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3)

생각하는 교인이라야 산다


창세기 22, 1- 14 ; 마르코 10, 46- 52


조 헌 정 목사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은 불란서의 사상가 파스칼이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 이성의 뛰어남과 육체의 연약함을 동시에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파스칼이 말하는 인간의 사고력은 단순히 인터넷을 개발해내는 과학적 사고력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조용히 혼자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의 결핍에서 시작된다.” 곧 우리는 여기서 파스칼이 말하는 생각이란 자기 성찰의 비판적 능력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별로 생각하거나 사색하지 않습니다. 아니 핑계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계속 뛰어야 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은 별로 없고 모든 것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저도 어떤 날은 교회에 나와 정말 글다운 글 한번 읽지 못한 채 5분의 기도 시간을 갖지 못한 채 하루 일과를 마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회의도 참가하고 부탁받는 글도 쓰고 여러 사람을 만나 중요한 대화도 나누었기에 결과물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날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같은 심정을 가질 때가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얼마만큼의 자기 성찰이 담겨 있는가는 스스로가 판단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건들에 둘러 싸여 살아갑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동영상으로 개개인의 사생활까지도 엿볼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얻은 따끈따끈한 정보를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자기 성찰과 영혼의 아픔이 담겨 있지 않는 얘기는 결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공허감을 갖게 합니다.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매우 매섭게 비판한 지식인으로 살았고 말년에는 자연과 더불어 일생을 마쳤던 스코트 니어링은 말합니다.

“나는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올가을 내가 비축해 둔 매발톱나무 열매와 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내가 이웃을 찾아가면 그는 어제 신문에서 읽은 세상의 최근 뉴스를 정확히 알려 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오늘 아침 빵을 먹다가 운 나쁘게도 왕겨를 씹은 얘기를 하겠습니다. 내게는 그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뉴스들은 듣기 괴로울 뿐 아니라 집주인이 내놓는 진수성찬만큼이나 진정한 대접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잘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뉴스는 동전 몇 개면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필요한 뉴스를 원합니다. 이 새로운 날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그런 뉴스들 말입니다. 즐거운 뉴스에 대해 언론이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내 버려두십시오. 우울한 뉴스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도 그들의 몫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분이 나아진다면 말입니다. 만일 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도를 숨기기 위해 발명되었다면, 신문이란 그런 나쁜 발명이 놀랍도록 발전한 형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의 삶을 신문이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스코트 니어링이 염려한 그대로 세상의 불필요한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서 한 장을 읽지는 않아도 9시 저녁뉴스를 꼭 보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 많고 눈을 뜨자 새로운 소식에 목말라 인터넷을 뒤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로운 듯 여겨지지만 마치 커다란 그물망(inter-net)에 갇혀 사는 고기와 같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함석헌]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하늘뜻펴기 시간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하늘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분으로 남한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신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함석헌선생님과 문익환목사님을 얘기할 것입니다. 두 분 다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신 바 있습니다. 노벨평화상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수상하였지만,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고 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면 이 두 분 중에 한분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는 함석헌선생 18주기가 있었고, 3주전에는 문익환목사님의 13주기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함석헌선생의 평화사상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만, 저 보다도 김종태장로님과 같이 더 가깝게 사신 분들이 계시기에 조심스럽습니다.

함석헌(1901-1989)은 한국의 간디라 불리는 20세기 한국 역사 속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동서양 고전과 현대 사상을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녹여내 매우 독창적인 한국 사상을 형성했다. 동시에 그는 실천적인 종교인이자 사회 운동가로서 종교, 철학, 역사, 정치, 사회 등 20세기 후반 한국 지성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투철한 반전 평화 사상과 비폭력주의, 이념을 초월한 민족 자주의 평화통일 사상은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지식인들에게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한국적 신학인 민중신학을 꽃피운 안병무 서남동 김용복에게 깊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고 특히 민중과 함석헌의 씨은 매우 밀접한 사상적 연대를 맺고 있다.

