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와 부활
출 15, 13-21; 요 20, 1-10

매년 맞이하는 부활절이지만, 2007년 부활주일은 제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게 합니다. 그것은 한미 FTA 협상이 지난주에 타결되었기 때문이고 이로 인해 사회와 국가가 혼란 속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삶의 양태에 따라 찬성과 반대라는 한쪽 입장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태도이지만, 저는 예수님의 삶과 성서의 말씀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진리의 가르침으로 전하는 목사의 입장에서 말하려고 합니다. 물론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워드 진이 말한 대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빨리 파악한 후에 계속 남을 것인지 아니면 뛰어 내릴 것인지를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기간동안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님들은 수유리 총회건물 내에 있는 여해기념관에서 금식하며 기도운동을 계속 하여왔고 이곳에 올수 없는 목회자들은 하루 12제자 연속금식기도회를 통해 그 뜻을 같이 하여 오고 있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지난 한 주간 동안 이곳에 함께 거하며 기도하여 왔습니다.

여기에 뜻을 같이한 분들이 교회에 보낸 편지 일부분입니다.

[우리 교단 동역자 여러분께]

사순절을 맞이하여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짊어지신 주님의 한없으신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 가슴아파하고 우려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마을은 점점 헤어나기 힘든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통계와 수치를 들지 않더라도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생태위기의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질서의 청지기로 세우셨건만 우리는 우리의 형제자매인 뭇 생명들을 위협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걷는 암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사회의 모습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는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규모를 넘어설 정도로 비대해진 초국적 자본들로 인해 전 세계 절대다수의 빈곤한 계층이 날로 늘어가고 있으며, 매일 수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전쟁의 위협과 강요된 가난으로 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습니다.

농촌교회 목회자들을 비롯한 많은 목회자들이 한미FTA를 염려하고 반대해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미FTA는 우리 사회에 빈부의 격차를 더 넓힐 뿐 아니라, 공공요금의 인상과 서비스의 질이 저하되어 서민들이 더 큰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특히 농업의 파탄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식량자급은 더욱 멀어져 초국적 농식품회사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유전자조작농산물과 공장식 축산에서 생산되는 쇠고기는 우리 국민의 건강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미FTA는 우리나라의 미국의존도를 한층 더 높이게 되어 미국은 우리나라를 중국 견제와 아시와 지배를 위하 군사적, 경제적 거점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할 것이며, 이에 따라 우리 민족 간의 이질감은 더욱 커지고 화해와 통일은 더욱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중략)

[세계화의 진실: 개방인가? 종속인가?]

노무현대통령이 말하는 대로 한미FTA가 가져오는 이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세계화와 개방의 논리는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일전에 TV를 보다가 노대통령이 한미FTA를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연계하여 얘기하는 것을 듣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 남한만큼 세계 시장에 문을 활짝 연 나라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의 비율 또한 세계 최고일 것입니다. 남한이 우리의 기업으로 자랑하는 삼성, 현대의 주식 60%가 이미 미국주도의 초국적 재벌의 소유입니다. 현재 제가 아는 한 남한보다 더 개방적인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지금 개방론자들이 말하는 개방은 빨개 벗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저는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구호를 들으면서 잠시 우리 역사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조시대에 많은 선비들과 선각자들은 중국 명나라의 주자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여기고 중국은 거대한 나라로 세계의 중심이니 중국과 하나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당시 그들이 말하는 명분은 세계화와 개방이었습니다. 중국이 쇠퇴하고 일본이 메이지혁명을 통해 군사적 대국이 되고 중국과 러시아를 잇따라 격파하자 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은 일본과 하나 되어 서구세계로 발을 뻗어나가야 이 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비난하지만, 당시 그들이 주장하는 신념에 찬 명분은 세계화와 개방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똑같은 논리로 세계화와 개방이 외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하나가 되면 TV 연속극에서 보는 것과 같은 미국식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24년을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 꿈에서 깨십시오. 미국에는 여러분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빈민계층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사순절 특강을 통해 베트남이나 몽골의 젊은 여성들이 한류의 연속극에서 보았던 남한에 대한 막연한 꿈을 갖고 결혼을 해서 온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고통 받고 있으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꼭 같습니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현실이 고통스럽게 변화한 후에야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이 한미 FTA에 적극적인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지만, 천박한 자본주의가 불러온 남한 사회의 타락상이 우리들의 사고를 모두 무디게 만들어 현실 판단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것입니다. 맘몬에 모두 포로가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잘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복권을 왜 사지요? 천 명 중에 한사람이 당선된다는 수학의 확률을 알면서도 왜 사지요? 그건 천 명 중에 한사람이 자기일 것이라는 자기 최면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모두 자기 최면에 빠져 있습니다.

