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길:무엇이 잘 사는 길인가

(139:1-6,13-18 예레 18:1-11; 빌레 1:1-21; 루가 14:25-33)

 

 

 김창희 장로 / 한세욱 목사

 

<김창희 장로>

 

교우 여러분을 반세기 이상 전 1950년대의 경남 통영으로 안내합니다.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빛바랜 흑백사진이지만 고즈넉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항구니까 당연히 배들이 들락날락 하겠지요? 배경에 보이는 산동네가 요즘 동피랑이라고, 벽화마을로 유명한 곳입니다. 시간 관계상 통영의 향기를 더 전해드릴 수 없는 게 유감입니다. 


사실 이 사진 보여드리는 게 오늘의 목적이 아니고 이 분 얘기를 좀 하려는 겁니다. 이 사진들을 찍은 분인데, 제가 아홉 살 때, 마흔넷의 나이로 돌아가신 저의 선친이십니다. 1923년 평남 용강 출신이고, 해방 직후 서울로 유학 왔지만 폐병 때문에 대학 졸업은 못하고 6.25때 피난 가서 통영여중의 교사를 하셨습니다. 사진의 배경이 교무실 칠판 같지 않습니까? 거기 단기 4291’, 그러니까 서기 1958927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해입니다. 


최근에 이런 사진들과 아버지가 남긴 수첩, 메모 같은 것들을 모아서 제가 책을 한 권 낸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주로 이 책에 소개하지 않았던 몇 가지 시청각 자료를 가지고 오늘 성서 본문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선친은 가진 것 없는 이북 출신의 딸깍발이형 소시민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는 병약했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쪽에 가까웠으며, 성격도 남 앞에 나서기를 즐기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기독교적 정체성이 그것입니다. 그것도 고려파또는 고신측이라고 불리는, 지금은 장로교 중에서 아주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교파입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순교한 분들의 신앙을 계승한다고 자부하는 분들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했습니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어머니는 6.25 직후의 결혼 전에 천막병원 시절의 부산 복음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셨습니다. 사진의 병원 간판에서 자가 보이지요? 그 바로 왼쪽으로 키가 조금 크게 서 계신 분이 약혼 시절의 저의 어머니이고, 사진 중앙에 인자한 표정으로 계신 분이 원장인 장기려 박사이십니다. 혹시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는데 이 병원이 지금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입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은 고려파 장로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교회의 인연으로 복음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또 그런 교회 인연 때문에 지역적으로는 전혀 연이 닿을 것 같지 않은 평안도 출신의 가난한 노총각과 경상도 깡촌 출신의 노처녀가 만나 결혼하게 된 겁니다. 두 분이 결혼하실 때 장기려 박사가 주신 축문이 남아 있습니다. 이건 좀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님의 뜻에서 구원을 받은 두 분이 하나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으로 이 축복을 받은 줄 믿사오니, 늘 정신을 차리고 존절하여,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살어지이다. 인생은 행복을 위함이라기보다는 정의와 성결을 위함인 줄 아오니, 흑암의 세상을 밝히기 위하여 힘쓰소서. 주님의 희생과 순종을 기억하고 모든 정욕을 이기고 희생으로 봉사하소서." 


어떻습니까? 신혼부부에게 주는 축문이라기보다 선언문이나 출사표 같지 않습니까? 여기서 상징적인 표현이 흑암의 세상입니다. 이 분들에게 세상은 흑암일 뿐입니다. 


