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

(시편 145:17-21; 하깨 1:15-2:9; 데살 2:1-5/13-17; 루가 20:27-38)

 

 

노재열 장로 / 조은화 목사

 

[노재열 장로]

 

안녕하십니까? 장년 여신도회 막내 노재열 입니다. 제가 올 1월에 장년 여신도회로 올라갈 것인가, 말 것인가? 많이 망설이다 희년여신도회에 있기도 민망한 나이라 자진해서 저 혼자 올라갔습니다. 그것이 실수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참여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장년 여신도회에서는 노 장로가 참여하도록 약간은 강요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장년여신도회 수련회 강사 노 장로”, 청빙 위원회 위원, “노 장로”, 평신도 설교 노 장로”, 그리고 터전위원회에 누구를 보낼까 하시기에 제가 보내지 말자고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시겠죠? 그러나 이렇게까지 부족한 저를 사랑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니 감사와 사랑의 마음과 순응하는 맘으로 지금 여기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클수록 저의 부담은 늘어만 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장로 임기를 마칠 때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한번 해야 한다고 조헌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나 미루다 못 하겠다고 하니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저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겨서 저 이후 임기를 마치신 장로님들께서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책임을 다 하지 못한 저의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이렇게 신도회를 통해 어떻게든 하게 하시니 주님 또한 저를 무척 사랑하시는 가 봅니다.

여기서 하는 평신도 하늘뜻펴기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교인들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을 말씀드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삶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참 무미건조한 삶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주 전 최영미 교우님과 같이 모험심을 가진 것도, 이욱종 교우님과 같이 새 신자도 아니니 더욱 난감했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강정구 선생의 사건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분명 이 민족의 굴곡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 보안법이라는 무시무시한 재판을 42번이나 감내해야 했던 저희 가정의 아픈 가족사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여기에서 말씀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공력력에 의해 야기된 분명한 죽음 앞에서 장례조차 유족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기막힌 현실과, 자식을 떠나보내고 이유도 모른 채 지금까지 울부짖어도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현실과, 최소한의 인간답게 살아 보겠다는 이 민중의 가슴 절절한 고통과 아픔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저의 가정의 작고 작은 아픔을 여러분 앞에 저의 삶의 일부분으로 평신도 설교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읽은 성서 말씀과 저의 평소 생각을 연관시켜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김명선 장로님께서 들려주신 시편 145:21절에 야훼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 지켜주시고, 악인들은 모두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진정 야훼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악인으로부터 지켜주신 것이 지금의 현실이냐? 고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 (디전 6:10) 고 하셨는데 지금 이 사회는 돈의 노예가 되어 그 돈으로 상대방을 짓밟아 노예로 삼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지금 직무유기하고 계신다고 한 것과 같이 저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정부가, 아니 대통령이 국민을 우롱하는 일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직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권력을 움켜지려고 꼼수를 부리는 대통령을 보면서 국민의 한사람으로 분노를 넘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하깨 1:8-9에 보면 유다 총독과 대사제에게 무너진 나의 성전을 지어라. 성전 무너진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집만 짓느라고 바삐 돌아다닌 탓으로 인하여 너희 하는 일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셨습니다. 주전 520년경에 쓰여 진 하깨서의 말씀은 지금 우리 현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짓기보다 우리의 집짓기에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읽은 루가복음 20:38하느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며,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 계신 곳]

 

그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란, 다시 말씀드려서 살아계신 하느님은 어디에 살아계시는 걸까요? 예언자 하깨를 통하여 주신 말씀인 무너진 성전을 지어라고 하신 말씀은 외형적인 성전뿐만 아니라, 너희 마음에 흐무러져 버린 하느님의 참 삶인 내적인 성전도 다시 재정비하기를 바라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서방 사회 여행지를 가보면 그 유물의 많은 부분이 외형을 자랑하는 성전을 봅니다. 그런 외형적 성전 속에 진정한 하느님을 모신 내적 성전인 하느님의 삶이 얼마나 존재했을까요? 존재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부패한 많은 교회의 역사를 보아 왔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남한 사회 또한 외형적으로 거창하고 아름답다 못해 옛 성을 방불케 하지만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지는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알 것입니다.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는 돈의 위력을 아낌없이 표출하는 외적 하느님의 성전과 우리 자신의 외형적 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과연 그 속에 진정한 하느님을 모신 참 성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아름다운 외적 성전 그 자체가 참 하느님을 모신 내적 성전이라면 오늘날 개독교라는 말로 지탄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 향린은 어떠합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 문제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향린은 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향린이야말로 볼품없는 외적 성전을 가졌지만, 낮은 곳으로, 아픔의 현상으로 달려가 그들의 아픔에 함께하는 하느님의 참 뜻, 참 삶을 실현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내적 성전을 건축해 가는 공동체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의 내적 성전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내적 성전에 살아 계신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내적 성전 안에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일까요?]

