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구하기"

  (창세기 12:1-4; 시편 121; 로마서 4:1-5, 13-17; 요한복음 3:1-17) 

 

홍원기 교우, 한세욱 목사

 

 

[ㅇㄱㄹㅇ 청춘 / 이것이 진짜 청춘]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이면서, 기장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은 청년선교의 의미를 되새기고 청년의 푸른 기상으로 교회와 사회에 대한 사명을 고백하는 소중한 날입니다.

 

그래서 준비해 보았습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이 얼마만큼 청년세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름 하여 아재력 모의고사입니다. 당연히 많이 맞출수록 신세대입니다. 우선 연습문제 나갑니다. 생파 = 생일 파티 너무 쉽지요? 하나 더 갑니다. 낄끼빠빠 = 낄데 끼고 빠질데 빠져라

 

이제부터 진짜 문제입니다. 취업관련 신조어 영역문제입니다. 광탈 = 빛의 속도로 빠르게 탈락한다 인구론 = 인문계 90%는 졸업 이후 놀게 된다는 이론! 2014년 인문계 취업률은 고작 46%에 달하며 대기업의 경우 삼성 15%, LG그룹 15%, 현대 자동차20%, SK 그룹 30%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의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이공계에 비해 홀대받는 문과 출신의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페이스펙 = 얼굴도 스펙이다

 

자조적인 신조어들이 쏟아지는 이 때,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 청년들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 볼 뿐만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홍원기 청년을 강단을 모실 때 따뜻한 격려의 박수로 맞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홍원기 교우>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새날청년회에서 청년신도회 소속이 된 홍원기라고 합니다. 저는 약 1년 전 서울로 상경하면서 향린교회에 처음 왔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경험했던, 그리고 우리 세대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하는 경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성서본문은 아브라함이 야훼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떠나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새날 청년회 겨울 들살이에서도 한세욱 목사님은 오늘과 동일한 성서본문으로 하늘뜻펴기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날 한세욱 목사님이 진행한 하늘뜻펴기에서는 믿음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에 의해 상처받는 약자들의 모습에 대해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믿음, 질서, 사회적인 통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보고, 성서가 침묵하는 약자들의 입장을 다시 생각하며, 우리 역시도 아브라함처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었습니다.

 

오늘 저는 아브라함 주변 약자들의 이야기 중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특히 이삭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느 날 늙은 이삭의 아버지, 하지만 당시의 가부장 사회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번제를 드리러 가자고 말합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만 아버지는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제단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묶어 제단 위에 올리고, 칼로 찌르려 합니다.

 

이 때 이삭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저는 이삭이 이 사건에서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혹은 아버지의 시스템을 따르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어 이삭의 남은 평생을 따라다녔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삭에게는 자신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광야에서 죽을 위기를 마주하고 있는 이복 형제 이스마엘도 있으니,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후계자 경쟁 구도에서 이기지 못하면 생존이 힘들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태어난 이삭의 두 아들도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을 벌입니다. 서로를 짓밟아 이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삭의 두 아들 중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속임수까지 동원하는 야곱이 결국 아버지의 모든 권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저희 세대가 자라면서 겪었던 수많은 경쟁들을 생각했습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경쟁을 배웠고,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면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항상 따라 다니는 저희 세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다른 모두를 짓밟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저희 세대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경쟁에 대한 학습에서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취업 준비생 시절, 입사 시험을 보러 가서, 공개 채용에서 예상되는 합격자 수와 시험을 위해 학교에 마련된 고사장 수를 가만히 세어 보면서 그 두 숫자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실 하나 안에 앉은 사람들 중 3~4명만 다음 단계로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고 시험을 보려하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섬뜩한 이미지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베어 쓰러뜨려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배틀 로얄"의 이미지가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굳이 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희 세대는 “IMF 이후 승자독식 체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세대혹은 각자도생 세대라고 불릴 만큼 경쟁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저의 경험은 초중고등학교부터 시작되는 입시 경쟁과 공무원 시험, 각종 고시와 시험으로 제각기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버틴 뒤에도 다시 사회에서 경쟁하는 저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경험입니다. 어릴 적부터 경험한 이 경쟁의 경험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학습되어 저희가 다른 시스템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드는 사회구조. 낙오된 사람의 실패를 그 사람 개인의 노력 때문이라고 쉽게 이유를 찾는 사회가 우리를 점점 비인간적으로, 혹은 괴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느 날 여행 중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소개시켜드리려 합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동네 친구들과 함께 공을 차고 축구 경기를 하며 노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 날 꿈속에서도 저는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같이 공을 차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재밌게 뛰면서 놀다가, 무언가 이상해 공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실 저희가 차고 있었던 것은 공이 아니라 웅크린 아기 코끼리였습니다. 저희는 계속해서 웅크린 아기 코끼리를 차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던거죠. 그런데 저는 그 순간에, 심지어 꿈 속인데도, 망설였습니다. 친구들에게 우리가 차고 있던 게 사실은 공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물이라는 걸 말해줘야 할까?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계속해서 즐겁게 놀아야 할까? 라고 말이죠. 친구들과 정해진 룰 안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그 시스템을 깨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꿈 속에서도 말이죠.

