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6()                                                                                                    창조절7

소란스러움과 친해지기

(예레미야 31:27~34, 시편 119:101~104, 디모테오후서 3:14~4:5, 루가복음 18:1~8)

[날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올해 날씨는 사람을 무척 놀라게 합니다. 여름동안에는 상상 이상의 더위로 놀라움을 주더니만, 이 가을에는 갑자기 찾아오는 추위로 순간순간 놀라게 합니다. 계절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난로를 켜고 예배를 드릴 것이고, 연말과 새해를 맞이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빨리 내년 3월이 왔으면 좋겠습니다!)아무쪼록 아직도 두 장 반이나 남아있는 올해 달력을 그저 시간이 되어서 넘기는데 사용치 마시고, 소중한 의미를 남겨 놓는데 쓰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공동체의 소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을 포함하여 교우여러분 모두 몸과 마음의 건강 살피시길 기원 드립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공동하늘뜻펴기가 진행됩니다. 먼저 청년남신도회 이욱종 교우께서 하늘뜻을 전하겠습니다.

 

[새교우가 드리는 질문]

                                                                                           이욱종 교우

안녕하세요. 저는 새교우 이욱종이라고 합니다. 저는 11년의 미국유학생활을 접고 올해 2월말부터 향린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저는 향린에 오도록 결심하게 된 이유와 새교우의 입장에서 향린교회에 다니면서 들었던 질문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루가복음 본문에는 당대 사회적 약자였던 한 과부의 간청이야기가 나옵니다. 과부는 그 당시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어려웠던 사람인데, 예수께서는 과부를 하느님의 택한 백성으로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불의한 이 재판관은 마치 오늘날의 법 집행자들이나 정치인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 속 예수는 각각 한 번씩 비유를 통해 과부를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남편의 부재 속에서 사회적 약자로 묘사됩니다. 오늘의 본문 속 과부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정치, 사회적 주류세력으로부터 주변인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끊임없이 자신이 당한 부당함을 불의한 재판관에게 토로합니다. 마치 백남기 농민께서 자본가와 정부가 정한 쌀값의 부당함과 노동의 권리를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는 순간까지 평생 동안 불의한 세상에 외쳤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오늘 성서본문의 과부는 불의한 사회의 체제가 강요하는 시스템과 가치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람됨에 집중하여 부당한 일을 당했음을 계속해서 외칩니다. 여인의 지속적인 호소는 현실을 외면하는 재판관을 못 견디게 합니다. 못 견디게 한다는 말에는 부끄럽게 한다는 뜻도 들어있다고 합니다. 본문 속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이 변하여 정의를 행사하는 것 보다 과부의 지속적인 탄원을 강조합니다. 불의한 주류세력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끈질긴 약자의 탄원이야말로 말세에 예수께서 찾는 하느님 백성의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소위 모태신앙이었던 저는 어릴 때부터 출석하던 보수교회의 가치와 판단을 그대로 수용하고 믿었습니다. 칼빈주의를 성서만큼이나 신봉했던 저는 미국의 영적대각성운동과 그 운동의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를 예수다음으로 따랐던 보수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신학교를 다녔고, 이를 더 배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현지에 가보니 미국 청교도들은 개인의 신앙을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들의 개혁주의 신앙과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 언덕위의 교회가 되겠다던 신념이 서로 상충함에서 오는 자기모순에 빠져 초기부터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회개하고 각성했다는 영적대각성운동의 실상역시 개인의 탐욕이나 이기심만을 일시적으로 뉘우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자신들이 스스로 하느님의 심판자가 되어 북미원주민과 아프리카 노예들을 이교도로 단죄하면서 그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영혼까지 말살했던 사회, 정치적 죄악은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선민인척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현실 속에서 타인을 탄압하고 그 고통을 외면했던 아메리칸 딜레마역사를 배우며 저는 마치 오늘 성서본문 속 불의한 재판관의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저는 학문을 통해 이러한 보수주류 교회가 신도들에게 주입한 맹신의 부당함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미국 종교사, 특히 소수 민족인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흑인교회 현상에 주목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적 각성의 모델을 킹목사로 대변되는 1960년대 시민권리운동에서 찾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수주의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청년교역활동을 하던 중,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보수교회에서는 처음엔 공감을 하다가 어느 순간 정치적 계산을 하는 무리들에게 호도되어갔고, 기독인으로서의 당연한 참여를 강조하던 저는 큰 불통 경험했습니다. 