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카이로스의 한 해
이사야 61장 1-3절, 로마서 12장 1-8절

[시간 질적 이해]

자주 쓰는 말은 아니지만, 야누스적 인간이라는 말은 두 얼굴의 사람이라는 말로 표리부동한 인간을 뜻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야누스는 앞뒤로 두 얼굴을 갖고 있는 로마의 최고신으로 경계선을 지키는 전쟁의 신이자 모든 사물과 계절의 처음 곧 문을 여는 창조의 신입니다. 이 야누스라는 단어에서 영어 1월을 뜻하는 January가 나왔고 문지기를 의미하다가 요즘은 청소부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janitor 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January란 단어는 신 야누스가 갖고 있는 양적 시간 곧 성서의 언어로 말하면 크로노스적인 시간의 의미를 갖고 있고, janitor란 단어는 과거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질적 시간 곧 카이로스적인 시간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해라는 단어도 꼼 씹어보면 연도를 뜻하는 물량적 시간의 의미와 하늘의 해 곧 빛의 근원이자 어둠을 물러가게 하고 만물이 만물되게 하는 깸이라는 질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미 우리는 2007년도 7일째를 맞이하고 있어 이미 새날이라는 의미가 퇴색하였지만, 그러나 7일째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안식하셨다는 말씀을 떠올리면 오늘이라는 시간의 의미가 태초와 맞닿아 있고, 나라는 인생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씀과 내 안에 하느님의 호흡 곧 생명의 영이 들어와 있다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마치 샤뮤엘 베켓이 ‘고도(Godot)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생은 돌아보면 허무하지만 그러나 새로운 한해라는 의미 속에서 뭔가 내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 곧 카이로스라는 신적 간섭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하고도 막연한 기다림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한 20여 분이라는 이 짧은 시간에 저는 여러분의 삶에 뭔가 질적 변화가 있는, 이 짧은 시간 안에 영원을 담는 그런 깨달음이 있는 카이로스의 한 때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통기한]

세상은 치열합니다.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해도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고,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 되어야 할 가정 안에서 조차 사소한 일로 마음을 상하는 경우는 너무나 잦습니다. 인간의 삶에 갈등이 없고 분열이 없는 곳은 없지만, 마음을 비우라는 종교의 세계 안에서 만큼 치열하지는 않습니다. 서양 역사에는 끊임없이 종교전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승리했다고 선언한지가 3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끝날 줄을 모르고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려는 이라크 전쟁도 깊게 뿌리를 파보면 종교전쟁입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싸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믿는 신앙을 위해 형제를 죽이는 것. 이 얼마나 모순된 행동입니까? 모든 종교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신을 사랑하고 그래서 신의 자녀인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이 모든 종교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살인과 폭력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세상이 예전에도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모순이 계속되는 것일까? 생각이 그냥 자기 안에서만 머물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생각이 신념으로 바뀌고 이것에 지식이 더해지면 이는 하나의 사회지배 구조로 변하고 이것이 통치의 힘으로 변합니다. 결국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통치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학자마다 주장이 다른데 어떤 생각이 바른 생각일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그 사회발전에 봉사할 때, 그 생각은 바른 생각 참 생각이 됩니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이전 모세 시대에 율법은 그 백성과 그 시대를 살리는 버팀대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시대적 변화를 거부함으로 결국은 사람을 죽이고 시대를 죽이는 독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식품에는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적혀 있습니다. 그 기한을 지난 것을 먹으면 탈이 납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신앙 또한 그러합니다. 새해를 맞아 혹 나는 유통기한이 지난 신앙을 고수하고 있지 않는가?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하는 그래서 새로 오는 세대에게 희망을 주고 길잡이가 되는 그러한 시대에 봉사하는 신앙인가 아닌가? 성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육자이며 최대의 계몽자이지만 반면에 외면적인 현상에 집착하거나 집단이기주의로 흐를 때 종교는 인류의 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어 온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종교의 가장 근본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나의 믿는 바가 이웃에게로 귀결되지 않고 있다면 어쩌면 그 신앙은 유통기한이 지난 신앙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한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나를 보내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사회의 양극화가 문제라면 우리의 신앙 내용이 이 양극화 해소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할 때에 그 신앙은 참 신앙이 됩니다.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떤 나라에서 최상의 엘리트들만이 들어가는 대학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되는 도서가 판타지 환상소설이고 그 나라의 대다수의 국민이 부동산구입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백년해로를 약속하며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부부가 혼수문제로 이혼을 한다거나 황금돼지 띠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신화에 정신을 빼앗겨 황금도색을 한 돼지저금통장이 없어서 못 파는 사회 이런 사회는 결코 정상적 사회라 말할 수 없고 심한 정신착란증을 일으키는 정신병사회 일 것입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는 인생 최고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30억짜리 아파트에서 최고급승용차를 굴리며 매 끼니마다 새로운 음식을 먹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최고의 행복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더불어 자신의 깊은 속내를 얘기할 수 있고, 그리고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지상의 것을 빌려 쓰고 지나갈 뿐이다. 생에 대한 겸손함과 순결성의 힘만 있다면 누구도 결코 가난하지 않다. 지금 어려운 시대에 힘겹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직 남아있는, 어쩌면 자신이 이룬 몇 안 되는 진실의 알갱이인 최소한의 현실을 소중히 붙들고 빛이 나도록 닦는 일로부터 다시 시작하라고.”(전경린의 ‘붉은 리본, 96쪽에서)