 

그 날 잠에서 깬 저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꿈 밖의 현실세계도 비슷한 시스템에서 작동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누군가를 경쟁에서 낙오시키고, 배제하고, 희생시키는 이 사회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 시스템에 적응하고 있어, 공을 차는 룰을, 그 공이 사실 살아있는 생명일지라도 그 룰을 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서서 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놀이를 중단시킬 때 자신에게 비난이 날아올 것을 두려워하고, 혹은 자신이 도리어 그 희생양이 될까 염려하기 때문이지요.

 

지난 228, 14회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우수 포크 곡으로 가수 이랑이 부른 '신의 놀이'라는 곡이 수상하였습니다. 최우수 포크 곡 수상소감에서 가수 이랑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난달 수입이 42만원이더라. 음원 수입이 아니라 전체 수입이다. 이번 달엔 고맙게도 96만원이다. 그래서 여기서 상금을 주면 좋겠는데 상금이 없어서 지금 이 트로피를 팔아야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랑 씨는 현장에서 트로피를, 그의 이번 달 월세 값이라는 50만원에 팔았습니다. 비단, 가수 이랑 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2010년 가을에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라는 1인 밴드가 몇 년 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111월에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이웃집 문에 남는 밥과 김치를 부탁하는 글을 붙인 채 생활고로 사망했습니다. 작년에는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젊은 기사가 가방 속에 컵라면만을 남긴 채 참변을 당한 사고도 모두들 기억하실 겁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아버지에 의해 목에 칼이 겨눠진 이삭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혹은 제가 앞서 말씀드린 꿈속에서 저와 제 친구들에게 차이던 작은 생명의 모습을 봅니다. 아버지의 질서, 곧 사회에서 말하는 '정답'인 길로 갈 것을 요구받고, 그 길로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사람들. 그래서 기존의 질서와 구조에 의해서 희생되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도, 2000년 전 당시의 지배 구조였던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 체계에 대해서 잘못되었다 외치고, 지배 구조를 위한 관습에 대해 행동으로 저항하던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잠잠히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서 죽임당하고, 희생당했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야말로 당시의 사회에 의해서 '차여진 작은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 기간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순절은 고난과 십자가 죽음 뒤의 예수의 부활을 기억하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지배구조에 의해 희생된 예수가 민중 속에서 다시 부활하고, 기억될 때 새로운 예수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도, 비록 많은 수의 청년들이 계속해서 생존 경쟁을 버티며 살더라도, 이 경쟁 구조에서 배제되고 희생된 이들을 기억한다면, 그래서 내 눈 앞에 차여지는 작은 코끼리가 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외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은 세상, 곧 배제되고 희생되는 사람들이 없는, 지금의 경쟁구도에서 낙오되고 벗어났다고 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 세상을 기대하고 연대하고, 행동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짓밟는 이 구조를 조금은 인간답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의 이 경쟁구도에서 힘겨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도, 당신이 못난 사람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단지 이 구조가 누군가를 낙오시키는 구조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한세욱 목사>

