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없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시편 85:1-7; 호세 1:2-9; 골로 2:6-15; 요한 13:34-35)

강 남 순 교수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34-35)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여러분은 왜 주일에 교회에 오셨습니까? 교회에 등록한 교인이니까 또는 지난주에 왔으니까 그 연장으로서 오늘도 교회에 오신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신앙생활이란 다른 말로 하면 상투성에의 저항이라고 저는 봅니다. 도로테 죌레 (Dorothee Sölle)주일은 다른 날들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라고 합니다. 주일을 지킨다라는 의미는 다른 일상적인 날들에 묻지 않았던 물음들과 만나고,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와 신에 대하여 새롭게 성찰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 올 때의 , 돌아갈 때의 는 동일한 존재가 아닌 뭔가 새롭게 변화된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성서를 낮설게 하기’]

 

오늘 제가 설교본문으로 택한 성서는 매우 익숙한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익숙함을 벗어버리고, 성서를 낯설게 하기 하는 작업이 있어야, 비로소 성서에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연결되는 살아있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를 낯설게 하기를 위해 도움 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성서 번역본을 읽기도 하고, 가능하다면 한글이 아닌 다른 나라 말로 된 성서들을 읽어보는 것입니다. 한글로 된 성서가 지닌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가 그 대화상대자가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언제나 반말을 하고 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니,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13: 34-35)”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반말하는 예수는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주의적인 존재로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로 쓰여진 성서에서 예수와 청중사이에는 아무런 위계가 없는 언어로 표현됩니다. 성서를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안다는 생각을 잠시 괄호 속에 넣어놓으시고, 마치 처음 대하는 성서라고 생각하는 이 낯설게 하기를 의도적으로 시도하시면서,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과제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2. 현대세계의 징조: ‘세계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종교인들은 이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그것에 개입해야 하는 책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감지하고 있는 이 시대적 징조는 바로 세계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전 시대에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지구적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생태위기의 문제, 핵재앙의 위협, 빈곤과 전쟁, 다양한 양태의 폭력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뤽 낭시(Jean-Luc Nancy)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가설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측면을 면밀히 조명한 후 귀결되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파괴한다는 것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또는 세계가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조차 알아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이 세계가 파괴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다.

(Jean-Luc Nancy, The Creation of the World or Globalization, transla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François Raffoul and David Pettigrew/ New York: SUNY Press, 2007, 35.)

 

우리는 오늘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예수는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를 새로운 계명으로 던집니다.

 

[3. 예수가 던지는 세 가지 과제/질문]

 

오늘 읽은 성서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세 가지 커다란 질문과 과제를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새 계명(commandment)’이라는 도전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말을 새 계명이라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라는 말은 사실상 이미 구약성서에도 등장하는 것인데, 예수는 왜 자신의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을 새 계명이라고 명명 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의 신학적/시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예수가 새로운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상투적인 사랑의 의미를 홀연히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의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전통적인 의미의 사랑하라는 말의 상투적 이해를 거부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로 생각하라는 것, 전통과 의도적인 불연속성을 만들어가면서,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저는 봅니다. 우리의 과제중의 하나는 전통이 내려 준 가치들을 무비판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로 전환시켜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서로-사랑의 도전입니다.

 

여기에서 서로란 누구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유대 공동체에서 이웃이라는 의미의 서로란 언제나 동족인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대종족중심주의적(ethono-centric)인 의미로 이해되는 서로였지요. 예를 들어서 십계명에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에서 이웃의 아내란 동족인 유대인의 아내를 의미하는 것이지, 소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아내를 포함하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아내란 남편의 소유물로 간주되었기에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아내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유물을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였던 것이지요. 창세기 19, 사사기 19장에는 아내//첩이 어떻게 한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 간주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서로-사랑하라의 그 서로의 범주는 무엇일까, 즉 그 서로를 의미하는 공동체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묻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의 이 명령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어떠한 사람들을 이 서로의 범주에 포함시키는가 또는 배제시키는가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씨름해야 할 과제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기독교인끼리의 서로인가, 한국인끼리의 서로인가, 또는 유사한 사회적 계층에 속한 사람끼리의 서로인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한다는 엄중한 과제를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셋째, 지금 여기에 있는 나/우리에게 사랑의 복합적 과제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도처에 있어서 우리는 그 사랑의 개념이 마치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곤 하지만, 사랑의 복합적인 의미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미등록노동자와 같은 이들에 대한 개인적인 차원의 배려와 사랑이 국가적 법률과 상치되는 것일 때, 우리의 사랑은 국가에 의하여 범죄자가 됩니다.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서로-사랑이란 매우 복합적인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낭만적으로만 이해할 때,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모습의 폭력적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리의 사랑의 행위란 다층적인 권력구조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현실 세계 속에서 사랑의 행위란 개인과 국가사이, 남성과 여성 사이, 파트너와 파트너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등의 관계가 지닌 다층적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일어나기에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이고 낭만적인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러한 세 가지 커다란 질문 또는 과제 앞에서 우리는 서로-사랑하라를 실천하는 공동체의 의미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공동체의 포괄적 이해를 위한 두 가지]

 

공동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작업을 해야 합니다.