모든 생의 장면에 ‘나’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돈과 명예 아무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함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나’를 바로세우는 일에 애써야 할 것입니다. ‘나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의 실패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전 오늘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새로운 시대적 부름 나를 통한 하느님의 부름을 깨닫는 한해,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한해, 내적으로 한해 더 젊어지는 한해 곧 카이로스적인 한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 거룩한 제물로 우리들 자신을 드리는 예식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다시 다는 예식을 갖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십시오.”

그런데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생각만으로는 부족하고 결심이 필요하고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앉아서 드리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하고 행동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생애에서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 우리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우리가 얼마나 실천하며 살아가는냐?에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자와 실패자를 가르는 것은 그 사람의 가진 지식이나 IQ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실천에 있습니다.

주보에 나눠드린 십자가 고백의 글 뒷면에 보시면 올 한해의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을 적게 되어 있고 올 한해 동안 다짐하는 실천 3가지를 적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거 해보았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그걸 확인하고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큰 변화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한다는 말씀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담임목회자로서 하느님을 대신해 여러분에게 바란다면, 그것이 작심삼일이 된다 하더라도 실천 다짐을 한번 적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사도바울로께서 권고하는 대로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큰 목표는 정하지 말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목표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여러분의 내적인 신앙 성장을 위한 한 가지 다짐을 적으시기를 바랍니다. 성서배움마당 하나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셔도 좋고 그럴 시간이 없다면 하루 30분이라도 성서를 읽고 기도하겠다는 다짐을 적으셔도 좋습니다. 가능한대로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도 좋습니다.

헌금을 바르게 함으로 감사의 생활을 하겠다는 다짐도 좋습니다. 헌금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 3년반동안 거의 말하지 않았지만, 헌금은 얼마만큼 드려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드리는 헌금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정성이 되려면 헌금 액수에 마음의 부담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물을 받을 때에 그 물건의 값어치를 통해 드리는 분의 정성을 가늠합니다. 너무 정성이 없으면 받고나서도 뒤가 찜찜합니다. 내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여러분의 마음에 얼마마한 부담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 하느님도 그만큼의 부담이 있는 것입니다. 부담 있는 헌금을 하는 것이 아마 가장 어려운 실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김태준집사님의 증언을 통해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북의 형제를 위해 그냥 헌금이 아니라 하루 한 끼를 굶고 드린다는 그 정성에 우리는 모두 감복하였습니다. 아마 북의 형제들이 그 얘기를 들었다면, 밥숟가락 넣기도 전에 배가 불러올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 이런 정성이 깃들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과부의 동전 두푼이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남보다 많이 갖는 길입니다. 이 길은 세상이 제시하는 길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줄 알고 그 길을 좇아갑니다. 두 번째 길은 욕망을 줄이는 길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욕망을 줄이는 길에도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절제를 통해 욕망을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욕망을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욕망을 남에게 준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여러분이 소유하고 싶은 값비싼 물건이 있다고 합시다. 일단 그 물건을 산 다음 바로 그 물건을 남에게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미 그 물건으로부터 해방을 받게 되고 동시에 남에게 값비싼 물건을 선물하는 부자가 된 것입니다. 많이 가져서 부자가 되는 길, 많이 줘서 부자가 되는 길, 그 선택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첫 번째 항목에다 ‘많이 주자.’ 그렇게 쓰셔도 좋습니다.

