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향린되기

(이사 58:1-9; 시편 112:1-7; 고전 2:3-10; 마태 5:13-17)

 

 

김무진 집사 / 조은화 목사

 

[김무진 집사]

 

지금부터 향린 공동체 교우들께 드리는 말씀은 제가 지난 9년간 향린 공동체에서 이런 저런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왜 공동체 예배에서 그 것도 하늘 뜻 펴기로 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자문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어느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웃그 사람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향린에 오기 전, ‘묻지마 믿음은 저에게 학습된 유일한 신앙의 방법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 물음은 오히려 방해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물음이라도 생길라치면, “! 아직 믿음이 부족하구나! 믿어야 한다. 그냥 믿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내 영혼아 물음과 이해 따위란 필요 없는 저 높은 믿음의 경지로 가자!”

 

그렇게 물음이 없는 믿음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세상과 역사에서 유리된 체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나의 이기심과 무지는 거짓된 믿음과 결합하면서 욕심 것 부풀어 올라 내 영혼을 질식시켜 갔습니다. 본질적으로 일어나는 물음들은 거짓된 믿음으로부터 조롱받고 외면되면서 내면의 깊은 영역으로 억눌려 숨어 들어갔습니다. 거짓 믿음의 허상이 내면까지 드리워지자 입으로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홀로 있는 시간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마침내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오래 다니던 교회에서 답답함이 극에 달하면서 아내와 저는 새로이 다닐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아내 윤선주 집사가 발견한 향린교회’. 이름이 향린이라는 이름이 이쁘다며 어떤 교회인지 한번 알아보자는 의견을 주었습니다. 향린 홈페이지를 둘러보던 중 창립53주년기념 영상을 발견하였고 이에 담겨 있는 안병무 선생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남을 위하기 전에 스스로 살고 싶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여 구한다는 일과 유리될 수는 없었습니다.”

 

남을 위하기 전에 스스로 살고 싶어라는 문구에 이끌려 향린을 찾게 되었습니다. ‘살고 싶다’... 그런데 향린교회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다 보니 내가 다닐 수 있는 교회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살고 싶어 시작되었다라는 말에 이끌림을 받아 2008년 가을 무렵 기존에 다니던 교회를 나와 탈출하듯 향린을 찾아왔습니다.

 

향린 공동체에 출석하고 4년간은 쉬엄쉬엄 다녔습니다. 향린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아내의 말도 있었지만 적어도 기존 교회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없었으니까요. 그러던 2012년 겨울. 기대와 너무나 다른 대선 결과를 보면서 사회에 대한 실망감과 더불어 무기력함이 엄습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4년간 진행해오던 사업도 힘든 고비를 넘지 못하고 정리하게 되면서 많은 자괴감도 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억압되어 있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의 물음이 의식으로 올라왔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이 많은 일들은 ?’ 이렇게 된 것일까? 나와 이 사회에 대하여 ?’라는 본질적 물음이 일어났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향린 주보의 공동관심사란에 올라온 역사와 해석이라는 성서학당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역사와 해석이라... 일단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성서학당에 참여하였습니다.

 

역사와 해석시간을 통하여 역사는 물음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참여하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히브리라는 단어였습니다. 히브리... 민중... 그럼 내가 히브리가 아닌가! 이어진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 신학의 소개... 그러나 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앎은 내면에서 새로운 충돌을 일으키고 그 충돌은 분노로 폭발되고 증폭 되었습니다. 성서학당 마지막 시간이 끝날 무렴까지도 그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더해갔지만 어디선가 불어와 머릿결에 살랑이는 미세한 바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미세한 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왔고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질문과 이해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쉼 없이 좌충우돌하게 만들었습니다. 목회실과 사회선교센터 길목에서 진행되는 신학강좌와 인문학강좌들 그리고 절기별로 향린 공동체에서 준비되는 여러 특강들은 질식되었던 제 영혼에 서서히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공동체 예배에서 선포되는 하늘뜻 펴기에 제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사건의 폭풍속으로 나서십시오라는 공동 축도는 더 그러했습니다. 사건의 폭풍속으로 나서라고...?

 

성서학당에서 불어왔던 미세한 바람은 심장을 지나 어느 덧 두 손과 두 발에 불어 옵니다. 그 바람에 이끌려 지난 2016년 한해에도 얼쑤 소모임 공동체와 함께 열심히 꽹가리와 장구를 치면서 용산참사 추모기도회’, ‘순화동 거리 기도회’, ‘소녀상 대보름 굿’, ‘민중총궐기 연합풍물행진등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이끌어준 그 곳에는 이웃과 유리되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여 구하기 위해 스스로 애쓰며 살아가는 많은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힘껏 이웃들과 외칩니다.

 

목소리를 크게 내어 힘껏 외쳐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 소리처럼 높여서 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

 

스스로 살고 싶어찾아왔던 향린 공동체. 그리고 9년여의 시간이 지나서 안병무 선생님의 말씀에서 이제야 그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산다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여 구한다는 일과 유리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이웃과 유리되어서는 살아질 수 없습니다. 이웃과 함께 서로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서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우리의 본성이라 생각됩니다. 그 본성을 충실히 할 때 비로써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살고 싶어 향린에 왔는데, 알고 보니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영성이 결국 나를 살게 하는 것,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우리에게,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조은화 목사]

 

지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은 원로공로상 수상소감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위기에 앉고자 하는 사람이 장애인 기자를 흉내낸 순간은 특권과 권한으로 우위를 차지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마음이 찢어졌고 목격했을 때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가 아니라 실재였기 때문이죠. 권력있는 자가 누군가를 조롱하려는 본능을 보이면 똑같이 행동해도 괜찮다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침투하게 됩니다. 무례함은 무례함을 낳고 폭력은 또 폭력을 일으킵니다. 권력자가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모두 잃게 됩니다.” 이는 트럼프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녀의 걱정은 정말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LA코리아타운 길거리에 피를 흘리고 주저앉은 할머니가 발견되었습니다.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린 목격자는 백인 여성이 "백인 파워"라고 외치더니 난데없이 한인 할머니를 밀치고 도망쳤다고 증언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는 벌써 일상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증오범죄의 대상이 무슬림에서 한인 등 소수계로 번지고 있습니다.

