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 사순절과 평화의 영성(2)
‘자 이 사람이다.’
이사야 59장 1-11절; 요한 19장 1-7절

2주 전 꽃샘추위가 시작되던 월요일 저녁 아프카니스탄에서 숨진 윤장호하사를 추모하는 광화문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도엽시인이 읊은 추모시가 매우 감명 있어 이를 소개합니다.

제목은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만난 두 청년>

고 윤장호 하사의 추모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승낙은 선뜻 하였는데, 좀체 써지지가 않는다. 또 한 청년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다. 누가 윤장호를 죽였는가? 명백한 살인자가 있는데, 나는 살인의 또 다른 추적을 하고 있다. 어떤 테러리스트의 삶을 알기 때문이다.

한 청년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취직을 했다. 그는 병역의무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군에 입대했다. 미국에서 배운 '평화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자원하여 분쟁지역으로 떠났다.

또 한 청년이 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가난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자무식인 농사꾼이다. 가난하지만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가족과 이웃이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았다. 하지만 평화는 멈추고 말았다. 탈레반을 몰아내기 위해 왔다는 '평화의 사신' 미국은, 최신식 전투기로 이 청년의 마을을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부모형제도, 이웃, 친구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혈혈단신이 되었다.

2007년 2월 27일. 두 청년은 미국이 만든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만난다. 미국의 평화를 굳게 믿은 청년과 미국에게 평화를 빼앗긴 청년. 미국에서 경영학을 배운 청년과 미국으로부터 분노를 배운 청년. 한 청년은 이제 한 달 뒤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정든 부모형제를 만날 꿈에 부푼 한국 군인이고, 또 한 청년은 부모형제를 잃은 분노로 가슴에 폭탄을 품은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다.

너무도 다른 삶을 걸어온 두 청년이지만 한날한시 같은 장소에서 죽음을 함께 한다. 한 청년의 주검 위에는 미국에서 보낸 무공훈장이 놓여 있고 또 한 청년의 주검 위에는 무지막지한 테러리스트란 이름이 주홍글씨처럼 새겨져 있다.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 내내 미국은 전 세계 숱한 지역과 국가에 최신식 무기를 든 채 평화의 이름을 나부끼며 개입한다. 불행히도 미국이 개입한 지역과 국가에 분쟁이 끝나고 평화가 깃들었다는 승전보는 받아보지 못했다. 9ㆍ11 이후 미국이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은 더 많은 테러를 양산하였을 뿐이다. 세계의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의 이름으로 벌이는 미국의 전쟁놀이를 먼저 멈춰야 한다. 최신식 전쟁 장난감 선전을 위해 무고한 민간인이 죽어가고, 테러리스트가 되어가는 악순환은 이제 끝나야 한다.

고 윤장호 하사의 죽음 앞에 불순하게도 테러리스트의 삶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제2의 김선일, 제2의 윤장호를 막는 길은 더 많은 파병과 복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장군복'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의 청년, 그리고 전 세계 청년의 생명이 이제는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무공훈장을 준 미국은 생각하길 바란다. 평화의 이름으로 죽어간 당신 나라의 수천수만의 청년들, 그리고 그 부모의 마음을. (오도엽)

[남한 사회에 대한 자기 성찰]

