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평화주일

 

또 향린!”

(시편 50:1-6; 이사 1:10-13/16-17; 히브 11:1-3/8-16; 루가 12:32-40)

 

고희영 교우 / 조은화 목사

 

[고희영 교우]

 

안녕하세요. 저는 새날청년회 고희영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청소년부 교사를 하고 있고요. , 미술경영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저는 대학원에 입학한 이래로 대학생과 직장인의 안 좋은 점을 모아놓은 대학원생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학생신분을 누리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면서 하는 것 없이 할 게 많은대학원생 처지의 비애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학원 진학을, 단지 학력과 연봉을 높이기 위한 취업보류처럼 보기도 합니다. 상당한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는 대학원 생활은 지금 당장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대학원생 신분을 선택했는데요. 제가 선택한 것이지만 견디기 힘든 부분은 제가 대학원생이라는 사실입니다. 공부를 하면서 전공분야와 관련된 현실의 문제들을 걱정하고, 제 미래를 걱정하고, 세상 걱정을 하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돌고 돌아서 돈의 문제로 수렴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현실의 많은 문제들을 비판하다가도, 책상 앞으로 돌아가 앉아야 합니다. 결국 당장 돈 한 푼 벌지 않는, 그야말로 비효율적인대학원생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생각에 울적할 때면 친구를 만나 한바탕 수다를 떨면서 어떻게 졸업과 취업을 빨리 쉽게 할지, 우리를 비효율적인 존재로 만드는 이른바 효율적인 세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턴가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기보다 효율적으로 경영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비용과 시간을 덜 들이고, 고생을 덜 하면서, 쉽게 살 수 있을지 궁리해야하는 듯합니다.

 

이런 고민은 일상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효율적 세상은 무책임한 문제들을 낳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친구와 새벽기차를 타고 동해로 훌쩍 떠난 날이 있습니다. 바다를 찾아 걷다가 어느 카페를 들어갔는데요. 친구와 저는 아이스초코와 바닐라라떼를 시켰습니다. 두 가지 모두 우유가 들어가는 메뉴입니다. 함박웃음을 지은 사장님이 음료를 내주시면서, “만들다보니 우유가 좀 많이 들어갔어요.”라고 하셨습니다. 기분 좋게 음료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우유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정말 우유 맛 밖에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맛이 없었습니다. 불쾌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순히 맛없는 커피를 먹었다는 것 그 이상의 배신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유가 많이 들어가면 맛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우유가 많이 들어간 상황을 알면서도, 맛없는 커피를 내어주는 사장님이 무책임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맛이 이상하면 다시 해주거나 조치를 취해주겠다는 말도 없고, 웃음으로 대충 무마하려는 그 태도에 화가 났습니다. 아마도 다시 만들기 싫어서, 이윤이라는 효율을 생각해서였겠지요. 사는 것이 이렇게 쉬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허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일상속의 작고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세상에 많은 부분이 맛없는 음료를 내어준 카페주인처럼 너무 쉽게 무책임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지난날, 무책임을 부르는 효율적 세상 앞에서 가장 크게 좌절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2012, 새청에서 강정마을에 갔을 때 보았던 정부의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시작부터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강행하고, 그로 인해 빚어진 갈등상황을 그저 무마하려는 정부는 정말 무책임해 보였습니다. 강정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울 때부터 이러한 갈등상황이 올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일을 이런 식을 처리하며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충분히 고려하고, 거쳐야 하는 많은 과정이 생략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그곳에서 새청 청년들을 포함한 10명 남짓의 인원이 공사장 앞에서 기도회를 하며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공사장에 들어가는 트럭을 문 앞에서 세워, 기사님들에게 사탕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공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트럭을 문 앞에서 잠시 세워, 이미 진행 중인 공사를 단 1초라도 늦추고자하는 절실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망루를 지어 멀리서나마 강정바다를 바라보던 그곳의 간절함 앞에서, 저는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잘 들리지도 않는 기도회가, 사탕으로 멈춘 단 1초가, 바라만 볼 수 있는 망루가 참으로 작은 것이어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큰 트럭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공사장의 엄청난 효율성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작아 보였습니다. 저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마음에 답답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열심히 잔일을 돕고, 일정에 참여했지만, 제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강정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특송으로 산 밑으로 내려가자를 함께 불렀습니다. 갑자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강정에 있으면서 답답했던 시간 동안 그 어느 때에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참을 새도 없이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뜨거운 눈물이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제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그 상황이 분해서 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느라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노래를 부르는 저에게, 예배에 참석하셨던 아주머니 한분이 앞으로 나와 화장지를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순간 이 감정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도 강정의 사람들도 그 시간들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일의 작은 움직임이 얼마나 걸릴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답답해하던 저와 그들이 달랐던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향해 고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가 빚은 무책임한 현장에서, 저는 희망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약속한 것을 얻지 못했는데도 먼 곳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효율적 사회의 기준으로는 미련한 사람들이겠지요. 약속한 것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은 다양하게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들 자신이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편할 수 있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쉽게 가는 길을 몰라서 어렵게 간 것이 아니겠지요. 그들에게는 바라는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을 효율적으로 경영해야하는 세상에서는 뜻을 품고 가는 치열한 몸부림이 비효율적이고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옳다고 생각하는 뜻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행동하며 사는 삶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무척 고될 것입니다. 그러나 강정 아주머니가 전해준 화장지처럼 우리에게는 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들이 함께 할 것임을 믿습니다. 그 순간들이 가진 힘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삶은 그 자체가 복된 길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약속한 것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먼 곳을 바라보며 기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삶의 순간순간 그것을 잊지 않게 해주는 곳이 바로 이곳, 향린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또 향린입니다.

