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29() 성령강림주일 하늘뜻펴기

 

한 사람이 건너면 모두가 건넌다!

(열왕기상 18:20~24, 시편 96:11~13, 갈라디아서 1:1~10, 루가복음 7:1~10)

 

고상균

 

드디어....... 조목사님의 안식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저의 심경을 적절히 표현해 줄 성구 하나가 떠오르네요.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또 전역 후 벌써 12이 지난 지금, 갑자기 사단 유격대장 시절 산악달리기를 할 때 마다 스쳐가던 간판 문구도 생각납니다. ‘피할 수 없거든 즐겨라!’ 제게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허락해 주신 교우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무쪼록 많은 격려와 도움, 그리고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여성혐오가 부른 참사]

사실 오늘의 하늘뜻펴기 원고는 이렇게 부탁도 드리고 격려도 받는 내용으로 작성하려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도, 또 모종의 염려와 불안함이 있으실 여러분들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강림의 절기에 임하시는 성령의 기운이 저의 마음을 한 사건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신 관계로 이 처음의 구상과는 다르게 진행 될 듯합니다. 그것은 지난 517일 새벽 17, 강남역 부근 건물 화장실에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 참을 수 없었다34세 남성에 의해 자행된 사건으로써, 그로 인해 23세의 여성 한 분이 단지 그 시간에 그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무고한 이의 죽음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심각한 이 사건에 대해, 먼저 경찰은 피의자가 장기간의 정신 병력이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조현병(調絃病, Schizophrenia) 정신분열증에서 기인한 과대망상이 부른 범죄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판단에 대해 시민사회단체 및 전문가 그룹 등에서는 매우 상반된 입장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피의자가 경찰 조사에서 '여성이 자신을 무시했다' 아무렇지 않게 범행 동기를 밝히는 것 자체가 이미 여성 혐오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평가했고,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는 "그냥 '아무 사람' 아니라 '여성 중 아무 사람'대상으로 한 사건이기 때문에 여성 혐오 사건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강남역 부근에서 추모행사가 진행되기도 했는데, 이 추모행사가 진행되는 장소에서 일베 회원 등이 반대집회를 열어 수차례 물리적 충돌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남성들이 잠재적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SNS상에서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이 논쟁의 상황에서 일부이긴 합니다만, ‘이 모든 문제는 조신하지 못하게 젊은 여자가 그 새벽에 집에 있지 않아서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나타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남이 함께 들어가는 공용화장실을 없애는 법을 만들자고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의 이면에서는 분명코 건강하지 못한 정신이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범죄의 원인을 모두 정신적 문제로 돌린다면, 정신질환 이외의 원인인 범죄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과 마음이 온전한 사람이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 대상을 고통스럽게 하는 스토킹을 할리 만무할 것이고, 약한 이를 돕지는 못할망정 괴롭히며 즐거워할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정신이 멀쩡한 국정 최고 책임자가 국민 304명이 수장되었는데도 7시간 동안 은밀한 개인시간을 가질 수도, 눈물로 호소하며 면담을 요청하는 유가족들을 길바닥에 두고 해외순방을 나갈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본 사건에 있어서도 그의 정신질환이 문제야라는 식의 평가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반론일 것이고, 핵심을 비껴가는 주장일 것이며, 과거 욕정을 이기지 못해라는 식의 문구를 들먹이며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던 판결문과 같이 범죄에 대해 여지를 주는 마초적 해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건으로 다시 돌아가서 피의자 김모씨는 업무상 지적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일상적인 노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인이었습니다. 또 사건 당일 새벽 0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사건 발생시간까지 숨어있는 가운데 자신보다 힘이 세거나 저항이 강할 것으로 보이는 남성은 여섯 명이나 보낸 후,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인 여성을 가해 대상으로 선택할 만큼 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그에게 현저한 정신 병력이 있어왔고, 최근 처방된 약을 잘 복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에만 모든 원인이 있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남성이 자신의 삐뚤어진 욕구를 해소할 분풀이 대상으로 여성을 택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519일자 경향신문은 서천석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의 의견을 인용하여 정신병의 증상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 문제는 그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의 사회적 맥락은 여성혐오’”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피의자 김씨는 진술과정에서 최근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교회를 지목하면서, ‘의욕적으로 일을 하려해도 여신도들이 나를 무시해서 막혔다는 언급을 했다고 합니다. 왜 난데없이 교회얘길 하느냐싶으신가요? 피의자 김모씨는 재작년까지 신학교육기관의 학생이었고, 장래 목사를 꿈꾸던 개신교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그를 형성하는데 영향 주었을 수많은 경험과 기억 중 교회와 개신교 신앙은 분명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을 겪던 그의 정신 속에서 공격하고 죽여도 무방할 만큼 무의미한 존재로 여성전체가 지목되어감에 있어서도 신앙은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우려는 기저귀발언, ‘빤스교인 망언도 모자라 성폭행 가해자의 개척과 목사직을 교단이 보장해 주고 나서는 등 그동안 한국 교회가 보여주었던 추태로 판단해 볼 때, 슬프게도 기우(杞憂) 아닐 것입니다.

