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이기는 예수의 힘

(시편 91:1-6; 예레 32:10-15; 디모테오 6:7-16; 요한 8:1-11)

 

 

한 완 상 교수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 요한복음 81~11-

어느 날, 아침 일찍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은 성전으로 곧 바로 가시어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진실된 메시지에 굶주렸던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바로 이 때, 한 무리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세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살기 넘치는 험상한 얼굴을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서 예수 앞에 위협적으로 나타났지요. 간음 현장에서 한 여인을 잡아끌고 왔습니다. 범죄현장에서 체포한 여인을 모세율법에 따라 공개처형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기 보단, 예수를 곤경에 빠뜨려 공개적으로 제거하고자 하는 음흉한 꾀를 품고 들이닥쳤습니다.

 

만일 예수가 그 여인의 공개처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면, 예수를 신성한 국법인 모세율법을 공개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을 증거로 삼아 예수를 당당히 제거하려 했습니다. 반대로 만일 예수가 여인의 공개처형을 찬성한다면, 평소 사랑을 역설했던 예수를 위선자로 몰아붙이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와 모세를 싸움 붙여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을 무력화시키려고 했지요.

 

바로 이 같은 위기국면에서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대응하셨는지, 그 대응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오늘 20169월의 우리 상황에 곰곰이 깊이 되씹어보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을 위시해서 이 땅의 온갖 갑()질하는 세력들의 모습이 이천 년 전의 돌 쥔 주먹으로 예수에게 도전했던 모습과 몹시 흡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먼저 당시 그 교활했던 종교지도자들의 행태부터 간단히 살펴봅시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은 이천 년 전의 팔레스타인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도 주류였고, 표준세력이었으며, 적자(適者)세력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운동은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들의 주류가치와 주류문화에 예수운동과 메시지가 도전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경제적 기득권에도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를 제거하거나 무력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함부로 폭력으로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비록 예수가 그들의 율법체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발언, 곧 반()체제적 발언을 끊임없이 쏟아냈으나, 율법의 근원적 정신, 그 본질적 가치는 그들보다 항상 더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이유는 예수의 급진적해석과 선포가 당시 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요. 율법주의자들, 바리새인들, 사두게인들, 헤롯당 사람들과 달리 참으로 감동적 권위를 예수께서 갖고 있었음을 그의 말씀과 행동에서 민중들은 뜨겁게 확인했기 때문에, 함부로 예수를 정죄하여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 갑들은 보다 쉽게 갑질하면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건수를 하나 잡았다고 확신한 듯합니다. 범죄현장에서 여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갑질하려는 자들에겐 신나는 호기(好機)이지만, 예수에게는 심각한 위기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셨는지를 오늘의 우리 상황에서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적, 신학적 상상력과 인문사회과학적 통찰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성서는 이와 같은 창조적 상상력과 통찰력을 읽는 자에게 항상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청중들에게 이러한 적극적 해석을 요구하는 듯합니다. 빈 병에 일방적으로 물을 부어주듯 설파하지 않으시며, 백지공간에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받아 적기를 요구하시지 않는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를 교활하고 잔인한 갑질 행동에 대해 어떻게 창조적으로 대응하셨는지를 먼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 갑질꾼들의 저돌적 도전에 예수님 자신은 매우 엉뚱하게, 매우 기묘한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매우 차분하고 우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들의 성급하고 폭력유발적 도전에 응전하셨습니다. 현장범인을 모세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하는지를 기세 좋게 물으며 대드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엉뚱하게 몸을 굽히십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이런 예수의 대응은, 그들에게는 참으로 웃기고 또 엉뚱한 짓거리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 엉뚱함에 주목한다면, 우리들의 상상력의 날개는 가만히 있지 않고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게 되지요. 도대체 예수님은 몸을 낮추시어 땅에 글을 쓰셨다면, 그 글들의 내용은 무엇이며, 나아가 글의 메시지를 따지기 전에 거칠게 말로 몰아붙였던 당시 권력자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땅위에 글쓰기> 대응의 뜻이 무엇인지를 차분히 성찰하게 됩니다. 허리 굽혀 글을 쓰셨던 예수님의 몸동작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적개심으로 가득 찬 집단적 언어공격에 대해 엇비슷한 거친 언어로 바로 대응하는 것은 예수님의 스타일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운동의 스타일도 아니요, 그 본질도 아닌 듯합니다. 가증스러운 독기공세 앞에서 예수님은 언어의 강대강 대결을 뛰어넘으셨습니다. 인간사의 비극의 상당부분이 조직적 거친 언어에 대한 더 거친 언어의 대결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는 말이 험악하면 오는 말은 더 험악해지지요. 언어의 집단적 발악이 때로 죽음을 불러오는 비극적 대결과 결투로 이어짐을 우리는 현실과 역사에서 흔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발악이 주는 평화 깨뜨림의 비극적 결과를 너무나 깊이 이해하신 주님께서는 발악하듯 추궁해오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그 거친 언어공세를 조용히, 우아하게 누그러뜨리기 위해 먼저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조용히, 그리고 여유 있게 글을 쓰셨습니다. 