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과 창립정신

11:1-9; 104:23-34, 35b, 2:1-21, 14:8-17

 

바벨탑 얘기는 세상의 언어가 본래 하나였는데, 인간들의 죄로 인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해 달라졌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온 세계의 말이 하나라면 소통이 쉬워지기에 오해와 분쟁 또한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가끔 TV나 책을 통해 지구의 외딴 곳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포기하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불편함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티티카카 호수 한가운데 전체 주민이 채 이천 명이 되지 않는 타킬레라는 작은 섬에 가서 하루 민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노인 부부가 사는 초라한 집이었는데, 그들은 영어를 한 단어도 하지 못하고 또 저는 스페인어를 하지 못해 전연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보이는 것이 모두 새로운 것이니 이게 뭐냐 저건 무슨 의미냐? 묻고 싶은게 많았고, 저들 또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섬에서 평생 TV도 없이 살다가 말로만 듣던 코리아 사람을 처음 보았으니 뭔가 알고 싶은게 많았는데, 서로 애만 태우다 헤어진 적이 있습니다.

 

[탑쌓기의 죄]

 

오늘 창세기 본문은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던 당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어 높은 탑을 쌓자. 그래서 하늘까지 닿게 하자.”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다는 말은 곧 자신들이 신들의 나라에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는 신의 아들딸의 자격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래서 쌓은 지구라트라는 성전 탑 높이가 백 미터도 안 되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탑이었지만, 성서는 이를 인간 집단 곧 제국의 권력이 추구하는 교만으로 설명합니다.

 

첫 인간 아담과 이브가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는 유혹의 말도 같은 말입니다. 먹으면 눈이 밝아져 신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 뱀이 던진 말입니다. 이를 성서는 Hubris 인간 교만의 죄라고 말하는데, 왜 이게 죄가 되는 것일까요? 기독교 영성이라고 하는 것. 그건 우리들이 신가 더 깊이 소통하고 그래서 신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신의 자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기도에도 나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고 그럼으로 우리 모두는 예수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다고.’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일이 교만의 죄가 된다면 하느님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우리의 영성 훈련 또한 교만의 죄가 되는 것은 아닌가요?

 

문자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영성 훈련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성과 부족함을 깨닫게 됨으로 점점 낮아지지만, 탑쌓기를 통해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는 집단의 노력은 권력의 집중화를 통해 독선과 배제의 방식으로 점점 높아갑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왜 죄가 되는 것일까요?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이 지혜이고 교육의 목표가 아닌가요? 그런데 선악의 판단 기준이 다 같나요? 5060년을 산 부부도 다릅니다. 그래서 논쟁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말을 지혜의 습득으로 말하지 않고 죄로 규정하는 것은 선과 악의 서로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절대성을 가짐으로 독재와 배타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전에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일심동체를 노래했지만, 열매 곧 선악을 알고 나자 저들은 서로를 비난하는 책임전가를 말하고 그들의 몸에서 나온 두 아들 사이에는 시기와 질투로 인한 형제살해가 일어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로 서술되지만, 실은 고대제국들의 절대 권력에 대한 비판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엘로힘()으로 불리며,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게 신의 형상을 띠고 태어났고, 노예라도 일주일의 하루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안식일 제정을 선포하는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는 바빌론 포로의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고,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로 불리며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 열매를 따 먹는 이야기가 담긴 창세기 2장의 설화는 다윗왕의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는 독재권력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곧 성서의 첫 시작 창세기 1,2장의 얘기는 야훼 하느님이 온 우주 만물의 주인임을 찬양하는 신앙의 고백이지만, 동시에 이는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인권선언문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는 오늘의 바벨탑인 고층빌딩 쌓아 올리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경쟁에 남한도 북조선도 빠지지 않습니다. 남에서 63층짜리 빌딩을 짓자 북에서는 105층의 류경호텔을 지었고, 그러나 또 다시 남에서는 123층의 롯데월드타워를 지었습니다. 완성이 되면 세계 10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를 둘러싸고 고층건물들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교회와 경계를 맞닿고 있는 모든 고층건물들은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은행과 증권회사들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에 은행은 필수요소가 되었지만, 은행과 증권 회사들이 하는 일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돈이라는 씨앗을 뿌려 돈의 열매를 거두는 그래서 사람들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경고하신바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섬길 수 없다고 말한 맘몬신의 충신들인 것입니다. 오늘의 시편기자가 말하는바 현대판 괴물 레비아단입니다.

