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1)
-평화는 함께 나누는 일-
시편 14, 1-3; 마태오 5,3-12

[CEO 시대]

성공회대 사회학 교수인 김동춘은 그의 책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에서 남한사회가 점점 기업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시이오 시장, 시이오 총장, 시이오 목사, 시이오 대통령.... 기업 최고 경영자를 일컫는 영어 줄임말 CEO는 남한의 모든 영역에서 모범이자 모델이고 표준이자 이념이 되어가고 있다. 지방 자치단체를 운영하는 일에서부터 국가와 정부를 통괄하는 일까지, 학문의 전당을 책임지는 일에서부터 사람의 영혼을 돌보는 일까지 모든 것이 ‘기업경영’을 이상형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 함정은 없는가. 혹시라도 기업가의 피리 소리를 따라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한겨레 18.0 2쪽 2007.1.12)

물론 김교수는 단지 시장경제에 기초한 사회가 기업사회가 되는 것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아니고, 시장이 사회로부터 분리돼 나와 자율적인 것이 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를 식민지화해가는 오늘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남한 사회는 차기 대통령은 시이오 형이어야 한다는 것이 주된 여론이고, 노조활동은 기업경영에 방해물로 간주되고 있고, 국민, 시민, 주민이라는 말 대신에 소비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교인들마저 시이오형 목사를 선호하고 교회가 기업형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몇 해 전에는 CEO 예수라는 제목의 종교서적도 나왔습니다. 벌써 30년도 넘었지만, 현재 세계적인 대형교회중의 하나인 어느 교회가 당시 시청에서 일하던 고위 관료를 교회의 조직관리 담당자로 스카우트 해갔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현재 남한뿐만 아니라 미국 주도하의 시장경제 중심의 세계는 수 천 년 인류를 이끌어온 도덕의 기준을 바꾸어 놓아 우리들 머리 속에 정의냐? 평화냐? 사랑이냐? 하는 인간영혼을 깨우는 용어보다는 이윤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중요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예수 말씀을 따른다는 우리도 이론으로는 이런 이윤추구의 기업논리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기업논리에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우리가 지난해를 마무리 짓고 새해를 여는 정기공동의회를 갖습니다. 100쪽이 훨씬 넘는 자료집을 내어놓았는데, 여러분의 주된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 교인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지난 1년 동안 그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배우고 얼마나 신앙적으로 성숙했는가? 여기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교인은 얼마나 늘었나? 재정 상태는 어떠했나? 하는 숫자와 이윤 쪽에 주된 관심이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 우리는 ‘하느님, 당신의 은총 안에서 이 세상을 변혁하게 하소서.’라는 세계교회와 기장의 표어를 우리의 표어로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은총을 경험했고,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얼마나 자신과 가정을 넘어서 세상의 변혁까지 나아갔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주요 관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샬롬!]

저는 올 한해 우리 교회가 보다 관심하고 함께 힘을 모아나가야 할 주제를 평화로 잡았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라는 큰 주제를 따라 몇 번 더 평화의 얘기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평화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그래서 독립운동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갈릴래야의 한 마을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약 2천명의 주민들이 모두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한 흔적이 남아 있는 뼈가 무더기로 발굴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도 일본에게 35년간의 지배를 받고 투쟁하였지만, 유대인들은 우리에 비하면 훨씬 더 신앙적으로 무장된 민족입니다.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는 야훼 신으로부터 특별히 뽑힘 받았다고 하는 선민사상으로 무장된 민족이었고, 그래서 야훼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었던 신앙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다른 민족과는 달리 유대민족만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과 종교세 거두는 일 그리고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집단사회종교지배체제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정치사회적인 소용돌이는 단지 로마가 지배하는 예수님 시대에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이전 수천년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한시도 평화로운 때가 없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길목인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지리적 특성과 문화적으로는 소집단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목문화라는 이동성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는 한마디로 말하면 전쟁의 역사입니다. 먹히고 쫓기고 죽고 죽이고 끌려가는 전쟁과 폭력의 얘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중동지역에서 평화는 모든 것에 앞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 그들은 서로 만나면 뺨을 서로 비벼되며 샬롬! 평화가 있으라! 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는 우리의 인사는 조금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밤새 무고하셨습니까?’ 얼마나 외국의 침략이 잦고 사화당쟁이 심했으면 이렇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을까요? ‘아침진지는 드셨나요?’ 얼마나 고난에 찬 세상을 살았으면 어른신들을 향해 아침을 잡수셨느냐?고 묻는 말이 인사말이 되었을까요? 물에 밥 말아먹는 습관도 밥알을 씻어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급히 피해야 하는 위태한 상황이 많아 생긴 습관입니다. 중국도 일본도 같은 쌀 문화나라이지만, 그들은 이런 습관은 종이나 하인들이 하는 매우 저급한 습관으로 여깁니다. 하도 살아가는 세상이 험하다보니 마치 유대인들이 누룩 넣지 않는 빵을 구워먹듯이 후다닥 먹는 버릇이 생긴 것입니다.