 

[우기가 동참한 폭력]

다른 사람의 일이라 여기시겠습니까? 우리교회는 그렇지 않음에 안도하시겠습니까? 지난 10년 동안 교인커플 중 남성에 의해 발생했던 데이트 성폭력, 한 명의 남성교인이 교회 내 다수 여성교인들에 대해 행했던 스토킹, 우리 교회의 교역자였던 이가 시무 중 지속적으로 아내를 구타했던 사실을 사임 후에야 알게 되었던 일에 대해 우리공동체는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지금 당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19살이나 어린 여성교인에 대한 스토킹으로 피해교인과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끼친 남성 교인에 대해 치리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부이긴 합니다만, 이토록 가해사실이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장가를 못가서 그런 것이고, 반성하고 있는데 봐줘야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도 지금 우리 공동체의 현실이지 않겠습니까? 혹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계속 들이대!’식의 이야기를 조언인양 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또 사회의 다양한 약자들이 당하는 아픔에 그토록 민감했던 우리 공동체가 517일의 사건에 대해서는 홈페이지에서도, 텔레그램에서도, 정말 이상하게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이고, 신앙인들은 한 지체라는 기본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들에게 있어 그 날 그 새벽의 폭력에 우리공동체도 동참한 것이고, 그녀의 목숨이 안타깝게 스러질 때 우리자신도 그 서슬 퍼런 칼을 쥐고 있었던 것이며, 피의자 김모씨의 마음속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가 자라나고 있을 때, 우리교회 역시 다양한 성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모임을 만들어내고 있지 못함을 통해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신앙을 가진 한 사람의 여성혐오범죄가 우리 모두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싫든 좋든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매일 매순간 죄스러운 마음을 한 가득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앞서 건넌 한사람1: 엘리야]

오늘 함께 모신 하늘말씀 1성서는 유명한 가르멜산 이야기입니다.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풍요와 번영을 약속한다는 바알 신앙에 경도된 상황에서 유독 한 사람이 야훼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북왕국 지배세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망치는 장본인(왕상17:17)’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이야기 속 엘리야....... 그는 사백 오십 명의 바알 제사장과 그들을 추종하는 군중들 앞에서 외로운 싸움을 제안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시오. 그들에게 한 마리를 잡아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지 않은 채 그냥 두게 합시다. 나도 한 마리를 잡아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나는 나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겠소. 어느 쪽이든지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이 참 하느님입니다.” (왕상 18:23~24)

 

압도적인 다수 앞에서 허언증 환자 같아 보이는 엘리야의 제안은 끝내 침묵했던 바알신단과 달리 하늘에서 내려온 불길이 제물 뿐 만 아니라 제단주변의 도랑물까지 말려버리는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유일신, 예루살렘 성전 중심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에 의해 작성된 망할 놈의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 시리즈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북왕국에 대한 원색적 비난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항도 아닙니다. 그러나 글 이전에 삶의 자리가 선행했음을 생각해 보면, 유다가 북왕국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이전, 북왕국 내부에서 당시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이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라는 엄청난 비중의 인물 관련 이야기 모두를 후대에 남유다에서 창작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중계무역으로 증대된 국력의 이면에서 더 큰 노역에 시달려야 했던 민중들의 아픔이 소위 풍요의 종교에 대한 부정적 민담으로 표출되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야기 속 엘리야는 홀로 야훼의 제단 앞에 섭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의 행동은 잠들어 있던 다수 대중의 종교적 양심을 깨웠고, 야훼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에 비해 참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을 이야기 속 엘리야의 실천은 그렇게 대중 전체에게 파급되어 갔고, 마침내 국가권력의 흐름을 바꿔버렸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 열왕기상이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피의자 김씨의 일과 달리 한 사람의 움직임은 이렇게 모두에게 선한 파장을 남기기도 합니다.

 

[앞서 건넌 한사람2: 바울로]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본문 갈라디아서는 공동체의 위기에 대한 바울로의 격정적인 마음, 심지어 형식적인 감사의 인사도 생략한 채 표현되어 있는 분노 등으로 인해 가장 명확한 바울로의 친서로 평가받는 서신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당시의 바울로를 그토록 솔직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울로의 선교활동 중 갈라디아공동체에서 유대교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선결과제라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는 소아시아라는 갈라디아의 지리적 특성상 유럽에 비해 예루살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형식적 규율을 극복한 예를 예수에게서 찾았던 바울로는 선교활동을 통해 형성된 교회공동체에 유다인, 그리스인, , 자유인, 남자, 여자에게 아무런 차이가 없다!(갈라 3:28)’는 혁명적 신앙을 전했는데요, 같은 예수공동체이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하게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지 못했던 예루살렘계공동체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바울로의 이와 같은 견해는 불온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그로인해 소아시아 지역에 건설된 공동체로 예루살렘교회 사람들이 파견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갈등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이로 인해 바울로는 졸지에 자신이 시작했던 공동체 갈라디아의 다수 구성원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외톨이가 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통상은 디모데 등 공동송신자의 이름을 기록하던 버릇과 달리 갈라디아서의 바울로는 자신의 이름만을 올린 채 직설적인 표현을 던집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 (갈라 1:10)

