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바보들

(시편 66:8-12; 예레 29:1,4-7; 디모테오 2:8-15; 루가 17:11-19)

 

최 영 미 교우 / 조 은 화 목사

 

[최영미 교우]

  

안녕하십니까. 저는 청년여신도회 최영미라고 합니다. 저는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입니다. 응급실에는 다양한 환자들이 옵니다. 아프거나, 다치거나, 싸우거나, 술에 취해 들어옵니다. 매일 매일 어떤 환자가 들어올지 예측하기 힘듭니다. 응급실에서의 일이 모험처럼 긴장되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해외로 나가 환자를 볼 때도 있습니다. 쓰레트 지붕에 비닐로 둘러막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필리핀 까비떼 빈민촌, 하루종일 대기환자가 줄지 않는 라오스 비엔티엔, 진료를 받기 위해 네다섯 시간 걸어와야 하는 네팔 신두팔촉에서도 상처를 꿰메고 청진기를 대고 약을 줍니다. 해외에서 환자를 보는 일도 모험과도 같습니다. 필리핀의 총기사고도, 라오스 가기 직전 비행기 추락사고도, 네팔에서 진료하다가 느끼는 대지진의 여진도 감수할만한 그런 모험말입니다. 저는 모험을 좋아합니다. 사고와 행동의 영역을 뛰어 넘는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2년 전 있었던, 제대로 된 모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뉴스 한 조각이 제 눈에 꽂혔습니다. 20141021일자 뉴스 제목은 이랬습니다. <한국, 에볼라 바이러스 발병지역에 의료진 파견>. 몇일 뒤에 공고가 떴는데,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지원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쾌재를 부르며 지원서를 쓰는데 남편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지우개를 꺼냈습니다. 남편 얼굴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지원서를 보냈습니다. 치사율이 60퍼센트네, 90퍼센트네 하는 에볼라 바이러스 발병지역 한 가운데로 가겠다고 지원서를 넣었으니, 이제 무조건 가는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경쟁률이 41이었습니다. 저는 1, 2, 3차에 거친 심사를 마치고 그 경쟁률을 뚫고 에볼라 바이러스 진원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으로 떠나는 티켓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에볼라 훈련은 혹독했습니다. 128일부터 34일 동안 대전 간호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루 종일 강의듣고, 토론하고, 전신방호복을 입었다 벗었다 했습니다. 겨울인데도 온 몸은 땀에 젖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몇일 뒤인 1213일 출국을 해서 먼저 영국으로 갔습니다. 저희는 런던 근처 한 도시에서 노르웨이, 미국, 영국 의료진들과 1주일 동안 교육을 받고 나서 1220일 런던을 출발해서 21일 새벽 드디어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에볼라치료센터가 있는 가더리치라는 도시로 갔습니다. 도시는 조용했고, 드문드문 차량과 행인이 보였습니다. 치료소 가까이에 숙소가 있었는데 숙소에서 치료소까지 걸어가는 길은 먼지 폴폴 날리는 모래자갈길입니다. 차라도 한대 지나가면 먼지를 옴팡 뒤집어씁니다. 치료소 입구에 도착하면 먼저 소독액에 손을 씻고 탈의실로 들어갑니다. 옷을 갈아입고 장화를 신고 의료진 텐트로 가는데, 그 구역이 그린 존입니다. ‘레드 존은 에볼라에 감염된 환자를 치료하는 구역인데, 주위에는 철조망이 두텁게 쳐져 있었습니다. 저희는 처음 몇일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습니다. 환자챠트는 어떻게 쓰는지, 처방은 어떻게 기록하는지, 레드존과 그린존 사이 무전기로 어떻게 의사소통하는지 연습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맞이한 2014년 크리스마스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에볼라 환자를 만나는 첫 날이었습니다. 저는 방호복으로 갈아입고 레드존으로 들어가 병실문 손잡이를 열었습니다. 방 하나에 환자가 네명 있고 중앙에 손을 씻는 소독액 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환자 침대 옆에는 모니터가 있고 수액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침대 옆 바닥에 빨간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어 환자가 구토할 때 사용했습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몸을 내어준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고열에 신음하고 구토와 설사를 하고 몸을 뒤흔들며 기침을 하고 축 쳐진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제 첫 환자는 열 두살 난 HAZA라는 소녀였습니다. 