 

첫째, 공동체의 탈낭만화입니다.

 

여러분들은 공동체라는 말을 들을 때에 무엇을 생각하게 되십니까. ‘공동체라는 말은 종종 매우 낭만적으로만 이해되곤 합니다. 사랑이든 공동체이든 여타의 낭만적이해가 지닌 문제점은 밝은 면만 부각시킬 뿐, 이면의 어두운 면은 보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밝고 좋은 면만을 전부라고 내세우면서, 그 밝은 면 이면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공동체의 탈낭만화를 해야 합니다. 한 공동체의 밝고 긍정적인 면만이 아니라, 어둡고 부정적인 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둘째, ‘포괄과 배제의 경계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할 때, 우선적으로 벌어지는 것은 포괄과 배제의 경계선을 그리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즉 누가 그 공동체에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는가라는 포함과 배제의 경계선을 그리는 행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정한 포괄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탈낭만화과정을 통해서, 그 공동체가 배제하고 있는 것들, 또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 공동체의 어두운 이면들은 무엇인가의 문제와 치열하게 씨름해야 합니다. 누가 그 공동체의 포괄의 원에서 배제되는가, 그러한 포괄과 배제의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같은 질문들과 치열하게 씨름해야 합니다.

 

[5. 두 종류의 공동체: 동질성의 공동체와 다름의 공동체]

 

예수를 믿는 이들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예수 공동체또는 기독교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공동체는 과연 예수의 서로-사랑에서 서로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이 서로-사랑하라는 명령을 하면서, 서로가 누구와 누구를 의미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통해서 예수는 여러 가지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서로-공동체의 의미를 들여다보기 위해, 저는 두 종류의 공동체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동질성의 공동체(community of sameness)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공동체는 동질성의 공동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동질성의 공동체는 서로 유사하게 생각하고, 유사하게 행동하고, 유사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소속감을 나누며 공동체가 구성되고 지속됩니다. 이러한 동질성의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 구성원들과 다른 생각, 다른 행동방식, 다른 존재방식을 지닌 이들은 포괄되지 못합니다. 그 공동체에는 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보는 본질화(essentialization), 구성원들의 개별성을 보지 않으려는 균질화(homogenization), 공동체 구성원들을 하나의 체제와 가치 속에 넣어버리는 총체화(totalization) 일어납니. 이러한 동질성의 공동체는 많은 경우 순수주의의 열망을 작동시키곤 합니다. 순수주의는 다양한 폭력과 연결됩니다. 이 공동체와 동질성을 보이지 않는 구성원들은 이 공동체의 순수성오염시키는 존재로 간주되며, 급기야는 이 오염의 가능성들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겠다는 폭력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다른 인종간의 결혼이 1967년까지 불법이었습니다. 다른 인종간의 결혼은 무엇보다도 백인공동체오염시키는 것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지요. ‘한방울 규칙(One drop rule)’은 이러한 왜곡된 순수주의의 열망이 제도적 폭력으로 작동된 예입니다. 나치의 게르만민족의 동질성과 소위 순수성을 지켜내고자 자행한 갖가지 폭력은 이러한 동질성에 대한 열망이 정치사회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지요.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사실상 50% 백인이며 50% 흑인인데, 여전히 흑인으로 분류되는 배경에는 한 방울의 피가 섞여서 백인성의 순수성이 오염되므로 백인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이 세계의 중심부에 있는 백인들이 지향하는 왜곡된 동질성의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면적인 사건은 오히려 짚어내기가 쉬운지도 모릅니다. 노골적인 양태로 그 모순성과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교회와 같은 종교 공동체신앙의 이름으로 그 동질성에 대한 열망이 포장되기에 우리가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문제점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공동체의 소위 순수한 전통누가규정하고, 어떠한 관점으로 규정하는가는 다양한 양태의 권력(power)’문제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권력(power)’이란 우리 밖 저쪽(out-there)’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in-here)’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지요. 예수가 지향하고자 하는 공동체란 사실상 이러한 동질성의 공동체로부터 거리가 멉니다. 예수의 대한 비판중의 하나는 그가 이 사회에서 제대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과 먹고 마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갖가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동질성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인간존재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다름을 그대로 서로 받아들이면서 바실레이아 공동체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서로간의 유사성을 나누는 동질성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그 동질성에서 벗어나 있는 다양한 이들을 결과적으로 배제하고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서로-사랑하라는 명령에서 이 서로란 사실상 동질성을 나누는 사람들끼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질성으로만 규정되는 공동체는 우리-그들사이에 배제나 포용의 선을 분명히 그음으로서, 언제나 배제와 배타의 가능성을 전제하게 됩니다.