비슷한 성격의 메모가 또 있습니다. 이건 아버지가 수요예배의 설교 내용을 메모했거나, 아니면 성서 구절을 받아서 혼자 일종의 바이블 스터디 한 내용을 정리한 것 같은데, 제목은, 잘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 것을 사랑치 말라>입니다. 이때 성서 본문은 요한12장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잠깐 고백할 게 있습니다. 이번 평신도설교를 어찌어찌 하여 제가 맡게 된 뒤 성서 본문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루가복음 14제자의 길에 대한 말씀이 바로 이 반세기 전 아버지 메모에 들어 있는 것을 제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평신도설교를 오래 전에 예정하신 것 같은 놀라움이 있었습니다. 붉은 테두리는 제가 친 것인데, 옛날 개역 성서의 표현으로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라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처음엔 아버지의 이 메모를 잘 활용하면 오늘 설교를 손쉽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큰 오산이었습니다. 메모의 그 다음 내용들을 읽으면서 제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겁니다. 파란 줄 친 곳을 읽어보면, “우리 생활 전체를 포기하라 하심” “상인이 한 푼을 손해 보더라도 영혼의 손해가 없어야지, 공무원이 마카오 양복을 못 입어도 영혼의 손해가 없어야지(당시 통영여중은 공립학교여서 아버지는 공무원이었습니다), 학생이 상급학교에 못 가도 영혼의 손해가 없어야지(아버지가 여중 선생이었으니까 여기선 고등학교에 진학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부인이 나이롱 옷을 못 입어도 영혼의 손해가 없어야지(아마 어머니께 당시 최신식이던 나일론 옷도 한 벌 못해 드렸던 것 같습니다)”라는 등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시대상의 격차가 느껴지지요? 그런가 하면 이 메모 하단에는 천국 잔치를 배설하고 초대장이 왔는데, 소를 샀으니, 밭을 샀으니, 장가들었으니(신혼 초의 아버지 본인 이야기입니다), 또 귀여운 아기를 낳았으니(당시는 제가 어머니 뱃속에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거절하려나?”라고 결연하게 스스로 묻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의 축문 가운데 흑암세상운운하는 대목이라든가 아버지의 메모 가운데 마카오 양복, 나이롱 옷 등의 물질과 영혼을 대비시키는 대목 등을 읽으면서,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다 이해하시겠지만, 그런 말들 자체가 틀려서라기보다 저희는 이미 그런 말들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이분법을 거부합니다. 예수가 이 루가복음 본문에서 가르치는 핵심은, 물질과 영혼, 세상과 이데아를 구분하는 2분법을 전제로 이 둘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통치와 구원의 역사가 바로 이 세상에서실현되는 종말을 너희가 믿느냐, 그리고 그런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너의 모든 것을 걸고 나설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이자 결단의 촉구라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 신앙고백도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뤄짐을 믿습니다.” “우리는 해방을 위한 주님의 선교 속에서 이뤄지는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자주 국악찬송 217장에서 음송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이 세상과 관계없이, 이 세상 밖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그런 믿음을 갖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복무할 때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찬송가 한 곡 들어보시겠습니다. 아버지가 가정예배 때 부른 것을 녹음해 뒀던 겁니다. 음정이 다소 불안한 점은 그냥 넘어가시고 평안도 사투리에 담긴 가사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아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입니다. 저도 어릴 때는 이 찬송의 2절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내 어이 여기 살리까그런데 지금 저희가 사용하는 찬송가 491장에는 이 대목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얼마나 다릅니까? ‘괴롬과 죄만 있는 곳괴롬과 죄가 있는 곳은 참 많이 다르지요. 그 두 가지 표현의 차이, 즉 그 두 가지 표현 사이에 놓인 거리가 정확하게 아버지의 신앙과 저의 신앙 간의 거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물질과 영혼,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의 이분법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신학적인 이야기 그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이 제 신앙의 뿌리 혹은 출발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와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그런 사실을 고백하는 게 제 이야기의 초점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을 버려야 할 것, 도외시해야 할 대상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삶의 터전으로 보는 겁니다. 저는 말하자면 장로교의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기장과 향린교회가 가진 신앙고백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습니까? 그러면 개인적으로 행복한 경우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 행복을 나눠주는 일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혹시 저와 비슷하게 먼 길을 돌아온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께는 우선, 수고 많으셨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동시에 아직 그런 수고의 도상에 있으면서 지금 신앙을 버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걸은 길의 경험을 나눠주는 수고를 조금 더 하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도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반세기에 걸쳐 할머니와 부모님의 신앙으로부터 이렇게 떨어져 나와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 가족사의 흐름을 돌이켜보는 과정을 통해 여전히 변하지 않는 신앙의 알맹이로는 무엇을 확인했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노래 한 곡 더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아까 아버지의 찬송과 같은 1962년의 어느날, 이번에는 할머니가 부른 찬송입니다. 아마 정식 인쇄된 어느 찬송가에도 실린 적이 없겠지만 할머니가 구전으로 익힌 창가조의 옛 찬송가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은 놀랍게도 오늘의 주제 제자의 길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메모를 통해 고민을 안겨주시더니 이렇게 할머니의 찬송을 통해 그 해결책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오늘 평신도 설교를 예비하셨던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학교라곤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저의 할머니를 포함해서 근 한 세기 전 기독교인들은, 제가 고심 끝에 확인한 제자의 길의 핵심을 이미,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체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이냐, 하느님이냐는 이분법은 여기선 아주 우스운 질문이 되어 버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게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신앙의 핵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역사에는 바뀌는 것도 있지만 바뀌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되풀이해서 돌아가야 할 지점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할머니의 신앙이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떠날 수 없도록 저를 강력하게 붙드는 신앙의 원점이기도 합니다. 그 옛 찬송가 일부를 들려드리는 것으로 저의 부족한 고백을 마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데베랴 바다에 고기 잡던 베드로 찾아가 하시는 말

