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과 평화의 영성⑴ 광야의 기도자 예수
신명기 8, 11-20 ; 마태오 4, 1-11

[교회를 훼손하는 자?]

요즘 도올 김용옥교수의 교육방송 인터넷 영어강의 요한복음 강해가 화제거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선 대부분의 목사님들의 경우에는 철학하는 사람이 성서 강해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신성모독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보수기독교 한기총의 대표 목사님들은 구약성서 폐기를 주장하고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 일을 주몽이 강위를 건너는 일에 비교하는 해석에 분노하며 김용옥교수는 교회를 훼손하고 파괴하려는 악마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극단적 평가는 단순한 성서해석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한기총이 정치 집단세력으로 나서는 일을 도올이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보교단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협의회 총무에게 종교계 기자가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에 대한 한기총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코멘트를 부탁한 모양인데, 대답인즉 ‘이웃집 개가 짓는데 뭐 그리 흥분할 일 있느냐?’고 한기총과 도올을 싸잡아 폄하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용옥교수는 각각 500쪽이 넘는 [기독교 성서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를 집필하였으니 신학의 문외한 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젊은 시절 한국신학대학도 1년을 다녔고 어렸을 때부터 예장의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자랐으니 웬만한 목사보다야 더 깊은 성서이해와 하느님 이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을 성서와 희랍어를 연구하며 신의 광야에서 방황하다 이제 그 방황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는 순간에 있는데 그 건너는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것뿐이다. 모든 종교에 대한 편견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으로서 기독교를 우리 사회에 어떻게 바르게 인식시킬까를 고민했으며 그래서 성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겨레는 금요일자 종교란에서 이에 대한 김경재교수의 얘기를 실었습니다. 김교수는 사학법 개정 등 정치적 메시야주의에 빠져 있는 보수 기독교를 경계하고 사고의 개방적 성찰을 강조하며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보수기독교가 시시콜콜한 것을 시비삼지 말고 큰 틀에서 한국 기독교의 생명력을 살려 한국 기독교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크게 기여하는 종교로 거듭나게 하려는 도올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현재의 모습을 고수하겠다면 결국 한국 기독교도 죽고 한민족도 불행해지고 세상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 120년 역사에서 도올 만큼 준비된 지성도 흔치 않다며 서양선교사들의 말을 그대로 답습한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맥이 도올에 까지 가 닿았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서 ‘루터와 칼뱅도 성서 해석을 바로 함으로써 새로운 기독교를 열었다’며 도울이 ‘한국기독교의 루터와 칼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 내에 아군 없이 혼자 개혁을 하는 것은 역부족일 것이고 또 역사에 남을 개혁가가 되려면 사회 안에도 개혁의 분위기가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의 남한 사회는 정치경제사회종교 모든 부문에서 너무 보수화되어 있는데다가 옛날로 돌아가려는 수구세력이 점점 힘을 얻고 있어 아주 좋게 본다 하더라도 루터나 칼뱅에 비유하기 보다는 그 이전 시대에 살았던 위클리프나 후스와 같은 초기 개혁가에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를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나 병 낫고 부자 되기 위해 가는 성황당쯤으로 보고 아예 외면하는 수많은 십대 이십대의 청년들에게 신앙이 무엇인지 요한복음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교회가 올해의 전도상이라도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올과 같이 동서양의 사상을 아우르는 비판적 지성인이 ‘나도 초월적 인격신을 믿는다.’는 개인 고백을 함으로 진정한 신앙은 합리적 이성과 학문적 비판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남한 지식인 사회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믿는 자는 어떤 교리 또는 어떤 경전을 맹신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순수한 양심과 명쾌한 사상 속에, 즉 신의 의지를 가장 바르게 드러내는 것에 두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면 남한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를 망치는 악마가 누구일는지는 보다 분명해질 것입니다.

