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마태오 1:18-25; 이사야 7:10-16; 시편 80:3-7; 로마서 1:1-8)

 

박영숙 권사 / 조은화 목사

   

 

[박영숙 권사]

 

저는 얼치기입니다. 특히 교회생활에서는 더 얼치기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늘 뜻 펴기로 이 강단에 서게 되니 더 부끄럽습니다. 어설프고, 성실치도 못하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저에게 이 강단은 그래서 떨림입니다. ‘향린을 사랑하고, 부족하긴 하지만 향린 정신을 따르려 애쓰는 나, ‘향린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삶을 선택하여 살기에 매우 행복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기회가 참 의미있습니다.

 

나는 교회 밖 생활에서는 사진작업을 하는 페미니스트 입니다. 40대 갖춘 페미니스트 정체성은 나의 삶을 진지하게 실행하며 사는 삶으로 바꾸어 주었고, 해서 지금까지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술계와 사진계에서도 내 할 역할을 찾아 실천하며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창작 활동은 내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역사 등 열린 사유를 열망하며, 내 삶의 가치관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실천의 장이기도 합니다. 현재, 트렁크 갤러리 운영도 한국의 아티스트인 나로서, 미술 활동하는 동료들에게 선배로서 도움 되는 일이 될까 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 간의 화목을 우선하는 삶을 통해 행복을 찾습니다.

 

2007년 즈음, 한국 미술시장은 호황이지만, 사진을 동시대 미술로 인정하지 않고 소외 시키는 현상은 한국 동시대 미술의 지평과 관계없이 미술시장을 이끄는 보수성 때문에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해서 트렁크갤러리를 시작했습니다. 세계적 미술과 그 흐름을 역행하는 미술시장, 사진 보다 회화에만 관심 갖는 그 후진성, 이 모든 문제는 갤러리스트와 컬렉터의 보수성과 맞물려 있어 미술계의 발전에 저해요소로 작용하고 있어서 입니다. 미술 시장논리의 작품미술관전시, 미술관 컬렉션과는 서로 많은 차이를 갖는 이 관행들을 해체시키기 위한 트렁크갤러리의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2002년에 제약회사 한미약품이 사진에 대한 관심으로 한미사진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시민사회를 통해 얻은 수익, 그 일부를 다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사진계는 크게 환영했습니다. 많은 사진작가들의 기대 또 한 컸습니다. 당시 외국 유학 갔다 돌아오는 작가 그 대다수가 세계미술의 흐름을 보여 주 듯, 사진작가가 되어 돌아왔던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일 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프로모션 해 줄 갤러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갤러리도 사진작품 프로모션은 해 주지 않았습니다. 갤러리스트가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을 초대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우왕좌왕 그들의 설 자리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미사진미술관으로 그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한미사진미술관 입장은, 아직 동시대 미술인 사진작품을 컬렉션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개관 초기라서, 근대사진들을 수집해 아카이브화 시키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포스트모던 사진에 대한 글을 사진전문 잡지에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작품을 이해시키는 일, 작가작품 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작품판매가 절실한 현실타개를 위해서였습니다. 사진계의 현실타파 없이 사진발전 없다는 고민이었습니다. 한미사진미술관 건립은 그 뒤 따른 사진전문갤러리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한미 사진미술관 관장은 저의 후배로 오랫동안 사진계를 같이 고민 해온 친구였습니다. 하루는 그 후배가 이 모든 현상들을 이야기 하며, 대응책에 동참을 요구해 왔습니다. 다른 갤러리들이 사진작가 프로모션을 해 주지 않는 현상을 질타하기보다, 그 사실을 인식한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는 실질적 대응책이 필요하다며, 나에게 생각해 보라는 요구였습니다. 내게 그 일은 분수에 넘친다고 말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 양심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겁났습니다. 그 즈음 홍근수 목사님께서는 파송사를 하시면서 매번, “생각 했으면 실천하라라는 말씀을 꼭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피하는 내 모습이 느껴지면서 내 가슴을 파동 치게 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도구로 쓰실 때, “ ‘어리석은 자를 들어 쓰신다는 성경의 한 구절을 읽고 감동하며 눈물 흘린 적도 있는 나, 지금 이 현실이 그 누군가의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라서 괴로웠습니다. “너는 왜 하지않고 남이 하기를 바라느냐하는 질타도 느꼈습니다. 결국 나서야 했습니다. 아침 새벽산에 올라가 이 과제로 하느님과 씨름도 했습니다. 왜 능력 없는 저에게 이 과제를 주시느냐 하며, 거두어 주시기를 부탁드리기도 했습니다. 발버둥 쳤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트렁크갤러리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트렁크 갤러리는 출발하자 마자, 많은 관객과 다양한 언론에 노출되며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2008, 갑자기 온 세상이 싸늘해지며 트렁크 문턱이 한가로워 졌습니다. 2IMF라는 위기였습니다. 문 닫아야 할 지경 이었습니다. 그런데, 트렁크갤러리 작가를 지지하고 지원 하겠다는 한 천사가, 매달 일정금액을 보내며 작가의 작품들을 분납으로 구매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 후원자의 지원은 트렁크갤러리의 고비를 무난히 넘기게 하였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그렇게 트렁크갤러리는 매일 매일이 위기였습니다. 그 때 마다 다 준비 되어있 듯 그 어떤 손길에 의해 극복되며 10년의 세월을 지켜냈습니다. 믿음이, 확신이.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결코 내가 한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 분이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 오늘, 저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서서 임마누엘’, 당신이 함께 하셨다.” 라고 고백합니다.

