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평화의 영성(3)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
에제키엘 18장 21-32절; 루가 23장 39-43절

저의 하늘뜻펴기는 나누고 싶은 주제를 미리 정하고 그 주제에 따라 성서의 본문 말씀을 정하기에 보통은 성서읽기표에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이나 대림절과 같은 절기에는 성서읽기표를 좇아 하는데, 오늘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우선 전 지금까지 루가복음의 이 구절을 본문말씀으로 선택한 경우는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받은 이 강도의 얘기는 회개나 구원의 주제와 관련한 다른 말씀에 곁들여서 보조말씀으로는 인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구절이 평신도들에게는 매우 매혹적인 구절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강도는 살인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일보 직전에 낙원 허락이라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병을 고쳐주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다르게 말한 경우도 있습니다. 세리장 자캐오의 경우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 하자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어떤 여인이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낭비한다고 비난하자,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라며 이 여인을 적극 옹호하며 칭찬합니다.

[막판 뒤집기 가능한가?]

이보다 더 큰 칭찬도 있습니다. 하루는 지방의 유력한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로마 백인대장의 종이 병들었는데 이를 고쳐달라고 요청하자 예수께서 그 백인대장의 집을 향해 가는데, 이 소식을 들은 백인대장이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수고롭게 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종은 고침을 받았고 로마인인 그는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보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전무후무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십자가 위의 죄수에게 한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라는 것보다는 그 격이 떨어진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병 고침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영생의 축복이고 게다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면 이만한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죄수는 십자가에 처형될 만큼 큰 죄를 저지른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날 예수와 함께 죽는 행운을 통해 살아생전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한 영생의 축복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몇몇 평신도들은 무슨 죄를 저질렀어도 죽기 직전에 뉘우치면 용서함을 받고 천국에 갈수 있다는 비상용 구원증거구절로 주머니 한쪽 구석에 집어넣고는 세상적인 삶에 계속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구원의 막판뒤집기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 구절에서 예수님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지 나더로 주여주여 외친다고 구원을 받는 줄 아느냐?고 말씀하지만, 오늘 낙원행을 보장받은 이 죄수의 얘기는 이런 얘기를 일시에 뒤집어엎어 버리는 구절이 되기에 사실 이런 얘기는 없었으면 하는 것이 설교자의 솔직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본문 말씀으로 선택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구원의 양면성]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자랑하지만, 실상 우리나라만 해도 기독교인구는 20%정도이고 나머지 80% 중 절반은 다른 종교를 갖고 있지만, 다른 40%는 교회를 외면하고 있고, 이중 다수는 교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지금 남한에서 교회를 다니며 교회가 유익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교회가 유익하지 않고 오히려 해악을 끼친다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교인들이 말만 번드르르 하지 말에 걸 맞는 행실이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무슨 죄든지 다 용서하신다는 가르침에 잘못은 없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분명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이고 구원은 선물이요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이지 여기에 우리 인간의 행위가 조건으로 붙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선물로 규정하니까 선한 행동이 필요 없게 되고 그러자 교인들은 믿음의 이름으로 더 자신만을 위한 세상 축복만을 요구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는 이 말씀은 본래 성령에 관련한 말씀인데, 성령은 간곳없고 모두 물질축복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친 교회 또한 교인들에게 하느님에게서 받았으니 하느님 사업에 바치라고 헌금을 바치라고 일종의 강요 아닌 강요를 종종하게 됩니다. 제 아내가 대전에 있는 한 친구를 만나 신앙고민을 들었는데, 그 교회에서는 권사가 되려면 3천만원을 헌금해야 하는데, 자신이 과연 3천만원을 내고 권사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옮기자니 수십 년의 믿음의 친구들을 잃어버리게 되고 게다가 교회를 떠나면 마치 돈이 아까워 교회를 떠났다는 얘기를 듣게 되어 이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분명히 우리의 행실에 근거하지 않는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편에서 하는 말씀이고 우리 인간의 편에서는 구원이 보장되었던 보장되지 않았던 선한 마음을 품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서읽기는 신약에서 용서받은 죄수의 구절을 택하고 구약의 에제키엘 말씀을 통해 균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만일 못된 행실을 하던 자라도 제 잘못을 다 버리고 돌아와서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바로 살기만 하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라고 변화된 삶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30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나는 너희 하나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이렇게 구원에 있어 은총과 바른 행실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나의 믿음에 있어 이 둘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실천이 부족하여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염려하는 분들은 구원은 나의 행위와는 관련 없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라는 가르침을 통해 그런 염려를 버리는 것이 좋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회개의 기도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안심이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듣고 바른 행실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루가의 숨은 의도]