국민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바꾸기가 그리 어려워 지금도 우리들은 어느 식당에 가서든 주문하고 5분만 넘으면 `여기 주문한 것 어떻게 되었느냐?‘고 재촉합니다.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느냐?고 묻지 않고 빨리 되는 것이 뭐냐고 묻는 사람도 많습니다.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는 ’빨리빨리‘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점심시간이 30분을 넘지 않습니다. 한가하게 앉아 있을 분위기가 아닙니다. 동남아시아나 유럽인들과 같이 점심시간이 두 시간 세 시간이 되고 점심 먹고 집에 가서 낮잠 한번 자고 나와 근무를 보는 그들이 우리를 본다면 아니 이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입니다.’ 서양인들은 식당에 가면 먼저 음료부터 주문합니다. 쥬스든 포도주든 먼저 주문을 받아 준 다음에 한참 있다가 와서 음식 주문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또 한 반시간 이상이 지나야 음식이 나옵니다. 음식이래야 반찬도 없고 그저 그거 하나인데, 또 그거 먹는데 이 얘기 저 얘기 또 한 시간 걸립니다.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결국 넉넉함과 여유로 말해질 수 있는데, 우리가 국민소득이라는 숫자로 세계의 일등국민이 되는 길은 멀지 않아도 문화나 습관 어떤 공공의식으로 볼 때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본래는 우리는 솥단지, 옹기 문화라 천천히 하는 문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김치고 된장이고 모두 숙성이 되어야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부터 빨리 데워지고 빨리 식는 냄비문화가 된 것입니다. 음식도 급하고 운전도 급하고 지하철도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밀고 들어옵니다. 기다림의 문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요즘 대통령 임기 개헌 논쟁이 한참입니다만, 저는 국민의식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그 개헌의 정당성은 둘째하고, 딱 세 번, 십 몇년 하고 말 일을 왜 바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5년 단임이든 4년 연임이든 장단점은 다 있게 마련인데, 그래도 한번 바꾸었으면 한 50년 백년 해보고 이제 좀 바꿔보자. 이래야 바람직한 진득한 국민의식이 형성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에서 평화로 번역되는 샬롬은 우리가 말하는 평화라는 단어보다는 함축하는 내용이 훨씬 더 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샬롬을 평화로 번역하지 않고 완전 혹은 온전으로 번역합니다. 영어로는 peace 보다는 wellbeing이 되는데, 요즘 우리말의 웰빙은 장수식품에만 연관된 너무 천박한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 랍비는 샬롬의 개념을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샬롬은 단지 전쟁이 없는 적대감이 그친 상태만은 아니다.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군인이 집에 돌아간다고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전쟁이 없는 상태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이다. 평화는 그 어떤 것의 부재라기보다는 있을 수 있는 것을 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 일한다함은?]