저는 살인자와 피해자를 모두 미국에 의한 희생자로 추모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여러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의 이러한 패권에 저항하여 반미를 외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미국을 배우고 좇아가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영어 배우기에 온 나라가 날 뛰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그 나라말을 잘하려면 그 나라 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야 합니다. 해방 이후 60년 동안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 한국인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비록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먹었지만 후식으로 숭늉 대신 스타벅스 커피를 먹는 문화양식이 변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국민 모두가 돈벌이가 쉽다는 이유로 영어말하기를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까지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한미 FTA 협정을 통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미국의 한주로 편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노대통령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럼 결국 미국은 손해 보는 협정을 맺겠다는 말인데, 이는 논리가 닿는 말이 아닙니다.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혁도 미국이 이 제도를 하고 있으니까 별다른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만약 미국이 내각책임제였다면 우리도 진즉에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지 않았을까? 그래 한발 물러서서 정치제도에 미국을 따라간다고 합시다. 먹고 사는 경제체제에 미국과 하나 된다고 그럽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미국이 앞서가고 있는 나라이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기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게 세계화의 대세이니까 좇아가야 한다고 우기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까지 따라가려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여러분이 다 들으셨을 것입니다. 세계의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흑표라고 하는 전차를 한국의 기술로 개발했다는 얘기를 그리고 이 전차 구입에 터키 등 세계 여러 나라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전차만이 아닙니다. 최근 들어 우리 손에 의해 개발된 무기 얘기가 언론에 자주 등장합니다. 헬기, 단거리 미사일, 자주포, 잠수함 등등. 국민들은 이런 소식에 은근히 좋아합니다. ‘아 이제는 우리도 무기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기 수입국에서 무기 수출국으로 전환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무기 수출은 가장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입니다. 한 개인이 도박이나 복권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듯이 국가도 군수산업에 한번 빠지면 여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제 남한은 국민소득이라는 미명하에 미국의 패권주의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왜 미국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킵니까? 군수산업 때문입니다. 전 국가산업의 3분지 1을 차지하는 군수공장이 문을 닫으면 국가경제가 휘청거립니다. 따라서 미국은 무기의 소비자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미국을 따라 군수산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2만불 3만불의 국민소득 유지를 위해 세계의 가난한 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비극입니다. 윤장호하사의 죽음보다 더 한 비극입니다. 일제 침략으로 35년 지배를 당한 비극보다 더한 비극입니다. 우리가 침략을 받아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지만,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저 어느 아프리카 나라에서 어느 흑인 청년의 심장 속에 박힌 총알에 메이드인코리아가 찍혀 있고 아프카니스탄 어느 마을을 통째로 불태운 미사일 파편조각에 메이드인코리아가 찍혀 있다면 평화를 사랑하는 이 나라의 성직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교회를 찾아왔던 정신대할머님이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아픔을 떳떳하게 변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하여 스스로 국적을 포기하였듯이 차라리 저 국적을 포기하는 것이 떳떳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내가 시금치와 콩나물 대신 돼지삽겹살과 불고기를 먹고 20평 아파트에서 30평 아파트로 옮겨 가기 위해 메이드인코리아가 박힌 총알과 자주포를 만들어 파는 그런 짐승 같은 나라의 한 국민으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야만 세계의 1등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전 꼴찌 시민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아무리 돈에 환장한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들어 파는 일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바로 자신을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한의 스트레스율과 자살률은 세계 최고]

지난 해 12월 AP통신이 세계 주요 10대 나라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응답자의 81%가 ‘일상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고 이는 전체 1위였습니다. 또 이미 다 아는 얘기라 조금도 놀라운 얘기가 아니지만, 자살율과 자살증가율 또한 1위입니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즈는 최근 ‘한국의 자살 전염병’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경제 사회적 변동, 즉 고도의 도시 산업화가 한국인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건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시 산업화는 남한에서만 일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남북분단으로 인한 극단적 이념대결입니다. 지난 60년 동안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빨갱이’라는 극단적 살인용어를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단지 적을 미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의 생명까지도 경시하는 잘못된 인간상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이 안에서만 살아와 세상 사람이 북한사람은 모두 악마의 자식처럼 보는 줄 알고 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은 미국의 지배를 받는 한국이나 일본 몇몇 나라 국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남한 사회는 잘못된 사회적 가치가 진리로 여겨지는 착각되는 사회입니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넘쳐나고 자살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외국 한두 달 여행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몇 해를 살아보고 외국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경험할 때, 우리가 얼마나 병이 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 2절에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손바닥은 사람 죽인 피로 부정해졌고 손가락은 살인죄로 피투성이가 되었구나. 너희 입술은 거짓이나 지껄이고 너희 혀는 음모는 꾸민다.’ 칼을 들고 누군가를 찔러 피를 내어야만 피로 부정해지고 살인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형제를 향해 살인적 용어를 쓴다면 그게 살인죄입니다. 무기를 만드는 일에 일조하였다면 그 또한 살인의 공범입니다. 누군가를 속여 돈을 빼앗는 것만이 거짓이나 음모는 아닙니다. 이 미사일은 100킬로미터를 날아가 오차 1미터를 벗어나지 않는 아주 정밀한 메이드인코리아입니다. 이 전차는 남한이 개발한 물속에서도 가는 최신형 전차입니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 또한 거짓이요 음모입니다.