그런데 오늘 루가복음 본문의 말씀은 용서의 은총과 더불어 또 다른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한 죄수가 다른 죄수에게 한 말에 있습니다. 한 죄수가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하고 말하자 다른 죄수가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이 답변을 통해 루가는 예수님은 다른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했지만, 그들과는 달리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얘기를 루가는 어떻게 알게 되었고 십자가에 매어 달려 손과 발에 피가 쏟아지는 고통의 순간에 세 사람이 이런 얘기를 나눌만한 시간이 있었을까 질문하면 루가가 전하고자 하는 얘기는 낙원허락 보다는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이 얘기를 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이 얘기는 우리에게는 하도 많이 들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2천년전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얘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전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래 그분의 삶도 훌륭하고 말씀도 참으로 훌륭하였는데 무슨 죄를 지었기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가? 하는 질문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는 로마의 법을 어긴 중대한 죄인이었다는 판단을 갖게 됩니다. 로마법을 어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사람들의 모함과 시기로 죽었다는 것을 말해야 했고 동시에 로마는 예수 죽이는 일에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하는 것을 밝혀야 했습니다. 이 두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로마시대에 복음 전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모순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니케아신조나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는 로마의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지만, 실상 복음서를 읽어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선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지 그에게 책임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과연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

마태오복음을 보면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어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사나웠습니다.’ 하고 당부하는 얘기가 나오고 빌라도 또한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하고 소리칩니다. 마태오는 빌라도가 손을 씻음으로 예수의 죽음에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에서는 군중들이 ‘예수를 죽이고 바라빠를 놓아주시오!’하고 소리칠 때,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그 뜻을 밝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빌라도는 예수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진리추구자로 등장하고 유다 군중들 앞에 서서 ‘내가 그에게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무죄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19장 12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줄 기회를 찾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세복음서는 빌라도에게 매우 분명한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다만 마르코는 세복음서와 같이 분명한 면죄부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빌라도는 대사제들이 시기한 나머지 예수를 자기에게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군중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는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함으로 당신이라도 빌라도의 경우를 당하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암시를 통해 빌라도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서에서는 빌라도는 전혀 책임이 없고 유대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데, 왜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줄기차게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가? 교회의 고백이 옳거나 복음서가 옳거나 둘 중 하나이지 둘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한쪽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알면서도 편의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 대답은 정말 복음서에 나와 있는 대로 빌라도는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책임은 있었지만, 복음전파를 위해 책임이 없는 것처럼 복음서 저자들이 그렇게 각색을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숨겨진 예수 죽임의 이유]

예수님의 죽음 이후 33년쯤이 지나 서기 66년경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로마는 예루살렘 성에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시킵니다.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이 나라 없이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유랑의 시대가 시작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모아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할 때는 이렇게 로마의 유대인 탄압이 최고조에 달았을 때입니다. 예수는 유대인이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또한 로마에 적대적이라는 소문이 나면 이 복음서는 쓰나 마나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로마는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그리고 모든 책임은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지난 2천년동안 유럽에는 antisemitism이라는 반유대문화가 뿌리 깊게 형성이 되었고 이를 악용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히틀러입니다. 또 많은 경우 우리는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너무 개인 영성화하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교리적이고 너무 종교화하였다고 말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것 또한 바울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이고 실상은 이런 변신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기독교의 타락이 시작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기독교의 세계화가 이루어졌고 동방에 사는 우리에게도 예수 복음이 전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내용을 떠나 일반 역사가의 입장에서 본다하더라도 로마의 십자가 처형은 분명히 자국민들에게는 행하지 않는 로마정부에 반역하는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사형방법이었기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책임을 전적으로 씌우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예수는 정치범으로 살해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로마를 비판하는 정치적 얘기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 흔적은 볼 수 있습니다만 분명한 구절은 없습니다. 있었다면 복음전파가 불가능했습니다. 예를 들면 일제가 조선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출애굽기나 요한의 묵시록과 같은 해방이나 자유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는 성경책조차 공적으로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식민지 백성으로 수탈을 당하며 살아가는 갈릴래아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과 함께 하였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갈릴래아는 끊임없이 폭동이 일어난 발원지라는 점에서 예수 또한 당연히 정치지배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헤롯왕을 여우에 비유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던 초대교인들은 비록 복음서에서는 빌라도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지만 빌라도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고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는 항목을 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단지 종교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불순한 생각]

