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13일 부활의 영성(3) 향린의 시작으로 돌아가자
이사야 1: 10-20; 마르코 16:1-8

[어버이주일을 맞이하며]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그리고 교회 창립 54주년을 함께 기념합니다. 원로장로 추대식과 명예권사 추대와 권사 임명도 함께 하기에 두 주일을 함께 지키는 의미도 있습니다. 먼저 어버이주일을 맞는 신앙의 의미를 간단히 말하고 교회창립기념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목회자마당에도 써놓았습니다만, 지난 주 이계연집사가 가족들이 낸 책이라고 하면서 책을 한권 주었습니다. 책 제목은 ‘어머니의 마음’이었고 7형제가 어머님을 기억하며 펴낸 책이었습니다. 이왕준집사 가족이 아버님을 추모하며 낸 책도 감명 깊게 읽은 적도 있고, 부모님을 기리는 책을 내신 분들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버이날에 다들 저녁을 먹으러 좋은 식당들을 찾아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책을 펴내는 일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책을 내다보면 겉으로 얻어지는 결과물보다 보이지 않게 얻어지는 속의 결과물이 더 많아집니다. 우선 자매형제들이 자주 만나게 되고 어버이를 회상하며 쓰는 글들을 써봄으로 어버이로서의 자신들을 스스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는 학교나 사회에서 배울 수 없는 가족공동체 뿌리 연대의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전 이 책을 보면서 저도 한번 그렇게 해보고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년이 어머님 팔순인데,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저희 가족이 함께 글을 써서 책을 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잠시 귀국중인 채운석집사 또한 어머님 칠순을 맞아 시집을 내어 드렸다는 감동어린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시면서 어린 5남매를 힘겹게 키우시는 어머님이 틈틈이 라면박스를 찢어 시를 쓰셨는데, 어느 날 자녀들이 이것들이 모아진 박스를 발견하고는 시집을 내어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님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이지만, 지금은 수필집을 내시기 위해 준비 중에 있으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어버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인생의 한계를 넘어 자신을 완성해 가시는 어머님 아버님들을 뵈올 때에 우리는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저는 이제 어버이날이 단지 저녁 한 끼 사드리고 용돈을 드리는 날을 넘어 가족의 뿌리를 찾아 기록하고 책을 펴내는 일로 책 펴내는 일이 경제적 부담이 되면 인터넷에 가족 홈페이지를 만들어 게시하는 날로 확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버이들 또한 자식들로부터 저녁 대접이나 받으려는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삶을 완성해가는 그런 다짐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족구원으로서의 향린교회]

이제 교회창립에 관련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신영복선생의 글귀인 ‘처음처럼’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또 다른 주님(酒)을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향린의 시작으로 돌아가자’라고 했습니다. 향린교회는 그 시작부터 다른 교회와는 분명히 다른 출발을 갖고 있습니다. 영혼구원의 열정으로 가득 찬 어떤 목사나 교세확장을 위한 어떤 특정 교단에서 시작한 교회도 아니라, 3년 동안이나 계속되며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나온 6.25라는 민족최대의 비극을 목도한 12명의 30대 초반의 기독 젊은이들이 민족구원이라는 커다란 신앙의 목표를 생각하고 공동체의 삶으로 시작한 신앙운동이었습니다.

그 이후 54년이 지났지만, 민족분단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향린교회는 아직도 시작의 단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분단이라는 광야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듯이 향린교회 또한 그 크기와 명성에 상관없이 광야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저 개인으로는 창립정신에 관련하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기독교사상 5월호에 저의 설교비평이 실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예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 비평에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제가 반론을 썼고 이는 기독교사상 6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이미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두 개의 글을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을 위해 인쇄물로 만들었습니다. 이 반론의 글은 저의 신앙관 성서관이 담긴 개인적인 글이기도 하지만, 향린교회 교우들 전체의 뜻을 담은 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다른 교회에 있었더라면 전혀 다른 내용의 설교를 하였을지도 모르고 그 비평이나 반론이 전혀 다른 글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통해서 영향을 받듯이 저 또한 여러분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동의하지 못하는 그 부분을 통해 자신의 신앙이나 역사 인식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고 밖으로부터의 설교비평이 아닌 교우 여러분들로부터의 설교비평 또한 부탁드립니다.

[공동체운동으로서의 향린교회]

두 번째 제가 나누고 싶은 창립정신은 신앙공동체로서의 섬김과 나눔입니다. 휴전이 발효되기 직전 전후 혼란의 시대에, 생존의 절박감이 짓누르는 그 때에 공동체의 삶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때로는 사회적 위기 속에서 탈사회화하려는 사교 종교집단들이 외딴 곳에 공동체로 모여 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전도관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모두 당시 지성인들로 탈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울의 중심 남산에서 공동체를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 엄청난 속도로 전개되고 있는 세계화의 물결 그리고 자본이 국가보다 우위에 서는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한미FTA, 한-EU FTA 와 같은 자유경제체제는 빈부의 양극화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라는 초청이 있었고, 바로 이러한 초청에 응답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라고 우리는 이 자리에서는 그렇게 고백하지만, 교회 문을 나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이러한 세계화와 자본의 물결 속에서 무력해지고 맙니다. 옳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사회경제 체제 속에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기에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는 많은 진보적 학자들과 신앙인들은 그 대안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자주 하게 됩니다.