그러면, 하느님은 내적 성전 안에 어떻게 살아 계실까요? 내적 성전 안에 계신 하느님은 기도 속에 살아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말합니다. 성경 많은 곳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도 아픈 민중을 위해 기도하셨으며, 다니엘 (6:10) 선지자는 포로생활 중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조국을 바라보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의 기도는 조국의 아픔에 대한 고뇌에 찬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무능하다 못해 무뇌아 같고, 지도자이기를 포기한 파렴치한자 같으며, 국민이 있으나 전혀 괘념치 않는 행동을 스스럼 없이하는 저들을 위해, 마음 속 내적 성전을 모신 많은 분들은 다니엘 선지자와 같이 고뇌에 찬 기도를 할 것이며, 예수님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드린 것과 같이 지금도 기도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대화의 확답은 커녕 조그만 예시도 받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의 현실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주님을 부정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것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적 성전인 기도 속에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부터 우리는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먼저 기도란 자기 수양을 통해 욕망을 버릴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친한 친구 중에 두 번의 암에서 치유된 친구가 있습니다. 치료 기간 중 살려 주시면 온전히 주님의 삶을 살겠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주변의 권유로 골퍼를 치려고 모든 준비를 하였고 몇 번 골프장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 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의 사선에서 생명을 주셨는데 세상 즐거움에 눈을 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속에 참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욕망을 비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버려야 할 욕망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에 대한 소유의 욕망, 자식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욕망, 권력의 욕망 등등을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내려놓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기도란 참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참이 거짓이고 거짓이 진리인양 혼돈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가진 자의 생각이, 말이, 행동이 곧 법이요, 진리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31-32,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안에 주님의 성전을 모신 자이면 진리를 깨닫게 되어 참 자유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또한 행동할 수 있는 양심이 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백남기 농민의 장례를 치룰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교회의 많은 교우들과 원근 각처에서 모인 모든 분들이 백남기 농민의 부검 반대를 위해 자신의 모두를 내어 놓고 그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공권력과 맞선 그 분들의 행동하는 투쟁 그 자체가 기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능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서 국민이 주인 되는 힘의 함성 속에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 함성 자체가 기도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란 꼭 눈을 감고, 새벽에, 혹은 골방에서 드리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적 성전을 모신 자라면, 길을 가다가도, 바쁜 일과 중 잠깐의 여유 속에서도, 사회활동의 현장 속에서도 생각과 행동의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습관을 터득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란 또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입니다. 요한복음 14: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평화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삶 그 자체가 평화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평화가 있을 때 상대방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배품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의 내적 성전을 모시고 사는 자라면 기도 속에서 평화를 얻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로 얻은 각 개인의 평화가 모여 교회의 평화가 되고, 교회의 평화는 한반도의 평화로, 세계의 평화로 이어져서 전쟁이 없는 온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기도란 모든 것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맘에 허물어진 성전을 재정비하여 기도 속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 우리의 생각을, 사고를, 행동을 하느님의 삶으로 바꾸어 갈 수 있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은화 목사]

 

지난 두 주간 고생 많으셨지요. 왠만한 예능이나 드라마보다 더 재밌고 무섭고 흥미진진한 박근혜 게이트 뉴스로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당황스런 시간을 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막장 드라마의 끝장판으로, 신문, 방송, SNS 등 눈 돌리는 데마다 황당한 뉴스를 접하면서 정말 여기가 현실세계가 맞는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박근혜씨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 평등, 양심 그 밖에 모든 것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가 듭니다.

 