과부와 같이 사회적 약자인 세월호 피해자들의 탄원을 주류 정치세력의 진실왜곡에 편승하여 외면하는 이곳에서는 도저히 기독교 시민의 사회참여가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보수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평소 다니고 싶었던 향린교회에 등록하였습니다. 지난 2월부터 현재까지 약 7개월 동안 새교우로서 제가 가지게 된 질문은, 오늘 본문 속 불의한 재판관을 부끄럽게 한 과부의 지속적 탄원과 같은 역동성이 향린교회에게는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귀국이후 향린이 주최하는 거리 기도회와 촛불교회의 현장 활동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해왔습니다. 현장에 있어보니 역시 향린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의 행악에 대해 규탄하며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좀 의아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현장에 오는 분들은 거의 정해져 있는 듯 정체된 느낌말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민중의 자각과 그들의 자성이 모인 역동성이 민중운동의 핵심이라 여기며, 거기에서 나오는 역동성이 우리역사를 움직여온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중과 함께 해온 향린의 정체성이 몇몇 민중 신학자 혹은 목사의 훌륭한 하늘뜻펴기로 유지될까요? 국악을 연주하는 것이 민족 정체성 함양에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정체성 자체가 될 순 없습니다. 향린의 정체성,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바로 교회 정문 기둥에 있는 6월 민중항쟁 기념동판 사진 속에서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서슬 퍼런 군부의 억압에 저항하며 태극기 앞으로 뛰쳐나가는 젊은이의 모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성보수교회는 대부분 전도부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수신앙으로는 전도부야 말로 교회의 핵심 기관입니다. 성령 충만 받고 교인들 모두가 복음을 역동적으로 전하는 것이 이상인데, 성령 충만은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소식이 없으니 대체전략으로 전도부장을 한명 세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다. 대부분 전도부를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기도해주는 것으로 모든 문제의식을 자위합니다. 향린공동체도 비슷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장의 역동성을 상실한 향린교회란, 즉 향린이 자성하는 민중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자신들의 종교체제와 전통, 친분관계가 있는 이들끼리의 사귐이 주는 내부의 안락에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 아닐까요. 새교우가 향린에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를 포함해 향린의 많은 새교우들은 불의한 종교적 구습을 고집하고, 과부의 탄원을 무시하는 기성교회보다 끊임없이 자성하고 개혁한 향린교회가 좀 더예뻐 보여서, 절대적으로 예뻐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더 예쁜 교회여서 찾아왔을 것입니다. 새교우의 순수한 짝사랑이 예수가 제시한 이웃”,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 자체를 품는 이웃의 모습과 정의를 위해 끊임없이 자성하며 현장 속에 뛰어드는 역동적인 향린의 정체성을 느낄 때 비로소 완성되지 않을까요? 물론 저는 우리 공동체가 여전히 생동하는 정체성이 예쁜, 그래서 짝사랑 할 만 한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대적 아름다움의 균형이 심각하게 깨어질 때, 우리 향린은 정체성을 잃은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기성교회의 구태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고, 더 이상 향기로운 이웃이 아닌, ‘악취 나는 이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저는 귀국한지 며칠 후 참석한 올해 2월 말의 제 4차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받았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청광장을 가득 매웠던 수많은 깃발 중에서 기독교 단체는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향린공동체 소속교회들의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이 유독 제 눈에 들어왔고, 참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모순된 인간이 만든 종교 가치를 가르치고 남을 심판했던 제 자신이 참 부끄러워 이제 새로운 신앙의 길, 교회의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향린의 깃발은 마치 썩어서 미쳐가는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양심같이 제 가슴에 물결쳤습니다. 당장 저 교회에 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다음 주부터 바로 향린에 왔습니다. 저는 보수기성교회를 40년 이상 다녔고, 그 가운데 11년 정도 유급으로 목회 사역을 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 속에서 가지게 된 안타까운 점, 기성교회의 회칠한 종교가치가 싫어서 버리고 왔습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에 산적한 문제들로 인해 더 많은 교우들이 이런 마음으로 향린을 찾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이곳에서도 버리고 온 구습이 반복되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개혁하여 민중과 함께 길을 걸었던 청년예수의 길, 반짝반짝 살아 숨 쉬는 역동적 진리의 길, 진실의 길을 걷고자 끝없이 탄원하는 과부향린의 모습을 사랑하며 함께 하고 싶습니다. 청년예수의 깃발이여, 영원히 박동하는 심장처럼 우리 한국교회의 양심이 되어 언제나 요동쳐라! 청년예수의 깃발이여, 현실의 모순에 무뎌진 우리의 가슴에 생명처럼 영원히 물결쳐라!’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고상균

