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신학 (3:1-8, 4:9-16, 3:31-36)

 

[교리에서 사건으로]

이번 주에 우리 교회는 정신적인 기둥이 되는 두 분을 추모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홍근수 목사님의 4주기 추모기도회를 가졌고, 오늘 오후에는 안병무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어가고자 강연회를 갖게 됩니다. 홍목사님의 통일신학과 안선생님의 민중신학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교리보다는 사건에 주목하는 사건의 신학입니다.

사건의 신학은 믿음의 지혜를 종교적 교리에서 구하지 않고, 생동하는 역사의 사건 속에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하는 신앙을 요청합니다. 이분들의 가르침이 요즘에 더 그리워지는 것은 한국교회가 깊은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우리 교단에서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신대학교 신학과 학생 34명이 집단으로 자퇴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퇴행적인 모습을 더해가고 있는 교단과 교회에 대한 젊은이들의 필사적인 저항이요, 기장의 교단 정신과 한신의 학문 정신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물 곳이 없다는 학생들의 상징적인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이 저에게는 마치 오래 전에 있었던 사건의 대자뷰(déjà vu)처럼 느껴졌습니다. 기장이라는 교단이 진보적인 정신을 표방하며 생겨난 때가 우리 교회의 창립년도와 같은 1953년인데, 그것을 촉발한 계기가 이번 사건과 같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이었습니다. 1947년에 있었던 그 사건은 이번 사건과 겉모습은 유사하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이긴 합니다. 평양신학교에서 근본주의 신학을 배우다가 편입한 학생들이 조선신학교에서 진취적인 학풍을 형성해가려고 애쓰던 스승 김재준 목사를 교단총회에 고발하면서 벌어졌습니다. 보수적인 그룹은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는 교단정치를 발휘하였고, 결국 그를 지키려는 진보적인 그룹과 갈라져 한국장로교가 분열되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있었던 학생들의 집단자퇴는 70년 전 학생들의 집단고발과 정반대되는 것이기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당시에는 진보적인 교단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진보를 표방해온 교단의 위선과 실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결국 종교개혁 오백 주년을 맞으면서도 총체적인 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한 단면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실패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정신의 왜곡과 타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힘의 복음을 숭상하고, 근본주의적인 교리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정신의 무능으로 인해 교회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의 실패는 사건의 신학이 아니라 교리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교리만 외친다면 어떠한 탐욕이라도 긍정해주는 정신의 편법이 기승을 부리고, 교리에 입각하여 배타적 증오를 거룩한 열정으로 해석하는 불길한 도덕성이 힘을 발휘하는 교회, 이런 교회에서는 더 이상 예수를 만나기 어렵게 되었고, 새로운 생명사건을 일으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문제점을 깊이 느꼈던 신앙인이 안병무였습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현존(現存)’ ,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면, 현재 그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 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교리가 아닌 사건에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보는 신학적 교리로써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으며,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냐?’하고 누구냐만 물어요.... 그러나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느님도 사건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인격으로 본 것은 틀렸다, 잘못 본 것이다!... ‘사건으로서의 예수’, 예수사건으로서 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니까 역사적 예수에게 접근하는 큰 신작로가 열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민중신학 이야기], 25-26)

사건속에서 예수를 만나고자 했던 안병무는 마침내 이런 선언을 합니다.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이 말은 역사 속의 십자가 사건, 즉 민중사건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 신학의 사명이라는 선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민중사건과 분리시켜왔던 신학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안병무의 사건의 신학은 고난당하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신앙이요,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오늘의 사건 속으로 뛰어드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사건의 신학입니다.

 

[신비롭고 거룩한 해방의 사건, 출애굽기 31-8]

오늘 출애굽기 본문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세 이야기, 모세의 소명기사(召命記事)입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가 장인의 양을 치는 목동생활을 할 때 한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 사건은 너무도 신비로워서 2절을 보면,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고 표현할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실제로 본 광경은 불꽃으로 나타난 천사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놀라운 광경이라고 생각하며 가서 봤던 것은 연약한 떨기나무가 불꽃을 견뎌내는 장면이었습니다.