 

[오늘의 바벨탑]

 

지금 진보교회의 대명사인 향린교회가 자본주의의 상징들인 은행과 증권회사들의 고층건물에 둘러 싸여 저들의 구호에 대항하여 정의의 씨앗을 뿌려 평화의 열매라는 현수막을 외벽에 걸어놓았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정신은 공동체 정신입니다. 그것도 약자 중심의 공동체 정신입니다. 은행과 증권의 시장 정신은 경쟁과 축척을 통한 부자되기에 있다면, 예수 복음의 핵심은 가난한 자들과의 나눔 축복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돈을 추구하는 대신에 먼저 하느님 나라의 의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혹 이 자리에 은행과 증권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해를 바랍니다. 저는 목사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니까요.) 향린교회 건물이 이 자리에 얼마나 더 머물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고층건물에 둘러싸여 겉으로는 더 왜소하게 되었지만, 신앙적으로는 세상 바벨탑에 대한 저항의 상징성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 또한 비슷했습니다. 헤롯대왕은 단지 46년을 걸려 예루살렘 성전만 크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성내의 수많은 토건 건설작업을 주도했고, 성 밖으로는 로마황제를 기념하는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습니다. 높은 성벽과 탑과 공중목욕탕과 콜로세움과 전차 경기장들이 여기저기 들어섰습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노예를 획득하기 위한 침략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군사력에 기초한 로마제국의 승리의 복음에 대항하여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곧 세상 전복 곧 로마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정의의 야훼 하느님은 이 죽은 예수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고, 이 예수 부활의 영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불의 혀로 임하였고 오늘이 바로 이천년 전 그날을 기념하는 성령강림주일인 것입니다.

 

[성령강림절과 방언]

 

예수 부활의 영 곧 성령은 바벨탑 심판으로 흩어졌던 인간들의 언어를 하나로 묶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언어는 단지 한국어 일본어 영어 그런 문자적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키는 변혁의 언어요 기존의 사회질서를 벼랑 끝으로 내어 모는 도전의 언어였습니다. 제자들의 외침을 듣고 양심에 찔린 예루살렘 주민들은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꼬?’ ‘회개하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럼으로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는 단순히 기도 말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에 아멘으로 답하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예언자 요엘을 빌려 분명히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은 정의를 선포하는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평화의 계시를 말하고 늙은이들은 변혁의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들은 자신들을 옥죄이는 족쇄를 끊음으로 자유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임하는 구원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 이야기를 복음으로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교회를 크게 만들라는 명령이었을까요? 기독교 제국을 설립하라는 명령이었을까요? 사도들이 예수를 통해 기억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기억의 자유 박탈]

 

독일 유대인 포로수용소의 경험을 통해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바라본 기억은 인간의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죽음을 초월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들 함석헌 문익환 안병무 홍근수 전태일 이분들의 공통점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의 위인들은 모두 주위의 시선이나 돈이나 세상 권력에 억매이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일을 실행하고 결단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아렌트가 말하기를 아우슈비치 수용소의 의도는 단지 사람을 개스실로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기억의 자유를 박탈함으로 몸은 살아 있더라도 그 영혼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자신이 살해한 적들에게도 기억될 수 있는 권리는 주어졌으며 기억은 그가 인간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용소는 삶의 완성인 죽음마저 익명으로 만들었고 완전하고 조직적인 망각체계를 형성했다.”(권정우, 하승우 아렌트의 정치한티재 43)

 

이에 반해 복음서의 저자들은 로마의 폭력에 의해 착취당하고 끊임없이 죽어가는 갈릴리 민중들에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기억함으로 그들을 죽음의 패배에서 되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매주일 하늘뜻을 통해 예수를 기억하고 제자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너희에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믿음이란 기억의 행위입니다. 그냥 기억이 아니라 예수가 추구했던 평화의 기억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의 기억입니다.

 

수용소는 인간의 개성을 파괴합니다. 굶주리게 만들고 추위에 떨게 만들고, 줄을 맞춰 걷지 않으면 심한 매질을 하고 규율을 어기는 자는 독방에 감금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 수인들은 빵 한쪽, 옷가지 하나에도 아귀다툼을 벌이고 간수의 명령에 동물처럼 순응하게 됩니다. 개성을 파괴하는 것은 자발성을 파괴하는 일이요 자발성을 파괴하는 것은 창의력을 파괴하는 일이요 창의력이 사라진 인간은 살아있는 송장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와 억압의 수용소는 1930년대 독일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천년 전 로마제국시대에도 존재했고, 유대인들의 율법사회에도 존재했고, 오늘날 한반도 안에서도 테러방지라는 이름으로 국가보안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오늘의 창립정신]

 

향린교회는 1953517일 미국의 농간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막바지에 민족구원의 희망이 되고자 30대 초반의 젊은이 십여 명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그 본질과 목표가 전연 다른 교회, 개인들의 창의력과 자발성을 보장하는 신앙공동체를 꿈꾸며 시작했습니다. 크게 4가지로 줄여 말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살아가는 생활공동체. 민족분단의 체제 안에 희생당하고 있는 오흘로스 민중들의 손을 맞잡는 입체적 사회선교, 그리고 일인 목사가 주도하는 교회가 아닌 교인들이 함께 목회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평신도교회, 그리고 교권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독립교회 정신입니다.

