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911()                                                     창조절2/한가위감사주일 하늘뜻펴기

여러분의 하느님은?

(예레미야 4:11~12/22~28, 시편 14:4~7, 디모테오전서 1:12~17, 루가복음 15:1~10)

                                                                                                  고상균 목사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날씨가 무척 변덕스럽습니다. 은근히 덥더니만,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고, 황사가 하늘을 가리더니만, 폭우가 쏟아지기도 합니다. 힌두교 신앙에서 창조의 신 시바는 동시에 파괴의 신이기도 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창조절에 만나는 생명의 기운은 이처럼 변덕스럽게 보일만큼 역동적인가봅니다. 이렇게 출렁거리는 시간을 거쳐 이 세상은 한 해의 결실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갑자기 찾아온 환절기에 여러 선배님들과 여러분 모두 몸과 마음의 건강 잘 지키시는 가운데 의미 있는 결실을 일궈 가시길 기원 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19세기 중엽의 미국 남부 지역의 목화농장,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 온 동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마을에는 두 개의 교회당이 있는데,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흑인들은 또 흑인들끼리 정해진 예배당에 들어갑니다. 같은 개신교 신앙인이라 해도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이 예배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의 예배 중 회중기도가 진행됩니다. ‘하느님! 우리들의 농장에 건강한 노예들을 보내주셔서 수확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게 되었네요. 이렇게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같은 시각, 흑인들의 교회에서도 특유의 운율에 맞추어 기도가 드려집니다. 하느님....... 우리들의 아픔을 아시는 하느님....... 우리들의 고향산천에서도 추수를 하겠지요. 우리들 중 몇 몇은 끌려왔던 곳을 그리워하다 끝내 하느님의 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의 아픔을 아시는 하느님.......우리의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 이야기는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위해 만든 내용입니다만, 선교를 명분으로 강제 이주시킨 흑인들을 생산력의 근간으로 삼았던 당시 정황에서 충분히 발생 가능한 상황이겠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 동일 시간, 근접 공간에서 드리는 기도의 내용에서 신앙고백 되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사뭇 다릅니다. 전능한 능력으로 풍요를 보장하고 그 이익을 취하는 신과 끌려온 이들의 아픔을 아시는 하느님.......하느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이처럼 상반된 기도를 받으시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극단적인 정신분열증 환자이거나 이중인격자인 것일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평소 어떤 하느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드리고 계신가요? 오늘 함께 모신 하늘말씀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모습 역시 상이하기 그지없습니다.

 

[징벌과 파괴의 하느님]

 

온 세상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기로 하였다.’하시더니, 마침내 야훼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예레미야 4:27)

 

1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정말 무서운 분입니다. 잘못에 대해 분명한 징계를 내리며 이에 대해 추호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는 저에게 야마라는 고대 중앙아시아의 전통 신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야마는 힌두교에서 시바의 명령으로 남방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신입니다. 이 야마신앙이 동북아시아일대에서는 도교 및 민간신앙과 만나면서 저승에 온 영혼들을 심판하는 판관 열 명의 대표자로 변모합니다. 이 존재에 대해 북방불교는 야마혹은 이마라는 단어에 대한 한자 음역을 통해 염라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네 무속에 등장하는 염라대왕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한반도에 정착한 신앙입니다. ‘염라는 아시아의 오랜 신앙 전통 속에서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공과에 따라 각 영혼들을 정확하게 심판합니다. 오늘의 1성서 본문 속에서 유다의 멸망을 이행하고 있는 야훼와 같이 말입니다. 본문 속 야훼는 유다에 대해 나쁜 일 하는 데는 명석한데 좋은 일은 할 생각조차 없다!”라는 평가 속에 회복 불가능한 징벌을 지휘합니다. 징벌과 파괴의 하느님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와 같이 나의 잘못에 대해 분명한 징계를 가하는 하느님을 믿고 계신가요? 남 유다의 국운이 기울어버린 시점에서 영향력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저마다의 이권과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이런저런 예언을 신의 이름으로 외치곤 했습니다. 대개는 야훼가 안녕과 평안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국가권력의 치부를 폭로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임박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예레미야의 신탁은 대부분의 구성원들, 특히 지배계층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시간이 흐른 뒤, 공동체신앙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예언 중 예레미야와 그의 추종집단의 신탁은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추후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고 있는 예레미야의 무서운 하느님은 그것보다 더 두려웠던 당대 역사적 상황의 반영이라 하겠습니다.

 

[구원과 자비의 하느님]

 

이에 비해 디모데전서를 통해 고백되는 하느님은 아무리 문제가 많은 존재일지라도 인내심으로 가지고 자비를 베풀며, 마침내는 구원에 이르도록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모든 세상의 중생들, 심지어 지옥에 떨어진 존재들에게까지 구원이 이를 때까지 교화를 멈추지 않는다는 불가의 지장보살과도 같습니다. 지장은 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성불을 포기한 분입니다. 악한 길에서 헤매거나 지옥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중생들이 존재하는데, 자신만 성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장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함을 믿는 신앙 앞에서는 제 아무리 심각한 업보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부처가 성불하여 더 이상은 세상의 존재가 아닌 상황에서, 지장보살의 자비는 역사의 한 중간에서 중생이 기댈 수 있는 구원의 희망입니다.