 

이욱종 교우는 올 해 전반기 새교우 강좌와 가입식을 통해 우리교회의 정회원이 되셨습니다.

우리 교회와 함께 한 시간이 짧음에서 오는 현실적 제한사항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새교우가 전하는 질문을 통해 우리 공동체와 각자를 살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늘뜻을 펼쳐주신 이교우님께 감사드립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을 아시지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가끔 혹은 즐겨 사용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군 생활 중 상관으로부터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 요즘 공적인 자리에서 군대 얘기하다가 잘못하면 국정감사에 불려나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군요.) 아무튼 이 관용구는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으면 다치지 않는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며 나름 많이 찾아보았는데 아쉽게도 이 말의 정확한 유래를 수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 좀 나은 세상을 위해 이런 저런 하던 이들의 무참한 죽음을 바라보았던 대중들에게 있어 이 말은 처음엔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야지정도의 느낌이었을 것이고, 점차 효과적인 처세술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침묵이 어느덧 미덕이 되어간 것이지요. 그렇게 이 말은 주술과도 같이 이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서로를 통제하는 언어가 되어갔습니다. 요즘말로 나대지 마라하고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모시고 있는 하늘말씀 세 본분은 공교롭게도 모두 가만히 있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유대 멸망직전의 예레미야는 임박한 멸망과 자신들의 실정을 감추기 위해 태평성대를 선전하는 지배계급, 그리고 이에 넘어간 다수 백성들과는 생각이 다른 예언자였습니다. ‘우리는 잘못했고, 멸망은 피할 수 없다!’ 예언서 속 그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 이야기를 혼자 외치고 다닙니다. 권력은 이러한 그를 억압습니다만, 끝내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자신의 입에 담긴 하느님의 말을 계속해서 떠들어 끝에, 기꺼이 권력이 말하는 불온세력이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오늘의 예레미야 본문은 난데없이 희망을 전합니다. 그것도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의 1차 원정 직후 다수의 유다국민들이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말입니다. 탄압에 못 이겨 생각이 바뀐 것일까요? 사실 예언서 속 그는 시종일관 동일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것은 상황을 직시하는 그 상황 너머의 가능성 바라보기입니다.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는 순간의 굴욕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것이었고, 멸망이 현실화 된 이후에는 현실을 인정하고 다음의 꿈을 꾸자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임박한 비극을 외면하고 싶은 이들이나, 비극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사람들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을 따름입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4:7)‘는 구절로 유명한 디모테오2서는 바울로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그의 유언 형식으로 기록된 주후 100년경의 서신입니다. 바울로의 사후 최소 50년은 더 지난 상황에서 그의 이름을 사용하면서까지 남기려했던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확실한 연대를 추정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한 저술 배경을 파악 할 수는 없겠지만, 본문의 특징을 통해 중요한 추론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디모테오2서가 다른 서신서와 달리 유독 이단자들과의 대결, 박해, 종말 등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디모테오공동체를 압박했던 존재가 정치권력이었든, 경쟁관계의 종교 집단이었든, 혹은 공동체 내부세력이었든 아무튼 그들이 무언가 예수 신앙을 드러내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중간쯤은 갈 수 있었던 상황이었겠습니다. 이 순간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그들은 강요된 침묵을 수용함으로 목숨을 보존하는 길을 택했을까요? 그들의 결정은 오늘의 본문 속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십시오. (디모테오2 4:2)