 

남산에서 시작한 실질적인 생활영성공동체는 2년이 지나면서 외부 예배 참여자들의 유입과 가정생활로 인해 유지가 힘들어졌지만, 그러나 그 정신은 지금의 향린교회 내의 수많은 소그룹 모임을 통해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고, 교우 십여 명이 양평에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마련함으로 그 정신을 되살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입체적 사회선교의 꿈은 교우들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나서 집으로 곧장 가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청와대와 미대사관이 바라보이는 광화문 거리에서 평화를 향한 촛불기도회로 사회적 약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에 함께 하는 일을 통해 계속 확장 중에 있습니다.

 

평신도가 주체적으로 목회에 참여하는 실천은 아직도 여러 가지 점에서 미숙하지만, 여러 실험을 통해 부족한 점을 고쳐가는 중에 있습니다. 지금 주위의 많은 교회들이 향린교회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를 잘 만들어내는 일이야 말로 남한의 교회를 살려내는 일입니다. 제가 다음주부터 9개월의 안식년을 갖게 되고 이 기간 중에 후임목사를 청빙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담임목사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어찌 될까 염려하는 교우들도 있지만,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거하는 여러분들인 것이고 목사는 지나가는 손님일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손님이 왔다 간다고 해서 염려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갈사람 잘 가라고 기쁨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독립교회의 창립정신은 교회 건물에 부과되는 세금 부담으로 인해 출발 7년 만에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함으로 무효화 되었지만, 교단의 틀에 억매이지 않고, 국악예배, 목사장로 임기제, 목회운영위원회 등등을 통해 독립교회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한국교회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계속 불러 일으켜 왔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일어난 성령강림의 현상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예수따르미들이 거리에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거리전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것과 동시에 변화되어가는 세상을 따라 교회의 틀 또한 변화해가는 소통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종교와 언론]

 

제가 최근 민플러스(minplus.or.kr)라는 인터넷 언론의 대표직을 맡음으로 몇몇 언론과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묻는 질문이 왜 목사가 언론에 나섰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교회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제정분리 원칙은 교회가 세상 권력을 추구하지 말라는 뜻이지 이 사회와 유리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지 세상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썩어지면 교회 또한 썩어지게 마련이다. 썩어지는 세상 속에서 썩어지지 않도록 하는 소금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이다. 3%의 소금이 바다를 짜게 만들 듯이 교회는 그런 소금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언론 또한 그러한 역할이 주어져 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처음 보는 후드를 둘렀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모두 익숙할 것입니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란 작품에서 도입을 했습니다. 그 그림은 하늘의 찬란한 별들의 빛을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림 중앙에 있는 마을 한 가운데 있는 교회 종탑에 불이 꺼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마을안의 몇몇 집들은 불이 커져 있는 반면 교회는 불이 꺼져 있습니다. 한때 목사를 꿈꾸며 가난한 광부들의 전도사이기도 했던 그는 교회의 제도에 갇힌 성직자들의 이중성으로 인해 크게 실망을 하고 교회를 등지게 되는데, 바로 제도에 갇힘으로 로 빛의 역할을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을 고발하는 그림입니다. 목사인 저는 언론을 통해 조금이나마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빛의 역할을 회복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남한 언론은 너무나 정치보수화 되어 있고 자본에 예속이 되어 있어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 눈먼 사람들의 눈을 더 멀게 만들어가고 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러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새 언론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요일 하루의 설교가 교회 안의 사람들을 향한 하늘뜻펴기라면 6일간의 언론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한 또 다른 하늘뜻펴기입니다.

 

[516, 517, 518]

 

오늘은 교회의 생일인 성령강림주일인 동시에 향린교회 63주년을 축하하는 창립기념주일입니다. 향린교회의 창립일인 517일이 남한의 현대사 속에 그 상징성이 뚜렷한 516일과 518일 사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516은 독재와 국가폭력의 상징입니다. 예수를 죽인 빌라도의 상징이자 거짓과 억압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반면 518은 이러한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민중들이 역사의 주인으로 나서는 자유와 해방의 상징입니다. 거리의 투쟁 속에서 주먹밥을 나누며 새 세상을 꿈꾼 대동세상의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꿈꾸었던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입니다. 876월 민중항쟁의 시작인 국민운동본부는 바로 이곳에서 결성되었습니다. 이 나라 민주화 성지의 하나입니다. 지금도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때 경찰들에 쫓기면 우리는 향린교회로 도망을 갔습니다.

 

지금까지의 향린교회 63년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이제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 땅 민중들의 도피성이 되기 위해 성전 문을 활짝 열고 거리로 나아가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외칠 뿐 아니라, 성문 밖 거리에 나앉은 천막 농성자들과 광고탑 고공에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가는 이 땅의 오흘로스들과 끝까지 함께 하는 성령의 사도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하느님은 밖에서 우리는 안에서 쪼는 졸탁동시(啐啄同時)의 정신으로 새 역사를 창조해 나아가십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 ()

 

김준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白衣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딸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번을 죽고도

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