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만들어가는 이들

(시편:107:1-9; 호세아 11:1-11; 골로 3:1-11; 마태 9:1-8)

강 남 순 교수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 자기 동네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며 수군거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어찌하여 너희들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마." 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보고 무리는 두려워하는 한편,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오복음 9: 1-8>

 

[1. 존재의 외부성과 내부성]

 

종교는 역사속에서 억압자해방자라는 두 가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한편으로 제도화된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다양한 폭력, 전쟁, 증오, 차별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들은 각기 다른 양태의 죄의 역사(history of sin)’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 종교는 억압과 차별의 현실세계속에서 새로운 자유와 해방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종교의 이 두 가지 상충적 얼굴들은 한 종교 공동체안에 각기 다른 모습들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의 한계와 죄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지속적인 자기 비움은 종교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중요한 책임적 과제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이러한 근원적인 비판적 성찰, 자기비움과 새로운 삶으로의 결단, 즉 회개의 행위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여러분들과 공동체라고 하는 우리의 외부성(exteriority)’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 공동체와 연결된 우리 각자의 내부성 (interiority)’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의 건물이 외부와 내부가 있듯이, 인간은 존재의 외부성내부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측면을 한꺼번에, 동시적으로 늘 살펴보아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각자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나는 신을 사랑하는가라는 종교적 질문을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립니다. 저는 이 주일 아침,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께 어거스틴적 질문을 드립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믿는가.

 

[2. ‘부자유라는 이름의 병]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라고 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1969<고도우를 기다리며>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요.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행복한 나날들"(Happy Days)에는 위니(Winnie)라는 이름의 50대 여인이 등장합니다. 1막에 나오는 장면은 위니가 그녀의 허리까지 모래에 묻혀 있는 모습입니다. 하반신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지만, 그래도 위니는 양치질을 하고, 핸드백을 소제하고, 자신의 남편인 윌리 (Willie)가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끊임없이 독백을 해 댑니다.

 

2막에서 위니는 이제 턱까지 모래에 잠깁니다. 더 이상 그녀는 머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모든 관계들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혼자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점점 그녀는 자신 자신에 대하여 비로서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모든 관계들은 깨어지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의미도 없이 끊임없이 해대는 독백일 뿐입니다. 위니와 윌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진정한 소통은 없으면 서로 독백을 할 뿐입니다. 진정한 소통이나 의미가 부재한 일상적 삶을 경험하면서도, 위니는 오늘도 행복한 날이 될꺼야. 또 다른 행복한 날(This is going to be a happy day! Another happy day)” 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행복한 날이라는 그녀의 외침은 너무나 공허하게 들려서, 마음이 아프기까지 합니다.

 

이 희곡은 자유를 박탈당하는 인간의 모습, 스스로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인간의 모습, 그럼으로써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사실상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정신적, 영적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요. 육체는 살아있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감동을 상실하고 어떠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자유를 철저히 박탈당한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죽음을 빵만으로의 죽음”(Death by Bread Alone)이라고 표현하셨지요.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감옥에 갇혀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 감옥에 갇힌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다양한 요소들에 의하여 자유를 상실한 삶을 살고 있으며, 진정한 소통의 부재조차 부재로 느끼지 못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모습이 점점 왜곡되는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니는 자신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모래에 턱까지 묻힐 때까지 자신이 어떻게 아무런 변화를 이룰 수 없는 무력한, 부자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조차 알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단순한 듯한 이 희곡을 통해서, 위니의 모습은 사실상 우리 인간 대부분의 모습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부자유와 무력한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의 삶을 식민화하고,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모래와 같은 것일까요.

 

[3.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구에게 잘 지내는가 (How are you?)’라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인사를 받은 친구는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지내는가를 오랫동안 설명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사람은 자신의 친구에게 자네가 절망에 빠져 있는 걸 보니 참 유감이네. 어떡하다가 그 지경이 되었나?” 라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내가 가진 문제들 때문이지. 자고나면 온통 문제투성이거든, 난 내 문제들에 지쳤어. 만일 자네가 내 문제들을 모두 제거해 준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르겠네."