그는 20세기를 연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출생하여 수많은 민족지사를 길러낸 오산(五山)학교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여기서 스승 류영모선생을 만났습니다.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해 1년간의 옥고를 치뤘고 8·15광복이 되자,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1947년에 월남하여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다가 1956년부터 《사상계(思想界)》를 통해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고 사상계가 독재정권에 의해 강제폐간을 당한 이후 70년부터는 <씨의 소리>를 통해 글을 계속 썼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당국의 검열 때문에 글 중간 중간 백지로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중 1957년에〈한국기독교에 할 말이 있다〉라는 글을 통해 가톨릭의 윤형중신부와의 사상계 지상논쟁은 사회의 큰 화제거리였고 다음해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인해 투옥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 [생각하는 교인이라야 산다]는 바로 그의 글을 빗댄 제목입니다. 이후 박정희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함으로 민주저항세력의 화살촉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의 활동을 하며 수차례 투옥을 당했습니다.

18년 전 제 나이 35세에 미국 워싱톤의 한 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함석헌선생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고, 함선생님을 존경하던 많은 사람들이 추모예배를 준비하면서 저로 하여금 설교를 하여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당시의 원고가 설교집에 남아 있어 첫 부분을 인용합니다. “대체로 추모예배의 설교를 담당하는 사람은, 돌아가신 분과 생전에 사상적 동지의 유대 관계에 있었거나 실천적 행동의 영역에서 만나 함께 고락을 같이한 사람이 담당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원칙이고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 상식을 벗어나 생전에 함선생님하고는 단 둘이 앉아 깊은 대화도 전혀 나눈 적이 없는 부족한 저에게, 그분을 추모하는 예배의 설교를 부탁받았을 때. 개인 조헌정이라는 사람이 함석헌 선생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의 직분을 맡은 한 명의 목사가, 만물의 생명체 중의 하나, 그 중에서 한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오늘 밤의 제 역할을 축소한 후에야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상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 하나도 접촉점을 찾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어리석게도 그 눈길을 밖으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어느 아버지의 애절한 외침처럼 저도 발가락 하나쯤은 함선생님을 닮았다는 조그마한 발견에서, 그리고 그 기쁨에서 설교의 초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함석헌선생님의 마지막 함자 헌자와 제 가운데 이름 헌자가 같은 법 憲(헌)이라는 새끼발가락의 발톱 색깔이 같다는 보편 억지의 발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록 길이와 색깔은 달라도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함석헌선생님을 처음 알기 시작한 것은 한국신학대학을 들어가면서 1학년 필독서적의 하나였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고 나서부터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개설된 ‘동양철학특강’을 수강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신학대학 언덕길을 올라오시는 함선생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눈에 선합니다. 수업 중 2층 교실 창문을 통하여 내려다보이는 그 모습, 책 몇 권을 싸신 하얀 보자기를 한 손에 드시고, 하얀 고무신을 신고, 하얀 두루마기와 하얀 수염을 바람에 흩뜨리며 걸어오시는 그 모습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한 가르침이요, 사상이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염을 왜 기르느냐고 물으면, ‘산이 거리 있어 오른다는 산 꾼의 대답처럼, 수염이 거기 나니까 놔두는 것이지 누가 기르느냐?’고 반문하였지만, 아마도 그때 보았던 함선생님의 하얀 수염 모습이 제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 봅니다. 함선생님 자신은 수염을 어떻게 여기셨는지에 대해 글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당신께서도 신체의 한 부분으로, 얼굴의 코나 눈과 같이 애지중지 하셨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애지중지 여기셨던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 내버렸던 모습, 고려대와 한국신학대학의 휴교령에 항거하여 그 하얀 머리와 수염을 삭발하셨던 그 모습, 또한 눈에 선합니다.

오늘 우리는 고 함석헌선생님의 영전의 자리에 옷깃을 여미고 앉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우리의 비겁 때문에 같이 참여하지 못했던 그분의 생전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자 모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당신께서 이 일 때문에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아마 다시금 흙무덤을 박차고 나와 우리에게 호통을 치실지도 모릅니다. 그분의 생전의 말씀 그대로 씨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니 씨은 이미 죽음과 생명을 넘어서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씨 민주 평화]