 

제가 오늘 평신도 하늘 뜻 펴기시간에 받은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말씀과 로마서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은 내게 이 시대적 사명에 대한 메시지로 다가 왔습니다. 수태고지받은 마리아 이야기는 처녀인 마리아에게 수태고지사건은, 순수한 처녀에게 닥친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하게 하심에 사명은 엄중함과 그 당시의 시대적 사명이 그러했다는 사실 앞에 연약하고 순결한 존재로 순응이 필요했다는 필연성을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 힘없는 존재인, 결혼 전 처녀, 그 연약한 여성을 쓰시려 하는 당신의 뜻, 분명 분수에 걸맞지 않는 존재를 들어 쓰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힘없는 존재를 들어 쓰시는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 힘없는 존재를 통해서만 이루려 하실까? 그리고 끝없이 밀어주시는 그 마음도 이해해 보게 되었습니다. 항상 저를 이끌어 주시는 그 분, 당신의 뜻을 이제서야 겨우 확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시대 미술의 산실 북촌에서 버텨내게 하신, 당신만을 믿고 의지했음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얼치기 박영숙은 그 임무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임재 하시어 이끌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조은화 목사]

 

혹시 밤늦게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기절할 듯이 긴장해본 적 있으십니까? 한밤중 엘리베이터를 혼자 탔을 때 중간에 이상한 사람이 타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며, 좁은 공간안에서 혹여 등 뒤에서 위아래로 쳐다보는 시선 속에 두려웠던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그간 여성들이 겪어온 수많은 공포 중 한 예의 불과합니다. 늘 폭력의 위험 속에서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약자인 여성입니다.