이 대안에 대해서는 저도 매우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 대안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은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의 모습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감리교신학대학에서 도올 김용옥선생과 더불어 5명의 신학자들이 함께하는 공개신학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도올의 신학적 주장 그리고 현재 남한 교회를 향한 매서운 질책은 분명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복음 안에서만 통하는 부분적인 주장이라는 것이고, 목회자가 아닌 고전학자로서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교회 개혁을 향한 구체성이 약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류사상을 아우르는 세계 종교와 철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있지만, 그것을 모두 개인주의화 한다는 점에서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라는 선언에 동의합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개인적 결단 사건이다.라는 주장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시작은 그렇게 개인의 영역에서 출발하지만, 그 나아가는 지향점은 개인의 영역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저는 그것이 불교나 유교 그리고 다른 세계 종교에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성서가 제시하는 기독교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 운동은 결코 그러한 개인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 시간이 넘는 긴 토론에서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혹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이라는 예수운동과 초대 교회 신앙운동의 핵심적인 용어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 한계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민중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향린교회의 창립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그 기간이 짧아 어떤 가시적인 열매는 맺지 못했다 할지라도 함께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교회를 섬기면서 두고두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고 저 개인으로서는 언젠가는 도전해야 할 부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생활목회자(평신도)가 주체가 되는 향린교회]

세 번째로 말하고 싶은 창립정신은 평신도 곧 생활목회자들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앙입니다. 저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나 다른 부목사님들은 단지 여러분들에게 성서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남거나 혹은 이 교회에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교회가 여러분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더 줄어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회가 복잡화되는 일면도 있지만, 신앙이 여러분 삶의 중심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향린교회를 처음 시작하고 그리고 40년 50년 가까이 이 교회를 섬겨 오신 어르신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분들의 삶의 거의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자신의 전부를 드렸던 그분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향린이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고 여러분은 바로 그 분들의 헌신의 열매를 나눠 먹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열매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여러분이 진정 향린을 사랑한다면 이제 그 열매를 나눠 먹은 여러분들이 후세들을 위해 희생의 씨앗을 뿌리고 헌신의 거름을 주어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지난 주 향린의 강남향린 들꽃향린 세교회가 함께 모여 선교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향린교회는 교인 숫자에 있어 이 두 교회에 비해 몇 배가 넘지만 그날 참석자들의 숫자는 엇비슷했습니다. 참석의 열도가 너무 낮은 모습이나 그리고 미래를 꿈꾸는 모습에서 확실히 우리 향린교회는 늙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듦의 지혜는 필요하지만, 새로운 도전에 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작년 여름에도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향린의 개혁성을 주창했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구태의연한 자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지금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는 저 십대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이 교회의 주역으로 설수 있도록 내가 뿌리는 헌신의 거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창립주일을 맞아 함께 예배드리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신앙의 도전을 생각해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중고등학생들 또한 오늘 그냥 어른들과 함께 예배드렸다는 생각만 갖지 말고 우리가 왜 어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지, 그리고 오늘 향린교회 창립주일이라고 하는데, 이 교회는 왜 세워졌는지를 한번 생각하여 보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부모님이 이 교회를 다니니까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내가 스스로 교회를 선택한다고 할때, 어떤 교회를 선택할 것이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해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민족과 사회를 우선시하는 향린교회의 선교정신과 나의 인생의 꿈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기를 바랍니다.

[분가선교의 꿈을 꾸자]

이러한 도전 가운데 하나가 분가선교입니다. 이는 많은 교회에 또 하나의 교회를 더하는 운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갈릴리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에 투철한 그런 교회, 곧 향린의 창립정신을 새롭게 세워가는 그런 공동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분가는 딸아들이 장성하면 하나의 가정을 꾸려 나가듯이 모든 생명체들의 자연스러운 생명운동입니다.

