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18일
본문: 열왕기하 1,1-10, 마태오 3,1-12

[참 평화를 향해]

평화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사람들이 모여 떠들다가 사라진 후에 찾아오는 고요함 같은 것입니다.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조용한 상태입니다. 이는 겉으로 느끼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평화입니다. 두 번째의 평화는 우리의 내면에서 만들어내는 평화입니다. 내 안의 하느님과 하나 됨으로 이루어지는 평온함이고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만물과 하나 되는 온전함이며 自己愛를 버리고 순수하고 진실하고 영원한 것만을 찾는 애틋한 마음입니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 무한한 본원과의 완전한 조화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채닝) 그리하여 이렇게 자기의 내면에서 시작한 완전한 평화는 자기를 해방시킴으로 결국은 세상 모든 것을 自己化하여 갑니다.

여기서 정치와 종교는 구분이 됩니다. 정치는 외면적 평화를 만드는 일에 만족한다면 종교는 내면의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에까지 나아가고자 애를 씁니다. 지난 주 우리는 어쩌면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놓을 수도 있는 6자회담의 협상 초기타결을 들었습니다. 북한은 비핵화의 과정을 밟고 미국은 대북적대정책을 점차 완화시켜나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와 더불어 중단되었던 남북장관급회담이 이달 말 평양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소식이고 이는 남북정상회담과 통일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북한이 자신의 마지막 생존수단인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테러명단에서 북한을 해제하고 54년 묵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대사를 교환하는 외교관계에까지 나아갈지는 매우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입술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자본과 군사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기득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분쟁을 부추겨 무기수출로 얻어지는 막대한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쟁무기 산업을 포기하는 순간 미국이라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는 달리는 자전거가 서면 넘어지듯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경찰국가로 행세하는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의 남한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 미국의 입장은 한 가지만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한미 FTA 협상과정에서 미국이 개성공단에서의 생산품을 남한산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개성은 100%의 남한의 기술과 자본이 투입되어 있고 단지 노동력만 빌리고 있으며 생산력도 미미합니다. 그러함에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북과 남을 하나의 민족 그리고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무기 수입국으로서의 주요고객인 남한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고 미군을 철수할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분단적대정책은 미국이 살아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이번의 합의는 부시정권이 이라크 실책으로 인한 비난을 일단 벗어나야 하겠기에 전술적으로 후퇴를 한 것이지 동북아 평화를 위한 근본적인 전략의 변화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번 협상에 대해 미국 내의 네오콘들이 심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북한 내의 매파 또한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번 2.13공동성명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지금까지의 양국이 보여 온 대결일변도의 정책에서 평화공존의 방향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여세를 몰아 이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넘쳐날 수 있도록 그래서 과거의 적대적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그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입니다. 어쩌면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상대를 비난하는 상황이 재현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렇더라도 또 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설 것이다라는 평화를 향한 절대적 의지가 필요합니다. 참 평화는 단지 핵 폐기나 평화협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한민족과 세계와 온 우주를 감싸 안으려는 종교적 이상 실현에 집중할 때, 얻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

구약성서에서 이렇게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참 평화를 세워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메시야라고 불렀습니다. 메시야의 문자의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헬라말로는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말이다.

구약성서에서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았던 특별한 사람들은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왕은 힘에 의한 현실 정치를 통해 제사장은 이 정치실현을 위해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가는 제의를 통해 예언자는 이 두 그룹이 자신들에게 부여받은 권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의 대표는 다윗이고 제사장의 대표는 모세이며 예언자의 대표는 엘리야이다. 물론 모세는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의 역할을 다 감당했습니다만, 크게 보면 율법 전수의 상징인 제사장 그룹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입니다만, 세례 요한의 상징이 되는 인물이 엘리야선지자이기에 엘리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절은 BC9세기 북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 아합 왕 시대이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정치경제적으로 최고의 황금기였다. 아합 왕은 신약시대에 시돈이라 불리우는 페니키아의 세력과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고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이때 그들의 종교인 바알종교가 들어왔습니다. 바알 신은 한마디로 재물의 신입니다. 비의 신으로 농작물의 풍요를 보장했고, 그의 짝인 여신 아세라신은 젖가슴이 수 십 개가 달려 있는 多産(다산)의 여신이었습니다. 요즘은 자식 하나 키우는 일에 돈이 많이 들어 자식이 많다고 하는 것은 가정 경제를 갉아먹는 요소가 되지만, 고대에는 노동력이 경제력의 전부였기에 자식은 많을수록 좋았습니다.