두 번째는 실천다짐입니다. 배움과 실천은 함께 가야 합니다. 2주 후에 발족하는 평화나눔 작은공동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시면 좋겠습니다만, 반드시 그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픔을 당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 실천이면 됩니다.

세 번째는 교회 안에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여러 해 다녔지만, 같은 신도회나 구역이 아니면 별로 대화도 없고 그냥 스쳐지나가는 교우들이 많을 줄 압니다. 한 달에 한명씩 주일만이라고 보다 집중적으로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는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는 기도의 고리라는 이름으로 3명씩 짝을 지어 3개월간 서로 만나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해보았습니다. 한 달에 한번은 그 세 사람이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해서 서로를 깊이 알아가도록 했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면 불편해서 교회 나오지 않으실 분도 있을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을 자기 편한대로 살고 간다면 인생의 깊은 맛을 모르듯이 신앙 또한 내 원하는 대로만 믿으면 신앙의 깊은 맛을 모릅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어색하더라도 자기의 한계를 넘어 새로움에 도전할 때 거기서 깊은 맛이 우러납니다. 오늘 사도바울로가 말하는 은총의 선물을 보면, 봉사가 있고 가르치는 일이 있고 격려하는 일이고 지도하는 일이 있고 자선을 베푸는 일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함께 어울려지는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세례나 성찬의 예식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순종하겠다는 군인으로서의 맹세와 예수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눈 혈맹의 동지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단지 일신상의 행복에 둔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허망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심장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분에 대한 봉사라고 한다면 그 순간부터 인생은 끊임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3가지 다짐이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신 분에 대한 봉사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007년과 카이로스]

올해는 제 개인적으로는 목사 안수를 받고 20년이 되는 해이고, 국내적으로 6월 항쟁 20돌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만 18세 철모르는 시절 신학의 문을 두들긴 지 15년만인 1987년 12월 만 33세에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이면 바로 이명이 되지만, 목사 이전 단계에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다 마쳤던 목사후보생의 3년 과정과 목사 시험을 다시 치루어야 했습니다. 미국 학생들조차 반 정도가 떨어지는 목사 시험에 합격하고 아이 둘을 가진 성년에 그것도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부모님께서 수십 년 동안 기도해온 일이 이루어졌으니 그 감회라고 하는 것은 저의 개인의 삶이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나이 33세라는 숫자를 생각하면서 예수께서 33세에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치셨으니, 나의 목회는 그분의 목회를 이어가는 목회와 삶이 되어야 하겠구나 하는 속다짐을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시 성전의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셨고 저는 제도권 안의 교회 안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근본적인 차이는 있습니다만, 그러기에 저는 더욱 교회라는 제도권 안에 머물면서 또 항상 제도권 밖 사회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제도권에 매이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제 목회 20돌을 맞이하면 다시 저의 초심의 자세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1987년은 동시에 국내적으로 보면 군사독재의 맥을 끊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해이고 민주노조가 출발한 해이고 시민운동이 활발하게 시작한 해입니다. 6월이 되면 6월 항쟁 20돌을 기념하는 일들이 많아지겠지만, 향린교회 또한 이 6월 항쟁과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호헌철폐와 민주헌법 쟁취의 열기로 온 나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5월 27일,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조직화하고 이끌어갈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바로 이 아래층 유년부실에서 기습적으로 결성된 것입니다. 당시 본 교회 교우였던 안병무선생님과 박영숙선생님이 공동대표로 참여했지만, 향린교회가 선택된 이유는 중앙정보부의 눈길을 피한 지도부의 당일 아침 결정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우연의 선택이었지만, 지금 저는 이는 향린교회로 하여금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도록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필연의 손길이었다고 이해합니다.

