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30() 창조절9/개신교개혁주일

실패를 넘어 앞으로!

(하바꾹 1:1~4, 시편 119:141~144, 데살로니카후서 1:1~4/11~12, 루가복음 19:1~10)

[오늘은 개신교개혁주일입니다.]

 

지난 해 참여했었던 독일교회의 날 행사 중 한 강연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회자가 참여한 이들의 국적을 말해 줄 것을 요청했고, 10여 개국의 이름이 불려 졌습니다. 물론 한국도 있다고 했지요. 강연 말미에 사회자가 한국은 정말 역동적인 나라인 것 같다라는 말을 했고, 발제자를 포함해 다수의 외국인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역동적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포함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지난 일주일 한국사회는 정말 역동적이다 못해 기가 막혔습니다. 이 기가 막힌 나라에서 한 주를 사시느라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무쪼록 어처구니없음에 대해 몸과 마음의 건강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개신교개혁주일을 맞이해 정의평화를위한기독인연대에서 주관하는 생활목회자 강단교류를 위해 방문해 주신 동녘교회의 김경윤 교우님과 제가 공동하늘뜻펴기를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김경윤 교우님의 하늘 뜻을 청해듣겠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 타자의 종교학]

                                                                                  김경윤 교우(동녘교회)

안녕하십니까. 동녘교회 평신도 김경윤입니다. 동녘교회는 30년 전 제정신을 갖고 신앙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감리교신학대학의 교수였던 홍정수 목사님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비록 홍정수 목사님은 감리교단에서 파문되어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계시지만, 현재 그의 길벗들이 교회를 이어받아 이성과 신앙이 함께 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당회에서 교회직분을 없애기로 결의함으로써 현재로는 모두가 평등한 평신도들과 목회자가 함께 교회를 일구고 있습니다.

오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향린교회에서 하늘뜻펴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 청년시절 향린교회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산실이었고, 저 또한 그 시절 역사를 같이 했기에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울러 교회 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렇게 교회 간 강단교류를 하는 것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자신을 늘 갱신하며 성장해왔습니다. 오늘날 외부에서는 개신교를 개독교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개신교 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이른바 교회를 나가지 않는 가나안교인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물론 교인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기독교 정신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을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기독교는 무엇이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기독정신은 어떠해야 하는지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짤막하게나마 같이 나누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교인임과 동시에 인문학을 강의하며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성서가 아닌 <장자>의 한 대목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전국시대 철학자 장자가 쓴 내용의 한 구절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잘 아는 일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이야기입니다. 이 일화는 <장자> 내편 2번째 부분인 제물론(齊物論)’소개되어 있는데요. 제물론은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정신과 마음을 통일하려 애쓰면서도, 모든 것이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조삼(朝三)일까요?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도토리를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다시 말했지요.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명분이나 사실에 있어서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기뻐하고 성내는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역시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인시(因是)]. 그래서 성인은 모든 시비를 조화시켜 균형잡힌 자연[천균(天鈞)]에 몸을 쉬는데, 이것을 일컬어두 길을 걸음’[양행(兩行)]이라 말합니다.

 

주인이 원숭이에게 아침에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자 기뻐했습니다. 3+44+3이나 모두 7이니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3+4는 화내고, 4+3은 기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철학적으로 살짝 설명해 보자면, 주인은 주체, 동일자를 뜻합니다. 원숭이는 대상, 타자를 이야기하지요. 주인은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원숭이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아마도 원숭이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원숭이들은 주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만약에 일상적인 주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선의의 제안을 철회하거나, 원숭이들에게 더 큰 화를 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화 속의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원숭이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숫자상으로 치자면 그게 그거인 제안이었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기뻐했습니다. 도대체 원숭이들은 왜 그랬을까요?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원숭이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다른 것일 겁니다. 어쨌든 결과는 주인도 좋고, 원숭이도 좋게 되었습니다. ‘윈윈(win-win)’이지요.