[광야의 유혹? 도시의 유혹?]

저는 사순절을 시작하며 예수님이 물리치신 광야의 유혹을 우리도 이기자고 말씀드렸지만, 현재 남한은 사탄의 유혹에 굴복한 것입니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빵의 논리 앞에 굴복하였고, G7 G10 하는 세계 강국이라는 명예에 홀까닥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과 손잡고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현재 남한은 세계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의 용병입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충실한 용병노릇을 했습니다. 현재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이 용병노릇을 잘하고 있습니다. 이제 FTA를 통해 경제의 용병이 된 것입니다. 이 얘기는 우리 얘기가 아니라 미국 언론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미국이 직접 동남아시아 경제권을 지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반미사상 때문에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에 미국 자본이 직접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한은 쉽게 들어갑니다. 지금 이들 나라에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자한 나라가 남한입니다. 이제 한미 FTA가 발효되면 아니 지금도 미국자본이 주도하는 한국계 은행을 통해 이들 나라의 경제권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은 그간 중국이나 일본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으로 남았던 동남아시아에 대한 미국지배를 한미FTA를 통해 하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등한 협약을 맺었다고 자랑하지만, 미국언론은 남한이 미국자본의 용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지금 미국과 세계가 우리를 보고 있는 냉정한 평가입니다.

그래서 협정이 무산되기를 기도하던 목회자들에게 있어 FTA 타결 소식은 어떤 의미에서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는 좌절의 소식이었고 농촌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교회가 텅텅 비는 죽음의 소식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님이야 말로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목사들로서 힘 있는 사람들의 지배를 보장하는 한미 FTA 협정은 분명 절망과 죽음의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도시 교회의 목사로서 농촌목사들이 직면한 그런 어려움은 없지만, FTA 협상 타결의 소식을 들으면서 이제 며칠 후면 다가올 부활주일에 무슨 메시지를 어떻게 전해야 할는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냥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있었다고 증언하고 우리 또한 그렇게 믿을 때에 우리도 모두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상투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부활은 그 이전에도 믿어왔던 것이고 지금 믿지 않고 내년 부활절에 믿는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저에게는 오늘 FTA라는 양의 탈을 쓴 이리를 보고 사람들이 환호하는 이 상황에서 진정한 부활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부활의 예수님은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다면 무엇이라 말씀하시겠는가? 오늘 본문에서 무덤이 비어있다는 얘기를 듣고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가 뛰어가서 그 빈 무덤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말씀과 같이 저도 그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앙 FTA : Fair To All]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다른 곳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곳을 드나들던 기장의 남녀신도회원들과 청년회원들이 목사님들의 사십일 12제자 금식기도를 이어 두 번째 40일동안 12제자 금식기도운동을 하여 나가겠다고 자원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그래 바로 여기에 부활이 있다. 바로 여기에 부활의 예수가 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무덤 문에서 제자들을 만나지 않고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생명 살리기 불꽃은 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마군병들과 유대의 지배자들은 예수는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그 생명은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도망을 갔고 더 이상의 민중 운동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 생명의 불꽃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에서 다시 타올랐습니다. 그러자 다시 짓밟아 불을 껐습니다. 그러나 이 불똥은 다시 튀어 다마스커스로 사마리아로 에페소로 필립피로 고린토로 로마로 계속 튀었습니다. 불꽃이 보일 때마다 지배자들은 계속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불꽃은 더 멀리 더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예수 부활의 모습입니다.