기 베슈텔이라는 역사학자는 신의 네 여자에 대해 말합니다. “창녀, 마녀, 성녀, 바보여성에 대해 모순적 감정을 품어왔던 가부장 사회에서 교권주의에 물든 이들이 여성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여성 폄하가 사회로 확대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가족구조에서 어머니의 노동이라고 간주되는 육아와 가사는 문화적으로 비하되고 경제적으로 보상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일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미숙련 노동이라는 잘못된 인식은 공적 영역에도 확장되어 노동 시장에서 여성노동에 대한 낮은 평가와 연결됩니다. 보살핌, 감정 노동을 중요한 노동 요소로 요구하는 사회복지사, 간호사, 유치원 교사 등 그들은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습니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복음서가 쓰여진 당시 남녀차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성의 존재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예속됩니다. 결혼은 타인에게 상품처럼 팔려가는 일이었습니다. 재산목록의 하나로, 노예와 같이 남편을 주인이라 불렀고 아내라고 이름불리며 노동력을 착취당했습니다. 재산목록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부장제도 하에서 혈통을 잇는 기능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교는 여성이 토라를 배울 수 없고 회당에서 가르칠 권리도 없었으며 라삐는 여자를 제자로 둘 수 없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아닌 여인과 길에서 마주하는 것도 수치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천한 여성을 통해 그들의 열망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마르코복음은 예수 탄생설화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두 복음서 마태오와 루가는 수태고지의 내용은 있는데 관점이 다릅니다. 여성에 관심이 많았던 루가는 최대한 부각시킬 수 있을 만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의 이야기 주로 다루고 이를 통해 예수 탄생 과정을 그립니다. 수태고지는 마리아와 천사가 직접 독대하는 가운데 마리아의 결단이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서는 루가에 비해 마리아의 자리가 축소되어 있습니다. 수태고지는 요셉과 천사의 이야기로만 머물고, 요셉의 결정으로 비로소 마리아와 예수의 입지가 살게 되는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예수는 요셉에 의해 안전하게 다윗의 자손으로 만들려는 것이 최대의 목적으로 이는 그 의도를 위해 억지로 짜맞춘듯한 흔적이 보입니다. 사실 그래서 불편합니다. 그럼에도 마태오복음서의 수태고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를 말하고 있는 오늘의 본문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자신의 주인으로 여긴다는 고백을 합니다. 예수를 부른다는 것은 그가 하신 일에 대한 확신과 믿음 그리고 희망을 갖는 것이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을 때마다 예수를 불렀습니다. 본래 여호수아의 헬라식 발음인 예수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에서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미리암의 헬라식 표현인 마리아또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반적인 이름으로 여호수아미리암’, 즉 헬라어로 예수마리아로 쓰였다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이 품고 있는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을 향한 믿음과 희망이 그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끊임없이 좌절되고 로마의 속국으로 살기까지 수차례, 외세의 압력 속에 아이를 낳고는 그 이름을 예수라 짓고 하느님의 해방하심을 믿었던 이들이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탄생은 이사야가 예언했던 임마누엘과 같은 맥락에 놓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임마누엘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다에 시리아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협공해 쳐들어 왔습니다. 예루살렘은 포위당했고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유다왕 아하즈는 흔들렸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사야는 이렇게 전합니다. 외세에 흔들리지 말고 굳게 하느님을 믿고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이 말을 듣지 않고 강대국 앗시리아로 디글랏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의 권고를 무시한 아하즈에게 이사야는 경고합니다. 도움을 받고자 하겠으나 결국 앗시리아는 두 나라 뿐만 아니라 유다도 칠 것이라는 것, 에브라임과 유다가 갈라지던 날 이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파멸의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바로 이러한 파국의 예언 가운데 나오게 됩니다.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역사상 분단보다 더한 나라가 없어지는 비극이 닥쳐오는 시점에서 젊은 여인이 갖는 임마누엘신앙은 이렇습니다. 고통스러운 절망의 삶 한가운데서 구원을 염원하며 그래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부르는 절규이자 몸부림입니다.

 

오늘 절망의 현실에서 임마누엘이라 외치는 이들은 젊은 여인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알마로 젊은 여인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마태오복음서에는 처녀로 되었습니다. 대체 이 젊은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해석에 따라 히즈키야라고도 하고 이사야의 아들이라고도 하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이것을 집단으로 해석한다면 젊은 여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비극의 한복판에서 임마누엘신앙이 여인들을 통해 살아남고 이어져 간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여인들은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가장 뼈저리게 겪고 짊어진 고아 떠돌이들과 함께 약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고통의 역사 한가운데서 임마누엘이라 절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구원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이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태오복음서가 이사야 본문을 가져온 이유입니다. 어두운 역사를 살아온 내내 이스라엘은 여인들은 자녀를 낳았고 그 이름에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염원을 담아왔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었다는 것은 반복되는 좌절 속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약자들의 믿음과 희망이 얼마나 끈질기게 이어져 왔는가를 밝혀줍니다.

 

이스라엘의 절망스러운 파멸의 역사가 끝없이 연속되는 시대. 그래서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희망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인 여성들의 끊임없는 믿음과 염원이 임마누엘 예언을 받게 했습니다. 오늘의 수많은 마리아들도 이 믿음과 희망 위에서 임마누엘 예수를 부르고 있지 않을까요?

 

예수가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지요? 우리가 평등과 자유를 목이 터져라 외친다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불평등이 극심하여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외친다는 것은 분단의 벽이 그만큼 크기에 간절한 마음이 더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 예수는 처음부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체적으로 노예의 자리, 고통의 자리를 선택하여, 약자의 짐을 지는 것이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가 민중이 됐다라고 하는 안병무 선생의 말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어렵고 힘든 이웃과 함께 그렇게 무너졌다고 하는 좌절과 괴로움의 자리에서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외치며 우리의 희망을 붙잡고 갔으면 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하느님은 인간 존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현존해 계신다.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 현존해 계신다.

굶주린 사람과 목마른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공장 노동자 안에서, 농촌 농민 안에서, 달동네 빈민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고 계신다.

헐벗은 어린아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

추운 겨울 밤 그리스도께서는 추위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 안에서 살고 계신다.

영양실조로 허약해져 질병에 걸린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

옳은 일을 하다가 혹은 불의한 사회 구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 당하는 모든 사람 안에 계시고

착취당하는 모든 사람 안에, 박해받는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

 

(후안 루이스 카라비아스, 구원은 사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