고통스럽던 하자를 떠올리며 저는 일기를 썼습니다. //너의 고통이 어느만큼인지 몰라 미안하다/따뜻한 맨 손으로 너를 만질 수 없어서 미안하다/아픈 너를 가족과 떨어뜨려 외롭게 해서 미안하다/이런 황량한 텐트 안에 누워있게 해서 미안하다/너를 만진 몇 겹 고무장갑마저 만질 때마다 소독해야 하는 나의 행동이 미안하다// 의료진들은 24시간 돌아가며 일을 했고 환자는 날마다 늘어 칠판 위에 명단은 빼곡해져 갔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일도, 먹는 음식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일할 때나 쉴 때나 격려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일 지나고 1228일 오후 6시쯤이었습니다. 저와 파키스탄 출신의사 우마르는 한 팀이 되어 레드존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저희가 맡은 환자는 열명이 넘었고, 레드존 한번 들어가면 두 시간이 원칙이라 부지런히 환자상태 파악하고, 환자들마다 피검사를 했습니다. 그 날 제 마지막 환자는 20대 후반에 작고 마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촛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채혈을 하려고 그녀의 팔을 폈고, 바늘을 꽂아 주사기를 당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녀가 팔을 들어 올렸는데, 순간 제 왼쪽 두번째 손가락에 무언가 따끔한 게 느껴졌습니다. 잠시 몇 초간 멍하다가 뭔 일이 생긴 거구나!’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녀 팔에서 떨어져나간 바늘 끝이 제 손가락을 스치고 바닥에 떨어진 것입니다.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남편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 순간적인 일로 난 여기를 떠나야 한단 말인가? 마음 한 켠에서 속삭입니다. ‘이 사실을 숨기면 어떻겠니?’ 전 고개를 흔들고 우마르를 불렀습니다. 밖에 도움을 요청했고, 방호복을 벗으며 장갑을 확인했더니 두 겹이 모두 뚫려 있었습니다. 몇일 후 숙소에 격리되어 있던 저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201512일 오후 2시에 숙소에서 짐을 꾸려 가더리치를 출발했습니다. 차량 네 대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공항을 향해 달렸습니다. 아쉬움을 달래며 가는 동안 서아프리카 석양은 아름다웠고, 문득문득 보이는 집 마당에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룽기 공항에 도착해서 몇 시간 기다리고 나서야 깜깜한 활주로 위에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전용비행기가 도착했고, 저는 그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7시간 반 비행 후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뜨거운 햇빛과 열기가 사라지고 음산한 추위가 찾아 왔습니다. 레드존에 갇힌 환자를 돌보던 제가 감염병동 한 병실에 갇혔습니다. 폴폴 먼지 날리던 길 소독액 담긴 드럼통이 사라지고, 깔끔한 방 최신식 모니터가 보였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벗을 필요도 없고 대신 누군가가 방호복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예측도 못하고 훈련도 못받은 상황입니다. 커튼을 열면 창밖은 온종일 흐리고, 방 안에서 대여섯 걸음이면 갈 데도 없고, 밖으로 열리는 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물 네시간 카메라가 돌아갑니다. 이 곳에서 3주를 보내야 합니다. 저는 가방을 뒤져 뭐가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 권, 책에 딸려 나온 노트 한 권, 형광펜, 샤프, 지우개가 있었습니다. 의료진이 들어오는 하루 세 번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긴 시간, 저는 뭔가를 해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소설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격리 삼일째 되던 날, 그 날도 창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는데, 느린 피아노 연주로 <Over the rainbow>가 흘러나옵니다. 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고 이렇게 하루하루 보낼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하지만 의료진들은 들어올 때마다 친구처럼 저를 격려해 주었고, 멀리 시에라리온에서도 동료들이 카톡으로 응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더리치에볼라치료소에 환자가 급격하게 줄어가고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큰 힘이 되었습니다.