떨기에 불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았다는 이 표현에 대해서 신학적인 의미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가장 연약한 것이 지니고 있는 강한 생명력에 관한 이야기요, 그 연약함은 모세가 앞으로 구원해야 할 노예들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온 사건의 전개를 보면, ‘떨기나무 불꽃의 신비로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보다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게 하려는 유혹이나 미끼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의 불꽃이라는 놀라운 광경을 보려고 갔지만, 그가 불타는 떨기에서 경험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에게 일어난 진정으로 놀라운 사건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야훼께서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자, 모세가 응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 부르심과 응답의 만남을 통해서, 히브리 성경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하느님의 약속이 선포됩니다. 그것은 7-8절에 나오는 말씀,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해방하여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해 내겠다.’는 약속입니다.

앞에 나오는 5절과 6절은 그 약속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안전장치에 해당합니다. 5절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자리를 거룩한 자리로 선포하는 것이요, 6절은 신의 정체성을 소상히 밝힘으로써 그가 하는 약속이 신뢰할만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야훼는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하고 말합니다. 무엇이 거룩하다는 말일까요? 히브리어 코데쉬/카도쉬’(qodesh/kadosh)거룩(holy)’이라는 뜻과 분리(apart)’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는 거룩한 땅이다. 가까이 오지 말아라하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렇게 구별되고 분리된 것에서 거룩을 느끼는 종교적 정서는 배타성을 강조하는 종교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종교는 배타적인 공간을 중시하는 성전중심주의와 배타적인 직분을 강조하는 사제중심주의, 그리고 배타적인 지식을 강조하는 교리중심주의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5절 말씀은 뒤에 나오는 약속의 말씀과 연관하여 읽어야 합니다. 5절의 거룩한 땅7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이 표현되어진 자리로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종교적 거룩이란 배타적인 언어가 아니라 연민/자비의 언어가 될 것입니다. 그런 감각을 가진 신앙은 가장 자비로운 것에서 가장 거룩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에 더욱 필요한 신앙은 자비의 신앙입니다. 하느님이 거룩하다는 성경의 표현을 신에 대한 공포가 아닌 신의 자비로움으로 읽어내는 신앙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6절에 나오는 특이한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6절에서 야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자신이 실은 조상들에 나타났던 신이었다고 말입니다. 모세가 등장하기 전까지 하느님의 이름은 /로힘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 야훼가 바로 조상들에게 나타났던 신 엘로힘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종교문화사적으로 볼 때, 야훼라는 노예해방의 신과 엘로힘이라는 가나안의 신이 서로를 받아들여서 하나로 동화되는 현상인 종교 습합(習合)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성경에 흐르는 하느님의 강에서 나타나는 신의 혼합 현상입니다. 성경은 이런 종교혼합주의를 감추지 않고, 태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이렇게 신의 구별조차 사라지는 지점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왜 서로 다른 이름의 신들이 대결하기보다는 서로에게 스며들어가며 합쳐지게 되는지, 도대체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은 그런 놀라운 현상을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 해답은 7절에 있습니다. 야훼라는 신과 엘로힘이라는 신의 구별이 사라지는 곳은 바로 신의 연민/자비가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신의 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내 백성이 당하는 괴로움을 보았고, 그들이 억압받으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의 연민을 표현하는 신은 마지막 8절에서 자비로운 약속을 선사합니다.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억압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약자들에게 주어지는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약탈하는 제국주의 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변론이 된다면,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정복욕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의 약속을 악용해온 힘의 복음은 교회에서 폐기돼야 합니다. 또 그런 힘의 복음을 욕망해온 신앙은 먼저 자신의 정신과 몸뚱이에 얽혀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무엇이 신비로운 사건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거룩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신앙의 주체로서 하느님 앞에, 히브리서 49-16]