 

[믿는다는 것]

 

기독교 신앙이 근본으로 내세우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확신으로 내세우는 성서구절 하나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117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헬라어 원문에는 오직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아마 이런 번역의 차이는 면죄부 판매와 같이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의미를 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로마서 43절의 말씀도 오직 믿음을 강조하게 된 칭의론의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성서에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원래 바울이 한 말이 아니라 창세기 156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럼 창세기 156절엔 어떻게 되어있는지 보겠습니다. 공동번역은 그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해서 개역개정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로마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긴 것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실제 히브리어 원문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아도나이)을 믿었고, 아브라함이 그 하느님을 ’(쩨다카)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번역입니다.

 

교회의 전통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여기고, 그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믿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근거로 인용하고 있는 성서본문에 대한 이해가 과연 올바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 곧 정경(canon)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어제까지 굳게 믿어왔던 신앙의 고집이 아니라, 오늘 새롭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다시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중세 교회처럼 종교적인 자기만족으로, 입으로만, 헌금으로 신앙생활을 다 한 것처럼 여기는 세태에서,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믿습니다고 말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공의로운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신앙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 거듭남]

 

니고데모와의 대화이야기(3:1-15)는 불과 15절 분량의 짧은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요한 공동체가 파악한 그리스도교 복음의 본질을 유대교 및 헬라철학과 차별화 시키면서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거듭나야만 한다고 합니다. ‘거듭 난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겐네테’(γεννεθη)입니다. 이는 3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다시 태어나다’, ‘새롭게 난다’, ‘위로부터 난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의의 뜻이 밝히고 있듯이 하느님 나라는 초자연적 기적이나 표징을 따르거나 믿는 것은 아무의미가 없다는 비판임과 동시에, ‘거듭났는가?’, ‘새사람이 되었는가?’와 같이 본질적인 자기 혁명에 대한 여부가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거듭 난 자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자가 됩니다. 여기에서 본다라는 단어 에이데인/ 에이도스’(ιδειν / ιδος)는 그리스적 사유전통에선 본질을 직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히브리적 사유전통에서는 경험해서 나오는 통전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하느님 나라는 유대 전통에서의 기대처럼 의인들이 들어갈 미래의 왕국이라기보다,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는 것, 실재를 경험하여 완벽히 알 수 있는 것으로서, 하느님 나라가 철저히 현재화되고 실존적인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대한 요한공동체의 실존론적인 이해는 피안적이고 비밀스러움으로 왜곡된 하느님 나라 이해를 새롭게 열어 줍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구원이해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물론 성서가 증언하는 묵시적이며 내세적인 구원이해도 있지만, 현세적인 억압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적인 성격 역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개인적이고 영적인 구원이해로부터 공동체적이고 정치-경제적인 구원이해로 전이시키게 해주고, 그것이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땅에 든든히 뿌리박게 하기 위한 소중한 사명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연된 종말론과 생활신앙운동]

 

우리는 엄혹한 시절을 뚫고 민주화를 이뤄내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민주화라는 것이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인권, 생태 등등 더 높은 차원의 민주화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불의하고 억압적인 체제가 저 밖에 어디에선가 나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나의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구조화되고 체계화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인 <코끼리 구하기>는 고도로 구조화되어버린 그리고 일상에 깊숙이 내재화되어버린 시스템을 직시하고, 대안을 넘어 혁명적인 가치로 전복되는 것을 꿈꾸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사회와 관련시켜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일상의 새로운 구성을 꿈꾸는 장구한 변혁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행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이루어지는 장구한 변혁’(레이몬드 윌리암즈)을 꾀하는 운동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현실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치지 않고, 평생을 운동적인 삶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학생, 청년시절을 통하여 자신이 평생토록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영역을 경험하고 발굴하고, 전문화시켜나가며 이것이 자신의 신앙과 동떨어지지 않는 기초와 토대를 마련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일상과 신앙이 괴리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운동을 생활신앙운동이라고 명명하고자 합니다.

