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21향린교회 여신도주일 / 임보라 목사
함께 산다는 것
잠언 31 : 30-31 ; 루가 14 : 7-14

- 여는 영상 / 향린의 소리..소리.../ 황선희 집사 편집 (4분35초)

여신도 주일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1937년 제26회 한국장로교 총회에서 1월 셋째주일을 여신도회 주일로 제정한 이후, 매해 지켜왔으니, 올해로 70년째가 되는 셈입니다. 기장 총회에서는 오늘 나눌 하늘말씀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는 2007년도 기장 표어와 함께, 공동본문을 보내왔습니다만, 저는 향린교회의 상황에 맞게 다른 본문과 제목을 선택하였습니다. 또한 여신도회 주일보다는 여신도 주일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왜냐면, 여신도회가 주인이라기 보다는, 모임을 이루고 있는 여신도 한사람, 한사람이 다 주인의식을 가져야 하는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연말, 올 한해의 일정을 함께 검토하는 가운데, 여신도 주일과 남신도 주일을 굳이 지킬 필요가 있겠는가에 대한 의논이 있었습니다. 본래의 의도는 보다 의미있게 여신도 주일과 남신도 주일 등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맘으로 한 문제제기였습니다. 즉, 각기의 주일에 그저 전체적인 예배 순서를 신도회에서 감당하는 것만으로 그 주일의 의미를 새길 수 있겠느냐 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신도 주일 같은 경우, 앞으로는 보다 적극적으로 작년에 있었던 향린 여신도 한마당과 같이 신명도 담겨있고, 남신도들도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하는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축제의 주일로 앞으로 꾸려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소망합니다.

한 때 (1989년도에) 유행했던 ‘희망사항’이라는 노래를 기억하시지요?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로 시작하여, ‘내가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여자...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 나를 만난 이후로 미팅을 한번도 안한 여자...’등의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가 나온 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어가는 요즘, ‘신 희망사항’이라는 노래가 나왔다고 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사랑스런 속삭임으로 나를 깨워주는 상냥한 여자, 허겁지겁 햄버거를 먹고 있는 나를 보다 내 입가에 묻은 마요네즈를 아무도 모르게 닦아줄 여자, 내가 해준 팔 배게 힘이 들까봐 뒤척이며 팔을 빼주는 여자, 내 작은 키를 맞춰 주려고 굽 없는 신발만 즐겨 신고 노래를 못하는 나를 위해 탬버린 쳐주는 여자...’
20년 전 노래보다 더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첨가된 이 노래에, 덧붙여진 여성의 목소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날 공주처럼 받들어 줄 수 있나요 그런 남자를 평생 꿈꿔왔죠 나만을 바라볼 왕자님이면 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요...’ 저는 이 대목이 충격이었습니다. 89년도에는 그래도 ‘그런 여자에게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좋더라...’로 끝났기에 한겨레 21의 한 칼럼에서 강준만 교수가 꼬집은 대로, 돈에 관한한, 남녀평등을 지향한 노래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만 했는데, 2006년도 판인가요? 신 희망사항은, 평등은 커녕, 공주론, 왕자론이 대두되고 말았으니까요.