저는 우리가 6자회담에 박수치고 북미협상에 기뻐하고 남북정상회담에 도취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8절에 ‘그들이 구불구불 뚫어놓은 뒷골목을 가면서 평화를 맛볼 사람이 어디 있으랴?’를 이렇게 바꿔 이해합니다. ‘미국이 구불구불 뚫어놓은 자본과 패권의 뒷골목을 좇아가면서 평화를 맛볼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9절 이하의 예언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평은 우리에게서 멀어만 가고 정의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만 간다. 빛을 기다렸는데 도리어 어둠이 오고 환하기를 고대하였는데 앞길은 깜깜하기만 하다.’ 사회의 양극화는 도를 넘어섰고, 그 대안을 얘기하는데도 오직 자신의 이익만 생각합니다. 서구사람들은 세금 내는 일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회적 공익으로 분배로 되돌아오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알량한 재산세 조금 더 내는 것에 아우성입니다. 실제 아우성을 쳐야할 일에는 난 모르는 일이라 외면하면서 말입니다. 오는 목요일 22일부터는 한미연합전시증원훈련이라고 부르는 사상최대의 전쟁연습이 실시됩니다. 여기에 대해 언론도 정부도 모름 쇠로 일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경고는 유대민족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시점이 아니라 바벨론이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민족이 자유와 해방을 기다리는 시점, 누구나가 평화가 임했다고 하는 시점에서 선포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책임회피 가능한 일인가?]

여기에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나는 모르는 일이다. 전문가인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하고 손을 떼면 되는 일입니까? 우리는 종교인이라 영혼의 문제만을 관심하니까 이 모든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손을 떼면 되는 것입니까? 마태오복음서에서 빌라도는 대야의 물을 떠오라고 해서 군중이 보는데서 손을 씻으면서 나는 이 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까지 했지만 빌라도는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 책임을 온통 뒤집어 썼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오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조를 비롯한 여러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는 빌라도를 통해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억울하다 하겠지요. 그래 예수님은 이에 동의하시면서 ‘너는 나의 무죄석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빌라도 너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말합니다. 대추리 분교를 난 부수지 않았다고. 난 거기에 전혀 관련이 없다고.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 학교가 어떻게 생긴지도 알지 못한다고. 그러나 예수님께서 거기에 뭐라고 말씀하실는지 난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 너는 죄 없다.’라고 말씀하실는지 아니면 ‘그때 너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실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아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벅찬데 예수님 그건 너무 하시는 얘기 아닙니까? 라고 우리는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좇는다는 말이고 나를 좇으려면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느님과 맘몬 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지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복을 받으려면 마음이 가난해지고 온유한 사람이 되고 내 자녀가 되려면 평화를 위해 일하고 하느님의 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말할 때 넌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전 우리가 처음 제자들과 같이 세상의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를 따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어느 쪽이 진리인지는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알지만 주저하고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양심적이고 솔직한 행동입니다. 결단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되지는 없습니다. 단지 세상을 섬기는 일과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혼동하여 자기를 변호하는 비겁한 일만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것이지. 수십년 교회를 다니고 나서도 이것인지 저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어정쩡한 태도를 갖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죽일만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세상 평판이 두려워 군중에 떠밀려 예수를 넘긴 빌라도의 잘못을 반복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보라 한 사람!]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빌라도의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빌라도가 던진 말 한마디, 오늘 제목으로 뽑은 ‘자 이 사람이다.’라는 말은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헬라어로 ‘이두 호 안뜨로포스.’ 직역하면 ‘보라 한 사람.’ 부하를 시켜 매질하게 하고 모욕을 준 다음 가시면류관을 쓴 피투성이의 예수를 향해 ‘보라 이 사람.’ 죽일만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외친 이유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합니다. 그렇게 매질하고 모욕을 당했음에도 억울하다고 소리 한번 내치지 않는 그런 인내심에 놀라 <봐라 이 인간> 이렇게 말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는 저자 요한에 의해 첨가된 신학적인 선언입니다. 앞장 18장에 로마 병정들과 대사제들과 가롯유다가 예수를 체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다가 예수에게 키스함으로 스승을 배반하는 것으로 나타나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는 그들의 답변에 예수께서 앞으로 나서며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그들은 땅에 엎드려집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선언은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이고 히브리어로는 ‘야훼’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엎드려졌다는 말은 놀람 속에 나가 자빠졌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의미는 경배했다는 이중의 의미도 숨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여러 번 쓰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수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미 요한은 예수를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내고 있기에 빌라도의 입을 통해 발설된 ‘보라 이 사람.’ 하는 선언은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는 메시야적 인간을 상징하는 종말론적인 용어인 것입니다.