 

친구의 말을 들은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어떤 곳에 갔더니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더군. 그런데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어. 자네도 그곳에 가 보겠나?" 그 친구는 "당장 가보고 싶네. 그곳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이 가서 살기에 어울리는 곳처럼 들리는군."이라고 흥분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공동묘지 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그 사람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죽은 사람들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제거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고 있는 삶의 짐과 실패들, 그리고 문제들 때문에 마음의 평화나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인간의 삶이란 어떠한 직업을 가지든, 어떠한 환경 속에 처하여 있든지 실패와 문제가 없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이 제거되어서가 아니라, 그 문제들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총과 삶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그렇기 때문에 (because of)’ 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의 자세를 통해서 더욱 성숙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통해서 그러한 기적의 삶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4. ‘기적의 가능성? ‘중풍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해방]

 

예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는 예수의 첫번째 기적 이야기인 가나의 혼인잔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다양한 기적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사용하여 이룩한 고도의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게 된 근대 이후에, 성서 속의 기적 이야기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을 복제할 수 있을 만큼의 놀라운 과학의 발전을 이룬 현대에, 우리의 이성과 합리적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되기 어려운 성서의 기적이야기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러한 기적의 이야기들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와 어떻게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성서의 이야기들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와 구체적인 연관성을 가지게 될 때에, 비로소 그 성서의 이야기들은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예수의 다양한 기적이야기들은 새로운 변화,’ ‘새로운 삶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기적 사건이전과, 그 이후가 전적으로 다른 삶으로 나누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온 몸이 마비된 어떤 한 사람이 예수께로 데려와졌고, 그의 병이 치유되어 병상에서 일어서게 되었다는 기적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2절에 보니까 몸이 마비되어 치유 받기를 원하여 예수 앞에 온 사람에게 예수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라. 너의 죄들이 사함을 받았다'(Take heart, son, your sins are forgiven)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예수와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온 몸이 마비된 사람을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면 제자들도 매우 으쓱 했을 것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예수가 정말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고 경외심을 단숨에 표했을 텐데, 예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십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너의 죄들이 사해졌다."

 

[5. ‘내면적 감옥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저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첫째, 도대체 예수께서 왜 몸이 마비된 육체적 병 때문에 고통당하여 온 사람에게 병고침'이 아니라 '죄의 용서'의 선언을 먼저 하셨을까 라는 점입니다.

 

'죄의 용서'란 분명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의 문제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온 몸이 마비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은 그 병이 치유되는 '육체적인 영역'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눈, 다른 사람을 보는 눈, 하나님을 대하는 눈이러한 사물을 보는 방식에 따라서 사람은 어떠한 동일한 상황에서도 매우 다른 반응을 보이고 그 상황에서 삶에 대한 태도도 매우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밀턴은 "마음이란 스스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자기자신에 의하여 형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눈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무수한 문제들과 실패들 한 가운데에서도 은총을 발견하는 기쁨과 감사의 삶일 수도 있고, 이미 다양한 조건들을 갖춘 삶의 한 가운데에서도 늘 불행한 의식과 절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보는 눈, 타자를 보는 눈이 냉소적이고 부정적으로 고정이 되었다면, 아무리 외적인 육체적 문제가 해결되었어도 그 사람의 삶은 늘 부정적이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온몸이 마비되어 온 사람에게서 우선적으로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 병자는 죄의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아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인식하거나 의식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둘째, 도대체 이 사람이 용서를 받은 '죄들'이란 어떤 죄일까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온 몸이 마비되는 병을 오랫동안 않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사실상 오랫동안 아주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처럼 의학이 발달된 시대에도 온몸이 마비되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하고, 자신의 삶을 원망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옛날 의학적 치유의 가능성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그 사람이 가졌을 절망감이란 참으로 깊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저주받은 삶을 원망하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변사람들을 보아도 좌절감과 원망으로 가득찬 시선으로 그들을 대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이러한 불행을 준 신을 원망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 시간들도 무수히 많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자신의 삶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조차 포기한지 오래되었을 것 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 사람의 영적 세계. 정신적 세계는 황폐화되고 절망감과 불행감으로 가득 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저 지나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절대적 무력감속에 잠겨서 매일 매일을 보냈을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고, 오늘과 내일이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삶에 대한 어떠한 기대나 희망도 가지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몸이 마비된 사람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육체적 치유보다 더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본 것은 이러한 정신적 세계의 치유였던 것입니다. 육체적 병의 치유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 만든 내면적 감옥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실제로 억압하고 식민화하는 것은 육체적 병만이 아닙니다.