함석헌선생님의 삶과 사상 그리고 생애를 단 세 마디로 줄인다면 [씨 민주 평화]입니다. 씨은 무엇인가? 여기서 씨의 은 고어체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 상징어 속에는 하늘과 사람과 땅이 함께 어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씨도 생명의 근본이고 도 생명의 근본입니다. 씨사상이란 무엇인가? 마치 민중이란 누구인가?를 한마디로 정의해낼 수 없듯이 씨사상 또한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씨사상은 살아 숨 쉬고 있는 씨알 생명체들의 현실태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씨알을 객관화하여 고정시킨 채 정의하기가 어렵다. 김경재교수는 말하기를 함석헌 선생은 다석 유영모선생의 생각뿌리를 창조적으로 이어내시어 씨알사상을 종교철학적으로, 정치사회사적으로, 문화인류학적으로 깊고 높게 일구어내시었습니다. 씨사상은 삼라만물을 역동적인 운동과 생성과정으로서 파악한다. 철학적으로는 존재(being)보다 되어감(becoming)을 중시한다. 고인 물은 썩고, 불변하는 물체는 죽은 것이듯이 우주자체가 끊임없는 생성 중에 있는 창조적 과정이라고 씨사상은 봅니다. 보수교인들이 들으면 이단이라고 하겠지만, 함석헌은 말하기를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바퀴가 구르는 것이다"(전집1권, 57쪽) 씨사상은 항상 하느님과 역사 그리고 인간 이 셋을 통전적으로 이해합니다.

함선생님의 가장 잘 알려진 책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입니다만, 본래는 [성서에서 본 한국역사]였습니다. 함석헌은 우리 민족의 5천년 역사를 성서의 고난의 빛에서 재해석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고난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의 입장에 서서 마치 예수라고 하는 하나의 개인이 인격으로 나타낸 것을 역사에서 하나의 민족에다가 적용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은 것은 말하자면 실패람 실패고, 부끄럼이람 부끄럼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것을 한없는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 까닭은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날까지 온 걸 보면 고난 받으러만 나온 것 같은 민족인데 그것은 못나서만 아니라 할 일이 있어서 그런거 아닌가. 이러한 입장에 우리 민족이 선다면 그래도 앞에 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거는 도리어 정치적으로 해방이라는 그런 문제보다는 더 깊은 의미에서, 정말 예수가 개인적으로 나타냈던 그것을, 세계 역사에 있어서 한국 민족이라고 하는 자격을 가지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해 봤던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정체성을 아브라함의 신앙에 둡니다.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합니다. 그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고난이 바로 오늘 읽은 창세기 22장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나에게 이삭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황당한 얘기입니다. 1절에 있는 대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보시려고’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믿음의 깊이를 시험해보는 말씀으로 이해함이 적절할 듯 싶습니다. 백세에 이르러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 이사악을 선물로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아들이 자라는 그 모습에 삶의 의미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에게 있어 이사악은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이 엄청난 명령에 아브라함이 고민한 흔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서는 덤덤히 그리고 아브라함의 어리석은 순종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서너시간 만에 도착하는 짧은 길이라면 일찍 일어나고 서둘러 떠나는 의미가 있습니다.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해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긴 여정에 아침 일찍 일어나고 서둘러 가야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러 가는 여정에 말입니다. 오히려 늦장을 피우고 에우러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일찍 일어나고 서둘러 떠났다고 아브라함의 어리석은 순종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야 말로 니이체가 공격하는 기독인의 노예적 근성일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항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차라리 이 부당한 신의 요구를 거절하고 인간의 정당한 권리 보호를 위해 코카사스 산 웅장한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 간을 뜯기며 영원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가 되겠다고.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고민도 저항도 외침도 하지 않습니다. 데려가려고 했다면 애당초 주지는 말 것이지! 하는 ‘탓’의 외침이 없습니다. 그리곤 아들이 묻는 질문에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뒤집고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칼을 뽑아 듭니다. 그리곤 그 칼이 마-악 이사악의 목덜미의 혈관을 자르려고 칼끝이 번뜩일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렘브란트가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왼손으로 이삭의 목을 누르고 오른손에 들린 칼이 목 근처에 가 있을 때, 뒤에서 천사의 오른손이 아브라함의 오른손을 붙잡고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진지한 모습으로 아브라함이 뒤를 돌아보자 천사는 왼 손가락을 펴서 덤불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리킵니다. ‘너의 깊은 뜻을 알았노라고.’ 여기 이 손가락은 원형극장에 모여든 로마 군중들의 함성에 황제가 허락을 뜻하는 땅을 향한 엄지손가락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을 생명의 환희로 돌리는 구원의 손가락입니다. 여기 모리아 산을 향한 사흘 길은 죽음의 사흘길이 아닌 부활을 향한 고난의 사흘 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왜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나고 서둘러 떠나야만 했는가는 풀리지 않습니다. 생각은 이리저리 해보지만 갈대와 같이 흔들릴 따름입니다. 죽기 전에 그 지혜가 오기를 기다려봅니다.

