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어머니가 되다

(이사야 11:1-10; 시편 72:2-7; 야고보서 5:7-10; 2:41-52)

 

시국이 이렇게 위중한 이 때에, 시국과 상관없어 보이는 주제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되어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범죄를 위장하기 위해 사용된 '사생활의 논리'가 대통령의 성별과 곧장 연결되어 '여성의 사생활'로 일반화되는 이 거짓과 무지의 시대에, 전통적으로 여성성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개념, 조금 과장하자면 여성성을 규정하는 유일한 개념으로 강조하고 가르쳐 온 '모성'에 대해 한 번쯤은 성서 텍스트를 통해 성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여성성과 모성, 혹은 그 둘의 관계를 성서 텍스트를 통해 성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밝혀 두고 싶습니다. 여성신학자들은 성서텍스트의 기록과 편집, 나아가 주석과 선포의 과정에서 가부장적 사회와 종교문화 전통이 어떻게 깊은 그림자를 드려 왔는지를 적지 않은 시간동안 연구해 왔습니다. 이들의 공로로 우리는 성서의 기록과 해석의 전통 속에서 얼마만큼이나 여성들의 존재가 업신여김을 받아왔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나마 오늘 제가 설교의 본문으로 택한 누가복음은 성서의 어느 텍스트보다도 여성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예외적인 책입니다. 그래서 신약학자들의 일부는 편집사적으로 볼 때, 누가복음의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마가복음과 Q자료를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이 이용한 L자료 자체가 여성관련 자료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여성신학자 제인 쉐버그는 여성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누가복음 자체가 여성에게 호의적인 성서라고 보기에는 위험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여성과 여성 집단에 대한 언급이 다른 복음서보다 숫자로 우위인 것은 맞지만, 여전히 남성인물들과 남성 집단에 대한 언급에 비교해 그 숫자가 여전히 미비합니다. 그러나 쉐버그가 볼 때 더 큰 문제는, 누가복음의 저자가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여성들의 역할이 236절에 등장하는 선지자 안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열심히 기도하고, 조용히 감사하며 남성지도자들을 보필하는 보조자 여성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루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열 두 제자와 함께 예수를 따라 다니며 섬겼던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의 이름을 친절하게 언급하면서도, 한 번도 그들을 제자라 칭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철저하게 온정적 가부장제(즉 착한 얼굴 가면을 쓴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의 역할을 남성의 보조적 역할로 제한하는 선에서만 여성의 존재를 성서 텍스트 속에 드러내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설교가 주의하여 보고자 하는 나사렛 마리아 역시 이러한 이중적인 시선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누가 복음에서 나사렛 마리아는 그 어떤 여성도 받지 못한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며 수태고지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용기 있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또한 수 세대를 거쳐,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해방과 자유를 외치는 이들마다 소리 높여 암송하는 마리아 찬가의 영광스러운 원작자가 되었습니다. 루가복음 안에서 분명히 나사렛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여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즉 그가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라는 역할을 제외하고, 우리는 마리아의 어떠한 모습도, 어떠한 스토리도 누가복음 속에서, 아니 복음서 모두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타이틀 이외에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마리아의 존재를, 마리아의 삶을 추적할 수 없습니다. 이 영광스럽고도, 제한적인 어머니라는 이름 속에 갇힌 마리아의 운명의 굴레는 지난 이천 여 년 동안 성서를 배우고 따르는 교회 내의 여성들에게 그대로 내려온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린 소녀들은 아주 오랫동안 미래의 어머니로 길러지고 보호받아야 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누구나 자녀를 생산하여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범적인 어머니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여성에게는 그렇게 다른 삶의 모습은 가능하지도, 가능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역할이 여성의 삶에 유일무이한 모범답안으로 강조되면서, 여성들의 다양한 삶의 경험들과 선택들은 비정상적이거나 폐륜적인 것, 심지어 저주받은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 아이를 낳기 싫은 여성, 이러저러한 삶의 무게로 아이를 키울 능력이 되지 않는 여성, 이혼하여 양육권과 친권을 빼앗겼거나 갖고 싶지 않은 여성, 애를 낳고 키우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은 여성, 자기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여성, 남의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여성 등 여성들의 다양한 운명과 선택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정상적인시선들의 포로가 되어야 했으며, 어머니 혹은 좋은 어머니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여성으로서 부여된 가장 중요한 본분을 다하지 못했기에, ‘불행한 여성’, ‘불완전한 여성’, ‘나쁜 여성등으로 여겨져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하여, 성서로는 우리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이른 것 같습니다. 최근 저는 제가 가르치는 대학의 수업에서 모성에 대해 수업을 하며 여학생들에게 익명으로 피드백을 받게 되었는데요.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나는 엄마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이라거나, “나는 아기를 절대 낳지 않을 것이다.” 라는 등의 의견을 어떠한 억압된 죄의식 없이 자유롭게 적어낸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날의 젊은이들은 여성에게 부여된 전형적인 성역할의 굴레에 스스로를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택을 집단적으로 해내기 시작한 첫 세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기혼자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여성의 입장에서도 모성은 더 이상 저의 삶을 규정하는 유일한 정체성이 되지 못합니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현대 사회에서 어머니 되기를 선택한 일부 여성들에게도 그들이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는 상당히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자기 자녀의 엄마로서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엄마라는 이름에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어 주지는 않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가정 속에서나, 직장에서, 또한 시민사회 속에서 자녀이외의 사적이고 공적인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적극적인 의무와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자녀의 공동양육자와 평등하게 부양과 양육의 책임을 나누어진다는 것을 전제아래서 가능한 것이기는 합니다.