예수님 또한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평화는 그 무엇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닌 우리가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그 무엇을 말합니다. 평화는 그냥 앉아서 기도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 앞뒤에 나와 있는 말씀 속에 나와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슬퍼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기 위해 일할 때에 평화가 오는 것이고 그제서 비로소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너는 하느님의 딸이 되는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라고 하는 인간상이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의 윤리도덕 실천 사항은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선언입니다. 폭력과 보복의 법칙에 반대하고 사랑과 용서의 법칙을 위해 결단하고 하느님의 나라 도래에 대한 확신 속에서 만이 실현되는 새로운 인간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 교사들은 세계 없는 구원을 가르쳐왔습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과 무관한 구원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민중들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리고 나아가 그 땅의 치유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수님 말씀 가운데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을 들라고 하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은 특별한 몇몇 신앙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대부분은 불가능한 이상적인 얘기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만이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원수 사랑은 단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모른 채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원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미워함으로 폭력으로 그를 꺽어 누르거나 아니면 사랑으로 용서하고 품에 안는 두 길 외에는 없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미워하면 폭력을 사용하여 이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남한사람 50명이 죽는 대신에 북한 사람 백 명을 죽이는 전쟁을 한다면 결국 이기기는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의 승자 없듯이 남은 것은 민족공멸입니다.

그래 원수사랑은 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결코 없앨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수가 죽는 날 우리 또한 죽기 때문입니다. 연못의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싸워 한 마리가 죽으면 그 죽은 시체로 인해 남은 물고기도 결국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 원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원수를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원수가 죽는 순간 나도 죽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9.11테러에 복수를 하고 그 테러의 뿌리를 뽑고자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시작하였지만 결국 4년이 되도록 더 많은 원수를 만들어내었고 후세인을 사형시켰지만 더 많은 후세인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사막에 뿌리를 두고 살아온 집요하고 끈질긴 아랍의 국민성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래 부시는 더 많은 군대를 보내 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말하지만 이는 오히려 더 많은 민간인 피해자와 더 많은 원수를 만들어내고 말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보도에 의하면 이라크 주둔 미군의 30%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이라크 미군들의 자살률은 첫해보다 거의 두 배에 이릅니다. 미8군에 근무하는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현재 남한에 주둔하는 미군들도 외출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 가둬둔 상태에서 북한의 핵전쟁의 공포만 심어주어 정신병 환자가 계속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무력으로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을 쓰는 사람은 폭력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가끔 교회 목사님들마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얘기를 하는데, 이런 적개심은 당장에는 승리하는 것 같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결국 그 자신을 안으로부터 썩어 부패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빨갱이목사 심판의 날]

이번 주 한겨레21 시사주간지는 ‘빨갱이목사 심판의 날’이란 표지 제목과 그 밑에 ‘보수교회 매카시즘이 몰아친다.’라는 부제를 달아 교회에 대한 특집을 만들었습니다. 대형 보수교회들이 설교나 집회를 통해 북한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조금이라도 북한에 찬동하는 발언을 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염창감리교회 정진권목사께서 지난해 세계감리교총회 총대들에게 배포하는 한 사진책자를 편집하는 일에 책임을 가졌습니다. 외국목사님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진으로 본 분단 60년’이라는 책이 유독 남한의 몇몇 목사나 장로들에게 문제가 되어 그는 좌경목사로 몰려 교회에서 쫓겨날 위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도대체 아무 것도 아닌 제목, ‘무능력한 이승만 정권’ 1946년 당시의 대한민국을 남조선이라고 호칭하고 김일성을 김일성주석이라고 부르고 문익환목사를 게재하고 이북이 주장하는대로 정전협정을 페기하고 평화협정을 맺자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목사가 아니고 교회가 아니어도 당연히 하고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런 일에 앞장 서야 하고 용서와 사랑을 가장 큰 신앙의 가르침으로 믿는 교회라면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회개해야 하건만 오히려 이런 목사님들을 빨갱이목사로 몰아 쫓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도 말하고 있습니다. 고신신학대학원의 길성남교수는 2004년 말 좌경으로 몰려 곤욕을 치루었는데, 그 이유가 학생들에게 황석영의 <손님>을 읽으라고 한 것과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까? 보수교회 연합체인 한기총 회장 선거에서는 ‘기독교사회책임’이라는 단체에서 공개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은 노무현 정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생각입니까?’ ‘햇볕 포용정택에 대해 어떤 입장입니까?’ 길 가던 행인이 이런 질문을 들었다 하면 무슨 야당 지구당의장 선거가 진행되고 있는 줄 생각할 것입니다.