시몬아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욱 사랑하고 있나 

네가 나를 사랑하겠거든 나의 양을 쳐서 길러다고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여 줌이 주님을 사랑함 같이 되네 

우흐로 하나님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자

사랑은 주고도 또 주고 다 주고 못 다 준 것 같이 생각되네 ()

      


<한세욱 목사>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조절 첫째 주일입니다. 창조절은 9월부터 시작해서 대림절 전까지 이어지는 절기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한신대 박근원 목사님은 창조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창조절은 하느님의 창조 섭리와 인간 구원의 역사를 신앙적으로 되새기는 절기로써, 하느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음을 고백하고 축하하는 생명의 때임을 강조하는 절기다.” 인간구원의 역사를 되새기는 그 첫 주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봅시다. 


종교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이스라엘 국가가 멸망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봅시다. 그 원인은 아마 주변 강대국보다 국력이 약한데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아주 간단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보도는 우리의 생각과 조금 다른데요. 성서는 하느님의 심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을까요 


예레미아서가 증언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문제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는 음행으로 표현되는 우상 숭배, 이방신 숭배이며, 사회적 문제는 사회적 불의,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도층들의 불의한 악행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종교·제의적 측면에서의 죄와 사회적 약자에게 가하는 악행은 서로 분리되거나 나눠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예레미아는 종교적인 죄의 문제와 사회적인 악행의 문제가 둘로 나눠지지 않는다고 증언한다는 점입니다. 그에 대한 것은 예레미아서 2장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일찍부터 고삐를 끊고 날뛰는 굴레 벗은 말이었다. 나를 섬길 생각이 없어 높은 언덕 무성한 나무 밑 어디에서나 뒹굴며 놀아났다(2:20).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도 아닌데, 가난하다고 해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 그 피가 너희 옷자락에 묻었다(2:34).” 


예레미아는 이스라엘 지도층의 외교정책을 발정난 암나귀에 빗대어 이방신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이방신 숭배로 표현되는 지도층의 죄악을 너의 옷자락에 죄 없는 가난한 자들의 피가 묻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이방신숭배로 표현되는 국가 지도층의 외교정책이 결국 이스라엘 안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는 불의의 문제와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지금의 남한 정부가 하고 있는 외교술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개념 없는 한심한 작태에 힘없는 민중들만 피 흘리는 이 상황이 놀랍도록 닮아 있지는 않나요? 


한국교회 극우주의와 동성애 혐오


지금의 남한교회 모습 중에서 독특한 현상 하나를 살펴봅시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기독정당은 유래 없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종북좌파 척결’, ‘동성애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었습니다.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개신교 신자들은 대부분 성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결사반대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성서가 그렇게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면 왜 지금까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다가 선거철을 기점으로 들고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써 찾아낸 성서구절들이 실제로 동성애 혐오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해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빈도수나 표현의 적나라함으로 따져보면, 혐오의 대상은 동성애자들이 아니라,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성혐오를 선거구호로 내건 기독정당은 없었습니다. 설사 여성혐오적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말이지요. 


20대 총선 결과를 보면 이들의 약진은 크게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동성애혐오가 반공주의에 비해 너무 빈약한 혐오주의 담론이며, 한국 개신교 내에서조차 더 많은 동조자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반동성애 담론을 쉽게 예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경제력과 사회적 자원을 가진 극우성향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고, 극우주의 세력들은 특별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기독정당을 축으로 뭉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극우 기독교인들이 뭉쳐진 지금의 모습을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목사는 혐오동맹이라 정의하고 그 키워드는 반동성애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진호 목사는 반동성애 혐오동맹이 가진 위기의식 중에 특별히 교회 부채에 대해 관심합니다. 다음은 경향신문에 연재된 그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속내는 이미 19대 총선 때에 기독정당에 의해 드러났었습니다. 당시 기독정당 주역들이 내건 주요 공약 중에는 한국교회의 은행 이자를 2%로 인하하겠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 황당한 공약은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그 무렵 교회가 금융권에서 대출받은 금액은 무려 45000억원을 상회했고, 어떤 연구에 따르면 실제 대출금액은 10조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었습니다. 또 대출연체율은 대기업 연체율의 2.7, 가계대출 연체율의 2.2배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파산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당시 매년 파산한 교회들이 6000개 정도나 됐고, 경매로 넘어간 종교시설의 70~80%가 개신교의 시설들이고, 수백억원대의 감정액이 매겨진 대형교회 시설들이 연이어 경매시장에 나왔었습니다. 그만큼 개신교 교회들은 부채로 인한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고, 19대 총선에선 그런 위기감이 걸러지지 않고 공약의 형식으로 표출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사유와 성찰]동성애 혐오동맹과 교회 부채 / 경향신문) 