저는 FTA가 자유무역협정을 뜻하는 Free Trade Agreement의 첫 글자를 딴 말입니다만, 사실은 이 자유라는 단어 속에는 자유 경쟁이라는 말이 숨어 들어가 있고 이는 결국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를 누르는 자유라고 하는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과외공부를 시킬 수 없는 가난한 집의 자녀들은 모두 뒤쳐질 수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 구조를 자유라는 이름하에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헤비급 선수와 페더급 선수가 아무런 제한 없이 링 위에서 싸우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는 자유의 횡포입니다. 때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이지만 맞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입니다. 이 자유와 개방 그리고 세계화라는 단어 속에 숨은 거짓과 모순을 모두가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내 안에서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생명을 살려나가는 기도가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FTA라는 구호 속의 첫 단어가 자유의 Free 가 아닌 ‘공정’ 이라는 Fair의 첫 단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FTA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라’는 의미의 Fair To All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날은 세 사람이 기도를 하였습니다. 평생을 농촌교회를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 일주일을 금식기도 중인 강남향린교회의 전도사, 농촌개발원의 이태영목사 그리고 저 세 사람이 마르코복음 14장 말씀을 읽고 묵상 나눔을 하였습니다. 20대의 전도사님이 말씀 한 구절을 선택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터인데 그 사람도 지금 나와 함께 먹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근심하며 저마다 ‘저는 아니지요?’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

전도사님은 고백합니다.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기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단지 한두 번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는 이유로. 한두 번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을 위해 봉사했다는 이유로. 혹은 교회가 그렇게 하자고 요구할 때 몇 푼의 구제헌금을 드렸다는 이유로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 죽음의 책임을 단지 가롯 유다에게만 줄 수는 없지요. 다른 11명에게도 동일한 책임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가난의 책임을 단지 그들이 게으로고 무능하다는 것만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의 전태일: 허세욱]

한미FTA로 인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던 지난 4월 2일 오후, 고위급 협상이 진행 중이던 하얏트 호텔 앞에서 "한미FTA 폐지"를 외치며 택시기사 한분이 분신을 시도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허세욱님입니다. 16년 동안 택시기사로 일하며 오후 5시부터 새벽 5시까지 택시를 몰아 120만원을 버는 54세의 평범한 노동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보통 분은 아니셨습니다. 박봉의 택시기사 월급을 택시민주노조, 참여연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민주노동당, 관악주민연대, 관악사회복지회원 등 여러 단체에 기부하고 그리고 여러 행사에 교대시간 틈틈이 참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집회 대열의 한켠에 배경처럼 조용히 서 계시다가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겸손하게 함박웃음을 지어보이시곤 하셨다고. 이따금 옆으로 다가오셔서 "고생이 많으시죠?"라고 허리 굽혀 깍듯한 인사를 건네고 택시 교대 시간에 맞춰 총총히 사라지시곤 하셨다고. 작은 체구에 반백의 스포츠 머리. 일년 내내 입고 계시던 낡은 남색 작업복이 익숙하다 못해 그이 자체인 것처럼 느껴지던 초로의 택시노동자….

