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그리스도, 역사의 예수

(시편 46; 예레이먀 23:1-6; 골로사이서 1:11-20; 루가복음 23:33-43)

 

 

소 희 숙(스텔라) 수녀

 

 

교회 전례력으로 보면 오늘이 2016년 마지막 주간이다. 다음 주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한 해 마무리, 마음이 급하다.

 

1. 오늘이 예수가 왕임을 축하하는 날인가? 아니다. 역사의 예수는 왕이 아니었다. 역사의 예수와 신앙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 그리스도가 왕임을 축하하는 날이다. 오늘은 역사의 예수가 부활하시어 그분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 그리스도, 왕이심을 축하하는 날이다.

 

그리스도는 왕이다. 우리는 그분을 왕으로 섬기며 살고 있는가? 예나 제나 왕은 절대 권력자이고 그 나라의 백성은 왕의 통치를 무조건 받아야 했다. 죽이면 죽어야했다. 예수를 왕으로 믿고 받드는 우리는 그분의 통치를 아무 조건 없이 따르며 살고 있는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해주면서 살고 있는가? 왕이 명령을 내렸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마르코 123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1334-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다른 편 뺨을 대주고 있는가?” -마태오 539-

 

네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남에게 해주고 있는가? -마태오 712-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분이 주신 계명조차 지키지 않으면 그분을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역사의 예수는 왕이셨는가? 사실, 역사의 예수는 왕이 아니었다. 왕도 아니었고, 랍비도, 사두가이파도, 율법교사도 아니었다. 당신 스스로는 인자라고 하셨고, 가르침과 행동을 보면 스승이자 예언자이셨다. 군중들은 예수를 예언자로 보았고(요한 740; 917) 당신 자신도 예언자임을 직, 간접으로 말씀하셨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마태오 1357),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을 수는 없다.”(루가 1333), 제자들도 고백했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다.”(루가 2419)

 

그런데 예수 자신과는 무관하게, 백성들이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한 사실이 있다. 이 사건은 당시로 보면 혁명이다. 유대 5대 가문에서만 대사제직을 독점하던 당시, 무지랭이같던 백성들이 어떤 한 사람을 왕으로 모시려 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혁명이다. 기득권자들이 그분을 없애버려야 할 인물로 찍고 죽인 것도 한편 이해가 간다. 예수는 기득권자들에겐 위험인물이었다. 그분은 왕이 아닌데도 자기들이 왕이라고 멋대로 규정하고,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만이 왕이라고 하며, 예수가 왕이기 때문에 죽여야 할 죄인이라고 소리쳤다.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나는, 기득권자들이 이미 예수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복음에서 사회 지도자들이,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입으로 고백한다. “다른 이들을 구원하셨던 예수, 하느님의 메시아이며, 선택된 분이신 예수!”를 조롱하면서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명패의 죄목조차도 왕이다. 기득권자들은, 굳이 믿으려 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면서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는, 그들이 감추려하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그들의 행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라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요한 77). 더 나아가 나는, 그분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죽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의여, 오라!’고 외쳐도 정작 정의가 눈앞에 나타나면 정의라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불의한 자신을 죽이는 대신 거울을 깨트려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김구 선생을 죽인 것 같이! 기득권자들은 이미 쟁취하여 소유한 것들을 다 내놓아야하거나, 자기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용납 못하는 것이다.

 