 

이상으로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은화 목사)

 

두 주전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을 갑자기 만나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던 중 교수님께 이렇게 여쭤봤습니다. “교수님, 요즘 연구하시는 신학 주제가 있으세요?" 그러자 교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을 노예화시키고 기득권과 한 패가 되어 세계에 기여한 게 없는 기독교를 없애야 해저는 다시 이렇게 여쭸습니다. “그러면 교수님은 지금 기독교를 없애는 것을 연구하고 있으신가요?”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기독교를 없앤다 해도 당장 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없앨 수는 없어

 

위의 내용은 씁쓸하기는 합니다만 기독교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화가 아닐까 합니다. 현재 개신교와 가톨릭신자를 합쳐 37%가 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 그리고 자본의 탐욕 앞에서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에 편승해서 사회문제를 등한시 하고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최근 뉴스타파를 통해 삼성 이건희 성매매 동영상이 나오면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박정희의 성탐욕으로 희생된 여배우 김삼화씨의 취재내용이 담긴 동영상이 유투브에 올려져 화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천재무용가이자 영화배우인 김삼화씨는 박정희가 상습적으로 권력형 성폭력을 가하고 김씨의 남편을 협박하여 강제이혼 시키고 성노예로 취급하다가 35세 연상의 미국인에게 강제로 결혼을 시켜 미국으로 추방당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취재 내용을 발설하지 못하고 30년이 지나 김삼화씨 사망 후 공개할 수밖에 없었던 기사내용은 비단 배우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당시 200여명이 넘는 여성들이 박정희가 명령하면 가야만 했던 시대의 어두운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이 같은 정치와 자본의 힘으로 벌이는 성문제에 대해 저항하며 분노해야할 종교가 오히려 같은 급으로 성을 노예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주에 알려지게 된, 라이즈업 무브먼트 이동현 목사가 청소년을 상대로 한 성폭행 사건입니다. 28살의 한 여성이 고백하게 된 이 사건은 17세 고교생이던 2005년 봄부터 2008년 사이 이 목사로부터 첫 피해를 당한 이후 수차례 성관계를 강요당했다는 내용입니다. 라이즈업은 개신교에서 그 규모가 정말 대단한 청소년 교육 선교단체입니다. 이동현 목사의 성폭행 사건이 알려지면서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앞서 권력과 성에 대한 문제를 주로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권력을 이용해서 더 추접스럽고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한 사람의 실수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혼자만의 죄로 끝날 일일까요? 저는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운 사람들, 그러니까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환경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일이 생기도록 만든 이들도 공범이라 생각합니다.

 

[악의 평범성]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약 15년 후,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옯겨져 국제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이 된 이가 있습니다. 바로 나치 친위대 대령 '아돌프 아히히만'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최종 해결책, 유대인 대량학살'을 수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체포된 그는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는 것과 상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충성한 것이니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재판은 정치철학자 한나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 나오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자"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전혀 도착적이거나 가학적이지도 않았고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행동을 세 가지의 무능성으로 구분합니다. 즉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입니다. 이로부터 한나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 생겨나는 과정을 분석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활동이나 비활동이 낳게 될 결과에 대한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다수 의견에 따르려는 경향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들도 언제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히히만의 이야기는 맹목적인 복종이 얼마나 큰 악을 행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는 작업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불의를 보고, 거기에 편승하여 살지 않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를 비롯한 세상의 불의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간과 돈과 몸을 들여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돈벌이가 시원찮아 생계를 고민하는 이도 있고, 누군가는 가족이 아파서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이가 있고, 나이가 듦에 따라 제대로 일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을 내고 힘을 들여 매번 불의의 현장을 찾아 함께 하려 합니다. 왜 우리는 힘든 가운데서도 타인의 어려움을 위해, 불의에 맞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의 끝은 어디인지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살아가기]

