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과 노아


창세기 6, 1- 12 ; 루가복음 12, 13- 15

이 세 우 목사 (들녁교회)


오늘은 2007년 정월대보름입니다. 아직까지는 대보름이 우리민족의 큰 명절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새해의 첫 만월인 이 날에 한 해의 바램을 달에게 빌고 건강을 기원해 왔습니다. 정월대보름 풍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으로 오곡밥을 먹고 나물을 먹으며 연날리기를 하는데 실을 끊어서 연을 날려 보내고 쥐불놀이를 하는 등의 풍습이 있습니다. 또 대표적인 풍속으로 부럼깨물기와 더위팔기를 빼 놓을 수 없죠. 그리고 이날 오곡밥과 9가지나물을 먹게 됩니다. 말 그대로 세시풍속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풍습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요? 세시풍속은 모두 농경사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보름은 농사일 중에서 농사준비시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보름하면 정월 초하루 즉 설을 쇤 후 2주가 지나는 시기인데 이 때쯤이면 농경사회에서 서서히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됩니다.

제가 사는 농촌은 이미 농사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해보다 날씨가 포근해서 그런지 진작부터 거름내기와 논 밭 갈기를 시작해서 지금은 마쳐가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농촌들녘에선 꽃들도 피어나고 새 나물도 나오고 해도 마음들은 벌써 논밭으로 달려 나가 있습니다. 농사일을 준비하고 새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시기에 이렇게 만나게 됨을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들녘교회는 지금 교회건축을 마친 후에 비교적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들을 하고 계십니다. 빚 문제로 다소 걱정들은 하고 계시지만 다들 대견하고 흐뭇해하시면서 자부심들을 가지고 신앙생활에 임하고 계십니다. 새 건물에 맞는 예배 모습의 변화가 생겼고, 또한 전에는 할 수 없었던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또한 사회단체를 비롯한 각종 모임과 수련회 등이 빈번하게 교회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교인 수에 있어서는 아직 이렇다 할 변화는 없습니다.

그동안 남의 일로만 알았던 일이 우리교회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교인가정과 연관된 40세를 전후한 노총각들이 모두 10여명 됩니다. 그 중 한 명이 엊그제 3•1절 날 베트남 여성과 만나 농촌총각과 국제여성과의 결혼식이 우리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이 일로 그 가정의 늙은 시부모들은 물론이고 아무런 준비 없이 낯선 이방인과 맞부딪쳐야 하는 동네사람들의 어색함과 당혹감, 복잡한 심정 등으로 마을은 지금 때 아닌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을 위한 목회를 현재 구상하고 있습니다.

교회 옆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는 올해 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4명의 신입생이 들어와 21명이 전교생을 이루고 있는데 30명 미만 학교는 경쟁력이 없다고 도교육청에서 문을 닫으라고 요구해 현재 폐교대상에 올라 있습니다. 이 요구는 10년 전부터 듣던 이야기인지라 크게 신경은 쓰지 않고 있습니다만 갈수록 학교를 지켜 내는 것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들녘공부방은 향린교회의 도움으로 별 탈 없이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부방의 변화가 있는 것은 공부방 대상자가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급격히 이동을 했습니다. 어린이가 줄어든 이유도 있지만 학교와 협의해서 초등학교에 방과 후 학습교실을 만들어 운영을 하기로 하고 지금 실시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저희 교회가 하던 일을 이제는 학교가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이들이 이제는 청소년으로 성장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방이 지금은 거의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으로 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인원은 중학생은 현재 8명, 고등학생은 5명입니다. 학습내용은 주로 학과 공부에서 뒤 떨어진 내용들을 보충해 주고, 일체 학원을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라 영어와 수학을 별도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향린에서 지원해 주는 후원금을 바탕으로 영어 선생님에게 약간의 사례와 운영비로 쪼개서 아주 알차게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서말씀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함께 본 노아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교만이 최고조로 달했던 때입니다. 그리고 2장이 지나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수로는 2장 밖에 되지 않지만 또 엄청난 사건이 비슷한 이유로 해서 바로 이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근본적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만 어째든 전설에 의하면 노아의 홍수사건 후 아브라함 시대까지의 약 400년 동안 니무롯이라는 사람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가 당시의 인류를 지배하려고 하는 야망에서 바벨탑을 건설한 듯합니다.

400백년이란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두 사건의 전후관계로 볼 때 오히려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노아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구체적인 범죄와 교만, 타락이 가득차고 그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는 내용이 다소 신파적이긴 해도 더 딱 떨어진 교훈과 신앙적 요소를 채울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째든 두 사건은 별개의 동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인과관계에 있어서나 여러 전설과 앞 뒤의 전개과정 등을 살펴 볼 때, 동시대의 사건으로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두 사건이 서울 대형교회의 김홍도목사가 쓰나미 재해, 또는 지진 등을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말한 것처럼 자연적인 재해현상을 과학적 이해가 없는 가운데서 신앙적 고백으로 재해석한 사건이라 이해할 수도 있으나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는 요즘에 와서는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람들이 제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도 끔찍하고 충격스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사건들은 뉴스 쪽에도 끼지 못하고 놀래지도 않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벨탑 당시의 죄악 상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범죄행위들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불순종과 인간 위주로 살려고 하는 죽음의 문화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을 대항한 결과입니다.