주인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원숭이를 배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원숭이에게 묻고 따지는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새롭게 갱신하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원숭이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동일자의 사고방식에서 타자의 사고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자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전환시키는 것, 우리는 이것을 타자의 철학, 타자의 윤리학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아까 읽었던 복음서 본문으로 갑니다. 자캐오는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일원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받는 사람이었지요. 같은 민족의 범주 안에 넣어지지 않는, 매국노이자, 민족의 수치처럼 여겨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한 타자 중에 타자였지요. 그러한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금기였고, 일반적인 공동체라면 선택하지 말았어야할 노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집에서 묵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변사람에게 공분을 살 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예수와 그 일행들은 자캐오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겠지요. 하지만 어떠한 대화가 오고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잘못을 지적했을까요? 그에게 회개를 요구했을까요? 공동체 일원으로 들어오도록 제안했을까요? 제 상상으로는 그러한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추궁도 질타도 정죄도 없었습니다. 자캐오의 지난날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않았습니다. 오직 즐거운 잔치만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자캐오는 그저 대접하는 대로 즐겁게 지내는 예수가 의아했을 것입니다. 불안도 했겠지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침이라도 뱉었을 텐데, 예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 이상도 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 자캐오의 초조함만큼이나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도 초조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나저제나 자캐오에게 쓴 소리 한 마디라도 해야지 명분이 서는데 자신의 지도자 예수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니까요.

본문에는 없지만 제 극적 상상력으로는 하룻밤이 지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러분도 본문에서 확인했다시피, 자캐오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8)

 

예수에게 감동하여 자신의 재산을 반을 떼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 사람,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자신이 남을 속인 것의 네 갑절을 보상한 사람은 있나요? 자캐오의 발언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9~10)

 

그렇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정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함의 결과입니다. 나의 자리에 타자를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자리로 내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색깔로 상대방을 물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리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옮겨가는 것입니다.

 

종교의 역사를 보면, 종교가 타락할 때마다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신앙을 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바로 그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낡은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철옹성을 쳐놓고 선민과 죄인을 구분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나갔습니다. 예수는 그 철옹성을 격파한 인물입니다. 물론 그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혹독한 대가였지요. 예루살렘 성전 바깥에서는 죄인의 친구였으나, 성전 안에서는 하느님을 모욕한 참담한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성전 바깥에서는 로마제국을 조롱하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이었지만, 성전 안에서는 로마총독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야만 하는 사형수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바울도 자신이 탄압하던 예수라는 타자에게 넘어간 자였습니다. 개신교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마틴 루터, 존 웨슬리 모두 정통교회 바깥으로 추방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역사는 이처럼 멸시와 추방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결국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 구원이 있냐고 묻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 바깥에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삶을 따르는 불교도에게 익명의 크리스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한 불교도가 반론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익명의 불교도냐고요. 자신의 철옹성은 지키며 상대방을 규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기독 정신은 다시금 과거의 를 버리고, 나 바깥의 타자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기독교개혁을 기념하고 기독 정신을 확인하기 위해 모인 오늘, 우리는 깊이 우리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구원은 있는가?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자의 이원성]

 

                                                                                              고상균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정권이 시작된 이래 단 하루도 국가운영에 문제가 없는 날이 없었고, 대규모 집회가 없는 주말도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과 친분이 남다르다는 한 사람과 관련된 이 엄청난 스캔들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실로 전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일이 드러나기를 수일 째 반복하고 있는 지금, 국민 대다수는 이게 나라인가?’ 하는 생각에 경악과 분노를 넘어 이제는 허탈함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지금 내부자들과 같이 정치비리를 다룬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현실인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1%99%의 구성원들을 타자화하고 있습니다. ‘, 돼지 발언 그들이 가진 생각의 단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하늘 뜻을 전해주신 김경윤 교우님의 말씀에서와 같은, 변혁의 현장과 그 주체로서의 타자가 있다면, 헤게모니를 점유한 이들에 의해 소외된 대상과 공간으로서의 타자개념도 존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외된 타자들의 자리에서는 경제적 파산, 인권 유린 등이 무척 당연한일이 되어갑니다. 무능하고 스펙 약한 자신의 잘못이 되어서 말입니다. 결국 구조에 의해 그 잘못이 온통 자신에게 돌려져버린 이들은 너무나 안타깝게도 삶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OECD국가 부동의 자살률 1대한민국은 이렇게 만들어져갑니다. 1%를 위해 존재하는, 아니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세상에서는 이전에 비해 더 많은 일을 해도 벌이는 크게 줄어듭니다. 그런데도 저항은커녕 자르지 않아 주신 을 그저 감사해야만 합니다. 문제를 제기하기엔 그 어렵던 외환위기 당시의 실업률을 훌쩍 상회하는 현실이 너무 크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노동의 질은 감히 따질 내용이 아닙니다. 크고 강한 팔을 들어 약자를 지켜내신다는 하느님은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야훼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하바꾹 1;1)

 