[생각하는 교인은 눈을 뜨는 교인을 말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그건 자주적 백성을 말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소수의 정치인들이나 외부의 열강에 달려 있지 않고 이 나라의 백성에게 곧 나에게 나의 씨에 있다는 자각을 말합니다. 생각하는 교인이라야 산다. 생각하는 교인이란 어떤 교인인가? 자기 안에 있는 씨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사악만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자신의 미래를 거는 신앙에서 이사악을 향해 칼을 겨눈 아브라함의 신앙으로 나아감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거기서 하늘의 부름을 깨닫고 따라 나서는 거듭난 신앙인 눈뜬 신앙인을 말합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이야기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고 있다. 보통 세 복음서에 함께 나오는 말씀이나 사건들은 복음서 저자 자신들의 입장에 맞게 다르게 편집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강조점이 달라진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이 눈뜬 이야기는 사소한 부분을 제외하면 놓여 있는 위치나 강조점은 일치합니다. 우선 마태오와 루가는 둘 다 마르코가 언급하고 있는 바르티매오라는 거지 소경의 이름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바르티매오라는 사람이 마르코 공동체에서는 잘 알려진 사람이지만, 자신들의 공동체에서는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삭제를 하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는 증인은 두 세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율법의 말씀을 생각하며 한사람의 소경을 두 사람으로 바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강조점이 모두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소경의 이야기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한주를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바로 그날 예리고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시간과 장소가 일치한다는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바로 앞에 있는 이야기 또한 모두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세상 권력쟁투로 이해하고 자리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라는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루가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친절하게도 이렇게 덧붙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는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얘기와 설명이 있은 후에 소경이 고침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곧 제자들과는 달리 이 소경은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세 복음서는 모두 이 소경이 눈을 뜨자 예수를 좇았다는 얘기를 그 끝을 맺고 있습니다. 물론 이 소경이 이후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눈을 뜨자 죽음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수난자 예수를 좇았다는 것입니다. 곧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교인이란 어떤 교인이어야 함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간다는 말 외에 다른 해석은 없습니다. 목사들마다 신도들마다 자기 십자가를 달리 해석하지만, 예수님에게 있어 자기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자기를 따라온 민중들, 3년이나 자기를 믿고 따라온 제자들의 인간적 기대를 부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정의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럼 지금 2007년 한반도 남쪽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함석헌의 통일을 위한 종교적 회개]

함석헌선생은 우리의 분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38선의 잘라짐은 불행이 아니오 죄악이다. 세계적 인류적 큰 죄악이다. 만고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남의 집 강아지를 두 놈이 갈라 먹어도 용서할 수 없다 하겠는데, 청천 백일하에 오천 년 역사 가지는 남의 나라를 허리를 잘라 두 동강이로 냈다? 이런 죄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통일 문제를 정말 의논하려거든,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로 의논하려거든, 의논이 아니라 부르짖으려거든, 악을 쓰고 기를 써 하늘과 땅에 호소를 하려거든, 우선 미.소를 대가리로 두 편에 갈라져서 이 불쌍하고 파리한 갈보 같은 민족을 발가벗겨 두 다리를 맞잡아 당겨 가랑이를 찢어놓은 저 열강(列强)이라는 나라들을 책망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뻔한 잘못을 책망치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너무 뻔한 잘못을 알면서도 책망치 못하는 것은 민족의 양심이 마르고 의로운 기운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함석헌은 말하기를 이는 우리 민족의 양심과 의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강대국이 무서워서도 아니고 오히려 양심이 있어서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 죄악에 같이 참여했기 때문에 양심에 찔려 감히 책망을 못하는 것이라고 그는 봅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해석입니다. 자신 안의 잘못을 알기에 다른 이의 잘못을 비난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종교적 양심의 발로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의 티를 힐책하는 우리를 꾸짖었습니다. 민족 분단의 죄악을 미소 강대국이 저지른 것임은 만천하가 아는 일입니다. 단지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태도에서는 문제를 극복하려는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종교적 양심이 살아 있는 민족이기에 우리는 회개를 말할 수 있습니다.(정지석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민족통일’)