그런데 또 하나의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는데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꼭 죄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매우 불순한 질문으로 들릴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의 아들이 죄가 없는 것이지 조목사는 지금 무슨 말하는 거냐? 저는 예수께서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다고 할 때 의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선 교리적으로 모순이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셨고 동시에 완전한 신이셨다.’고 말합니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신> 이중 한 가지를 포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에 초기 교회는 많은 종교적 갈등과 합의를 통해 공의회에서 이렇게 확정하고 이후 이에 이의를 달면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인간을 뭐라고 정의합니까?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이셨다면 완전한 죄인이 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동시에 완전한 신이셨다고 말하면서 그러기에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분명히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세계이니까 인간의 논리에 맞지 않으니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모순입니다. 하여간 더 이상의 논의는 쉽지 않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교리는 다른 근본교리와 충돌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고백에 대해 청소년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유치한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도 어렸을 때는 누구나가 저지르는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동네친구들하고 놀다보면 이웃집 창문 깨는 일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당시에 침을 뱉거나 숲속에 방뇨하는 것이 죄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런 정도의 잘못은 쉽게 범하지 않았을까. 벽에 그림을 그렸는데 아버지 요셉이 이 벽에 누가 이렇게 낙서했어? 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난 모르는데요.’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갓난아기 때부터 똥 누고 오줌 누는 것도 다 가리는 성인처럼 행동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여간 저는 불순하게도 이런 유치한 질문을 갖고 있고 이 질문을 누구와도 나눈 적은 없었는데 오늘 여러분과 처음 나눕니다. 누군가가 복음서의 구절을 내 밀고 예수는 결코 어떠한 죄도 없는 분이셨다고 주장하면 반증의 재료는 하나도 없으니까 저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 정말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매력이 없는 분이다. 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교리적인 고백은 이해하지만, 그래서 잘못하면 예수님의 친근한 인간미마저 없애버리는 것은 아닌가? 신적 교리에 묻혀 인간 예수의 실상을 잘못 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들은 예수님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로 목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매우 불순하고 불손한 얘기들입니다. 예수님을 신적으로 자꾸만 표현해야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도 덩달아 하늘로 올라가는 법인데,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고 자꾸만 땅으로 끌어내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얘기는 가능하면 빨리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우리의 현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보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내가 다 이루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신적인 표현도 있지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아 내가 목마르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는 매우 인간적인 표현도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에 따라 예수에게서 신적인 모습을 보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적인 모습에 좋아 땅으로 내려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음을 향해 담대하고 늠름하게 나아가는 모습보다 뭔가 주저하고 고민하고 아파하고 고통 짓는 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더 친근감을 느낍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여 승천하여 저 멀리 하늘나라로 가시어 역사의 심판주로 재림의 주님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십자가 위에서 계속 고통가운데 머물고 계시면서 ’예수님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에 ’오늘 정녕 낙원에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계속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제 저의 오늘 얘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기독교적 이념 위에 세워진 거창고 교장을 지내신 전성은선생이 하신 얘기가 오늘 설교 주제에 관련이 되기에 나눠봅니다. “저는 제가 3년 동안 아이들에게 이것만은 전해주고 싶었다는 것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는 것, 그것이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도덕적, 법적인 의미에서의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의 삶, 도덕성, 인격 수준은 불완전하고 완벽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종교의 차이, 인종의 차이, 경제력의 차이를 들어 타인을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민주화 운동과 한국 종교운동의 큰 별인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선생님의 일생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무엇이겠냐고 여쭈니까, 함 선생님 말씀이 ‘나는 죄인이야’라고 했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깨닫고 인정할 때 세계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아픔과 슬픔, 고통을 거치지 않고 인격적, 정신적 성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아픔을 겪습니다. 내 잘못으로 인한 것도 있지만, 전혀 내 책임이 아닌데도, 눈물 흘리고 고통을 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슬픔이든 그것을 통해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눈을 떠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성서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것이 종교적 의식, 규율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고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제 열 명의 향린의 젊은이들과 함께 대추리의 마지막 촛불집회에 참석했습니다. 935일 동안 이어온 마지막 촛불을 끄고 평생 동안 살아온 자신들의 집과 농토를 미군들의 기지로 내어주어야 하는 주민들의 한 많은 눈물에 각지에서 온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격려의 박수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지난 2년여 동안 이 일에 앞장서서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왔습니다. 제가 어제 여러분을 대표해서 감사하다는 따뜻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인 여러분 사람다운 사람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민족이 당하는 아픔을 대신해서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에 함께 나누는 일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인 것입니다.

“거창고 학생들에게 해온 세 번째 이야기는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라.’ 나한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겁니다. 용서하는 것 외에는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타인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용서의 첫 단계는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대방을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벌을 받는 것, 대신 죽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 실제로 행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하는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신 죽지는 못해도, 적어도 보복하지 않는 것, 앙심을 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작은 기도 큰 응답]

예수님 옆에 매어 달렸던 두 죄수가 있었습니다. 한 죄수는 자신의 삶을 비웃으며 비관적으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향해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라고 조롱합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이웃을 향해 적의에 가득 차있었습니다. 생애 마지막 순간 이 적의를 예수를 향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죄수는 이를 꾸짖습니다.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그는 아마도 살인죄를 저질러 사형언도를 받았지만, 그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벌이 마땅하다는 뉘우침 곧 자기 용납과 자기 용서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달려있는 친구는 자신의 죽음을 부당하다고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죄수는 그 이유야 어찌하든 현재 자신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용납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주위 환경을 비난하는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있는 자기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고 더 나아가 그런 부족한 자기를 용서하고 더 나아가 자기를 사랑할 때 그 안에서 타인을 향한 사랑이 일어나고 환경을 극복하는 도전정신이 일어납니다. 이 죄수는 바로 이러한 자기 용납과 자기용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아주 작은 소원을 말합니다.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거창한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낙원에 데려다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소원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소원 그저 ‘자기를 기억하여 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소박한 요청에서 그가 갖고 있는 마음의 평화, 영혼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곤 그는 낙원을 허락받습니다.

전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달라고 한다든가 뭐가 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에 그저 나를 기억해달라고 하는 기도야 말로 참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억의 기도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보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구원의 기쁨과 하늘의 평화는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