통합측 장로교신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한 이종성박사는 ‘목사들 중에서도 김정일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이비 목사들이 있다.’고 비난했는데, 북한은 유엔이 인정하는 국가이고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그 국가의 통치자인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 정권이 신앙적으로 바르냐? 바르지 않느냐? 하는 것은 시비가 될 수 있지만 통치권 자체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부시정권에 대해 신앙적으로 바르냐 바르지 않느냐는 시비는 할 수 있지만, 그가 미국의 통치권자인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은 유엔의 회원 국가인데 그럼 누가 통치권자란 말입니까? 통치권자가 없는 국가란 말입니까? 그런데 이종성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위원장을 북한의 통치권자로 인정하는 저나 세계의 수많은 목사들은 모두 사이비목사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과 감정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사이비목사로 보입니까?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고 신학이라는 최고의 학문을 평생 공부한 사람의 결론이 이렇게 나올 때 이는 남한교회의 병리현상으로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남한 교회 내에서 이런 빨갱이몰이 매카시즘의 분위기는 매우 일상화되어 있어 젊은 목사들이 자칫 진보적인 목소리를 냈다가는 교단의 영향력 있는 보수적 목사나 장로에게 친북반미 운동권목사로 찍혀 앞길이 막히기 십상입니다. 심지어는 아까 얘기한 좌경목사로 몰리고 있는 염창교회 목사 사택이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염창교회는 열린 우리당을 지지하는 좌경교회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병들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바라본 기자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문제는 다름을 인정하는 일반적인 사회 논쟁과 달리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들어 자신과 생각이 다른 타자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으려는데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와 관계없는 견해 차이들로 서로를 이단이라 욕하고 사탄이라 정죄해왔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 속에 한국의 보수교회는 사회의 민주적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반공과 친미의 논리에 갇힌 수구로 퇴락해가고 있다.”

교회는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모인 공동체이고 예배와 교육과 친교와 선교를 통해 그 말씀을 실천하고 펴나가는 신앙공동체요 실천공동체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따라 남을 대접하기를 즐겨하고 부패해가는 세상에 자신의 몸을 던져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고 어둡고 쓸쓸한 곳에 사랑을 갖고 나아가는 빛이 되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세상이 빛이 되라고 부탁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한탄소리를 듣습니다. “야훼, 하늘에서 세상 굽어보시며 혹시나 슬기로운 사람 있는지 이러저리 두루 살피시지만 모두들 딴길 찾아 벗어나서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 모두어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우리 주님 또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평화는 나누는 일]

저는 평화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한자어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平和는 균등하다는 평자와 합친다는 화자로 만들어져 있고 이 화자를 또 나누어보면 벼 禾(화)자에 입 口(구)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를 풀어 말하면 평화는 목구멍에 들어가는 쌀을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란 단체가 지난주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저희 교회 4층을 빌려 노숙자들을 위한 사랑의 손길을 펴가고 있습니다. 영등포에 사무실이 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올해 새날청년회 부장이 되신 이현숙B 교우님의 소개로 저희 교회를 빌려주게 되었습니다. 이 행동하는 양심이란 조직은 무려 6만 명이나 인터네 회원으로 운영되는 조직인데, 불과 3년 전에 한 젊은 목사에 의해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도 부임당시부터 이 근처에 있는 노숙자들을 위해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와서, 이분들의 활동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5시 너머 서너명이 와서 부침개를 만들 밀가루 반죽을 시작합니다. 7시경에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와 불판을 열 개쯤 놓고 열심히 전을 부칩니다. 굽는 사람, 싸는 사람, 물 끓이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떠들고 웃고 시끌벅적합니다.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이 분들 서로 원래 아는 사이이냐고요? 본래 모르는 사이이고 여기 와서 다들 처음 만났답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명 한명 동참한답니다. 그날도 3명인가 처음 참석을 하여 자기소개를 하더군요. 거의가 대학생이고 회사원들입니다. 교회 안 나가는 사람들도 많구요. 그래 전 250개를 다 부치더니 9시 반쯤 너댓명씩 짝을 지어 5개조로 나뉘어 뜨거운 물통과 조그만 약통과 기증받은 빵과 부침개를 들고 을지로 시청 종각을 향해 흩어집니다. 지하도 한 구석에서 종이박수로 임시거주지를 마련하고 이제 잠자리에 드려는 노숙인들을 하나하나 찾아갑니다. 이 부침개나 빵은 이분들의 저녁이 아니라 저녁 간식입니다. 이 단체에서 하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날 저녁에 그들이 하는 목적은 먹는 것을 나눠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어주는 목적이랍니다.