이런 정국을 보며 생명이 없는 이가 지도자가 되면 나라를 죽은 사회로 만들 수 있음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생물학적으로 살았다 하겠지만 정신과 영혼이 죽은 사람, 그런 이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군림하는 이 나라이기에 수많은 민중이 죽어가는 사회를 보며 좌절하고 분노하며 울분을 토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오늘 루가복음 본문은 죽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부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 이들은 새 존재로 다시 살아나 세상의 온갖 오류가 바로 잡히게 할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를 이미 알았던 것이고, 특히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한 정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봅니다. 사두개인들은 권력유지에 노심초사하는 귀족이었기에 더더욱 이러한 부활을 믿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부활신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증명하고자 합니다. 부활 때 누구와 결혼한 상태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죽은 자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루가가 본 부활은 살아있는 삶입니다. 이 삶은 기존의 패턴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로 부활한 이에게는 그간 많은 공을 들이며 자신들이 생존하고자 한 혈통을 잇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부장적 구조에서 여성의 존재가 누구의 아내로서 혈통을 잇기 위한 수단이나 소유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소유 이상의 차원, 존재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죽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나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미 부활한 이들의 삶이 기존의 삶과 얼마나 다른 차원의 삶으로 연결되는가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데, 그것이 루가복음서가 말하는 부활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파라오의 학대 아래서 온갖 고통을 다 겪고 있던 히브리 종족의 해방과 자유를 이야기하며 어제의 노예의 삶이 오늘의 해방의 삶으로 전환되는 삶이야말로 새로 살아있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행태는 잔인했습니다.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는 소유물로서 존재하는 여성은, 그 스스로가 열림과 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긴 싸움의 시간을 보냈기에 평등한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노예, 인종, 성소수자 등 그렇게 차별받아왔던 이들이 연대하고 저항하면서 평등의 자리를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있는 존재임을 되찾아 갔습니다.

 

생명은 진행형입니다. 몸이 살아있다는 것은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작용, 즉 받아들임과 내보냄이 있는 개방성과 소통의 과정이 있기에 생명유지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의 통합적인 관리가 될 때 우리의 몸은 살아있는 생명이라 하겠지요.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받아들임과 내보냄이 멈출 때 생명은 끊어집니다.

 

생명의 진행을 위해서 몸은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오면 억지로라도 밖으로 내보내려 합니다. 상한 음식이 들어오거나, 먼지 등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 쌓였을땐 재채기, 구토와 설사를 하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오중과 똥을 싸 내보냅니다. 정신도 이와 비슷합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되서 얼른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한 감정이나, 오랫동안 쌓이고 억눌린 감정.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고, 흡수되지 못한 것이 오래 쌓여서 굳어져버린 것들. 이것들이 그냥 쌓이면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데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으나 정신이 죽은, 그래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지 못하는 폐쇠적인 정신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몸에서 구토와 설사를 하며 몸의 이상증세가 보이는 까닭은 살아있기 때문이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입니다. 정세가 불안하지요. 터질때로 터졌습니다. 그간 개성공단 중단, 사드 배치 확정, 위안부 협상 등,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매일 부딪히는 일상 속에서도 얼마나 우리는 불안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늘 행복하고 기쁜 삶이 참 좋은 삶이라 하겠지만 실제 살아있는 삶이란 때로는 고통과 힘겨움이 따라 오기도 합니다. 이 불안은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를 더 위험한 곳으로부터 보호하게 하고, 조심하도록 경고하며, 자신을 보살피도록 하게 안내합니다. 우리는 변화가 올 때마다 불안을 느낀다고 하지요.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것을 다루고 안심시키는 가운데 불안을 나의 삶과 연결해서 해석해 가다 보면, 나의 부족한 것을 보게 되고 또 채우게도 됩니다. 결국 서서히 마음이 열리며 자신을 새로운 변화의 삶으로 이끌게 되는 결과를 낫습니다.

 

박근혜 씨가 왜 최태민 최순실에 질질 끌려다니며 신봉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어릴적부터 일어난 충격적인 일들로부터 온 불안을 자신이 외면한 결과가 아닐까합니다. 극도의 고통과 불안을 느껴 정리하기 보다는 대상에게 자신을 맡겨 의지하는 게 훨씬 편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 대가는 참담합니다. 이미 스스로의 판단력은 흐려져 써준 글밖에 모르는 정신의 죽은자이지요.

 

결정을 스스로 내리지 못하고, 이 나라를 최순실과 그 일가에게 맡겨 송두리째 모든 것을 망쳐놓았습니다. 중대한 외교정책도, 통일도, 경제도, 그 모든 것에서... 자신의 불안을 타인에게 전가한 결과입니다. 자신의 정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루가복음의 부활이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아 계신 하느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루가복음서 저자는 하느님은 살아 있는 사람의 하느님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제 백남기 농민 장례를 치뤘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마음 모으셨지요. 박근혜 게이트로 분노한 수많은 이들이 나와 범국민행동에 계속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광화문에만 이만명 어제는 20만명의 사람들이 나와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들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힘을 모아 함께 간다는 것은 정말 희망적인 일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옳은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개방과 통합의 마음으로 연대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정의로운 새 세계가 이루어지는 희망을 봅니다.

 

우리가 다시 사는 일은 사람답게 사는 일이며, 사람답게 살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이 하느님은 살아 계시게 된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가운데 현재의 암담한 현실을 뚫고 새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루가 2038절을 보는 것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