즈가리야 6장 10절로 12절 말씀과 연계하여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오늘 금과 은을 받아다가 면류관을 만들어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머리에 씌우고는 이렇게 일러주어라.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사람을 보아라. 그 이름은 새싹이니 이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싹이 돋으리라 그는 야훼의 성전을 지을 사람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나중에 성서를 찾아보면 아시겠지만 즈루빠벨에 이런 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로 되어 있지만 문맥을 고려해 바꾸었다고.> 본래는 여호수아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맞지 않기에 그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원문으로 읽으면 ‘너는 오늘 금과 은을 받아다가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는 이렇게 일러주어라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사람을 보아라. 그 이름은 새싹이니 이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싹이 돋으리라. 그는 야훼의 성전을 지을 사람이다.’ 즈가리야 시대의 제사장 여호수아가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예언이 선포됩니다. 요한은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와 새 성전]

요한복음 2장에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로 가득 찬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그때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답하십니다. 저자 요한의 머리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성전, 곧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새로운 그 무엇이 태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이 요한복음 강해에서 구약은 폐기되어져야 한다고 하는 발언은 요한복음 안에서는 이해 가능한 발언입니다. 다른 세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구약의 율법으로부터의 단절을 매우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예수께서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함으로 구약과의 깊은 연대를 선언하고 있지만, 실상 요한복음에서는 율법과의 단절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1장 1절에서부터 예수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하느님과 똑같은 말씀이셨다.’고 전제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어두움에 갇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 빛을 알아본다고 선언합니다. 그 빛 곧 하느님의 영광을 은총과 진리로 설명하면서 1장 17절에서 구약과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곧 요한은 예수님의 출현을 넓게는 우주 창조의 재시작으로 그리고 좁게는 율법으로 대변되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성전을 만들어내는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이 신앙을 빌라도의 입을 통해 선언하도록 한 것입니다. ‘보라 한 사람!’ 빌라도는 누구입니까? 그는 당시 세상 권력의 중심이었던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빌라도는 예수를 매질하고 조롱하는 예수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세자로 보이지만, 실제 이야기 내면에 있어서는 빌라도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역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후에 이 글을 읽는 예수 따르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죽으심은 패배가 아니라 새로움을 창조하여 나가는 변천의 한 과정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께서 지는 십자가의 죽음은 새로운 사상 아니 새로운 종교 아니 새로운 우주 역사를 틔우기 위해 씨앗이 땅에 묻히는 생명의 자기해체의 과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나 부활을 개인의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학자마다 요한복음의 핵심을 다르게 두겠지만, 저는 요한복음의 핵심 구절을 14장 12절 말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일 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다는 선언이야 말로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서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가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일을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입니까? 우리가 모두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에 어떤 성숙의 단계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10년 전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와 지금의 고백은 말은 같지만, 그 내용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믿음의 성숙 단계를 우리 육신의 아버지에 비유하여 3가지 단계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첫째, 우리는 관계에 있어 호적상 나의 아버지임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아버지의 하는 말씀이 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 단계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가파른 바위 위에 서있는 아이에게 아버지가 나를 믿고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내가 밑에서 받아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 이 아이도 판단의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자기 능력으로 볼 때는 자기를 안전하게 붙잡아 주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뛰어내렸는데, 아버지가 놓치면 어떡하나 하는 의심이 생기고 불안이 생깁니다. 그래서 주저합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나를 믿으면>이라고 말씀하실 때의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뛰어내리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바위 위에서 땅으로 뛰어내리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되는 것일까요?