그럼 오늘 날은 어떻습니까? 돈을 주인으로 삼는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아이들과 함께 보는 TV에서 마저 불륜을 소재로 하면서 면죄부를 주지 않으면 시청률이 떨어져 경쟁적으로 불륜장면을 가까이 자주 보여주는 미디어, 대안학교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게 귀족학교로 변질되었고, 교회가 민주화 운동, 평화, 통일 운동한다고 손가락 질 하던 교회들이 사학법 등 기득권 빼앗길까봐 목사들 앞잡이로 세워 머리깍고 사학법 재개정하자고 생난리짓들을 벌리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멍하니 우둑하니 서 있을 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의 판단기능마저 무디어져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못 가려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무관심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시대를 3무시대(三無時代)인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의 시대라 말하던데 정말 그래서 그런지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식입니다.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말하면 '정말 이상한 사람 다 있네.'라며 멀뚱멀뚱 쳐다보기 일쑤입니다. 이런 증상은 무서운 병 아니겠어요? 저주의 시대라 칭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노아와 바벨탑 사건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다시금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하다보니 전율을 느낄 만큼 섬뜩합니다.

거짓이 진리가 되고 진리가 거짓이 되며,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회 좋아하시죠? 회집에 가면 꼭 물어보는 말 있습니다. ‘이거 자연산입니까?’ 주인이 ‘물론이죠!’ 하면 기분 좋게 맛있게 먹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물고기 거의 100%가 다 양식 물고기랍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도 자유스럽지 않습니다. 저희 교인들도 마찬가지구요.

저는 목회활동을 하면서 어떤 목회를 할까 고민을 하면서 양식목회, 양식목사가 아닌 자연산 목회, 자연산 목사가 돼야지 하고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양식의 특징은 몸짓이 큽니다. 화려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키우려다 보니 약품을 많이 씁니다. 좁은 공간에서 크다보니 물고기끼리 서로 부딪쳐 몸의 상처가 나고 그래서 빨리 부패해 죽으니까 방부제를 엄청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빨리 키워서 시장에 내 놓아야 하니까 성장 촉진제가 들어 있는 사료를 듬뿍 듬뿍 먹인다고 하는군요. 제가 보기엔 교회도 이런 양식교회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방부제와 촉진제 왕창 왕창 주는 교회, 비상식적이며 몰지각한 양식목사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공동식사를 하다보면 저는 음식에 조미료나 설탕 많이 쓰지 말라고 하죠. 그러면 알았어요! 하고 대답을 하세요. 그런데 맛을 보면 그게 아네요. 미원도 많이 쳤고, 설탕도 많이 넣은 것이 분명합니다.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제초제 등 농약 쓰지 말라고 하면 분명히 안 쓰겠다고 대답들은 잘 하시는데 나중에 보면 그게 아니에요. 나 몰래 농약들을 치시드라구요. 어떤 분은 다 잠들은 밤에 몰래 나가셔서 농약을 주는 분까지 계세요. 설교도 양식설교가 있어요. 아주 청산유수지요. 설교가 아주 삐까 번쩍, 어떤 것은 느물 므물, 야단법석인 설교들이죠. 우리 교인들이 아직도 이런 설교들을 그리워하고 계세요. 도대체 저 양반이 저렇게 머리를 쥐어 짜며 고민하는 이유라든가 몸부림치는 까닭이 무엇일까 좀 들어 줄만도 할 땐데 설교를 잘 준비해서 나가기만 하면 그날은 모두 주무시기만 하네요.

요즘 저희 교인들은 대놓고 나한데 야단을 칩니다. 무능력한 목사라구요. 아니 먼저 번 목회자나 다른 교회 목사들은 자식들 중매도 잘 서고 취직도 잘 시킨다는데 우리 목사님은 코만 컸지 아무 쓸모가 없어. 하시면서 빨리 노총각들 장가보내고 취직시키라고 성화십니다. 이 분들은 목사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자기 자식들 장가 보내주고, 자녀들 취직시켜주는 것이 능력이고 그것이 제일입니다.

아니 대통령도 못 푼 문제를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진짜가 아닌 가짜에, 자연산이 아닌 양식에 모두가 물들어 있습니다. 남 탓만도 못하겠습니다. 저 자신도 목회활동 전반에 걸쳐 부끄러운 모습만 가득할 뿐입니다.

어째든 FTA문제 잘 매듭짓고 농촌문제 잘 해결되어야만 농촌의 노총각들 결혼문제도 풀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거 한참동안 무능력한 목사소리 들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걱정스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세계가 미국과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되면서 경제가치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통제된 세상을 보면서 바벨탑과 홍수가 자꾸 연상이 됩니다.

세계는 전쟁과 사회적 양극화와 생명파괴의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초극적기업의 물질적 탐욕과 세계제패를 향한 패권적 권력욕이 거대한 구조를 또다시 만들고 이것이 세계를 소용돌이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합하여 거인을 낳았듯이(창6:2) 신적인 명분은 세속적인 탐욕과 결합하여 인류역사상 최대의 악마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희망은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인간만의 노력으로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 만들기

1. 지금의 구조는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개입에 의해 치유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2. 심판적 사건을 피할 수 없으나, 그 심판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미래의 싹을 함께 키워가고 계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홍수 심판 후의 새 세계를 준비시키셨듯이 오늘도 여전히 그 역사를 전개하고 계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여기에 우리는 희망을 갖는다

3. 그 희망의 싹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홍수 심판 당시에는 노아의 가족으로 상징되었으나 지금은 ‘집단적인 노아’, 노아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이 사건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안에도 많이 계신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준비작업이 진행 중이시고, 이 곳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미래를 열어갈 이 시대의 노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노아운동은 노아가 산 속에 들어가 배를 만들었듯이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구조를 탈피해야하는 용단과 사람들의 질시와 반목을 견뎌낼 수 있는 신앙고백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예언적 소수자 운동일 수밖에 없음도 사전에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오늘, 자신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노아’를 부르고 계십니다. 농업의 위치와 가치가 전도되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이즈음, 누가 끝까지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미래의 뜻을 이루어 갈 것인가? 다함께 물었으면 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