 

3주가 흘렀고, 저는 건강하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저를 돌보던 의료진들은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리고 저와 악수를 하고 허그를 했습니다. 저는 짧은 감사의 편지를 썼고, 병원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은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치사율이 50퍼센트가 넘는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통받는 환자가 가득한 곳, 그리고 레드존으로부터 들것에 실려나가는 죽음이 매일 반복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죽음의 현장에는 삶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희망 또한 있었습니다. 온 몸에 방호복을 뒤집어 쓴 채 환자들을 돌보는 의료진들이 있었고, 장화를 소독하고 망가진 옷을 수선하고 음식을 만드는 지원팀이 있었고, 에볼라 치료소 주변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개를 빼어 들고 안을 들여다보는 가더리치 마을의 순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의료진들이 에볼라 환자를 돌보다 감염되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두려웠던 에볼라바이러스조차 지속적이고 끈질긴 인간의 사랑 앞에 굴복하고야 말았습니다. 201511월 시에라리온은 에볼라 제로를 선언한 것입니다.

 

서아프리카를 떠나 독일로 향하던 제 모습을 그려봅니다. 산산조각난 계획 앞에 초라한 모습이었지요. 갇혀지고, 외로움과 고독 속에 침잠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와 우마르와 동료들의 손을 통해 에볼라 환자를 돌보신 하느님은, 슈타이너와 아임과 아이스너의 손을 통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난 제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저는 그 도움으로 좁은 공간에서도 활기차게 내 내면의 공간을 넓힐 수가 있었습니다. 무한하고 변함없는 사랑, 연약한 사람의 손을 통해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마주했을 때 시편 66편에서처럼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저의 하늘뜻펴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은화 목사]

 

앞서 최영미 교우의 하늘뜻펴기를 통해 고난 받는 이들을 만나기 위한 사랑과, 뜻하지 않게 만난 고난 속에서, 그것을 버티어 내고 한걸음 더 가는 삶이란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

 

지난 925(),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농민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으로 많은 이들이 가슴 아픈, 분노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치적 사건이라 소견서도 써주지 않는 의사의 이상한 판단,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한 경찰의 부검요구 속에서 그 가족은 진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경주의 지진이 났습니다. 여진이 400회 이상, 조선시대 이후 400년 경과한 시점에서, 이제 어떻게 보면 한국은 더 이상 지진에서 자유롭지 않은 위험한 지역이 되고 있습니다. 원전은 7.0 까지만 버틸수 있게 만들어졌기에, 7.4이상의 지진이 일어날 경우 피해는 상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별 대책없이 원전을 더 짓겠다고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1998년 이전 건물에는 지진에 대한 내진설계가 없어 실제 지진이 7.0 이상이 나면 피해범위는 상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민간 입양의 부정적 사태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양부모가 6살 난 딸을 30분 동안 파리채 등으로 때린 후 테이프로 묶고 학대하는 과정에서 죽었고 그 시신을 불에 태우고 훼손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그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지역이든 부모이든 국가든 말이지요. 그런데 종교가 이런 문제들에 대응함 없이 그냥 모든 일을 은혜로 덮어버리거나 모른척 한다면 그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예레미야: 고난의 현실과 마주함]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은 현대사회가 갖는 불안과 고통을 함께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예레미야서의 당시 대립되는 두 명의 예언자가 있습니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냐는 체제를 대표하는 예언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훼는 자비하시다.”인 것과 같이 그의 메시지 역시 하느님이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반면 예레미야의 예언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재앙과 염병이 든다. 한마디로 우리는 망할 것이다 라는 좌절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무엇을 원했을까요? 그들은 빠른 시일 내 복귀한다는 평화주의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하나냐가 느부갓네살을 꺾어 해방시켰다고 보았으나, 오히려 유다백성들에 대한 탄압이 가증되었습니다. 꼭 선거 때마다 우리의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모든 것이 금방 회복될 것처럼 현혹하는 정치공약처럼 당시의 사라들도 독립, 복귀라는 것에 쉽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실제로 하느님의 공의 없는 국가의 안전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포로기를 거친 후대의 저자들이 예레미야를 자신들이 처한 삶을 이렇게 고백한 것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친이집트 정책으로 기생하여 갖은 이득을 챙기며 살다 결국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들은 다시금 기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지만 결국 하느님의 공의 없이 그들의 생각만으론 나라를 세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면한 과제는 그저 70년이란 포로기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가운데 버티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처참하지만 바벨론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바벨론의 평화가 곧 유대인의 평화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했스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갈망하며 현실을 직시하고 회복을 향한 기나긴 기다림을 그들은 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고난의 현장을 찾아감]