[오늘의 광야는?]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동참하는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 사순절의 기원은 바로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유혹하는 자가 와서...’ 이렇게 해서 3가지 유혹을 받으시게 됩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우선 광야는 문자적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을 넘어선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므드바르’의 어원적 의미는 하느님의 말씀 혹은 하느님의 행위가 일어나는 곳을 말합니다. 성서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는 일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야곱은 도망자가 되어 루스라는 광야에서 하늘문에 연결되는 사닥다리 꿈을 꾸었고 모세는 미디안광야에서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고통받는 내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 하느님의 소명을 들었고 엘리야는 그릿광야에서 가뭄을 견디며 3년을 살았고 다윗은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광야에서 10년을 살았고 아모스는 광야에서 양을 몰고 다니다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고 세례 요한 또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한 주님을 만난 이후 아라비아광야에 나가 3년을 살며 민족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큰 뜻을 깨달았습니다.’ 분명 광야는 허허벌판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넘어 신을 경험하는 카이로스의 결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광야는 어디입니까?

세상과의 단절이 일어나는 곳은 모두 광야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자기가 구축해놓은 자기 세계를 말합니다. 자신이 익숙한 곳, 자신이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곳,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곳, 자기가 인정받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광야란 이런 자기구축을 떠나 자기 홀로 그래서 벌거벗은 자기 영혼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고독의 장소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감옥이 광야일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여주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묵시록을 기록한 요한사도 또한 유배의 장소 파트모스 섬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산속 기도원에 홀로 앉아 있다면 그곳이 광야입니다. 혹은 이 예배실에서 홀로 앉아 기도함으로 세상과 단절할 수 있다면 여기가 바로 광야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홀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나 같은 예언자는 고기 뱃속 캄캄한 곳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제가 오늘의 하늘뜻펴기 큰 제목으로 말한 십자가와 광야의 영성이란 바로 이렇게 세상과 이웃으로부터 단절되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공간을 말합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모든 곳이 막혀 있어 아무런 도움이 올 수 없는 순간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위를 쳐다 볼 수밖에 없는 그런 장소 혹은 그런 절대 절명의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포위되어 그 안에 갇힌 동족 유대인들이 자신의 자녀를 먹을 수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전 북한의 형제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간다는 얘기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기에 거기가 바로 우리 민족의 광야이고 그러기에 거기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줄 하느님의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 또한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아가 40일을 단식함으로 죽음 직전의 상태로 자신을 몰아가셨고, 거기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이 갖는 유혹 3가지를 경험하시게 됩니다. 여기서 40일 또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입니다. 가끔 목사님들 가운데 목회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40일 금식기도를 시도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 경우는 실패해도 문제고 성공해도 문제입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분은 처음부터 목회에 실패와 좌절만 맛보고, 성공한 사람은 자신을 예수로 착각 속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사람은 탈진상태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 또한 광야와 같이 하느님의 임재를 뜻하는 거룩의 시간에 대한 상징일 따름입니다.

[감사를 회복하자]

