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시편65:1-5; 요엘 2:23-27; 2디모 4:6-8/16-18; 루가 18:9-14)

 

김홍일 신부(성공회 희년교회 사제/ 살렘영성 훈련원 운영위원)

 

향린교회 강단에 설 수 있도록 초대하여 주신 목사님과 교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하여 가던 시절 향린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겠지만 저에게도 이상적인 교회와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교회 강단에서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영광과 기쁨입니다.

 

한 두 주 전에 제가 후원하고 있는 출판사로부터 작은 책을 한권 받게 되었습니다. 실은 오늘 설교 제목은 바로 그 책의 제목과 같습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그리고 부제는 , 참회, 구원에 관하여입니다. 저자는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라는 미국성공회 여성사제인데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전통에서 중요한 단어였던 라는 단어에 대하여 현대인들이 갖게 된 불편함과 더 나아가서는 거부감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합니다. 저자는 이같은 사조를 반영하여 교회와 신학이 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했지만 그 언어들은 전통적으로 라는 단어가 갖고 있었던 고유하고, 중요한 의미를 담아낼 수 없는 한계로 인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전통의 핵심적인 가치를 상실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해있다고 진단합니다.

 

교회와 신학자들이 발견해 낸 새로운 단어는 바로 질병위법입니다. 첫째로 의학적 모델에서 는 치료받아야 할 병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행동과 반응들의 많은 부분들은 성장과정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왜곡의 표출이고, 이는 진단을 통해 치유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법률적 모델에서 는 법을 어긴 위법이며 이는 상응하는 처벌을 통해 일정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양자 모두 일정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두 단어는 모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담아내고 있지만 못합니다. 그리고 두 단어 모두 다른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어두운 힘또는 하느님과 우리가 분리된 상태를 가르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는 하느님과의 분리를 넘어, 우리의 참자아와 우리를 분리시키고, 또한 이웃과 피조세계와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교회는 차별과 분쟁과 갈등의 깊은 뿌리에 바로 하느님과 분리된 인간의 죄가 자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고백과 참회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에서 찾았습니다. 초기교회는 개인의 죄가,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를 오염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죄의 고백은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 졌고, 이같은 전통은 이후 전례에서 죄의 고백으로 구조화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자기네만 옳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보여주신 비판적 태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사인들에 대하여 곱지 않은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신앙적 구심이었던 예루살렘마저 파괴된 암울한 역사적 상황에서 바리사이들은 토라를 성실히 지키는 경건함으로 유대신앙을 지켜 온 주인공들이었고, 사두가이들처럼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지도 않았고, 엣세네파처럼 민중들 삶의 현장을 떠나지도 않았고, 젤롯당처럼 극단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민중들 가장 가까이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이며 유다교신앙을 지켜낸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세리들은 토라에 위배되는 로마의 세금징수를 대신하였던 죄인들이고, 때로는 부과된 세금에 자신의 이익을 덧붙여 부를 착복하며 민족들을 착취하는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두 사람의 자리는 역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 간 사람은 세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복음서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바리사이의 자만과 세리의 겸손으로 보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길었고, 주어는 였으며, 내용은 자신이 행한 선행을 나열하면서 그렇지 못한 이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세리의 기도는 짧았고 주어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내용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처럼 감사의 근거를 차별화된 우월의식에서 찾으며 남을 경멸하는 태도는 우리들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교파나 교회의 우월함을 확신하며 그렇지 못한 교파와 교인들을 업신여기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은사의 우월함을 확신하며, 다른 은사를 지닌 사람들을 낮추어 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신앙적 성실성을 근거로 그렇지 못한 다른 형제와 자매들을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돌아보게 합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그녀의 책 중력과 은총에서 수난을 앞둔 스승이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고 말씀하실 때. 펄쩍 뛰며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는데, 베드로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 이미 주님을 배반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베드로가 스스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확언하던 그 순간에 이미 주님을 배반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스스로 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경고하였습니다.

 

성공회기도서 세례서약문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후보자들에게 세 가지 사항을 묻습니다. 그 내용은 저항할 것, 믿을 것 그리고 지킬 것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세례를 집례하는 사람이 후보자에게 행할 것과 지킬 것에 관하여 물을 때, 후보자는 네 하느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창세기 타락이야기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 이후 교회는 원죄라는 교리를 공식화하였고, 전적인 타락이라는 교리는 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류와 피조세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형상을 가리워 왔습니다. 매튜 폭스는 이같은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원죄대신 원복을 주장하였습니다. 함석헌선생님은 인간의 정체성을 점이 아닌 선으로 비유하며, 막대기 한 끝에 이기적 자아가 자리하고 있다면 다른 한 끝에는 하느님의 형상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모두 내재하고 있는 천사와 악마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피조되었습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가 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언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 균형이 깨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와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일랜드 속담에 비밀이 깊은 곳에 병도 깊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내면 깊은 곳에 모두 속죄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향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신경증적인 죄의식은 사람들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병이지만, 진정한 죄의식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안내하는 은총입니다. 노르위치의 줄리안은 우리가 죄를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죄의 고백과 자비의 간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의 고백과 자비의 간청은 용서와 화해, 자유와 해방의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입니다. 익명의 알콜중독자 모임 AA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는 알콜중독자 아무개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적 소개와 나는 지금 알콜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중독의 현실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오늘 세리가 하느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바로 그같은 태도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고백하는 사람을, 청하는 사람을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가 매 주일 드리는 예배는 죄의 고백과 자비의 청원으로 시작하여, 화해와 일치의 성사인 성찬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저마다에게 화해와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는 고백과 청원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으로 묵상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