 

루가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 유대와 사마리아는 전통성 면에서 서로가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입장에서는 그리심산이 전통성이 있었고, 유대사람은 예루살렘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둘 중 아무에도 속하지 않은 그런 곳에 있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열 명의 나병환자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피부병에 의해 정상인 취급을 못 받는 부정한 사람.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들 근처에 가서는 안되는 존재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는 나병환자들에게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가는 길에 병이 낫는 일이 생깁니다. 루가복음은 그 10사람 중 한사람 사마리아인이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예수께 경배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야기의 말미에 돌아오지 않은 9사람에 대해 탄식하며 9명은 어디로 가고 한명밖에 돌아오지 않았는가를 묻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고 도성에 들어갔고 집에 갔습니다. 즉 체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이라고 회복된 후 자신들을 부정한 존재라고 규정하고 쫓아낸 예전 그 체제 안으로 복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정죄하는 악한 체제를 뒤집으러 오셨습니다. 사람밑에 사람을 놓이게 하고 율법을 통해 사람을 제단하는 이 거지같은 체제를 뒤엎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9명은 그냥 체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편하니까, 안전해보이니까. 그러니 루가복음 본문은 바로 이런 체제 밖으로 나와야 함을 그래서 회복에서 그침이 아니라 체제변혁을 위해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 절실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낡은 구조들, 가부장적 통제,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끊임없는 강박관념들, 도덕주의 등의 상태에 머물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붕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질문들과 문제에 우리는 대응책을 찾아야 합니다.

 

[향린의 현실]

 

요즘 제가 자주 받는 연락내용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 내정되었습니까? 청빙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공고는 언제 하죠? 입니다. 과연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 누가 올 것인가가 참 중요한 일이긴 한 것 같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임기가 내년 5월이면 끝납니다. 청빙위원들이 많은 시간 애쓰고 계시지요. 새로운 목사님을 위한 선별기준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 쉽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주면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청회가 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떤 목사님을 모실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가 진행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지난번 조헌정 목사님을 두고 목사님을 옹호한다 하여 친조, 반대한다 하여 반조라는 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조니 반조니 하는 이야기 모두가 사실 우리가 한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는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향린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알고 담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향린의 시작]

 

오늘의 향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창립정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말 만주와 일본에서 연을 맺어온 청년들이 모여 기존교회의 한계에 대한 비판, 기독인으로서 보다 투철하고 헌신적인 삶을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생활공동체, 입체적 선교, 평신도교회, 독립교회. 물론 이 처음 뜻이 현실성에 부딪혀 포기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목적을 우리가 기억하며 이어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참된 기독교인으로 살아 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향린의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직업 현장 속에서 하느님의 선교를 실천해 나가자는 취지. 즉 개인과 교회, 생활과 선교가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통합된 삶을 의미합니다.

 

목회자를 향한 기대, 물론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한 사람이 전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향린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우리의 현주소를 알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득권의 체제 밖에서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로 살아가기를 노력할 때 변화는 가능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의 모순 앞에서 바보 같아 보이는 정직한 길로의 행보는 가능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의 역사와 전통, 그 본 취지를 담아 함께 만날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모른척할 수 없었고, 억울한 죽음 앞에서 오열하며 모두가 슬픔을 함께 했으며 독재 앞에서는 늘 강인함으로 대항하고자 애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향린의 힘이고 정신이고, 이것이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억누르는 이 체제 밖에서 바보같아 보이지만 거룩한 발걸음을 함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