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체험과 성령의 사역"

(고후 3: 5-6,4:6-7)  

 

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오늘은 교회력상 성령강림절 둘째주일입니다. 교회를 평생 다니면서도 신비롭고 합리적 이성으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 두가지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합니다.

 

첫째는, 고대사회나 현대사회나, 종교에서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지혜를 찾는 지식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는 것인데, 왜 하필이면 바보처럼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람을 나의 주님, 나의 사랑,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는 것일까 하는 신비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시작의 신비입니다. 기독교는 유교나 불교와 달라서, 그 제자들이 스승의 숭고한 교훈과 지혜를 존중하여, 스승이 세상 떠난 뒤에도 잊지 않고 그분의 정신을 계승해나가자는 지적공동체의 결사체와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처음 갈릴리 여인들의 진솔한 고백대로, ‘무서워 움츠리고 은거하며 불안해하던 그들 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렬하게 그들 위에 임하여예수가 구세주임을 증언하는 용기를 갖게 되고 교회가 발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줄여말하면, 기독교는 철저히 영의 종교, 성령의 종교인 것이지, 형이상학적 종교도 아니고 도덕교양종교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상적 언어생활 속에서 신비적’(mystical)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말 할 때,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방언 신유 독심술을 지닌 사람의 기능을 목도할 때, 심지어 마술이나 이상심리의 초능력을 목도 할 때, 우리는 흔히 신비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의 본질은 겉으로 나타난 초자연적 기적들에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의 내적 자아가 신비이신 하느님의 능력과 의미 충만한 진리에 의해 붙잡히는 경험 상태라는 점에 있습니다.

 

영원한 신비적 실재에로 참여하거나 일치하는 경험이 신비체험의 특징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영혼 사이에 어떤 중간매개자가 자리를 잡고 중매해주어야 하느님을 경험하거나 뵐 수 있다는 주장에 신비주의는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경전, 전례, 성직질서 등은 도우미는 될 수 있지만 필수불가결한 것 아니라는 체험입니다. 누구나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주장에 신비주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 유형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도-불교계 신비주의 전통은일치와 동일성을 강조합니다. “브라만이 곧 아트만 ”(梵我一如)임을 강조한다. 유대-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참여와 연합을 강조합니다. 비유하건데, 아무리 용광로 안에서 쇠가 달구어져 쇠인지 불인지 구별이 안 될지라도 쇠는 쇠이고 불은 불이다라고 자각하는 의식, 곧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의식이 살아있습니다. 성 프란시스나 스페인 테레사 성녀의 신비체험이 대표적입니다.

 

한국민에게는 신비주의 전통의 그 양면요소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동학(천도교)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이 강조되면 일치와 동일성의 신비주의에 가깝게 되고, “사람 몸에 하느님을 모신다라는 시천주’(侍天主)가 강조되면 참여와 연합의 신비주의에 가깝게 됩니다.

 

흔히 사람 마음의 3가지 특성으로서 지성(知性), 덕성(德性), 감성(感性)을 말하지만, 그 세 가지가 모두 인간 마음의 특성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영성’(靈性)이란 언급한 세 가지 특성에다 4번째로 추가된 또 하나의 특성일까요? 영성 안에서 세 가지 사람 마음의 특성과 기능이 분열되지 않고 통전됩니다. ‘영이신 하느님의 현존안에서 사람은 마음이 고양되는 경험을 합니다. ‘마음이 자기초월 상태을 경험하면, 자유와 해방감, 기쁨과 감사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영성은 절대로 지성, 덕성, 그리고 감성을 무시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온전케 하고 숭고하게 고양시킨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본래 심리학과 해부학을 하버드대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유명한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에서 신비적 체험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인간의 의식 상태로서 4가지 특성을 제시하였지요.

 

첫째, 신비체험 내용을 일상적인 언어로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ineffability). 체험상태가 주객구조를 넘어선 상태에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질서가 다르고 인과율의 일상질서와 다른 상태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말하려면 기껏해야 은유와 상징적 표현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신비체험은 합리적 설명은 어렵지만, 황홀감이 동반되는 감정 상태에서 이성 또한 황홀한 이성상태로 고양되기 때문에, 신비세계가 반논리적이거나 혼돈세계로 느껴지지는 않고 이해된다는 점입니다(noetic quality). 지성이 고양되어 황홀감을 느끼지만 반지성적 이거나 비도덕적인을 진정한 신비주의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셋째, 신비체험은 일상적 시간경험과 달라서 긴 체험내용을 순간에 할 수 있다는 특성입니다(transiency). 많은 사건경험을 하지만 일순간에 지난 것 같고, ‘영원한 현재로서 느껴지는 법입니다.

 