저는 모든 교우들이 향린교회의 현실참여적이고 사회참여적인 교회 활동에 동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동의하지 않고 또 그래서 저 또한 그 뜻을 접는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예수님의 활동은 분명히 현실참여와 사회참여의 목회활동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정치지배세력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사회의 지도층을 매섭게 비판하셨다는 사실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서 밖의 예수를 믿겠다면 할 말은 없지만, 우리가 성서 안에 계시된 예수님을 믿겠다면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우리의 갈 길은 분명합니다.

[오늘의 남한 사회를 향한 우리의 각오]

한겨레신문은 4일자 신문 전면에서 6월 항쟁을 돌아보며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외피는 갖췄으되 진정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가 완성도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지, 민주노조라는 외피는 갖췄으되 노동운동이 노동자로부터 외면 받는 연유는 뭔지, 전교조라는 굳건한 교사운동이 자리 잡았으되 참교육의 이념은 제자리걸음인 이유가 무엇인지, 시민운동은 화려했으되 시민들의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지?‘ 이런 질문을 던지고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 기사를 실고 있지만, 아무리 읽어보아도 답은 보이지 않고 기사 내용은 핵심 근처만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왜 질문은 잘 던져놓고 그 핵심의 근처에서 맴돌고 있는가? 그건 실상은 예수님이 하셨듯이 오늘의 신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자본주의가 갖는 모순을 비판해야 하고, 인간이 갖는 향락 본능을 비판해야 하고, 민족의 분단에 양극화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 하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뭔가를 두려워 한 나머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맹점을 드러내고 높은 세금을 통해 부자들의 사유재산을 제한하는 유럽식 사회주의를 주장해야 하고, 인간이 갖는 쾌락의 본능이 한이 없으니 도박이라든가 술집이라든가 향락산업을 제한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간 개인의 자유권의 침해 나아가서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부동산과 사교육의 문제 바닥에는 나만 살겠다는 이기주의가 몸 사리고 있고 이 몸 사림의 바닥에는 북한이 우리를 침공할 것이라는 공포가 몸 사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얘기해야 하고 남침이 정말 가능한지를 확인하자고 주장해야 하는데 그걸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살고 있으시다면 남과 북을 다니시며 화해운동을 하셨을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외치셨을 것이고, 바리새 율법주의자들을 대신해서 오늘의 분단주의자들과 사두개인들과 헤롯당원들을 대신해서 오늘의 친미군사대국주의자들과 끊임없이 논쟁하며 싸우셨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들어가셔서 그들의 믿는 바를 바꾸도록 깨우침을 주셨듯이 북한을 향해서도 깨우침의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삶속에 그 행동 속에 그 결단 속에 우리가 사라가야 할 삶의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요 돌밭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끝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이사야는 그 끝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주어라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어라. 침울한 마음에게 찬양이 울려퍼지게 하여라. 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하여라, 야훼가 자기의 자랑거리로 손수 심은 것. 한해를 여는 첫 주일 저는 향린의 또 다른 이름이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 될 것임을 알고 기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 선언]

신앙이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나의 원하는 바를 신이 갖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이룩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이를 확인하고자 다시금 십자가를 답니다. 이제 여러분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여기 십자가가 있는 곳까지의 길은 우리들의 골고다 언덕입니다. 내 생명이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저 앞으로 나아가 자기 십자가를 다시기 바랍니다. 이 몸을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드리오니 당신 뜻대로 사용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라고 기도하며 십자가를 다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