[이누이트 부족들의 노래]

한편의 시로 제 대답을 대신합니다. 에스키모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백인들이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부친 좋지 않은 명칭이기에 그들 스스로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 곧 이누이트라 부르는 부족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자주 부릅니다.

[새벽이 밝아오고 태양이 하늘의 지붕위로 올라올 때면 내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겨울의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아니오 나는 신발과 바닥 창에 쓸 가죽을 구하느라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어쩌다 우리 모두가 사용할 만큼 가죽이 넉넉하다 해도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여름에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나를 행복하게 했습니까? 아니오. 나는 순록 가죽과 바닥에 깔 모피를 구하느라 늘 조바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빙판 위의 고기 잡는 구멍 옆에 서 있을 때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기잡이 구멍 옆에서 기다리며 나는 행복했습니까?

아니오,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까봐 나는 늘 내 약한 낚시 바늘을 염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잔치 집에서 춤을 출 때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춤을 춘다고 해서 내가 더 행복했습니까? 아니오. 나는 내 노래를 잊어버릴까봐 늘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너무 염려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자가 되려면 겸손하고 단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완전하게 보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인간성이나 위대한 성인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천한 사람 낮아진 사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곧 잘 잊어버립니다. 죄인을 부르시러 오셨다는데 우리는 예수님 앞에 죄인 된 모습이 아닌 어떤 완성된 의인의 모습으로 나서기를 원합니다. 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합니다.

하바드신학대학장의 자리를 버리고 장애우 한사람을 섬기기 위해 새벽의 공동체로 들어간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우리는 성공하거나 뭔가를 만들어 내거나 업적을 쌓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부름을 받았다. 성공은 힘과 긴장과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풍성한 결실은 상처받기 쉬움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함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신앙인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자신들의 노력과 훈련을 통해 신의 경지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사람이 된 신을 찾아 낮은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부류 중 어떤 부류에 속하십니까?

어떤 시인이 말하기를 ‘21세기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해야 하는 시대다. 하나의 존재로 살지 말고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로 살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세상과 소통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누군가와 소통한다고 할 때 그 소통의 관계는 언제 일어납니까? 말이 통하는 때는 언제 일어납니까? 술을 한잔 나눌 때입니까? 아니면 세미나 토론시간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아파할 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없이 나의 손을 잡아주었을 때입니다. 결국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은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을 향해 자신의 손을 펴고 나아가는 존재가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화나눔 공동체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사순절에 주위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난주는 방글라데쉬의 이주노동자가 약간은 발음이 어색한 한국어로 강의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는 얼굴색이 다른 이방인이요 나그네요 10년을 살고 있지만 법적 신분은 불법체류자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지만, 한번 나가면 돌아오지 못하기에 큰 아들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자신의 삶도 불안하였지만 그는 자신들의 동료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안에 있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사람답게 한국인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답변하기를 길거리에서 그런 이주노동자들을 보거든 따스한 눈빛으로 봐주는 것이 우리 교회가 할 일이라고. 저는 그를 향해 한번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보라 이 사람.’ 오늘 또 한분의 사람이 오십니다. 비전향장기수로 30년 이상을 감옥생활을 하여 온 임방규선생이십니다. 오늘 오후에는 대추리를 방문합니다. 거기에는 지난 4년 동안 자신들의 잃어버린 권리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일하신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세상 자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의 연약함을 통해서 그리고 이 땅의 낮은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과 소통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견사)

'평화가 무엇이냐' (대추리 평화지킴이)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이 서식처 잃지 않는 것이 평화
가고 싶은 곳을 장애인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
이 땅을 일궈 온 농민들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이 평화
배고픔이 없는 세상 서러움이 없는 세상
쫓겨나지 않는 세상 군림하지 않는 세상
빼앗긴 자 힘없는 자 마주보고 손을 잡자
새 세상이 다가온다 노래하며 춤을 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