강대강의 대결 상황에서 발악하는 사람들에게 숨을 되돌려 쉴 수 있는 여유를 주신 것이지요. 저는 예수님의 이 멋진 우아함과 그 여유를 확인하며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습니다. 만일 제가 화가라면 이 모습을 그림에 담고 싶습니다. 렘브란트라면, 주먹 쥔 갑들의 험악한 표정과 차분히 땅에 글을 쓰신 예수님의 평온한 표정을 대조적으로 잘 그렸을 터인데 말입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글을 쓰신 예수님의 마음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글을 쓰시는 사건이 저희들의 상상력을 촉구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빈 병이나 빈 종이처럼 가만히 수동적으로 있지 말고, 하느님이 주신 주체적 상상력, 창조적 통찰력을 적극 활용해보라고 저희들에게 요청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상상해봅니다. 표독스럽게 위선적인 이들 갑들의 꽉 쥔 주먹을,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굳게 움켜 쥔 그 주먹을 우아하게 풀게 하려면, 그들 숨겨진 죄악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험악한 얼굴로 돌을 움켜쥔 갑들 하나하나에게, 크게 꾸짖는 목소리로 그들의 숨겨 놓은 죄악하나 하나를 공개적으로 폭로했다면, 과연 그들의 주먹손이 풀려졌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숨겨진 죄악, 그래서 드러나게 되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는 비행(非行)과 악행을 땅 위에 쓰되, 각자만이 대번에 알아볼 수 있는 상징언어로 쓰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의 비행과 악행을 하나하나 소상하게 쓰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그 악행을 대번에 기억케 하는 상징언어를 쓰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지난 자유당 시절, 민주적 공정선거를 외쳤던 학생들에게 무자비하게 총을 쏜 것과 같은 악행을 행한 적이 있는 자가 예수를 닦달했던 무리 속에 있다면, 예수님은 땅에 단순히 4·19라는 숫자를 적었을 것 같습니다. 그 악행자는 대번에 자기 악행을 기억하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혹시 갑질했던자 중, 옛날 자기 이웃집 복순이를 겁탈했던 비행을 저질렀던 자가 있다면, 복순의 두 이름자만 써도, 그는 대번에 자기 잘못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 부끄러운 짓, 그런데 그것이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왔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글 속에서 그는 들켰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양심이라는 하느님의 형상이 살아있다면, 그의 얼굴은 남모르게 발갛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겠지요. 이 부끄러움이 그의 위선적 발악에 일단 제동을 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들과 동조하려 했던 주변의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들의 치졸한 발악 행동을 누그러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본문 7절에 보면 그들은 계속 예수를 거칠게 다그쳤습니다. 바로 이 때, 주님은 그 우아한 침묵을 깨고 놀라운 명령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내리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명령을 듣고 이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미 발악이 그들 속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터에, 이 현행범 여인을 돌로 치되, 죄 없는 사람부터 먼저 모범적으로 치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이들은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칠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는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다시 몸을 낮추시어 땅에 또 무엇을 쓰셨습니다. 과연 두 번째 땅에 쓰신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처음에 땅에 쓴 글은 갑들 각자 개인이 그간 숨겨왔던 비행과 악행이었다면, 두 번째 땅에 쓰신 메시지는 정말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사회학적 상상을 해봅니다. 두 번째는 개개인의 부끄러운 비행이 아니라, 그들의 모두의 집단적 위선과 조직적 악행을 지적했다고 저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집단적 위선과 악행은 그 집단적 공유로 인해 위선이라든지, 악행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른바 관례화된, 제도화된 위선과 악행이 되고 말지요. 일단 이렇게 관례화되거나 집단화되면 그것이 특히 위선으로 인식되지 않게 되지요. 그것은 곧 진부한 정상성이 되고 말지요. 사실 이렇게 정상화된 악행과 위선이 훨씬 무서운 범죄임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나치의 악행이 드러낸 진부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지요. 나치의 죄악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몸을 낮추시어 땅에 글을 쓰셨을 때는 갑들의 진부한 악행,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악행을 일깨워주는 메시지를 적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모세율법인 레위기 2010절이나 신명기 2222절에서 24절의 말씀을 적어 그들의 본질적 죄악을 깨닫게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레위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 곧 자기의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면, 간음한 두 남녀는 함께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레위기에 의하면, 간통죄는 반드시 당사자 두 사람, 곧 남자와 여자 모두가 극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만을 체포하여 예수 앞에 데려온 그들 모두는 남자 범행자는 놓아두고 여성만을 잡아 왔다는 뜻이 되지요. 이것은 명백하게 모세율법을 어긴 범죄행위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모두 남자였고, 당시 유대 문화가 지독하게 가부장적인 문화였기에 그들은 모두 법집행에 있어 원천적으로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를 악용했습니다. 바로 이 같은 가부장적 문화의 부당함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두 번째로 땅에 글을 쓰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성 갑들의 근원적 범법을 폭로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의 집단적 범법행위를 드러내주신 것이지요.