오늘의 1성서 하늘말씀 하바꾹서에서 지금 우리들의 심정과 같은 탄원을 발견합니다. 이어진 전란으로 국가경제와 향촌사회는 파탄에 이르렀고, 신흥강국 바빌로니아의 위협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백성과 국가안위를 살펴야 할 지배자들은 태평성대를 외치며, 이집트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떠들어대던 시기, 하바꾹서는 그와 같은 유대 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총 위기 상황에서 흔들거리고 있는데, 의미 없이 잦은 해외순방 때마다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를 논한다는 자리에서 금준미주(金樽美酒), 옥반가효(玉盤佳肴)로 배를 채우면서, 미국에게 의지하면 안보는 해결된다고 떠들어대는 권력이 지배하는 한국과 유사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하바꾹서는 시대의 절박함을 신에게 호소하고 야훼는 이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언서 속 하바꾹은 말합니다. ‘주님!, 나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때려잡는데 왜 잠자코 계십니까?(1:13)’ 신은 대답합니다. ‘그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2:2~3)’ 지금, 우리들의 탄원은 무엇입니까? ‘주님! 나쁜 권력이 304명과 백남기 농민을 죽였는데 왜 잠자코 계십니까?’ 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하느님은 무엇이라 대답하고 계신가요? 그리고 하바꾹서에서 불의한 권력의 말로가 오고야 만다던 신의 대답은 실현되었을까요?

 

[실패를 넘어 앞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향린공동체 여러분!

저는 권력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권력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비서진교체 정도로 이 엄청난 상황을 무마하려는 청와대와 남한정부가 억류하고 있는 북한주민 김련희씨를 간첩으로 몰아 난데없는 공안몰이를 하려드는 경찰의 작태로 볼 때, 이 땅의 권력은 존재해야 할 의미도, 명분도 없는 것 같습니다. 권력이 광기어린 마부가 모는 마차가 되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면, 다친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을 넘어 그 마부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신앙인의 마땅한 역할일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함을 통해 마부도 살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친 마부가 모는 마차 앞을 막아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아쉽지만 포기해야 할까요?

 

좀 생뚱맞습니다만,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약산 김원봉을 아십니까?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광복군 부사령관을 역임했던 인물입니다. 약산이 등장하는 영화가 최근 상영 중인데요, 혹시 아시겠습니까? 영화 밀정입니다. 영화상에서 약산은 자신의 가명 중 하나인 정채산으로 등장합니다. 내용 중 조선에 잠입한 의열단원 대부분이 죽거나 투옥됩니다. 어려움 속에서 변절자들까지 발생합니다. 운동의 다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폭탄을 건네며 한 조직원이 묻습니다. ‘단장님께서는 무슨 말씀이 없으셨나?’, 자살공격을 떠나는 조직원이 답합니다. ‘단장님은 우리들의 계획을 다 들으시고는 내내 통곡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여, 그 실패를 딛고서 앞으로 전진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이는 불의한 권력의 출현을 막는데 실패했던 우리들에게 다음의 할 일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하바꾹서를 우리에게 남겨준 신앙의 대선배들이 살아내야 했던 역사도 앞서 설명 드렸듯 녹록치 않았습니다만, 결국 인내하던 이들은 유다멸망 후 불의했던 지배자들이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감을 통해 신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불의한 권력이 마침내 무릎을 꿇는 날까지 함께 기도하고 각양의 방법으로 행진했으면 합니다. 그 여정에서 지치는 이들을 위로하고, 작은 승리를 통해 서로에게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부족한 하늘뜻펴기의 마지막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순간, 다음의 희망을 가슴에 새기며 불렀을 하바꾹 공동체의 시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야훼 나의 주께서 힘이 되어 주시고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십니다. (하바꾹 3:17~19)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시대가 어둡습니다.

 

그러나 백남기 농민의 장례를 무사히 모실 수 있게 된 것에서

어두움 너머의 광명을 봅니다.

 

무한할 것만 같았던 권력이 스스로 붕괴되어가는 모습에서

더욱 힘을 내어 기도해야 할 책임을 느낍니다.

이 겨울나라에서 서로에게 힘이 될 벗들과 이렇게 손을 마주잡을 수 있음에,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음에 희망의 온기를 얻습니다.

 

우리 실패를 넘어 앞으로 걸어갑시다. 하느님의 당당한 다리와 발들이 되십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 힘 센 자들의 앞을 막아설 수 있는 분임을 온 세상에 알립시다.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가 우리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