그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중학교 중퇴에 학력에 판자촌을 전전하시면서 사회의 바닥 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가난 때문에 결혼도 하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주어진 운명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운전을 배워 삶을 영위했고 늦은 나이에 컴퓨터도 배우고 모르는 것은 계속 물어 가시며 여러 운동에 참여하셨습니다. 택시 안에는 받아온 유인물을 갖고 다니며 손님들에게 나눠주었고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에도 가장 많은 서명을 받아오시는 분이셨습니다. 지난 3월말에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도 자신이 깨달은 FTA 반대 이유를 손수 써서 만든 피켓을 목에 걸고 하셨습니다. 저도 몇 번 피켓을 들어 보았지만, 제가 직접 쓴 경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다 남이 써 준 것을 앵무새마냥 걸었습니다. 그는 항상 배우는 자세로 동료들을 일깨워 주셨고, 대열의 끄트머리에서 도리어 선두선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서에서 말합니다. 누가 자기를 시켜서 하는 일은 싫었다고. 그는 하나하나 깨우쳐가며 사회 운동에 참여함으로 참 자기를 찾았다고. 그리고 자기는 멀리 가서 저 하늘나라에서도 동지들을 기억하며 참여연대 운동에 계속 동참하겠다고. 이제야 그분의 많은 선행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삶의 귀한 가치를 깨달은 선각자였습니다. 자기를 위해 좀 더 노력하면 자신의 월급 120만원이 150만원이 되고 200만원이 되어 좀 더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저축하면 이자가 붙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 운동에 자신의 번 돈을 내놓았고 잠을 줄여가며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해야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자신의 한 달 봉급을 하루치 술값으로 없애는 부조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온 것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후세들에게까지 이런 부조리한 사회를 물려주는 것은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운명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주어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인터넷에서 그분의 여러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며 넉넉합니다. 그래 그 웃는 모습 때문에 참여연대 월간지 2004년 1월호 표지 모델로 나왔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싸웠습니다. 싸우다 싸우다 그는 누군가가 희생해야만 이 싸움이 그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 예수님과 같이 전태일님과 같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자 자신의 몸을 불길 속으로 던졌습니다. 저 또한 허세욱님과 똑같은 54년의 인생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만, 자신의 운명을 뚫고 나가는 그 성실한 노력과 투지 그리고 진지한 삶의 태도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어떤 정치가는 막장 인생의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웃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없이 사회나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신영복선생님의 글귀에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갑니다.” 그런 세상 논리로 보면 예수님도 어리석었고 전태일님도 어리석었고 허세욱님 당연히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까? 허세욱님은 지금 수술을 받고 고통스러운 사투를 벌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성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허세욱님이 하루 빨리 죽음과의 싸움을 이기고 다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의 부활사건]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기적적인 손길로 이집트의 군대의 칼날을 피해 홍해를 건널 수 있었고 그 뒤를 뒤따라오던 이집트의 군대는 수장되었습니다. 바로 이 얘기를 듣고 만방이 술렁거립니다. 블레셋주민은 겁에 질리고 에돔의 두목들은 놀라고 모압의 권력가들은 떨려 가나안 주민들은 모두들 기가 죽었습니다. 기장의 목사님 500명이 함께 기도운동에 참여한 것은 근래 들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 뒤를 이어 남녀신도회 청년들이 하나 되어 기도 운동을 이어가겠다는 일도 근래 들어 처음 있는 일입니다. 20대의 전도사가 평생을 농촌 목회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일도 근래들어 처음 있는 일입니다.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라고 손을 빼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내가 그 사람입니다.’ 라고 사회의 부조리와 가난에 대해 자기 책임을 고백할 때 부자들은 겁에 질리고 재벌들은 놀라고 초국적 자본의 권력자들은 떨려 미국사람들은 기가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홍해사건이자 부활사건입니다.

허세욱님과 같이 우리 자신을 불태우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의 여건 안에서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그리고 주님이 지시하는 그 방향을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함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때로 힘이 들면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면서 말입니다. 이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나누면서 하는 일입니다. 혼자 잘 믿으려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곧 넘어질 뿐만 아니라 남도 넘어지게 만듭니다. 처음부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뜻을 맞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바른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뽕나무를 들어 바다에 빠트리고 산을 옮겨 바다에 빠트리는 신앙은 결코 무모한 기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기도는 보통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큰일을 위한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고 그리고 그런 일은 하루 이틀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10년 20년을 걸쳐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때에 안 되면 내 아들과 딸 때에 그것도 안 되면 손자 아이들 때에 그것도 아니라면 몇 백 년 후에 일어날 수 있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혼자서는 쉬이 포기하게 되니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눠가며 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우리 각자 각자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각자 각자가 예수 안에서 하나로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생명 말씀 안에 하나로 모였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세례의 의미가 있고 성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는 단순한 하나의 종교 예식이 아닙니다. 물 씻음을 통해 옛 자기는 죽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자기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새 자기는 모두 예수 안의 자기입니다. 세상 안의 자기는 뿔뿔이 흩어진 작은 자기이지만, 예수 안의 자기는 예수의 뜻 안에서 하나 된 큰 자기입니다.

성찬에서 나누는 떡과 잔은 모두 자기의 떡과 자기의 잔을 먹지만 그러나 그 떡은 한 떡에서 나누어진 작은 떡이요 한 그릇에서 나누어진 작은 잔입니다. 여러분이 이 진리를 깨달을 때, 그래서 옆과 앞과 뒤에 있는 교우들이 나의 또 다른 자기로 보여질 때, 여러분은 바로 예수님께 속한 부활의 몸이 된 것입니다. 이 은혜의 깨달음이 2007년 부활절을 맞는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