 

둘째, 다름의 공동체(community of alterity)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는 다름의 공동체입니다. 여기에서 다름이란 영어로 ‘difference’가 아닙니다. ‘Difference’는 언제나 무엇과 다르다라는 비교의 대상을 전제로 합니다. A를 인식하는 데에 ‘AB와 다르다라고 함으로서 B의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비교라고 하는 것은 권력이 개입된 행위이지요. 왜냐하면 비교에는 언제나 그 비교의 기준들이 있어야 하며, 그 비교기준을 만드는 이들은 바로 권력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서 사람과 개를 비교한다고 할 때 그 비교기준은 누가 만들겠습니까. 개 보다 권력이 많은 사람이 만듭니다. 사람이 비교 기준을 만들기에 언제나 보다는 사람이 우월한 존재로 부각됩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름의 공동체는 한글에서는 예민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에서는 매우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 알터리티alterity’로서의 다름을 사용합니다. 즉 그 어떤 비교를 하지 않고, 그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는 의미의 다름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개체적 존재입니다. 집단성으로 규정되는 다른 창조물과는 달리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라고 그 개별인의 창조임을 강조합니다. 즉 인간창조이야기는 바로 이 개별성의 윤리(ethics of singularity)’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란, 모든 인간들이 지닌 고유의 개별성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즉, ‘개별성의 윤리에 근거한 공동체여야 합니다. 동질성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환영되고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는 화석화된 공동체입니다.

 

[6. 공동체가 지닌 전통에 대한 두 가지 과제]

 

그렇다면 우리가 공동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책임이란 무엇일까요. 각 공동체는 소위 그 공동체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전통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 책임과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과거 전통 속에서 지속적으로 보존해야 할 것을 찾아내는 과제이며, 둘째, 새로운 전통을 창출(innovation)해야 하는 과제 입니다.

 

한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전통에 대하여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 동시에 무엇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라는 두 가지 과제와 끊임없이 씨름해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그 공동체가 지닌 과거전통을 고정하고 절대화할 때, 그 공동체는 굳어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기 어렵게 됩니다. 찬란한 과거 전통에 대한 낭만화나 지나친 자부심이 때로는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 그 적절성이나 책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전통 속에서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연속성) 또는 무엇을 과감히 버리고(불연속성) 새로운 전통을 창출할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한 공동체가 지닌 지속적인 과제입니다. 전통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은 이러한 분별을 할 수 있는 다양한 렌즈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린공동체를 포함해서 여타의 공동체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과 지속적으로 씨름해야 합니다.

 

누가전통의 정통성을 규정하는가. 누구의 경험이 존중되는가

어떠한 관점이 적용되는가

공동체가 지닌 인식론적 사각지대는 무엇인가

보존해야 할 전통은 무엇이며, 과감히 버리고 새롭게 창출해야 하는 전통은 무엇인가.

 

[7. ‘서로-사랑이라는 새 계명: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향하여]

 

1. 동질성의 공동체가 아닌 절대적 다름의 공동체 (community of absolute alterity)’

2. 구성원들을 묶는 것이 동질성만이 아니라 다름을 포용하는 공동체

3. ‘우리의 범주의 급진적 확대: 를 급진적으로 확장하여 연대와 책임을 나누는 것

4. 예수가 서로-사랑이라고 하는 것에서 서로란 다름의 공동체, 서로의 급진적 확대를 의미함.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계명, 새로운 명령이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란 전통적으로 이해되는 동질성의 공동체를 과감히 넘어서서, 새로운 다름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의미에서의 공동체 입니다. 바로 예수가 만들고자 한 공동체의 표상이지요. 향린교회가 예수의 서로-사랑하라에서 서로라는 그 포괄의 원(circle of inclusion)’을 점점 더 확대하고 복합화 하는 공동체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