 

이처럼 격렬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바울로는 갈라디아교회로 보내는 서신을 통해 유대교적 율법에 경도되어가는 갈라디아 교인들과 홀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와 같이 외로운 행보는 바라던 결과에 이를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끝내 왕따된 채 사라지고 말았을까요? 본문에서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선교활동의 무대를 유럽으로 더욱 확장시켰고, 그가 직접 기록했거나 그의 이름을 따라하는 위서들 다수가 2성서 안에 정경으로 정착된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모두가 그래! 라고 할 때, 홀로 아니오! 라고 했던 바울로의 걸음에 다수의 예수신앙인들이 함께 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건너간 길을 종국에는 많은 이들이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앞서 건넌 한사람3: 백인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 사람의 행보는 루가복음 본문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병든 종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백인대장이 예수에게 이적을 간청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종을 너무 사랑하는 주인이니 그 목숨을 살리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겠지요. 참 좋은 주인이네요.......라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먼저 백인대장은 로마의 군인, 즉 지역의 핵심 지배세력입니다. 아무리 성서라 하더라도 그가 거렁뱅이에 가까웠을 피지배층 예수에게 이토록 저자세일 수 있었을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설명을 드리자면 백인대장의 부대인 백인대(百人隊, Centuria) 레기온이라 불리던 군단의 최소 기본단위입니다. 100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여섯 개 모여서 대대(코호트, Cohort)를 이루고, 다시 대대가 열 개 모이면 앞서 말씀드린 로마군의 최대 전술단위인 군단 즉 레기온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백인대장은 단순히 백 명의 지휘관 정도가 아니라, 대대원들의 투표를 통해 대대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입니다. 그러니 백인대장은 곧 대대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인 것이지요. 더군다나 팔레스타인 등 변방에 파견된 백인대장은 소규모의 지역사령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처럼 높은 존재가 거렁뱅이 무리의 지도자 예수에게 애걸복걸한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사람들에게조차 쉽게 납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소수자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퀴어 비평(Queer Criticism)에서는 이야기 속 백인대장에게 있어 종이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로마군의 원정 전쟁 시 귀족남성과 함께 했던 동성연인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인이든 연인이든 간에 신분과 인종을 넘어 도움을 청했던 이야기 속 백인대장은 분명 유대인의 이야기로 가득한 성서 중에서 독특하게 부각되는 ‘1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 사람의 행보에 대해 오늘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립니다.

 

잘 들어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은 이미 깨끗이 나아 있었다. (루가 7:9~10)

 

아무리 위의 말씀들의 내용이 맞다 하더라도 역시 혼자 앞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할 때 슬그머니 묻어가는 것이 참 좋긴 합니다. ‘먼저 한다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 선각자들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무수히 희생되었던 이 땅의 근현대사로 인해 염려를 넘어 부정적인 이미지가 굳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겠습니다.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아마 스승 예수가 사라진 후 처음으로 자신들끼리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해야했을 당시의 제자들도 그러했겠지요. 그러나 한명 두 명, 처음의 두려움을 뚫고 무언가 해 나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 어떤 존재로서의 성령을 인식하고 신앙고백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성령강림절기에는 그렇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삶으로 실현시켜나갔던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향린공동체 여러분!

세상에는 점점 기가 막힌 일이 많아지고, 안타까운 일도, 애통해하는 사람도 늘어만 가는데, 우리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도 참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속해있는 교회공동체도 고민해야 할 일들이 많은 시간입니다. 이 모든 자리에 성령의 위로하시는 마음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한 걸음만 나아갑시다. 각자 걸어가고 계신 삶의 자리에서 그렇게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내딛어 갑시다. 이를 통해 두려운 마음 곁에서 힘찬 응원을 보내고 계실 성령의 기운을 체험해봅시다. 그렇게 한 사람 한사람이 건너가게 되면 마침내 우리 모두는 함께 염원하는 세상을 향해 함께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회와 지체의 어려움에 대해 변화를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생명을 하찮게, 약한 존재를 혐오하는 세상의 끝은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인드라망을 아시지요? 불가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은 홀로설 수 없는 갈대들로 구성된 묶음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갈대는 견결하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일어선 인드라망은 신들의 왕 샤크라의 보석그물이 되어 악을 물리치고 불법을 수호하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연결된 우리들의 걸음을 그렇게 강한 힘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인드라망의 일원이 되시길 마음모아 축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의 움직이지 않았음으로 인해 그날 그 새벽 너무나 두려운 시간을 거쳤을 그녀의 영혼이 부디 영면하시기를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함께 침묵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라는 신앙고백은

초월자 한 분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이와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바, 그 한 사람의 행동에 우리가 동참함으로

모두가 함께 구원의 자리로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죄송합니다.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겠습니다.

 

바뀌지 않는 삶의 자리를 탓하기 이전에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 걸음을 떼어갑시다.

마침내 세상이 함께 걸어 나갈 것입니다.

그 여정의 곁에 성령의 기운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