 

세 번째 본문은 이욱종 교우의 하늘뜻펴기를 통해 계속 탄원하여 끝내 원하는 바를 이루고야 말았던 여인의 비유임을 살펴보았으니 더 부연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예레미야, 디모테오2서 공동체, 그리고 루가공동체는 이렇게 모두 침묵이 강요되던 순간, 기꺼이 소란스러움을 택했던 자신들의 결심을 지금의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소란스러움과 친해지기]

 

존경하고 사랑하는 향린공동체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알고 계시듯, 2년 전 침몰하는 배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통해 살려는 아우성을 잠재웠고, 그 순간 모든 언론사에서는 전원구조라는 거짓말을 통해 진실을 침묵시켰습니다. 지난 912일 경주 인근에서 강진이 발생했지만, 국민안전처는 무기력했고, 총리와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은 발생 삼십분이 넘도록 상황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만, 이와 같은 사실은 크게 보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식 재난방송사인 KBS재해방송 요청을 접수한 이후에도 일일연속극을 중단 없이 방영했고, 이후에는 관련뉴스로 진도 5.8 지진에도 원전은 안전하다라는 내용을 반복했습니다. 경상도 지역 학교에서는 내진설계가 되어 있지 않은 학교건물을 떠나 귀가하도록 지시했던 한 교사가 오히려 학교장에게 문책을 당했고, 학교건물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리려는 학생이 교사에게 휴대전화를 빼앗기는 일이 있었으며, 1.2학년은 귀가하고 고3은 자율학습하라는 통제에 학부모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학교도 있었습니다. 그 학교 관리자들에게 3은 죽는 순간까지도 공부만 해야 하는 기계이거나 수능을 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는 좀비 정도로 인식되었나 봅니다. 예상하시듯 이와 같은 내용 역시 비중 있는 언론에서는 단 한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왜 쓰러졌는지를 알고, 그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사망에 이르렀는지를 알고 있는 백남기 농민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원칙과 의사의 권위를 운운하며 진실을 감추고 있고, 공권력은 부관참시와도 같은 시신훼손을 통해 자신들의 살인행위를 왜곡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불법이라는 굴레를 씌워 침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퀴어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그의 저서 <혐오발언>을 통해 타자를 침묵하게 하는 동시에 각종의 혐오발언을 양산해내는 생산주체는 국가와 같은 권력임을 주창합니다. 아울러 권력이 생산하는 혐오발언은 단순히 언어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받은 타자에게 정신적, 육체적 타격을 안겨 항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권력을 재생산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지금 한국 사회의 권력은 저항하는 이들에 대해 불온세력, 혹은 빨갱이라는 혐오발언을 쏟아놓음으로써 지지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드는 것을 볼 수 습니다. 공격을 받은 이들은 이전과 같이 저항하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만히 있음을 통해 나는 크게 피해 보는 일이 없는 동시에 침묵을 강요하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좀 까칠한 사람이 되어 다소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할 말을 함으로 이 사회의 여기저기를 소란스럽게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함께 모신 하늘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들의 신앙은 시끄럽게 하는 이들에게서 시작되었고, 불온한 사람들에 의해 퍼져나갔던 종교입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향린공동체는 지난 63년 동안 한국교계와 사회에 놀라움과 소란스러움을 던져온 신앙결사입니다. 좀 더 말했으면 합니다! 침묵을 강요하는 일체의 존재들에 대해 위축되지 말고 당당히 말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권력으로부터 침묵을 강요받고 있는 세상을 조금씩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로부터 시작되는 소란스러움과 친해집시다!

침묵 가운데 말해야 할 여러 소리들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학교장으로부터 왜 아이들을 귀가시켰냐는 문책을 당한 후, 자신의 SNS를 통해

난 세월호 때처럼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죽일 수 없었다는 의지를 밝힌

그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공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장을 지키기 위해

모이는 마음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하나 둘, 삶의 자리에서 필요한 말을 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여러분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 말합시다. 하느님의 거룩한 입들이 되십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힘 센 자들이 벌벌 떨 만큼 큰 소리를 지닌 분임을 온 세상에 알립시다.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가 우리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