오늘 히브리서 4장의 본문은 거짓과 위선을 벗고 하느님 앞에 바로 선 신앙인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먼저 참된 안식을 누리도록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이 권면을, 왜 달려가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정신없이 질주하는 삶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의 문명은 자유와 평등에 관한 민주주의의 꿈마저도 이기적인 방식으로 소비하고 맙니다. 한 철학자는 평등이 주장의 이기심이 되고, 자유가 무응답의 이기심으로 작동하는 우리 시대의 세속성을 비판합니다. (김영민, [동무론], 249) 왜 그러합니까? 괴로움을 당하며 부르짖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을 잃고, 자신의 욕망을 소비하는 일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주장하기 위해서 평등이라는 가치를 소비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기 위해서 그 고통에 응답하지 않아도 될 자신의 자유를 강조하는 정신은 분명 병든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비의 정신으로 우리 시대의 문명은 치유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본문 12절은 하느님의 말씀이 어리석지 않고 지혜로우며, 아둔하지 않고 날카로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고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언어가 동원되었더라도 거기에 자비대신 욕망이 번뜩인다면, 그것은 거짓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신비한 사건이 증언된다 할지라도 사랑이 아닌 증오가 조장되고 있다면 그것 역시 종교의 기만에 가까울 뿐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권고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자리로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앞에 바로 선 주체적인 신앙인의 정직한 삶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흔히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으로 침식되곤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찾는다 하면서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 상실이 아니라 자기 분별을 요청하고, 그 분별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생명의 행로를 뚜렷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영성은 단지 자기만족이나 자기발견 자체에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하느님의 평화를 뚜렷하게 보는 것입니다. 평화를 향한 수많은 길 가운데 예수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교리에 앞선 사건에 주목해야, 요한복음 331-36]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은 알쏭달쏭합니다. 성경에 따라서는 이 말씀을 세례요한의 설교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새벅역, NIV), 따로 떼어내서 읽기도 합니다 (공동번역, NRSV).

이 본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한복음 316절 말씀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주의적 오용 때문에 가르침의 빛을 잃곤 했습니다.

특히 본문 36절에 나오는 표현이 근본주의 신앙의 배타성의 눈으로 읽혀질 때는 하느님의 저주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난처한 문제가 생깁니다. 36절 말씀,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적 수사학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짙게 깔린 근본주의 신학은 이 말씀을 증오의 교리로 삼곤 합니다.

왜 성경의 말씀이 한국교회에서는 저주와 증오의 교리로 변질된 채 유포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감을 잃어버린 종교가 앓고 있는 정신의 질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절망과 허무주의에 빠질 때, 그 죽음의 질서 위에서 독버섯처럼 번성하는 정신이 근본주의입니다. 사회적 유대감이 깨지면 약자들은 손쉽게 짓밟히는 반면 기득권자들의 이해관계는 특권처럼 보장받게 됩니다. 그런 암울한 질서가 고착되어서 더 나은 세계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잃을 때, 허무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포획해가는 사상이 근본주의입니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이후 사회적 안전망이 무너진 고통의 시대로 변해가면서, 한국사회에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단 정치적 근본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사회는 지난겨울의 촛불혁명을 통해서 지난 이십여 년간 암약해온 정치적 근본주의를 권력에서 몰아내고 이제는 자유한국당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놓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종교적 근본주의가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교회가 유대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공주의의 포로가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정신을 잃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 절망과 어둠이 깊어서 데카당스에 빠진 느낌마저도 듭니다. 이 어둠의 병상에서 질러대는 열띤 신음소리가 증오와 배타성의 교리입니다. 그런 교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은총의 사건을 보지 못하는 근본주의라는 사상적 자폐증이 지어낸 관념입니다.

 

[교리의 문자가 아닌 역사의 사건에서 되살아나는 믿음]

하느님의 은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적 어법들 이전에 존재하는 해방과 은총의 사건에 주목해야 합니다. 안병무의 사건의 신학이 가르치듯이 우리는 교리 이전의 사건에 주목해야 합니다. 잘못 기능하는 교리를 치료하는 길은 단지 그것을 희화화해서 뒤집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의 모든 기제를 헛되도록 만드는 창조적 긍정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A. 바디우,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40) 그것은 현재의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건을 통해서 신학을 새롭게 전개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의 진실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눈을 뜨고 이 역사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봐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빼앗기고, 밀려나고, 진압되고, 배제되는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믿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믿음을 새롭게 지어내기 위해 외로운 망루에 오르고, 보루를 쌓는 땀을 흘리며, 마침내 평화의 진지를 구축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시대 속으로 그리스도가 부활합니다.

교회가 살아갈 길은 오늘의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사건을 찾고, 그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름에 응답하기 위하여 사건에 참여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역사의 알곡을 거두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실 때, 살아있는 신앙의 모험을 통해 부름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