함석헌은 이 민족이 회개를 해야만 새로운 역사의 이념을 얻게 되며 새 역사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단의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고 증오하던 남북 모두에게, 남 탓할 거 없다 함께 회개하자고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한이 동시에 회개하기란 어렵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협상으로 이뤄질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누군가 먼저 회개를 해야 하는 종교적 결단입니다. 그래 함석헌은 말합니다. ‘우리가 참 통일을 이루려면 우리만 아니라 저쪽도 회개를 하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요, 저쪽이 회개를 하게 되려면 그것은 오직 우리의 회개에 의해서만 될 것이다. 우리는 울어서 울어서 그 울음이 돌 같은 저쪽의 가슴을 울려, 울음이 터져 나오도록 되기까지 울어야 할 것이다’(전집 3: 181).

[뉘 탓이냐?] 함석헌 시의 일부분입니다.

나를 본 자 아버지 본 거라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라 높다
네 자신을 알아라
하늘이 내게 속알을 주셨다
거룩하게 거듭거듭 일러는 주셨건만
불이란 불은 다 불다간 꺼졌더구나
물이란 물은 다 흘러선 흘더구나
바람조차 불다가 불다간 돌아도더구나
종교요 과학이요 두루 캔 뒷 끝은
싹 트는 알 하나의 하품에 놀라
공든 탑보다도 말 먼저 무너져
얼굴이 파랗게 질리게 됐으니
이게 뉘 탓이란 말이냐

뉘 탓이냐고
개인 탓, 사회 탓,
물질 탓, 정신 탓,
그렇다 산 내 탓이요 있는 너 탓이다
뭐 탓다고 이 곤두박질이겠느냐
어떻다고 이 가슴 답답한 냄새겠느냐

아니야 너도 아니오 나도 아니야
제 탓이람 차라리 쉽지만
있자 해서 있는 인생이더냐
없자 해서 없는 자연이더냐
탓이람 그의 탓이다
그가 애초에 탓을 일으키셨다
말씀(뜻) 낸 것이 말썽의 탓 아니냐

내 탓 네 탓. 탓 타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원인은 말씀을 낸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잘못을 조상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발자국만 물러서면 다 똑같은 사람이요, 똑같은 이치요 똑같은 주장이니 그것 같고 탓 타령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가 애초에 탓을 일으키셨다’는 선언은 마치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던져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서로 싸우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깊게 묵상해보면 내 탓 네 탓 따질 것 없다는 얘기도 이해가 됩니다. 탓이 있다면 그건 하느님 탓이라는 얘기이지요.

이는 하느님께 우리 인간의 책임을 미루자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들이 갈라져 싸울 바에야 차라리 하느님께 그 책임을 돌리고 우리는 화해하고 용서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일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식들의 싸움 자리에 결코 들어오지 않습니다. 누구 편을 든다는 것은 애시당초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건 부모의 자리를 벗어난 일입니다. 차라리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나를 비난해라. 못난 애비와 애미를 비난하라’는 것이지요.

이 하느님의 쓰라린 마음을 읽어내고 통곡하는 백성은 생각하는 백성이요, 회개하는 교인은 생각하는 교인이요 눈을 뜬 사람입니다.

함석헌선생은 죽기 얼마 전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인생의 역사는 릴레이 경주와 같다. 날 때는 바통을 받아들고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고 갈 때는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바통 넘길 생각까지는 안 할 거다. 보통으로 말하면 아직도 몇 십 년 더 살아야 할꺼니까. 나는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웠기 때문에 요새는 그 생각만 한다. 바통! 아무래도 넘겨주어야 하잖아?....그러니까 뛰기는 실컷 뛰었다가도 바통 넘겨주지 못하면 소용없고, 저 사람도 아무리 뛴다 해도 바통 받아 쥐지 않고 뛰면 소용없다.

저는 여기 자신이 젊다고 생각하는 모든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의 바통을 받아 뛰고 있습니까? 이제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갖고 있는 바통을 누구에게 넘겨주려고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평화나눔 작은 공동체를 바통을 주고받는 자리로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