만약 어떤 부모님이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여 자녀들의 분가를 두려워하고 죽을 때까지 그들을 계속 품에 안고 있으려고 한다면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도 죽게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한화그룹의 김회장의 결정적인 실수는 바로 20대의 장성한 자녀의 삶을 자기가 해결해주어야 한다고 하는 지나친 보호정신이었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이 밖에 나가 싸우고 터지는 것은 제 몫입니다. 거기서 그는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예입니다만, 미국에서 일류대학의 소수민족 입학률이 제일 높은 민족은 한인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1,2학년 자퇴율이 제일 높은 민족도 한인입니다. 지나친 과외공부와 부모의존도가 혼자 결정해야 하는 대학생활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인들의 자식보호는 너무 지나칩니다. 겉으로는 자녀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는 자기가 늙으면 그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 우리 남한 사회가 보다 성장해 나가려면 바로 이러한 가족이기주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깨트리지 못하는 한 남한 사회는 국민소득 4만 불이 아닌 5만 불이 되어도 여전히 후진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 자매인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나의 가족’이라는 이 말씀을 보다 깊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그런 의미에서 유산사회환원운동은 매우 중요한 신앙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참 부모 됨은 자식들이 분가하여 또 다른 부모가 되도록 하는 일에 있듯이 교회의 참 교회됨 또한 분가에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혀 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계속 움츠리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활의 삶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옵니다. 만약 우리가 향린교회 공동체의 부활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을 나누는 분가입니다. 이제 겨우 만 두 살에 불과한 들꽃향린교회가 벌써 분가를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 이점에서 할아버지뻘인 향린교회는 너무 안일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사라에게 ‘내년 이 맘 때쯤에는 네가 아이를 낳을 것이다.’라는 예고를 하였습니다. 그때 사라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경수가 끊어진지가 언제인데, 이 늙은 몸이 무슨 아기를 낳겠는가? 하며 피식 웃었습니다.’ 혹 이런 불신앙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너희들도 나와 같이 이렇게 휘황찬란한 부활의 영성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16장 8절로 끝나는 원 마르코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갈릴래아로 다시금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왜 예루살렘 무덤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시지 않고 갈릴래아로 돌아오도록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행한 3년간의 복음사역을 본받아 각자의 복음 사역을 시작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3년 전에는 예수님 혼자였지만, 이제는 제자 모두가 함께 시작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구체적으로 갈릴래아 분가선교이고 우리가 행하는 성찬의 예식 속에도 이 분가선교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몸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의 상징입니다. 몸을 나눈다는 말은 곧 교회를 나눈다는 말입니다.

[가시떨기의 교훈]

아마 이 분가의 부름에 대해 많은 분들이 나는 못한다. 라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미디안 광야 호렙산 정상의 타지 않는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이집트 파라오 왕 앞에 가서 노예로 살아가는 히브리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라고 말씀하는데, 모세는 계속 ‘자기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타지 않는 가시떨기’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합니다. 가시떨기 나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잎이 무성한 그런 나무가 아니라 광야의 마른 땅에 있는 말라깽이입니다. 보통의 경우 뜨거운 태양 볕에 의해 불이 붙으면 수초 안에 확! 타올라 버렸다가 금방 꺼지고 마는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잘 것 없는 가시떨기가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연약한 존재라도 하느님의 손이 함께 하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번에 여러 사람을 신임권사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의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 담임목사로서의 저의 책임이 큽니다만, 거의 모든 분의 반응은 ‘나는 할 수 없어요. 나는 자격이 없어요.’였습니다. 그래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누가 자격이 있습니까? 저도 목사의 자격이 있어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부름 때문에 된 것이고 저는 여전히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부름의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을 때, 그 부름에 응하는 것이 신앙적입니다. 내가 할 수 있어 직분을 받게 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여전히 그분들의 대답은 ‘저는 자격이 없어요.’였습니다. 내년에는 나를 먼저 보는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을 먼저 보고 나를 보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라고, ‘그러기 때문에’의 신앙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가 권사직을 부탁할 때, ‘왜 이제야 부릅니까?’ 라고 오히려 저를 힐책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우리가 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이 하시니까 하느님이 부르셨다면 감당할만한 능력도 함께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할 것이다가 아니라 하느님은 바로 나를 통해 일을 하신다는 주체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 또한 우리와 같았습니다. 그래 하느님은 그 모세를 향해 말합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 신을 벗는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인간적인 것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안전과 편안을 보장하고 있는 세속의 껍질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맨발로 서서 땅의 호흡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맨발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벗어버린 벌거벗음(赤裸) 속에서 이집트의 고통 받는 히브리 노예들의 애원하는 소리에 아파하는 야훼 하느님의 고통의 소리를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송스런 얘기이지만, 지금 한번 신을 벗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맨발로 바닥의 차가운 촉각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바닥을 통해 땅과 하늘에 충만한 야훼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전에서 나라와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앞서간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함께 앉아있는 교우들의 가슴의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말합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한의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네가 내 대신 가서 그들을 해방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 하여라’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보러오는데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내 집 뜰을 짓밟으라고 하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보아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는 한 우리가 드리는 예물도 소용없고 기도도 소용없다는 것이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민중들의 아픔이 계속되는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창립 54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우리가 갈릴래아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호렙산 위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