 

히브리서는 어려운 시대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이 길을 가야하는지를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대상은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음과 동시에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는 소수 기독교 공동체였습니다. 곧 오실 것이라 믿었던 예수는 오지 않고, 삶을 공유하는 영역에서 쫓겨나야 했고, 신앙동지들이 하나 둘 순교를 당해 죽음을 만나게 되는 그런 살벌하고 두려운 상황 속에 살아야 했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죽을 줄 알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결단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공동체가 겪은 고민과 고통을 히브리 신앙의 선배들도 겪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꿈꾸던 곳으로 가지 못했고 원하던 일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힘든 길을 꿋꿋이 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매 시대 어렵고 연약한 힘이었으나 끝까지 버티며 살아갔다는 것, 현실에 안주하려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고 공동체를 배신하지 않았으며 주님의 뜻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지금의 고난 가운데서 뜻을 갖고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고통을 견뎌내고 달려가다 보면 결국에는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루가공동체도 정말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합된 공동체로 내부의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또한 공동체 외부로부터 심각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후 1세기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공동체였습니다. 지배자들이 하층의 계급민들을 부당하게 취급하고 멸시 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환경에서 루가공동체는 자기 공동체와 사회 일반의 가장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돈과 음식을 나누어 주도록 하면서 약한 힘이지만 뜻을 품고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애썼습니다.

 

예언자 이사야 시대도 고통의 시기였습니다. 이사야는 8세기 후반 남유다의 예루살렘 출신으로 중심부 예언자입니다. 왕정의 도래로 시작된 국가 구조는 옛 지파 동맹의 틀을 와해시켰고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종시켰습니다. 국가라는 정치적 틀은 계층 간 분열을 가져왔고 재산 증식에 열을 올리던 부유층과 소시민 사이의 충돌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사회 불의에 대한 강한 고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언활동 초기에 사람들은 이사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정적 은둔 생활을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그의 제자들은 이사야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다가 시대의 흐름 속에 그 가르침을 수정하면서 전승을 이어갔고 그렇게 하여 이사야서를 완성하게 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신앙의 길이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늘 옳은 길을 가고자 한 이들은 함께 위로하고 노력하며 애써왔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을 통해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봅니다.

 

[, 향린!]

 

시대에 편승해서 저항 없이 지내는 것이 어쩌면 쉽게 사는 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불편하고 어려울지라도 우리가 조금 더 고민하며 나아가는 길은 우리의 공동체가 함께 깨어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는 일제강점기에 28세 나이로 짧게 생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의 생을 다룬 작품인데 이 영화의 한 장면의 대화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윤동주가 그리도 존경하고 만나고 싶어 하던 시인 정지용과의 만남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고갑니다. 정지용은 동주에게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합니다. 그러나 동주는 창시계명을 하면서까지 가야한다는 것이 부끄러워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동주에 말에 정지용은 이렇게 답합니다. “창시계명을 하고 유학을 갔다 온 나 자신이 부끄럽다. 그리고 너 보러 일본으로 유학가라고 하는 내가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대신 부끄러운 것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지.”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평화와 정의와 생명이 이뤄지는 날을 꿈꾸며 갑니다. 적어도 우리가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지 깨달아가는 삶, 비록 힘들지만 떳떳하게 살아가는 힘을 갖는 것이 우리가 지금을 가는 이유이겠습니다. 예배 중 앞서 부른 국악찬송 217장은 변혁의 영이신 주님을 믿고, 주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기를 믿으며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향린공동체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고통 받고 살기 어려운 이 시대에 떳떳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난 받는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위로하고 세상의 악과 맞서 나가는 것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향기로운 이웃, “또 향린!”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길을 가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무릇 혁명을 꿈꾸는 자

꽃나무를 닮아야겠다

가지가 꺾이고 줄기가 베여도

뿌리 남아 있는 한 악착같이 잎 틔우고

꽃 피워 마침내 열매 맺어야겠다

저마다의 외로움을 나이테로 새기면

지평을 푸르게 물들이다가

꽃들을 다 내려놓고 쓰러져야겠다

이웃한 나무들의 거름으로.

(혁명 이재무)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비록 멀리 돌아가는 힘든 길인 것 같더라도

우리가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나라로 가는 것임을 기억하며

오늘도 서로의 연약함을 위로하며 세상과 맞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