여기서 본래 유목민의 부족 신으로 출발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역사를 주관하는 이스라엘의 신 야훼와 가나안 정착농민의 신 바알은 대립하게 됩니다. 이때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엘리야는 3년간의 가뭄을 선포하고 이후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받드는 제사장 850명과 홀로 대결하여 승리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극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싸움을 단순히 야훼종교와 바알종교라는 종교간의 갈등으로 단순화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싸웠던 대상은 단순히 이방종교의 제사장이 아니라 그들 배후에 숨어있는 개인의 부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이를 축적하도록 만들고 이를 정당시하는 아합왕과 이세벨왕비와의 권력 지배체제였습니다. 이는 아합과 이세벨이 왕궁 가까이 붙어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비판하고 싸웠던 것은 바로 이러한 권력남용이었고, 그러한 권력남용을 허락하는 정치종교의 억압 체제였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히브리인들의 공동체로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인이란 본래 핏줄로 이루어진 민족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떠돌이로 노예로 약자들을 칭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서에 기록하기를 야훼 하느님 앞에 예배할 때마다.‘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신 26,5)라고 고백하고 추수의 절기 때마다 곡식더미를 쌓아놓고‘야훼께서 온갖 좋은 것을 주셨구나. 우리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자.’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선지자나 예언자는 바로 이것을 생각나도록 하느님께서는 인간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셨고 그리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우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기에 소수자의 부자와 권력층의 기득권을 보호할 수밖에 없는 왕이나 정치인에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미 FTA 대하여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일수도 있지만, 이러한 야훼 하느님의 약자보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반대하는 것이 교회의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 전체로는 돈벌이가 되겠지만, 결국 이 돈벌이는 소수 기업인들의 돈벌이가 될 것이고 돈을 많이 벌어 분배를 잘하면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세계화가 되면 될수록 빈부의 양극화는 점점 벌어지면 벌어졌지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것이 바탕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왕의 시대는 북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가장 부강했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유대민중들의 한의 소리가 가장 컸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후 유대민중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이 엘리야선지자가 평등과 평화와 정의의 하느님 나라의 대명사로 각인되어왔던 것이고, 세례 요한 시대의 유대인들이 엘리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체제 하에 살아가야 했던 유대민중들은 불의한 왕권에 도전하여 민중의 승리를 이끌어낸 엘리야선지자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떠올리며 살아왔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엘리야선지자는 이 땅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불 수레를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엘리야의 도래를 기다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의 마지막 구절 3장 22절 이하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엘리야의 도래를 예언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구약성서는 그 끝을 마감하고 그 이후 약 400년의 침묵을 지나 복음서의 얘기가 이어집니다.

[요한의 회개 세례는 체제 도전]