 

죄송하게도 성서 본문에서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긴 시간을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는 예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성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모성을 여성 모두의 모성으로 여기거나, 모성을 여성성의 본질이나 핵심, 혹은 전부로 여기는 전통적인 편견을 결코 반복하고 싶지 않아 좀 길게 돌아오고야 말았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성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마리아의 모성은 수태고지의 기적으로 인해 교회 전통에서 오랫동안 매우 성스럽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마리아를 더 이상 성모로 부르지 않는 개신교 전통에서마저도 그의 수태고지의 기적만큼은 순결하고 헌신적이며 희생적인 완벽한모성의 모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온 마리아의 모습은 그렇게 예수의 어머니로 선택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믿음이 훌륭하고 신실하게 보입니다. 떨림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아들 예수의 뜻에 말없이 순종하는 헌신적인 어머니 마리아가 교회 안팎의 여성들을 휼륭한 어머니로 교육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모델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마리아를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우며 자란 저도 예수 어머니 마리아하면 언제나 예쁘고 온화한 미소에, 말수는 적으며, 아들의 등 뒤에서 그의 사역을 위해 눈물로 밤낮 기도하는 모습을 쉽게 떠올립니다. 아마도 여러분 대부분도 저와 다르지 않으실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랬기에 저는 성서에서 나사렛 마리아가 어머니의 이름으로만 등장하는 것에는 늘 문제제기를 해왔어도, 우리가 늘 배워온 마리아의 모성의 위대함 자체에는 크게 의심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루가복음 2장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이제까지 오랫동안 발설하지 못했던 의심에 직면해 보기로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함께 어린 예수를 데리고 유대교 관습에 따라 3일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어 예루살렘에 들어가 유월절 의식에 참가합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수가 자기 무리에 없는 것을 하루가 지나서야 발견하게 됩니다. 놀란 두 부모는 어린 예수를 찾아 다시 길을 돌아가 삼일 만에 성전 안에서 선생들과 토론을 벌이는 예수를 발견하고 놀랜 가슴을 쓸어내리게 됩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하느님 아들로서의 어린 예수가 자신의 운명과 사명을 스스로 어렴풋이나마 드러내 첫 사건으로 루가복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오랫동안 제대로 질문되기를 억압되어 온 하나의 질문을 솔직히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의 부모는, 마리아는 어린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잃어버리는 일은 불행하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어버린 것을 발견하는 데에 무려 하루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무리 친족하고 같이 묻혀가는 관습이 그들에게 있었다고 해도, 예수를 오는 도중에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예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처음부터 예수를 챙기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지금과 같이 자녀를 과보호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또래의 자녀를 둔 제 경험에서 볼 때, 초행길의 먼 여행을 나선 어린 아들의 부재를 어떻게 그렇게 장시간 동안이나 눈치 채지 못할 수 있나 하는 원망이 솔직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의 의심이 마리아에 대한 책망으로 여러분을 인도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이러한 질문과 의심을 통해, 엄청나게 신화화 된 마리아의 모성을 깨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삶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여성이 그렇듯 날 때부터 어머니로 태어나지 않은 마리아도 실수와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역할을 익혀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에 대한 사랑도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처음부터 완벽하고 완성된 것이었던 게 아니라, - 저와 같이 일반적인 어머니의 경험처럼 아이가 자라면서 함께 나누게 되는 아기자기한 순간들과 울먹울먹한 순간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더욱 깊어져 갔을 겁니다. 