예수님께서 당하신 첫 번째 유혹은 돌이 빵이 되게 하라입니다. 빵. 이는 단지 먹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의식주 모두를 포함하는 생존을 향한 인간 본능의 기본 단어입니다. 우리가 생활이라고 말하고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의식주에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전에는 뭐든지 배만 부르면 만족하였지만, 지금은 먹어도 얼마나 품위 있는 장소에서 얼마나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느냐에 관심하고, 입어도 브랜드가 있는 옷인가가 중요하고 주거공간도 어디에 있는 어떤 건설회사가 지은 앞으로 오를지 몇 평인지가 관심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서 있을만한 공간이나 여유는 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남한은 신명기의 말씀이 적용되는 시점입니다. ‘아무쪼록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살게 되고 소떼 양떼가 불어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너희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행여나 교만한 생각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께서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주시지 않았느냐?’ 요즘 우리나라가 못사는 나라들에게 본이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자 보라 남한은 불과 50년 전 전쟁의 잿더미에 불과한 나라였지 않느냐?’ 그래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제사회에서 어깨에 힘을 주는 일이 많아지고 있고 해외를 다니며 업무를 보는 친구들을 만나면 은근히 우리보다 역사나 문화에 더 깊은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들조차 무시하는 교만한 얘기들을 자주 듣게 됩니다. 지난날의 배고픔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남을 얕잡아보는 교만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난주 뉴욕타임즈는 우리 남자들이 베트남에 가서 여성을 고르는 모습을 주요 뉴스로 자세하게 실었습니다. 돈 천만원을 내고 서류와 통역을 통해 앞에 앉은 여러 여성들 가운데서 한사람을 골라 아내로 ‘삼는’ 아니 50대 중반의 이혼 남성이 20대 초의 아내를 ‘사는’ 기사를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과거 지독한 남아선호로 여야태아를 살해하여 온 잘못으로 여성의 부족현상과 여성들의 지위 향상으로 평균 이하의 남성들은 짝을 찾기가 어려워진 오늘의 남한 현실을 인정하지만 그건 우리 입장에서 하는 궁색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고 그 기사를 읽으며 한국의 한 남성으로 어떤 민족적인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말하는 국제화요 지구화요 3만불 시대의 미래인가?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 민족 또한 감사를 잃어버리면 패가망신하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이 재산은 내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든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하느님께서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그렇지 않고 나를 잊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 예배한다면 너희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난은 가장 큰 걱정 부는 최고의 선!/ 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나는 보물을 찾으러 갔다./ 내 영혼을 그대가 가져도 좋다./ 나는 내 피로 그렇게 써 주었다.’ 부와 성공과 자기의 영혼을 맞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은 축복약속의 말씀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실 것이라는 저주약속의 말씀도 믿는 것입니다. 빵만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곧 불행했던 과거로 돌아가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찾고 그래서 감사를 회복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보 인생 바보 교회]

악마는 다시 예수를 끌고 성전 꼭대기로 올라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보시오.’ 만약 뛰어내려 몸에 상처하나 입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모두 신이 내려왔다고 감탄할 것이고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갈 것이고 이거야말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도 알았을 것입니다. 쉽게 가는 길, 지름길을 두고 돌아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말로 바보 중의 바보입니다. 교회가 유행하는 기업형 목회성장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민중목회니 평화목회니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니 하는 얘기만 외치고 있다면 이는 분명 바보교회일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옆에 있었더라면 분명 그렇게 꼬드겼을지도 모르지요. “아이 목사님 뛰어내려도 괜찮을 거에요. 목사님은 하느님이 지켜주시지 않아요? 아니 교회가 차고 넘친다는데 무얼 걱정하세요. 저 환호하는 박수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목사님 기회는 한번 오지 두 번 오는 게 아닙니다.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고 그러세요? 눈 한번 딱 감고 뛰어내리세요.” 살아가면서 여러분도 이런 유혹 가끔 받으실 것입니다. 바른 길은 아니지만 목적을 빨리 이룰 수 있는 분명 쉬운 길이 눈앞에 있습니다. 말은 모험이라고 하지만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모험이 분명합니다. 주저합니다. 그러나 옆에서는 괜찮다고 이번 한번만이니까 괜찮다고 꼬드깁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떠보지는 마세요. 이번만은 용서하실 것이라고 단정하지 마세요.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뿌리치셨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두 번의 실패를 경험한 악마는 이제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 세상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인간은 끊임없이 남위에 올라서려는 지배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재물욕심 명예욕심도 크지만 권력욕심이야말로 가장 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 말 한마디에 상대방이 움직이고 따라주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희열이 아닐까요? 아이들의 컴퓨터게임도 사실은 그 안에 권력에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자기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화면의 사람이 움직이잖아요. 총알이 날아가고 건물이 마구 무너지잖아요. 보이지 않는 권력에의 욕구 표현입니다.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의 유혹은 멀리 청와대 국회 군대와 같은 관료 조직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의 부부사이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교회나 학교에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든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깊고 철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온 편지]

오늘 목회자 마당에 글을 실었습니다만, 이번 주 목요일에 있을 3.1절 산상예배는 인천의 계양산으로 갈 예정입니다. 이 계양산에는 골프장건설을 반대하는 윤인중목사께서 인천녹색연합의 신정은씨에 이어 두 달 가까이 12미터 상공의 소나무 위에 임시천막을 치고 시위를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시간 인천 평화교회 교인들은 나무 위에 있는 목사님을 쳐다보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쓰신 글입니다.