 

본디 신앙이라는 말이 일련의 믿음과 확신일 뿐 아니라, 믿는 것에 대한 결단력 있는 행동과 지속적인 태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신앙은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신앙이란 일련의 움직임으로 이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말이나 언어로 표기되지 않는 나의 표현, 나의 태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등을 통해 우리 삶의 대안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기는 그 날까지]

 

우리는 지난 금요일 아침을 그 어느 때와는 다르게 맞이하였습니다. 집에서, 일터에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맞이하였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이렇게 불러볼 날을 얼마나 꿈꿔왔는지 모릅니다. 조금 의아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끝까지 하야하지 않고 버텨주어서 감사합니다. 야훼 하느님이 파라오의 고집을 꺾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녀의 고집을 꺾지 않으시어 역사상 최초로 파면당한 대통령으로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그간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위기 앞에 좌절하지 않은 모든 촛불들을 위로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헌법수호의 의지와 정치적 폐습들을 청산하기 위한 의지를 표명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간 매서운 추위를 뚫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사랑하는 향린가족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승리를 마음 것 기뻐합시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싸움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는 탄핵과 함께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어설픈 국민통합론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나치부역자 숙청 반대 여론에 맞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박근혜씨의 탄핵은 세월호 7시간 논란에서 비롯된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세월호의 진실은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마지막 하나는 지난 4, 이 불의한 힘과 권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활고에 세상을 등진 송파 세 모녀들을 기억합시다. 국가와 한전의 폭력과 계략에 맞서다 희생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기억합시다. 삼성에서 일을 한 것이 잘못이었던 노동자들을 기억합시다. 컵라면 한 개를 끝내 먹지 못하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이에서 숨졌던 청년을 기억합시다. 여성비하와 혐오가 저지른 살인, 화장실에서 숨져야했던 그녀를 기억합시다.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한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끓을 수밖에 없었던 고 한광호 동지를 기억합시다. 민중의 지팡이가 휘두른 공권력에 희생된 고 백남기 농민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신음하는 이들과 하느님의 피조세계를 위해 기도합시다. 저항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 그 길에 조금 더 힘을 냅시다. 믿음이 이기는 그 날까지 우리의 싸움은 끝이 아닙니다.

 

역사의 슬픔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생명의 등불을 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교단의 큰 스승님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는 믿음은 미래를 향한 전적인 모험이요 행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낡고 죽은 가치들을 회복시킬 움직임은 새로운 시대의 주역들이 등장할 때 현실화됩니다. 깨어있는 신앙인들의 생명과 평화를 일구기 위해 일하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가 지닌 빛을 더욱 소망하게 합니다. 어둠이 빛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을 안고 모험을 하는 신앙인만이, 이 세계에 생명과 평화의 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정 가운데에서 우리는 혼자, 그리고 또 함께 길을 나서게 될 것입니다. 늘 혼자 하고 있다는 소외감이 늘 따라다닐지 모릅니다. 나 혼자라는 외로움도,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감도 넘어서 위협과 유혹으로 다가오는 것들에 솔직해지고, 그 긴장을 오래참고, 이를 풀어가는 집요한 과정 속에서 마침내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청년주일을 맞아 새로운 믿음으로 일어선 여러분의 신실한 발걸음에 의해서, 어둠을 이기는 생명과 평화의 복음이 회복되고 널리 전해지기를 기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