넷째, 신비체험은 신비가로서 수련, 극기, 절제를 통하여 신비체험 준비단계는 가능하지만, 신비체험을 능동적으로 습득하거나 쟁취못 한다는 특징입니다(passivity). 신비체험은 신비가에게 오는 것이고, 수동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상의 4가지 신비체험의 특성 때문에, 정통적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신자 개인이 신비체험하는 것을 단죄하지 않지만, 매우 조심하고 경원시 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성경만, 오직 믿음만, 오직 은총만>의 원리와 상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500년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를 뒤돌아보면, 신비주의 운동은 퀘이커 신우회나, 재세례파등 소종파들과 부흥회적 기질의 오순절계통 교단의 특색이라고 잘못 인지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이나 교회의 목회가 신비주의를 경원시하면, 그 결과는 부정적 열매를 맺는데 20세기 개신교의 거성 틸리히는 그 현상을 진정한 신앙의 세 가지 왜곡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정한 신앙(authentic faith)이란 역동적 신앙이요, 생명 넘치는 신앙이요, 요즘표현으로 영성이 충만한 신앙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주의적 요소가 결핍된 신앙에서는 첫째로 신앙의 지성적 왜곡’(intellectual distortion of the faith)이 발생하기 쉽다고 경고합니다. 신앙을 교리신조를 외우거나 암송하여 지적으로 수락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왜곡이지요. 근본주의 신학에서 보는바와 같은 현상입니다. 삼위일체교리, 예수의 양성교리, 십자가의 대속교리, 부활 승천 재림교리 등을 받아드림이 곧 신앙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둘째로 신앙의 도덕적 왜곡’(moral distortion of the faith)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도덕적 계율을 충실하게 준행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안식일 준수, 십일조 생활, 십계명 준수, 선교열정, 이웃돕기 등등입니다. 그것들은 참 신앙인의 나무에서 저절로 열리는 열매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요소가 결여된 디아코니아를 강조하는 공동체에서 바리새적인 경건한 위선자가 배출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은근히 속으로 하느님, 나는 저들 죄인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성전에서 긍지와 자만감에 빠진 바리새인처럼 되기 쉽다는 경고입니다.

 

셋째로 신앙의 감성적 왜곡’(emotional distortion of the faith)이 일어날 수 있다. 신비체험은 인간의 격렬한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착각이나 왜곡이 발생한다. 심리적으로 과잉흥분 상태는 감정의 카타르시스와 일시적 초월감정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정적으로 흥분된 상태와 신비적 초월감정으로 고양된 상태는 질적으로 다르. 후자에게서만 존재의 자기변화곧 거듭남과 중생이 일어난다. 종종 부흥회의 감정적 흥분 분위기가 참여자들로 하여금 집단적 탈아 상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참된 신비체험이 아니며, 감정의 물결이 지나가면 옛사람으로 다시 돌아간다.

 

바울의 편지 전체를 거시적 안목에서 새롭게 성찰한다면, 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큰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임재와 능력 안에서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성화론 이었습니다. 성령은 바람이나 빛처럼 국경, 인종, 종교의 차별을 구애받음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자유하게 하신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령은 대모귀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생명을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성령은 기독교 부흥회가 개최되는 건물 안에서 유명한 부흥사의 요청에 따라, 무당 굿판의 신내림처럼, 내리기도하고 않내리기도하는 초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 이십니다. 그 분이, 유명한 부흥사 길선주 목사에게도 내리고, 유기그릇장사 남강 이승훈에게도 내리고, 늦깎이 고학생 김재준에게도 내리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김일성을 만나 전재미치광이 놀음을 멈추게 해야 겠다고 작정한 문익환 목사에게도 내리는 것입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가 제물포에 선교사로서 입국하기 전엔, 성령은 한반도에 오신 일이 없는가? 원효와 의상, 퇴계와 율곡, 수운 최재우와 해월 최시형의 마음을 밝히시고, 신령으로서 그 분들에게 강림한 신비체험도 동일한 보혜사 성령의 사역이십니다. 성령은 기독교 선교사들을 따라다니며 시종 드는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성령이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앞서서 이끄십니다.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주체적 하늘바람’(3:8) 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예배에서 말씀강조성령강조가 일방적으로 한 쪽에 기울어질 때, 그 메시지나 예배는 위험하고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비유하건데 전등은 전선을 따라 흘러오는 전류가 필라멘트를 통하여 빛으로 방전되는 때 밝은 빛을 냅니다. 천둥번개처럼 전선 없이 전기현상은 방전될 수 있지만 천둥번개는 위험합니다. 반대로, 전류가 흐르지 않는 전선은 무거운 구리철사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고후 3:6)라고 했습니다. 개신교 예배에서 성경말씀 중심의 예배는 반드시 성경문자주의가 아니라, 설교하는 자와 설교를 듣는 자에게 성경말씀은 성령의 감동감화를 통해 열과 빛을 발하는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형제를 심판하고 죽이는 살인도구도 될 수 있고, 우상을 섬기는 용비어천가 가사로 남용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강조하면서 영() 받았다고 자만하는 예배 인도자가, 성경말씀은 참고인용문 정도로 치부해놓고, 자신이 받았다는 영적 기운에 도취할 때, 전선을 일탈한 전기 방전현상처럼 자신과 종교공동체를 감전시키어 혼란과 광신으로 몰아가 망하게 할뿐입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과 냉소적 원인들 중에서, 1970년대 이후 소위 성령강조의 신앙의 중심교회였던 순복음교회의 성령 목사라는 분들의 일탈과 타락이 있다는 것은 슬프고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부정 못 할 현실입니다. 성경이 경고한대로,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혈육적 결실로 끝나고 있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왜 그러한 일이 발생할까요?

 

신비주의의 진정한 면모는 우상타파 정신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신비주의는 인간 삶속에 등장하는 온갖 자기 절대화하는 우상들(종교적, 정치적, 사회문화적)의 허구성을 폭로 합니다. 거짓 권위를 비판하고 저항합니다. 그들의 우상성을 폭로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경외하고, 사람은 사람답게 자유인 되려는끊임없는 화산폭발 활동이 신비주의 본질이고 성령운동의 심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자국에 얼룩진 얼굴에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시는 그 빛”(고후4:7)이 곧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11:35)고 경고하신 적 있지요. 향린교회와 같은 지성적 교회, 누구보다도 사회적 불의와 도덕적 혼란기에 하느님의 나라의 기본조건인 정의, 진실, 공의, 그리고 윤리적이기를 힘써온 교회입니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덫은, 복음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영적 자유, 인간의 초월적 영성을 약화시킨 체, 엄정한 윤리적 종교로 변질시키는 위험이라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