2. 왕은 무슨 왕!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 하느님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득권세력들과 싸우며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다가 패배한 결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극형을 받고 죽었다, 그의 가르침과 그의 행동, 그의 삶 전체는 패배였다. 예수는 이러저러하게 사시다가 부활하셨다. 맞는가? 성서는 죽었던 예수를, “그분이 일으켜 세우셨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3. 부활은 하느님의 사건이다. 부활은, 인간 눈에는 철저히 패배하였던 예수의 삶을, 그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째로 하늘로 들어 높여 준 하느님의 사건이다. 부활사건은 하느님께서 예수의 삶이 옳았다는 인증이며 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선포하신 사건이다. 예수는 부활하여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시어 성자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왕을 넘어 주님이 되셨다(에페소 120-21). 예수의 부활사건으로 이제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은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것을 확신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4.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정한 예수가 도대체 어떻게 사셨기에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셨는지 한번 쯤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온 생애를 바쳐 가르치며, 가르침 그대로 행동했던 그분의 사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평화의 하느님나라를 이 땅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생명과 사랑, 정의와 평등, 평화와 자유와 행복이 가득한 나라이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나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분은 일생에 걸쳐 하느님나라와 그 내용에 대하여 수많은 비유로 가르치셨다.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하느님나라다!

 

5. 예수 당시의 사회현실은 어떠했는가?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가지셨던 꿈, 계획이 심하게 뒤틀리고 왜곡되어 있던 당시 사회. 예수께서 무섭게 질타하셨던 나라의 지도자들인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 그들은 눈 먼 길잡이들이 되어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있었고, 위선자들로서 작은 것들은 십분의 일은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저버리고, 착취와 무절제로 가득 차 있었으며, 회칠한 무덤 같이 겉으로는 의롭게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범법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마태오 2313-33). 그들은, 사람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고,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고, 전통을 세우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물리치고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마르코 77~13).

 

6. 마르코복음 221-22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아무도 생베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는 법이다.” 그 당시의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예수께서는 왜 공생활 초창기부터 말씀하셨을까? 대단히 궁금했고 마침내 나 나름대로 이렇게 깨달았다. 이건 선전포고다. 새 포도주는 하느님나라의 가치들, 사랑, 정의, 평등평화... 하느님의 뜻! 헌 가죽부대는 당시 기존사회.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틀, 제도, 전통, 썩은 사회. 새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켜야할 새로운 사회,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건설되어야 할 그 하느님나라를 세워야 하는 터전, 사회.

 

예수는 공생활 시작부터 기존사회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뜻을 선언하셨던 것이다. 새 가죽부대를 만들고자 했던 예수의 의지는 사회개혁를 넘어 사회혁명이다. 그렇다. 예수께는, “하느님나라라는 목표는 확실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길도 확실했다. 예수의 가르치신 핵심은 부활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이다. 그 길이 멀고 험하고, 죽음이 온다 하여도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가야만 했던 길이다(루가 1333).

 

예수는 경계인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줄타기 하듯이 사셨다. 예수는 그 길을 가면 죽음이 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알기에 단호히 그 길을 가신 분이다. 결과는 비참한 죽음이었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주셔서 천상천하의 왕이시며 주님이 되게 하셨다.

 

7. 우리는 예수를 왕으로, 주님으로 고백하는 제자이며 하느님나라의 시민이다. 우리들의 신분은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삶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크리스챤! 그리스도의 제자는 스승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 그분의 가르침을 새기고 그분의 과업을 계승, 완성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사명은 예수의 사명과 같을 수밖에 없다. ‘생명과 사랑, 정의와 평등, 평화와 행복의 하느님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

 

애석하게도 초대교회 사도들의 시대에 이미, 예수의 부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 앞에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은 뒷전으로 밀렸다. 더군다나 예수를 따르던 크리스챤들이 유대아 독립전쟁 때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이웃나라로 피난 갔다가 유대아로 되돌아와서, 예수공동체를 다시 세울 때 필요했던 사랑, 자비, 자선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되었고, 하느님나라는 죽어서나 가는 나라로 굳혀졌다.

 

하느님나라의 건설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시대의 징표를 읽고 식별하여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널리 알리고, 그 뜻과 반대되는 것은 악이라고 외치고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선으로, 사랑으로, 정의로, 평화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징표로 살아가는 구체적 행동을 필요로 한다.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는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고, 우리의 할 일은 하느님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지금 여기에서 이미 하느님나라의 평화와 기쁨을 맛보며 살다가 때가 되면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이 사회적구원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가 하느님나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예수께서 진정으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