오늘 본문 함께 읽은 잠언은 주전 950년부터 주전 400년까지 수집되고 다듬어지고 편집된 것으로, 31장은 그 당시의 희망사항 노래가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넉넉히 벌어들이는 아내, 상선처럼 멀리서 양식을 구해오는 아내, 밭을 사도 잘 생각해서 사고, 제 손으로 벌어 포도원을 장만하는 아내, 머리가 잘 돌아 하는 일마다 잘되는 아내, 입을 열면 지혜로운 말이 나오는 아내, 항상 집안일을 보살피고 놀고먹는 일 없는 아내...’등 슈퍼우먼이 되어야 현숙한 아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여성상이 비단 그때뿐이 아닌, 여전히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성서, 특히,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들의 삶의 자리를 보면, 당시의 여성이란 대를 잇기 위해 출산을 하는 하나의 도구, 그래서, 남편의 재산목록 중의 하나정도로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산을 못하면,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한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반면, 21세기의 한국 여성들은 일부러 출산을 안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출산 장려를 위해 이러저러한 대안을 세우면서 얼마 전에는 임신에서 출산까지의 모든 비용을 무료로 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저출산은 출산비용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출산 후 양육과정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맞벌이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상황, 거기에는 양극화 현상과 더불어, 공교육의 붕괴로 인한 사교육비 부담 등등 출산비용 무료화만으로 대체될 수 없는 복잡한 상황들이 얽혀있습니다. 그동안 엄청난 군사비를 펑펑 쓰면서도 속빈 강정이긴 해도, 경제대국 반열에 있다며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것은, 작년 인권주일 때 전순옥 박사님이 언급하셨다시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남성들 임금에 반도 미치지 못했던, 싼 임금을 받고 불철주야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사회복지의 ‘사’는커녕, ‘현모양처’와 ‘일하는 여성’이라는 역할을 묵묵히 해냈던 여성들의 힘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신도 주일이니까 당연히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라는 예상을 하셨겠지요. 많은 분들이 요즘은 워낙 ‘여성’들의 주장이 강하고, 사회적으로도 많은 부분이 향상되어서 오히려 남성을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워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어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성차별이 근본적으로 없어지지 않는 한, 겉모양은 그럴싸할지 몰라도 속과 근본이 바뀌지 않은 한, 더 큰 소리로 외쳐야 할 것 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70년째 여신도주일을 지켜오면서, 분명 변화는 있어왔지만, 일반적인 사회의 흐름보다도 더 정체되어 있고, 폐쇄되어 있는 기독교회 안에서는 산적해있는 문제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근본적으로는 성서를 이해하는 눈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대부분, 많은 교회들이 성서가 씌여졌던 당시의 다양한 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없이, 너무나 문자에 얽매여 있고, 교리 중심적인 성서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시각으로 성서를 조망하는 눈은 비단 목회자 뿐 아닌, 기독인이라면 누구든지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성서를 보는 눈은 창세기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교정되어야 합니다. 여자는 남성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창세기의 말씀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다거나,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구절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구약신학을 바탕으로 한,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창세기를 들여다보면, 갈빗대를 일컫는 ‘세라’라는 히브리어는 ‘전혀 분리할 수 없는 절친한 친구나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있음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남녀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피조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시 인식하게 됩니다. ‘돕는 베필’이라는 말도, ‘에제르 케네크토’ 즉 ‘마주보면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한쪽이 맹목적으로 순종하라는 말이 아니지요. 또, 원죄 이야기도, 모든 인류의 불행은 하와로 인해 비롯되었으니 여자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는 누구나 하와가 될 수 있고, 뱀이 유혹하는 자리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였던 아담이 될 수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더 이야기를 하자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옭아매는 그 배경에는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 즉, 당시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에 대한 배경은 등한시 한 채,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매몰되어 있는 닫힌 눈 때문에 비롯된 것이지요.
여성신학, 여성학, 페미니즘 등의 말만 들어도 반감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시더군요. 이는 가만히 있는 여성들을 들쑤시는, 혹은 대가 센 여성들만이 관심 갖는 분야가 아니라, 너무도 오랜 세월 한쪽으로 치우쳐져만 왔던 시각을 교정하여 제대로 볼 수 있는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하는 여러 방법론 중의 하나입니다. 때문에 여성들만이 아닌, 남성들도 함께 관심을 갖아야 할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남성신학은 없냐, 여성신학이라는 말보다는 모성신학이 낫지 않겠냐 라는 말도 왕왕 듣게 됩니다만, 이미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성서관은 굳이 말하자면 남성신학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모성성을 내세우면서, 본래의 여성성을 희석화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여성신학 개론을 강의하고자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여성의 자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본다면 공동체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을 말합니다.