우리는 개신교가 주도하는 혐오동맹의 중심부에 많은 목사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성장지상주의가 낳은 부작용이 교회 부채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 결여된 교회의 퇴행적 표현이 바로 혐오동맹으로 나타나고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아는 왕, 제사장들이 불의한 악행을 일삼고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종교가 야합하고 권력에 빌붙어 제 주머니를 채우는 교회의 모습이 어쩜 이리도 놀랍도록 똑같을까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악행을 멈추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내릴 재앙을 옹기장이처럼 마련하여 두었다. 너희를 벌할 계획을 이미 꾸며놓았다. 그러니 모두들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오너라. 너희 행실과 소행을 뜯어고쳐라.” (18:1-11) 


사도 바울의 급진적 사랑의 실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서신서의 말씀을 잠시 보겠습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너그럽게 용서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그의 수고에 대해 아낌없는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사회정치적인 입장에서 보수적이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최신 바울 연구는 제국주의에 맞선 기독교 신앙이란 주제로 연구되고 있고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학계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게 하는 대표적인 성서입니다. 하지만 시선을 다르게 해서 읽어보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며 그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여주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도망친 노예를 다시 잘 받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328절의 말씀처럼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매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오네시모를 다시 돌려보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 뜻 펴기를 준비하며 저는 바울을 통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급진적인 사랑도 느꼈지만, 사도바울의 빌레몬을 향한 따뜻한 격려의 말에 가슴 뭉클함을 느끼며 위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지난 부활절 예배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하늘 뜻 펴기 시간에 전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에서 고공 농성 중이던 기아자동차 해고도농자인 최정명, 한규협 동지와 전화로 연결하여 현장의 소리를 들었었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새 힘을 얻었던 그 가슴 벅찬 기억을 다시 소환해 보려합니다. 


“() 부활절 예배에 저희들을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참 잔인한 세상입니다. 법이 판결한대로 정규직화 하라고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하는데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 돈 있고 권력이 있으면 법 위에 군림해도 되고, 사람 위에 군림해도 된다는 권한을 누가 줬습니까? () 300일이 다가오니 이제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리의 핍박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하는 향린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을 보며 저희는 힘을 얻습니다. 매주 올려주시는 따뜻한 집밥 도시락을 먹으며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얻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에게는 여러분들이 '예수'입니다. 약한 자의 고통에 온몸으로 함께하는 신앙인들을 보며 예수를 느낍니다. () 잔인한 세상,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지만 이렇게 응원하고 연대해 주시는 그 마음 새기며 나쁜 마음먹지 않고 건강하게 승리해서 내려가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향린교회 그리스도인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두 분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모진 현장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향기를 전하는 우리 향린가족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차마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던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용기 내어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예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잘 사는 길인가? 


함석헌 선생님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이 말은 눈물 없이는 진리도 볼 수 없다는 새로운 진리를 역설하는 말입니다.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이웃이 되겠다는 결단과 실천이 있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를 바로 볼 수 없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철학자요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우리 교회는 지금 유래 없는 어려움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가 이렇게 희망의 빛을 잃어 어두웠던 적이 있을까요? 온갖 불의가 판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이들의 외침이 절규가 되어 돌아오는 엄혹한 역사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향린은 교회를 둘러싼 도시정비사업계획에 따라 이리 저리 표류고 있고, 향린의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을 함께 할 목회자를 청빙해야하는 큰 암초를 만나 앞을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작은 몸짓임을 기억합시다. 예배를 준비하는 정성어린 마음과, 향린의 힘찬 미래를 품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지켜나가는 일, 향린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 조금의 수고와 어려움도 마다않고 땀 흘리는 사회부와 선교부의 노력, 향린 식구들을 보살피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살뜰히 챙기는 향린교우들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교회는 잘 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힘을 냅시다. 


요즘 우리 사회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훈훈한 소식들이 아니라 마음속을 시리게 하는 흉흉한 소식들이 훨씬 더 많이 들려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시지는 않는지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봅시다. 무엇이 잘사는 길인가를.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일이 잘 사는 길이나니,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냐, 야훼의 말이니라”(22:16)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배고픔을 주소서.

너의 배고픔이 나의 배고픔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만끽해서 오는 비대함에서 풀려나

그날그날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와 연대하여

진정한 '우리'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