 

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모르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를 자비롭게 대해주셨습니다. (디모데전서 1:13)

 

지장보살과 디모데전서 속 하느님의 느낌이 무척 유사하게 보이지 않으신가요? 디모데 본문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자신의 선교사역을 방해했던 이가 잘못을 돌이킬 때까지 심판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유다의 범죄에 대해 분명한 징벌을 내리던 예레미야서의 하느님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와 같이 한없는 인내와 자비로움으로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까? 디모데전서가 속해있는 목회서신은 바울로계열의 신앙공동체에서 사조의 권위에 의거하여 작성된 문헌입니다. 이들 교회들이 당면한 내적 문제는 한 마디로 갈등이었습니다. 유대계와 비유대계 그리스도,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교회 내 여성지도력과 그녀들을 견제하려는 남성들, 장로와 교사 등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목회서신 공동체는 사분오열될 가능성 앞에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절대 스승인 바울로의 권위를 내세워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은 갈등이었고, 저자의 소망은 참회에 이은 공동체의 통합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들의 자리에서 고백되는 하느님은 돌이키고, 인내하시는 신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단 한 존재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하느님이미지를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와 한 닢 잃어버린 여인으로 비유한 루가복음공동체의 문제 역시 갈등의 극복이었습니다. 그들의 갈등은 세리 등을 죄인이라 폄하했던 당대 유대사회 일반의 인식이 공동체 구성원

상호관계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은 분명히 존재하나 소외된 이를 찾으시는 분으로 고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디모데전서와 루가복음의 자비로운 하느님은 공동체의 갈등극복을 위한 통전적인 틀을 통해 공동체의 다음을 견인하려 했던 당시의 상황이 신 이미지에 투영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하느님은?]

 

포이에르바흐는 기념비적 저서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 신학의 본질은 인간학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깁니다. 이는 유구한 신앙 전통 속에서 형성된 신 이미지의 실상이란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총합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신 존재, 혹은 신의 속성을 파악해간다는 것은 그렇다고 믿고 싶은 인간 본질을 찾아들어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쉽게 말해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떵떵거리고 싶은 자들은 무한대의 힘을 가지고 엄청난 축복(?)을 내려주는 하느님을 믿을 것이고, 작은이들의 삶이 짓밟히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의 하느님은 잘 들리지 않는 음성이나마, 작은이들에게 힘내라, 함께하겠다 말해주는 분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성서는 무척 긴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다듬어진 글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다양한 신 이미지와 신앙고백이 등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유일신 교리를 확고하게 형성시켰던 성서전통 속에서 염라나 지장 같은 신이 있다 말 할 수 없었을 테니, 그 결과만을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서 속 한 분 하느님이 정신분열이나 이중인격으로 보이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참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이라는 존재란 한 마디로 이렇다!’라고 가르치는 교리교과서가 아닙니다. 성서는 이토록 다양한 삶의 자리가 있었다. 그러니 당신들은 어떠한가?’라고 묻고 있는 질문서입니다. 성서를 질문이 아닌 규정된 교리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규정해버린 자신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흑인신학자 알란 뵈삭이 쓴 우리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19세기 미국교회의 흑인용 교리문답에서 그 분명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질문: 누가 당신에게 주인과 여주인을 주셨습니까?

대답: 하느님이 주셨습니다.

질문: 하느님이 당신을 지으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대답: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질문: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대답: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계신 주인을 섬기고, 감독자에게 복종하며 아무것도 훔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 상당한 숫자의 미국-백인-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신의 가르침을 분간하지 못했고, 그 결과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흑인들의 목숨과 삶을 빼앗으면서도 그것이 잘못인지도 몰랐습니다.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필리핀, 남아메리카, 베트남, 이라크 등에서 자신들이 욕망을 하느님의 뜻 혹은 정의의 이름과 혼동하는 가운데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을 끼쳐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대북전쟁억지력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고 있는 이 땅 한반도 사드배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오늘 함께 모신 하늘말씀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하느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여러분은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믿고 싶은 모습으로 하느님을 규정하고 계십니까? 혹은 박제시켜 마음 속 어디엔가 보관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개인주의적이고 일견 보수적인 신앙만의 문제는 아니겠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민주주의가 바로설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 순간 기도하는 본인이 설정해놓은 전능한 하느님께 내가 해야 할 일들까지 전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견, 나의 욕망을 직면하는 것과 유사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의 하느님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까? 침묵 가운데 성서가 던지는 질문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한가위를 맞이합니다.

올 한가위에는 나와 내 가족의 안위와 함께

또 한 번 길에서 차례를 드려야하는 세월호 가족들의 마음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합니다.

거두고자 하는 결실에는 내 이익을 넘어

아파하는 이들의 소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보았으면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힘 센 팔과 다리를 가진 채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쟁이이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소망과 신앙을 통해 작은이의 마음 곁에서

따뜻한 위로를 전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봅시다.

그 작은 하느님은 마침내 우리 모두와 함께

신명나는 한가위 잔치자리로 나아가실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가 우리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