그리고 4개의 복음서는 자신들의 선포의 대상인 사람들은 모두 달라도 동일하게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 세례 요한은 그냥 나타난 새로운 인물이 아닌 엘리야의 재현에 맞춰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겉모습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은 당시의 지배적인 종교체제나 정치체제에 대해 거침없는 도전과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이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서 보여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여기서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세례의식도 단지 회개를 향한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만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 종교체제 하에서 유대민중이 회개할 수 있는 길은 성전에 가서 소나 양, 그리고 비둘기와 같은 희생제물을 사서 바치는 일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민중들은 그런 희생제물을 살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하루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희생제물을 살만한 능력이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병에 걸렸거나 불구가 되었거나 옷조차 걸칠 수 없었던 떠돌이 노숙자들이었던 그들은 죄인으로 정죄 받아 성전에 접근하는 일조차 거부되고 있었습니다. 소위 말해 구원은커녕 잘못에 대한 회개조차도 거부되는 현실이었습니다. 여기에 요한이라는 사람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는 가난한 민중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으로는 새로운 돌파구요 희망이요 구원의 시작이었지만, 기존의 종교나 정치체제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며 살아가던 기득권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는 체제 자체를 뒤흔드는 매우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이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일은 피할 수없는 운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오늘 우리는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기 물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을 찾아 나서는 떠돌이 민중인가? 아니면 오늘의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현실파인가? 오늘 성서의 본문 말씀을 보면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나아왔다고 말합니다. 아마 그들 또한 예루살렘 성전제사의 부정과 불의를 보아왔던 사람들로 개혁을 꿈꾸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자 요한은 이렇게 외칩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이전 민중들을 향해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나아온 사람들을 모두 세례를 베풀고 회개의 의식을 행하였습니다만, 지금 나아오는 기득권의 계층을 향해서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서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서에서는 이보다 더 구체적인 행실을 요구합니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세리들에게는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마라.’ 군인들에게는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엊그제도 건설부에서 직원들의 뇌물 받는 것을 감시하는 감시직원이 뇌물을 받다 들켰습니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겨놓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단지 회개만을 강조하는 하늘뜻펴기를 하는 것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에게 던졌던 질문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떠돌이 민중인가? 아니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자 나아온 개혁파인가? 아니면 그 지배체제 유지를 위해 한몫을 담당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현실파인가? 저는 여기서 성서의 본래 메시지를 재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요한 자신일수는 없는가? 하는 그런 도전입니다. 물론 이 도전의 대상에서 나 스스로를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다만 주님의 길을 곧게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 소리에도 큰 소리 작은 소리가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모두는 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시대의 소리 세례 요한- 문익환목사]

오늘 우리 시대에 있어 세례 요한과 같이 광야의 큰 소리를 외친 사람은 누구인가? 엘리야의 민중적 저항의 전통에 서서 개인의 욕망과 부의 유혹을 부추겨온 잘못된 종교를 비판하고 국가권력을 향해 비판의 소리를 낮추지 않아 옥에 갇힌 사람은 누구인가? 저는 지난 주 남한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면 함석헌선생이거나 문익환목사님 두분 중의 한분이 마땅하였다고 얘기하였고 지난주에는 함석헌선생님을 추모하는 얘기를 했습니다만, 오늘은 오늘의 세례요한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답으로 문익환목사님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13년 전에 하늘의 부름을 받으신 문익환목사님을 모르시는 분은 없겠지만, 2,30대 젊은이들 가운데는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와 시인으로 신학대학 교수로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신구교공동성서번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76년 유신통치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하여 22개월 동안 투옥된 이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이 되면서 80년대 재야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이후 돌아가시기까지 옥중생활을 밥 먹듯이 하셨습니다. 1989년 3월에는 통일의 길을 앞당기기 위해 비밀리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주석과의 2차례 회담 끝에 통일 3단계방안 원칙에 합의했으며, 1993년에는 통일맞이 7,000만 겨레모임 운동을 제창하는 등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전념하다가, 1994년 1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북한 사람들을 만나면 제 자신을 소개할 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번 금강산에 갔을 때에도 20대의 젊은 안내원에게 문익환목사님 얘기를 했더니 얼굴이 밝아지며 반갑게 인사를 하더군요. 북한에서 기독교전파에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을 꼽으라면 첫째는 당연히 문익환목사님이십니다.