물론 그의 어머니 역할도 순간 순간 닥치는 삶의 위기들로 인해 후퇴하거나 잠시 멈추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역할들은 안타깝게도 포기하기도 했을 겁니다. 이로 인해 마리아는 아이에게 충분히 헌신하거나 희생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우리와 같은 일반적인 어머니처럼 상처받기도 했을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만큼 철저하게 인간의 아들로서 예수를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리아의 모성은 하느님의 아들을 키우는 위대한 모성일 수만은 없습니다. 철저하게 우리의 부족한 모습과 닮아있는 인간의 어머니, 그 자체의 한계와 좌절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많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어머니 경험에서 깨우치듯, 인간의 모성은 아이의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느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감에 따라 함께 성장하고 함께 나아갑니다. 저는 마리아의 모성이 그가 예수를 잉태하고 탄생한 처음 순간부터 완벽하고 신비로웠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리아 모성의 신성화는 이제까지 가부장적 교회의 성서 해석 역사 속에서 우리와 같은 일반의 어머니 다수를 늘 부족한 어머니, 못난 어머니, 나쁜 어머니로 비하하는 데에 이상적 기준점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리아의 모성이 지금까지 우리가 은연중에 생각해 왔던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이거나 완벽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마리아의 모성이 그렇게 평범하고 세속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많은 어머니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자녀의 꿈과 미래, 삶을 자신의 뜻으로 재단하고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자녀의 성취를 자신의 명예로, 삶의 의미로,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들을 잃고 삼일동안이나 헤매다가 만난 아들을 원망하고 훈계하면서도 그의 대답에 주목합니다. 예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가복음에 의하면 분명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둘 다 이 말이 무슨 뜻에서 한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이의 이 불길하면서도 신비한 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그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굽히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아이의 말을 그 자체로 자신의 마음에 간직합니다. 저는 여기서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이나 욕망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 자녀를 대하는 젊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모성의 중요한 지혜를 배웁니다.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는 자녀는 부모에게 또 다른 나이지만, 절대로 낯선 타자라고 부르며 자녀의 삶에 대한 부모의 절대적 책임과 존중을 가르칩니다. 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제까지 본바 와는 전혀 다른 아들 예수의 모습 앞에 왠지 모른 낯섬과 두려움에도 그의 변화 자체를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성인이 된 예수의 건강하고 독립적이며 단단한 인간의 참된 인격의 뿌리를 찾게 됩니다.

 

여성성은 모성으로 완전히 치환될 수 없습니다. 현대 여성에게 모성은 선택적 사랑이며, 그래서 자유한 사랑입니다. 또한 모성은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습니다. 실패도 있고, 좌절도 있지만, 또한 성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설교를 마치기 전, 또 하나의 오해를 피하고 싶습니다. 한참 사역중인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에게 예수는 그들을 만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관계는 혈육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행함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혈육관계의 모성을 혈육 밖의 모든 인간의 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보편적 사랑으로서 성숙시켜야 하는 의무가 분명히 우리에게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랑 역시 실패와 좌절에 언제나 노출되겠지만, 그래도 그러한 한계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 겨자씨 나무처럼 어느새 공중의 새들도 와서 깃들 수 있을 만큼 성장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서로를 완벽한 인간의 자녀이자 완벽한 하느님의 자녀로 품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