“1월 20일 토요일, 아쉬움이 있다면 해넘이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욕심이 끝없다. 노을이 붉게 물든 서해를 보았던 기억을 되짚어본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삶이기를 기도한다. 그게 말이 쉽지. 쉬운 일은 결코 아닐 게다. ‘그리스도 예수’의 뒷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삶이지 않은가? ... 밤이 깊은 시각. 습기가 높아지는 듯 숲의 기운이 싸늘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숲 속에 정령 또는 요정이 살았다고 생각했나보다. 묘하고 깊은 기운이 숲 속에 있다. 인디언들은 성인이 되는 소년을 숲으로 보낸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에게는 무서움과 두려움이 먼저 몰려왔다.

숲속에서 소년은 두려움, 무서움, 외로움 배고픔 그리움 등 어른이 되기 위한 감정들을 소화해 냈을 것이고 숲에서 만나는 어둠 밝음 나무와 꽃 새 동물 해와 달 구름 바람 별 그리고 떠나온 가족 집 공동체를 떠올렸을 것이다. 스스로 먹을거리도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하여 나름의 터득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결국 ‘홀로 있음’을 깨달았겠지.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을 구별할 줄도 알고, 둘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립’과 ‘연대’를 묵상했을게다. 내가 이 숲에 앉아있는 연유도 그런 ‘어른이 되는 과정’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을 결여한 탓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를 되새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주께서 마련하신 성장 체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축복이다.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스런 일이다.“

윤인중목사의 글은 마치 광야에 거하는 예수께서 보내온 편지와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후고는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주둥이가 노오란 미숙아요,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며 돌아다니는 자는 중간치의 인간이요 모든 곳을 타향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자가 뛰어난 자’라고 말했다. 결국 그가 말하는 인생의 성공자는 세상에서 자기 아성을 쌓은 사람이 아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어 이 땅의 이방인으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신앙한다는 궁극적 목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이고 하느님은 이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시기에 세상이 낯설수록 하느님을 더 쉽게 깊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사순절은 불편함과 어색하기 살기]

지난 주 저는 사순절을 맞아 여러 가지의 절제서약들을 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절제 서약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절제와 인내를 통해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세상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도록 살아보라는 말입니다. 보다 익숙하게가 아니라 조금 불편하게 그래서 내 주위가 어색하게 되었을 때에 섬뜩 신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께서는 지난 주 목회자마당을 참조하시고 한두 가지의 절제를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을 따라 광야에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은 광야로 나아갈 때, 그 길을 인도하신 분은 분명 성령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악마와의 유혹의 대결에서 하느님은 뒷짐 지고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아 성찬식을 하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광야를 찾아 홀로 나아갈 때, 그 ‘홀로’ 안에는 이미 성령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을 걸어가는 우리 앞에 이미 성령께서 앞서 걸어가고 계십니다.

엠마오의 길을 걸어갔던 두 사람은 떡을 뗄 때, 비로소 자기들과 얘기하던 그 나그네가 부활의 주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왔던 길을 거슬러 어둠을 뚫고 십자가의 피 냄새가 채 가지지 않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또한 피하여 내려왔던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귀한 눈물의 결단이 오늘 떡과 잔을 나누는 가운데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견사]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광야에로 나아가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까?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젊었을 때의 열정을 포기한 것은 아니겠지요?
자신의 욕망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슬그머니 뒤로 빠지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진리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수님은 홀로 광야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가까이 나아오라고 손짓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