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사명"
(시편 146:5-9; 이사야 35:1-10; 야고보서 5:7-10; 마태오복음 11:2-11)

박종인 신부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내용은 구세주가 오시면 벌어지게 될 표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구세주가 하실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구세주는 우리가 겪고있는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인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상처를 어르만져주고, 슬픔을 위로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하는 이가 보이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설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스레 자문했던 젊은이는 이사야서의 예언에서 자기 소명을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명 선포를 기억합니다. 

어느날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예수님께 건네집니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아 읽으십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서의 아무 곳을 눈감고 찍어서 읽으신 것이 아니라 "찾아 읽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그리스도로서 당신의 사명을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 그리스도의 사명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이 성경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4,16-21 참조)

그가 와서 이사야서의 저 예언을 실현시키고 있기에 우리가 기다리던 구세주가 곧 예수이며, 그러한 이적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알리는 표지로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의심치 않고 믿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오로지 예수님 스스로 터득한 것일까요? 우리는 이 세상을 밑도 끝도 없이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태어나기 이전부터 완전히 성숙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존재였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존재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따라서 참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객체일 것입니다. 그저 사람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영아기, 유아기, 유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온 존재라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 사이에 관계를 맺게된 다양한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그 시간들을 소중히 정성껏 살아 참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마땅한 이치이며, 우리도 그분을 닮아 궁극적으로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참된 신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옛날 프랑스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 성인은 말합니다. "신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사람이 신이 되기 위함이다"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 스스로 신이 되는 불경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신이 되어가는(신화, divinisation) 역동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되이 참 사람으로 성장하셨고, 참된 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을 모델로 삼아 성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인생의 초기에 예수님이 맺었던 관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그분이 어머니와 맺었던 관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 신도들에게는 꺼내기가 매우 조심스런 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톨릭을 성모마리아교라고 이단시하기까지 하는 시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예수 아기를 낳고 기른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보여주신 관심과 사랑이 단순히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루카 1,46-55)

흔히 "마리아의 노래", 혹은 "마니피캇(Magnificat)이라고 불리는 노래입니다. 열여섯살 된 소녀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혁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를 받아 부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린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이를 상징합니다. 게다가 이 노래는 나이들어 아기를 갖게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만난 후 마리아가 부른 찬가입니다. 나이든 여인도 사회의 약자로 취급됩니다. 

어린 소녀와 나이든 여인의 만남은 우리에게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를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만나서 어떤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린 여인은 인류가 경험하게될 전복, 업 사이드 다운, 뒤집어 엎기, 첫째가 꼴찌가 되는 오묘한 조화에 대해 노래합니다. 가히 하느님이 마리아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인권헌장이라 할만 합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가장 먼저 무의식 안에 기억했을지도 모를 노래가 이렇게 불려진 것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와 사랑을 아이가 배우며 자랐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유다인들에게 아이의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품위, 즉 인권을 훼손당해왔습니다. 국민이 부여해준 권력을 오용하고 남용한 이들에 의해 생명을 잃어야 했고, 거리에 나앉아야 했습니다. 유린당한 인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깊은 갈망이 우리를 결속시켰습니다. 이 결속과 연대에는 그릇된 사회로부터 폭행당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 있었습니다. 향린교회의 신도분들이 내몰린 이웃들에게 끊임없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꾸준히 그런 현장을 찾아가서 지켜준 여러분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게되는 요즘입니다. 연대한 힘은 폭행당한 인권을 되찾고자 한 거대한 불이 되었고, 통치자를 자리에서 내려앉혔습니다. 물론 아직 종료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고백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뭉쳐진 민중을 통해 당신의 권능을 떨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달려가시는 현장에서 위로받는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리스도가 선포한 소명을 함께 수행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이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 모두에게 공통으로 부여된 미션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들을 풀어주는 그 일을 함께 합시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잠시 침묵 중에 우리의 공동 사명을 되새기도록 하겠습니다. 


<파송사>

저는 우리의 대통령이 자식을 잃고 긴 어둠의 삶을 경험했다가 헤어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대통령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딸이어서 농사짓기가 얼마나 고달픈지 아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의 대통령이 공장에서 이교대로 일해본 비정규직 노동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대통령이 어느 날 갑자기 해고당해서 좌절한 나머지 한강대교 위에 서 본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대통령이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해본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대통령이 알콜 중독이었다가 술을 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통령을 원하십니까? 적어도 우리 모두는 이제, 우리의 대통령이 우리와 같이 사회의 그늘을 경험해 보고 인생을 배운 사람이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기도하고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실천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