 

지난 2045대 미국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취임식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권력을 워싱턴 DC에서 국민에게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미국을 다시 강하고 부유하며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연설했습니다. 서울시를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트럼프가 성서에 왼손을 올리고 오른손을 든 채 취임선서를 하는 장면, 더불어 그의 연설 중 마무리 글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God bless you. And God bless America.”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미국에 하느님의 복이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는 연설 내내 성서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미국의 하나됨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하나가 될 때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 후 불과 10여일 만에 나라를 반쪽으로 쪼개 놓은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난달 28일에 시리아, 이라크, 이란, 소말리아 등 중동·아프리카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90일간 금지한다는 입국불허 명령을 내렸습니다. 국경장벽을 설치하고 무슬림 입국금지로 난민과 가난한 이들을 경계하는 미국우선주의 정책을 펴가고 있습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학생들이 설명절임에도 한국에 올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꽤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대치의 군사력을 보강하여 경찰과 장병들의 보호아래 든든히 독재나라를 구축할 것이라는 선포는 앞으로의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짐을 직감하게 합니다.

 

매티스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위협을 최우선 안보 현안으로 다루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청와대는 한미동맹 차원의 결정인 주한미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를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고 북한의 추가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강경대응 한다는 공통의 입장을 확인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사회 정황 속에서 신앙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신앙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의 은총이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바라며 간절함을 가지고 신을 믿습니다. 그러한 은총이 한 개인, 한 국가에 머무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깁니다. 진정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신앙은 우리 삶에 어떻게 구현되는 것일까요?

오늘 이사야 58장의 본문은 금식제의를 통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단식, 표준새번역에서는 금식이라 말하고 있는)탄식의식의 절정인 금식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 파괴로 인한 파국 이후에 정기적 의식으로 제정되었습니다. 당시 금식은 연 4차례 행해졌는데 포위가 시작된 날, 도성 함락일, 성전과 도성 소실일, 게달리야 암살일입니다. 이같이 지내오던 탄식의식인 금식은 포로기 기간이 끝나면서 귀환 후 의문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의식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사야는 금식을 대하는 이스라엘백성의 이중적 태도를 고발합니다. 포로기 이후 공동체는 궁핍함이 심했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 더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인 헌신을 하며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금식하고 있다고 백성은 믿었으나 사실은 향락을 즐기고 안주하며, 정착하지 못하여 힘들게 사는 이들을 돌보지 않았고 외면했으며 종교의식에만 치우쳤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금식이 오히려 타인의 억압을 야기했다고 규탄합니다.

 

금식하는 동안 주인은 하루 종일 일하지 않기에 그의 일꾼들 그 노동자들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혹사시켰습니다. 이사야서는 바로 이 지점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그르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제의는 공동체의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공동체는 분열되었고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 사이에 엄청난 불평등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탐욕스런 사람들의 희생양이 되었고, 서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먼 사람처럼. 의인이 잘못된 벌을 받아도 아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의식이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결과로 나와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금식과 같은 신앙의 목적은 개인 영성의 회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정의가 동반한 사회적 영성의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로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기득권으로부터 주권을 박탈당한 민중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이사야 58:6-7)

 

이렇게 우리가 탄식하고 이웃의 삶을 돌볼 때 신비가 찾아오는데 8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의 치료가 시작해서 네 상처가 아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탄원할 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할 것이다.”(이사야 58:8)

 

요즘 연예인을 비롯하여 인사들이 나와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인 말하는대로에서 사회학자 오찬호 님이 나와서 청중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한 청년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바쁘다. 지금도 어학원에 가야할 시간에 여기 나와 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나 같이 약한 한사람으로 변화가 되겠어? 좀 더 스팩도 쌓고 힘 있는 자리에 간 다음에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랬습니다. “바로 이런 질문이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사회문제에 대해서 시간을 늦추게, 좀더 개인주의로, 사회와는 동떨어진 개별화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나마 개입하고 요청하고 불평등을 이야기할 때 그 작은 움직임들로 세상은 계속 변화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는 이들의 해방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한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서는 때로는 나의 것을 나누고 포기할 때가 필요합니다.

 

오늘 마태오복음서는 말씀합니다. 소금으로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소금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듯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됨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의 위한 영성을 잃어버린다면 우리가 바라는 변혁의 세상은 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만을 위한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좌충우돌 해보이지만 이웃을 대해 따뜻함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하기를 애쓸 때 세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통 받는 우리 이웃의 자리에 함께 하는 것, 어루만지는 것, 그것이 신앙을 가진 우리의 힘이자 역할이 아닐까요? 우리가 만지면 변할 수 있음을, 그 희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 서로의 상처가 아무는 치유의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당신은 저를 가지시고 저는 당신을 가집니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과 희망을 제안에 두시고

저는 저의 믿음과 희망을 당신 안에 둡니다.

당신의 모습을 우리의 이웃 안에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인류에게 부으시는 당신 사랑 넘침을 우리가 받아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 안에 움트고 있는 신앙의 힘을 함께 모아 살아가십시오.

지금 곧 그리 할 수 있도록 움직입시다.

그 순간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음을

모두가 회복될 수 있음을 믿고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