밖, 아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박근혜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책임기피와 진실규명에 대한 의도적인 방해, 친일미화 역사국정교과서 강행,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한일졸속협정, 언론의 자유를 가로막는 테러방지법 강행, 노동자들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노동악법 밀어붙이기 그리고 개성공단 폐쇄 강행으로 인한 남북대화 단절이라는 오만한 폭정(暴政)과 어처구니없는 실정(失政)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선거 이틀을 앞두고 근거도 확실치 않을뿐더러 이미 1년 전 언론에 나온바 있는 북한군 대좌의 탈북기사와 뻔한 의도가 보이는 13명의 중국 북한식당 노동자들의 탈북 기사였습니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강한 북풍을 기대했지만, 북풍은커녕 역풍을 맞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기존 방식의 언론조사가 들어맞지 않듯이 기존의 조중동 종편 언론이 그 효력을 상실하고 2,30대가 주도하는 페북과 타톡과 텔방을 통한 패러다임 전환이 이미 일어났던 것입니다.

 

언감생심, 박근혜정권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뒤집어서 뭔가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으로 바라기는 남북관계에 있어서만은 전향적 자세로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다른 사안과는 달리 외세의 힘에 의해 대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대북 1분기 수출입 총액수가 경제봉쇄 이후 더 높아졌습니다. 실제적 효과가 전연 없습니다. 이제 미국의 대선의 결과가 어찌되었든 미국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할 것인데, 끌려가지 전에 먼저 주도권을 갖고 나아갈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화해와 저항]

 

이미 언론에도 공개가 되어 아시는 분도 계시지만, 두 달 전 남북간의 긴장이 매우 고조되던 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 대표 5명의 목사가 심양에 가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단과 일박 이일의 회담을 가졌습니다. 매년 2월이면 갖는 정례 회담이었습니다. 통일부에 허락을 요청했지만,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저희 통일위원회는 깊은 토론 끝에 남북간의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화해의 책임에 앞장 서야 한다는 결론을 짓고 다녀온 것입니다.

 

그로 인해 5명의 목사님들이 각각 200만원의 과태료를 받았습니다. 과태료는 감방살이로도 대신 할 수 없고 내지 않으면 이자만 계속 불어나기에 내긴 내되 저항의 의지를 담아 낼 작정입니다. 이전에 김상근목사님께서도 615남측위원회 위원장으로 같은 이유로 과태료를 부과 받았는데, 저항의 의미로 동전을 모아서 통일부에 갖다 주었다는 얘기를 듣고 저도 동전으로 갖다 낼 생각입니다.

 

물론 제 혼자 힘으로 동전으로 바꾸어낼 수도 있지만, 우리 향린교인들의 의지를 함께 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몇 주간 옷 주머니 속과 집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동전을 모아 갖다 주시기 바랍니다. 10원짜리면 더욱 좋습니다. 교회 마당에 동전 통이 준비되어 있으니 나가실 때 주머니 속의 동전은 모두 꺼내 놓고 가시기 바랍니다. “동전을 넣고 가는 자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느님의 아들딸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 아멘

 

동전이 가득 찰 날이 속히 오기를 기다리며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오늘날 성숙된 세계는 복음에 무관심하며 더 이상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는 비종교적인 세계로 변모했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교회 자체만을 위해 발전시키는 일과 광적인 신앙을 멈추어야만 하며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이 세상에 교회의 참 모습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는 고통을 통해 이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세상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본 훼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