 

가부장 문화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남성 중심적 율법준수 관행을 보다 심각한 범죄로 날카롭게 고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두 번째 메시지를 확인한 이들인 여성혐오세력은 그들의 남권 우월주의적 발악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예수님은 모세의 신성한 율법을 어긴 남성 범법자는 어디에 숨겨 두었는가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의 글쓰기 물음 앞에서 증오로 단단하게 틀어 쥔 이들의 주먹은 풀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슬금슬금 서로 눈치 보며 한 사람씩 예수님 앞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이중적 교활함과 이중적 위선이 이제 저절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느꼈던 그들은 돌을 놓고 슬그머니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같은 과정에서 예수는 단 한 번도 큰 소리로 핏대 세우며 야단치시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히 두 번이나 몸을 낮추어 조용히 땅에 글을 쓰셨을 뿐이었지요. 그러나 그 글이 주는 메시지는 결코 조용하고 무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악했던 자들의 주먹 쥔 손이 발선으로 풀리면서 그 여인은 마침내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운동이 주는 구원의 감동이 이 위기의 현장에서 잔잔하게 번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천 년 전 땅에 글을 쓰신 예수님과 오늘 저의 현실에서 보다 새롭게 역지사지, 역지감지(易地感之)하고 싶습니다. 저처럼 글을 쓰고 살아온 지식인들, 특히 글을 통해 자기의 삶 전체를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남겨주고 싶어 하는 지식인들에게 땅에 글을 쓰신 예수께서 주시는 가르침이 무엇일까를 고백적으로 성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평소부터 갖고 있던 물음 한 가지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왜 예수님은 글 한 줄도 남기지 않으셨을까요? 땅에 글을 쓰신 것 보면, 글을 몰라서 글을 남기시지 않은 것만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글 한 줄도 친히 종이에, 파피루스에 남기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글도 하필이면 땅 위에 쓰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비행과 악행을 깨우치게 하신 후, 곧 그 글을 쉽게 지우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들은 미련하여 남의 잘못을 돌에 새겨 그 인간들을 영원히 그 죄악을 기억하게 하고 돌 감옥에 가둬두고 싶어 하는데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선행만은 짐짓 돌에 새겨 영원히 남기고 싶은 자기미화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말입니다. 이런 인간의 약점을 꿰뚫어 보셨기에 예수님은 아예 처음부터 당신의 꿈, 당신의 갈망, 당신의 비전을 글로 남기실 생각을 안 하신 것이 아닐까를 저는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에 글을 쓰셨으나 땅에 쓴 글은 용서해주고 싶은 간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쉽게 지울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짐짓 땅에 글을 쓰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글을 통해 자기 삶을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려는 인간의 탐욕, 특히 지식인의 탐욕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저의 글을 읽고 감동받았다고 하는 분들이 여러 번 전화로, 또는 직접 찾아오셔서 자기들의 심각한 실존적 고민과 현실적 난제를 풀어 놓고 해결책을 달라고 할 때마다 저는 제가 얼마나 무책임하게 미화하는 글을 썼는가를 깨닫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글쓰기가 글쓴이를 자기미화라는 유혹에 끊임없이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요즘 저는 때때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글을 한 줄도 남기시지 않았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거울 앞에서 새삼 자기의 못난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이제, 돌로 맞아 죽을 뻔했던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당부의 말씀의 깊은 뜻을 되씹어 봐야 하겠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당신을 죽이려했던 정죄자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제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고 여인이 대답하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 죄를 짓지 말아라.” 이 말씀의 뜻을 오늘 우리 상황에서 반추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마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다는 듯 말씀했습니다. 실은 그들이 여인을 현장에서 잡았을 때 이미 정죄했지요. 그런데 그들의 정죄행위를 주님은 당신의 오묘한 방법으로 무효화 시켜버렸습니다. 발선으로 그들의 발악행위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여인을 용서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치 그들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지요. 주님은 애초부터 정죄할 뜻이 없었음에도 말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여인으로 하여금 종교적 위선자들, 갑질 했던 폭력세력을 미워함으로써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랑의 원리와 사랑의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한 것 아닐까요? 악을 이기는 힘은 악의 본성인 증오와 독선이 결코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닐까요?