 

예수가 용서한 죄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은 항상 있다는 강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포기하는 것,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는 것,

자신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신앙을 포기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사실상 육체적으로 마비된 사람이 용서함을 받아야 했을 가장 커다란 죄들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6. 세 종류의 사람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기적의 사건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있던 사람들이 사실상 동일하게 그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그 기적 이야기 속에 등장합니다. 첫째,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삶에 전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기적의 사건 한 가운데에서, 그 기적의 의미를 전혀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방관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흥미를 가지고 이 기적 사건을 보지만, 그 기적 사건에 의하여 자신이 직접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있지만, 그 기적사건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기적은 그래서 그 기적을 기적으로 볼 수 있는 이들에게만 변화와 해방의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셋째는 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기적의 주인공이며, 자신의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온몸이 마비되어 아무런 변화도 기대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되는 놀랍고 경이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절대적 절망이라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불가능성의 희망’, ‘희망 너머의 희망 (hope against hope)으로 가득 차게 된 사람입니다. 오늘과 내일이 단지 어제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병고침을 받기 이전에, 예수로부터 '마음을 편히 가져라'는 첫마디에 이미 자신의 삶이 변한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 그러한 따스한 위로의 말을 해주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 사람에게 심판자의 모습으로 죄사함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아들아'라고 부르며 '마음을 편히 가져라 '(take heart)라는 아주 따스한 위로의 말로 그의 모든 죄가 사해짐을 선언합니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문책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예수는 그를 따스하게 맞아들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병드는 것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흔적은 성서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로부터 예상치 않은 이러한 놀라운 '죄사함의 경험'을 한 것이것이 바로 중풍 걸린 사람에게는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을 보는 시각, 타인을 보는 시각,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전과 철저히 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적을 온 존재로 경험한 그는, 이제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무수한 문제들과 실패들 한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언제나 있음을 자신 있게 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도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 종류의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어쩌면 우리 각자는 이 세 종류의 사람을 모두 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7. ’절망이라는 이름의 병]

 

그런데 여러분, 이 중풍병에 걸려 예수앞에 들려온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성서는 이 중풍병자의 기적이야기를 통하여 이 자리에 모인 우리도 이 중풍병자와 같이 죄의 용서와 내면적 감옥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의 경험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마비 되지는 않았어도, 우리의 영적 세계와 정신세계는 중풍에 걸린 사람과 같이 마비되어 있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이라면,

오늘과 내일은 단지 시제의 연속일 뿐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나 자신 속에서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존재로의 태어남을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중풍병자이며, 절망과 무관심이라는 죄 속에 빠진 사람들이며, 예수의 '죄의 용서받음'과 그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비판적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삶과 이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입니다.

 

[8. ‘기적을 만들어가는 이들]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적이란 복권이 당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씨름하던 문제들이 별안간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희망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기적은 아무런 새로운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에 전적으로 반기 를 드는 것이며,

현재와 미래는 단지 과거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전적으로 거절하 는 것이며,

진정으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며,

늘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다고 단 호히 말씀하시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며,

깊은 절망과 불행감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과 개입의 삶 한 가운데에서 기적은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래서 희망이란 항상 존재한다는 믿음이것이 기적의 뿌리입니다. 문제나 실패들이 하나도 없어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양한 문제들과 실패들, 좌절과 절망스러운 일들의 한 복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내려주신 축복과 은총을 느끼고 새로운 삶에의 가능성을 향한 희망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바라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특정한 환경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한 마음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만이 예수의 기적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예수가 왜 육체적 '병고침' 보다 '죄사함'을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9.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

 

오늘도 예수는 이 성서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도 기적이 가능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먼저 우리의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함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눈, 다른 사람을 보는 눈, 하나님을 보는 눈이 전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는 중풍 걸린 사람의 죄가 사하여 졌다고 선언한 후,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가라고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가라는 예수의 명령은 새로운 변화된 존재로 살아가라는 명령이며,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이는 새로운 삶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선언이며, 깊은 절망 속에 잠긴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희망적 삶에의 초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말처럼 불가능성에의 열정(Passion for the Impossible)’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과 의식 속에서 가능성의 영역 안에서만 제한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희망의 불가능성, 연민과 사랑의 불가능성, 용서의 불가능성, 새로운 삶의 불가능성 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향한 열정을 키우고 간직해야 하는 책임적 존재로 예수는 이 아침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는 우리의 절망감의 죄, 무기력감의 죄, 무관심의 죄에 대하여 심판자로 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를 아들과 딸이라는 친밀성의 관계속에 불러들입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십시오(Take heart)’라는 따스한 격려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겠다는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불가능한 것 같은 희망을 우리 자신 속에 끊임없이 지펴내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가는 분명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 모두 절망적인 삶 한 가운데에서, 문제가 많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서,육체적/정신적 중풍과도 같은 절망과 무관심과 타성의 삶을 넘어서서, 단호하게 희망적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함으로서,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향하여, 용기 있게 일어나라, 그리고 절망의 침상을 들고서 걸으라는 예수의 초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