80년대에는 마치 세례요한이 부활한 것처럼 문목사님 주위에는 한 많은 민중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분의 외침과 설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었고, 힘을 얻었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특히 20년 전 6월 항쟁의 선두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이한열열사의 장례식장에서 앞서 숨져간 열사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하늘 높이 외쳐 부르는 목사님의 그 처절한 음성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살아있는 하늘의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문목사님이야 말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외쳐진 소리였습니다.

그분은 하늘 뜻을 펼치는 가운데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외쳤지요. 예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죠. 회개하는게 무슨 뜻이죠? 히브리어에서 그것은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어디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라는 말이요. 젖먹이 어린아기로 태어나서 다시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인생을 새로 살려면 지난날의 얽히고 설킨 것, 배배 꼬인 것, 쌓이고 쌓인 원한과 오해와 적의를 장기판 쓸어버리듯 쓸어버리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그것은 죽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어요? 죽는다는 것은 기득권을 버리는거죠. 자기의 자랑을 버리는 겁니다. 기득권에 대한 애착과 제 잘난 멋에 사는 자랑으로 얽힌 실보무라지들을 숯불에 던져버리는 일입니다. 나의 기득권, 곧 내 젖줄을 버리지 않고 죽을 수는 없어요. 죽지 않고 미래를 향해서 부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과거에 죽어 미래를 향해서 오늘 다시 사는 일이지요. 저는 그것을 죽음을 산다는 말로 표현해 봅니다.

죽음을 살자
죽음을 살자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죽여 버리고 싶도록 미워도
죽음은 나의 님
죽음을 살자
떨리는 손으로 돌아서서
제 가슴에 칼을 꽂아
죽음을 살자
선지피 저벅저벅 걸어가는 발자국 자국에서
동면하는 개구리 논두락에서 튀어나오듯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튀어나오는
죽음을 살자
제 손으로 제 관에 쾅쾅 못을 박고
제 손으로 땅을 파고 묻은 다음
그 앞에 엎드려 숨죽여 흐느끼며
쿵 쿵 쿵
지축 울리는 북소리로
오늘도 내일도 죽음을 살자
죽음의 가슴에서만 밝아오는
새 하늘과 새 땅
맑고 뜨거운 눈물이여

[나의 광야를 찾아서]

이번 주 수요일부터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함께 동참하는 사순절이 시작합니다. 광야로 나아가 진리를 체험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자유는 자신이 꿈꾸는 모든 것을 이룸으로 얻어지는 움켜지는 손아귀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가지고 있던 것을 놓음으로 손을 폄으로 얻어지는 절제의 자유를 말합니다. 자유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자유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해야 합니다. 왜 인간이 불행해지는가? 자신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농부의 마음으로 돌아가 비와 바람과 햇볕을 기다릴 때 비로소 우리에게 참 평화가 찾아온다. 평화는 아랍지역에서는 샬롬이라고 말해지지만, 인도에서는 샨티라고 불러진다. 샨티는 위로는 하늘을 존중하고 옆으로는 다른 모든 존재를 가까이하며, 밑으로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데서 오는 민중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행복감을 느낄 때 우리의 의식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간 별로 관심을 기울지 않았던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깨닫고 그들과 하나 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광야는 바로 이렇게 우리 주위에 있는 존재들과 하나 되기 좋은 장소입니다. 사순절은 광야에로 나아가는 좋은 시간입니다.

오늘 목회자 마당에도 기록해 놓았습니다만, 초대교회 이래 성도들은 이 사순절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특별한 절기로 여기고 훈련과 회개를 통해 신앙의 영적 성장을 추구하여 왔습니다. 죽음을 사는 특별한 시간을 정해놓았습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중세 가톨릭과 같이 지나친 고행이나 허례허식적인 종교 의식에 매인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이러한 종교적 신앙 훈련이 너무 사라져 버려 사순절의 특별한 의미가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자기 죽음을 훈련하는 곳으로의 상징성을 상실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기 십자가의 의미를 재확인해야 할입니다.