 

둘째로, 다시 죄를 짓지 말라는 당부는 지금은 부끄럽고 두려워 잠시 현장에서 물러갔던 갑질쟁이들의 호시탐탐 을들의 약점을 계속 악용하여 덤벼들 위험이 있음을 알려주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주먹에는 항상 위험한 살인무기인 돌들이 쥐어져있음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주님은 그 주먹의 폭력을 해체 시키려면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새삼 깨달아야 함을 가르쳐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실천을 통한 평화만들기요, 공의실천입니다. 진정한 평화와 정의는 예수따르미들이 사랑을 통해 악의 힘을 해체시키려 할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여기 사랑은 값싼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값진 원수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힘을 주님은 이 여인이 직접 보는 앞에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갑질쟁이들의 돌 쥔 주먹이 풀어지게 된 것은 오로지 주님의 놀라운 발선의 힘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육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 새 사람이 되어 새 질서를 만드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어느 제자보다 더 깊이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갈파했지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위에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로마서 1220~21)

 

머리 위에 숯불을 쌓게 되면, 얼굴은 자연스럽게 불그스레 달아오르게 마련이지요. 얼굴이 벌겋게 된다는 것은 부끄러워 한다는 뜻입니다. 악행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양심이 원수로부터 받게 된 지극한 사랑으로 녹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이 작동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원수들 간에는 원래 발악(發惡)하기 마련이지요. 그 발악이 증폭되면 공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다른 한쪽이 철천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을 받은 쪽은 몹시 놀라면서 원수를 향한 자기의 증오심과 대결의식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순간, 발악은 발선(發善)으로 전환되게 되지요. 발악이 발선으로 전환되면, 악은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사라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일입니다.

 

저는 사도바울의 이 권면에서 갈릴리 예수의 육성을 듣는 듯합니다. 흔히 바울은 갈릴리 예수(역사의 예수)의 진보적인 복음을 개인영혼 구원으로 환원시켜 버렸다고 속단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로마황제 숭배를 강요했던 로마체제 안에서 엄청난 변혁적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갈릴리 예수의 하느님나라 메시지를 누구보다 용기 있게 전파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복음은 공의와 평화와 공공의 기쁜 소식이었고, 그렇기에 복음은 항상 감동적인 변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것을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실현을 위해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오늘 간음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자칫 돌로 맞아 죽을 뻔했던 한 여인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복음실천 사건에서 저희들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는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를 죽이려고 주먹을 단단히 쥐어 틀고 있는 세력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 간의 발악행위를 보면 마치 지옥현실을 보는 듯합니다. 헬코리아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요, 헬한반도가 엄연한 우리 민족의 비극이기에, 돌과 총, 미사일과 핵무기를 쥐어 틀고 있는 사람들의 주먹을 풀어내는 일은 참으로 절박합니다. 이 주먹을 풀어 평화를 만드는 일은 결단코 증오와 격돌, 보복과 살생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발악은 발악을 낳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발선으로 무기를 쥔 주먹을 풀게 해야 합니다. 이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예수따르미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이 부활예수의 능력에 힘입어 발선에 앞장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