그리곤 한 시간이 지나 을지로 2가 대로변 코너에서 만나 처음 나온 사람들 자기 소개하고 기도하고 다음 주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거 우리 교회가 진작 했어야 할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노숙인들의 문제는 바로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구조변혁이나 통일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함께 가야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향린교회의 표어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단지 구호로 그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 여름에 제가 향린의 개혁과 영성이란 제목으로 5번에 걸쳐 설교하였고 평화나눔 작은공동체를 제안했고 그때 백 명 가까운 여러분들이 열 댓개가 되는 구체적 선교 현장에 동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속 불타오르기를 바라면서 다음 주에 평화나눔 작은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예배 후 모두 이 자리에 남아 우리의 약속대로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들 주위의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한 달에 한번 찾아가는 실천운동이고 함께 하는 분들이 이를 위해 서로 기도하고 격려하는 기도운동입니다. 한주에 한 번도 아니고 한 달에 한번이고 1년 단위로 약속하면 됩니다. 이미 젊었을 때 다 해보셨고 지금은 몸으로 참가하기 힘든 어르신들도 함께 하셔서 새로 출발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도 하시고 기도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공동의회도 중요하고 장로도 중요하고 정관도 중요하지만, 이게 더 중요한 신앙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의회도 지나가고 장로도 지나가고 정관도 지나가지만 평화 나눔은 영원하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니라.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유언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것처럼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너희가 서로 사랑한다면 너희가 내 제자임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나를 믿는다면,’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가 만일 서로 사랑한다면’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과의 관계 시작은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시작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는 종교적 신념은 시대에 따라 부단히 변화합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그리고 그 실천만은 영원합니다. 평화는 나누는 일입니다. 쌀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너무 작은 심장]

작은 바람이 말했다.
내가 자라면
숲을 쓰러뜨려
나무들을 가져다주어야지.
추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빵이 말했다.
내가 자라면
모든 이들의 양식이 되어야지.
배고픈 사람들의.

그러나 그 위로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비가 내려
바람을 잠재우고 빵을 녹여
모든 것들이 이전과 같이 되었다네.
가난한 사람들은 춥고
여전히 배가 고프지.

만일 빵이 부족하고 세상이 춥다면
그것은 비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작은 심장을 가졌기 때문이지.

장 루슬로(류시화 엮음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26쪽)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견사]

당신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당신이 몇 살인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다만 당신이 사랑을 위해 진정으로 살아 있기 위해
주위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알고 싶다.

당신이 어떤 행성 주위를 돌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슬픔의 중심에 가닿은 적인 있는가?
그래서 잔뜩 움츠린 적이 있는가?
또한 앞으로 받을 더 많은 상처 때문에 마음을 닫은 적이 있는가 알고 싶다.

당신이 누구를 알고 있고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당신이 슬픔과 절망의 밤을 지샌 뒤
지치고 뼛속까지 멍든 밤이 지난 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가 알고 싶다.

나의 것이든 당신 자신의 것이든 당신이 기쁨과 함께할 수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미친 듯이 춤출 수 있고, 그 환희로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까지 채울 수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나는 알고 싶다. 그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