1988년도에, 박재순 선생님께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라는 책을 내시면서, 밥상공동체란 말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더욱 가까운 관계로 발전해 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언제 밥이나 한번 같이 먹지~’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밥을 같이 먹는 것은 (물론, 별 관계가 없어도 먹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관계가 일상적으로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편한 사람들, 친한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예배 후, 4층 식당에 올라가 보면, 매주 공동식사를 나누는 분들이 고정화되어 있음을 내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실에서는 구역별, 연령별, 혹은 새교우와 함께 등 공동식사를 함께 나누는 방법을 다양화하기 위해 고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신약 곳곳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도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로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당시 사회에서는 주변으로 밀려도 한창 밀려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편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편한 사람들에 속하는 사람들과 주로 밥상을 나누셨습니다. 손가락질을 받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는 당시 죄인이라고 일컬음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신약의 말씀도 그 무대는 밥상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자리입니다. 우아한 자리에 초대되어 귀빈 대접을 받으며 음식을 먹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이 밥상 공동체에서도 사람들은 상석에 앉기 위해 안달이었나 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수는 윗자리를 탐내다가 맨 끝자리로 밀려날 수 있음을 일깨워주면서 처음부터 맨 끝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는 ‘자기 낮춤’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밥상 공동체는 음식만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는 자리, 사회적으로는 엄격히 나뉜 신분과 계급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이 허물어지고 서로의 친구가 되어 주고, 동지가 되어 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가 이룬 밥상공동체였고, 이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자기 낮춤’에 대한 원칙은 더 나아가 ‘자기 개방’으로 확대됩니다. 내가 편하고 아는 사람에게만이 아닌, 오히려 남들이 안 부르는 사람들을 불러야 하는 것이 밥상 공동체의 두 번째 원칙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말이 그렇지 쉬운 일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러한 원칙에 있어서, 말에서만 그치지 않고,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기에, 이를 지켜보았거나, 혹은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이들이 그의 진심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저는 우리 향린교회가 예수가 실천했던 밥상공동체의 원형을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명동의 한 구석, 쉽게 잘 찾아지지도 않는 곳에 위치한, 밋밋한 건물로서의 향린교회가 아닌, 일주일에 한번씩 드나드는 그런 습관적인 교회가 아닌, 큰 밥상을 두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언제고 화기애애하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퍼져나가는 공동체를 그려봅니다.
그 밥상에는 80세가 넘으신 분들도 계시고, 이제 갓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도 있습니다. 또 그 밥상에는 여성들만이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남성도 함께 어울어져 있습니다. 많이 배운, 사회적인 위치가 꽤 높은 이들,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들만 모여 있어서도 안되겠지요. 우리가 이 밥상공동체에 둘러앉아있는 것은 단지 잘 차려진 밥을 먹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 빚진 것이 있는 사람들, 그럼에도 넉넉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 나라를 일구기 위해 그 출발점을 이 공동체로 잡고 여기에서부터 희망의 싹을 틔워보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지요.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 장애우 등 소외되어 있는 이들을 향린 밥상 공동체에 초대하는 것은 물론, 한 밥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저 구석에 가려져 있는 통에, 밥은커녕, 사람들의 눈길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서로를 돌아볼 줄 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앞을 다퉈서 해야 하는 실천사항이지만, 여신도 주일인 만큼, 예수의 눈길에 함께 눈을 맞추며, 앞장서는 주체가 여신도들이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차려주는 밥상을 받으려만 하지말고, 밥상을 차리느라 동서분주한 그 과정에 남성들도 주체적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사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원칙 즉 자기 낮춤과 자기 개방에서 시작됩니다. 가족과 내가 편해 하는 이들의 범주에 매몰되기보다는, 공동체를 향해 더욱더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여성이 아닌 분들도 같은 맘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나를 앞세워야 살아남을 수 있을 런지 몰라도, 하느님 나라는 내가 아닌 너를 먼저 배려할 줄 알아야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느님의 사람답게 당당하게 사십시오.
여러분들이 가는 곳마다 밥상공동체를 이루십시오. 그 밥상에 초대하기를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넉넉한 마음으로 많은 이들을 부르는데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 밥상을 통해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온 몸으로 깨닫는 한주가 되시길 빕니다.
나를 열면 네가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