이제 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특별 훈련과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합니다. 1. 사순절 특강입니다. 이웃의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찾아보는 향린의 시간으로 외부강사를 초청합니다. 5주간에 걸쳐 일요일 오후에 진행이 됩니다.(1시반부터 3시까지) 올해는 평화나눔 작은공동체가 주관합니다. 3월 4일(농촌/환경 평화나눔공동체 주관-강사 이세우목사) 11일(이주노동자) 18일(통일) 25일(빈민) 4월1일(인권)

2. 말씀 묵상과 찬양의 수요기도회(오후 7시 반)
이번 주 21일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매주 수요일 모이며 마지막 주는 4월 6일 성 금요일에 모입니다.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는 성찬식이 있습니다. 28일 수요일에는 전경옥집사의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위한 기념공연’으로 대신합니다.

3. 개인 훈련- ①매일 30분 이상 성서읽기(혹은 필사하기) ②매일묵상집 (기장총회 교육원 발간 2,000원) ③하루 한 끼 혹은 두 끼 금식하며 남북나눔헌금 드리기.④지나친 향연이나 음식 기호식품 절제하기(육류 담배 술 커피 등) 오락행위 (TV드라마, 노래방 등) 절제하기, ⑤예배시작 30분 전에 교회 도착하여 묵상하기. ⑥ 침묵하기 (모임에 참석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경청하기), (화가 났을 때에) 인내하기, (차 운전 중에 누가 끼어들면 나도 저런 때가 있어지 하며 기쁘게) 양보하기 ⑦ 가족이나 지인에게 사랑의 편지 쓰기 등등 이외의 것도 개인의 형편에 따라 정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희년청년회 수련회에서는 두 사람씩 짝을 지워 2월 한달동안 서로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여 주도록 하였습니다. 저도 누군가와 짝이 이루어졌는데, 저는 한달동안 새벽묵상 시간에 그를 위해 기도한다고 약속을 했고, 그는 저를 위해 한주에 두 번 핸드폰에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기로 하여 진행 중입니다.

결심은 주위에 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드골대통령도 평생 즐겨 피던 파이프담배를 끊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계속 실패를 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부하 직원들에게 나 이제 끊었다고 선포를 했답니다. 결국 대통령이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혼자 마음의 결심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결심을 가족들과 교우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필요하다면 알릴뿐더러 화장실 벽에 침실 벽에도 붙여놓으시기 바랍니다. 근데요. 전 이런 일 여러 번 해보았고 속기도 많이 해보았습니다. 예배 후에 집에 가서 뭔가를 결심하세요라고 말하고 지나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2분의 침묵시간을 갖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결심하고 옆 사람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이란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며 그 이해에서 생기는 의무를 인식하는 일이다.’라고 톨스토이가 말합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98쪽)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의 깊이를 이해하고자 함이며 그 이해에서 나온 삶의 의무를 잘 이행하기 위함입니다. 이번 사순절이 여러분이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는 거룩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견사]

[나의 길 당신의 길] (문익환 시)

나는 모릅니다
나는 왜 당신을 밟고 가야 하는지
당신의 핏자죽을 왜 오늘도 밟고 가야 하는지
당신의 체온을 한숨을 눈물을 고독을 허무를
왜 오늘도 내일도 밟고 가야 하는지
여기 저기서 당신의 살점이 발에 밟힙니다
당신의 아픔이 발바닥을 사정없이 찌르는군요
온 몸의 피가 술 술 새나갑니다
그러자 막혔던 숨통 터지며 다시
발을 옮길 수 있군요
난 이유 없는 이 길을 다시 가야 하는군요
그럴 밖에 다른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이 절망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가신 길
내가 누군데 안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간밤 꿈에 당신이 끝난 데 다달아
그만야 숨이 막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당신이 벌떡 일어서시어 나를 밟고 갔습니다
아픔이 온 몸에 번져 갔습니다.
그제야 난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이나 참된 것은 오직 길일 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