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영성(4) 성서의 민중해방이야기와 5월의 광주민주항쟁 이야기의 합류
출애굽 12:29-36; 마르코 11:15-19

(지금 20대 청년의 절반이 광주항쟁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다는 답변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다보지 못한 동영상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518의 현재적 의미]

1980년 5월 27일 탱크 지나가는 소리가 불빛을 잃은 금남로의 새벽녘 밤하늘을 가르고 있을 때, 왜 시민군은 ‘죽음의 집’ 도청을 떠나지 못했을까?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말합니다. 큰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함께 싸우다 먼저 간 동지에게 등을 보일 수 없었고, 둘째, 노예적 삶을 청산하고 주인이 되려하지 않고 서로 함께 자유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택시와 버스기사의 차량 시위, 양동시장 아주머니와 시민들의 주먹밥 지원, 성매매 여성이 합세한 헌혈, 투사회보와 결집대회를 통한 의사소통, 시민수습위원들의 죽음의 행진. 광주는 서로가 주체인 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였고, 시민군은 자유의 집 도청을 지키다 총탄을 맞는다.

많은 동학농민군들은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양반집 빼앗아 제 집 삼으려고 그랬을까? 아니다.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하는 항전의 의지요, 설사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굴욕의 증거인 헌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자유를 향한 결단의 의지였다.(한겨레 세상읽기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지난 금요일 518국립민주묘지를 찾은 노대통령 이하 모든 정치인들의 마음속에는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지만, 평소에 하는 행동들을 보면 계엄군에 맞서 도청에서 당당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가졌던 ‘죽음도 불사하는 자유를 향한 결단의 의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민주공화국의 정체는 무엇인가? 민이 곧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불란서가 혁명을 통해 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웠듯이 그렇게 민이 주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쿠데타를 통해 민의 역사를 짓눌렀던 박정희의 잔당들이 아직도 역사의 주인으로 행세하고 있고 백성들은 그를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고 5월 광주의 민의 역사를 피의 역사로 바꾸었던 전두환과 그의 후예들 또한 여전히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억울하게 죽어간 민의 한은 풀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실 규명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

1980년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미국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미국언론은 사망자수를 2천명까지 말하였습니다만, 남한 정부의 공식사망자 수는 그의 10분지 1인 2백여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최소한 오륙백 명쯤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설입니다. 저는 20년 전 미국에서 잠시 귀국하여 지금의 민주묘지 이전의 망월동묘지를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찢겨진 현수막이 바람에 흩날리는 을씨년스러운 가을의 어느 날, 제대로 된 비석도 없이 묘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는 명예회복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거기 가는 것만도 용기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몇 명의 대학생들만이 함께 둘러 앉아 소주잔을 기우리며 운동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얀 소복을 입은 한 어머니가 저를 붙잡고 거의 실성한 목소리로 자기 아들을 찾아달라고 말합니다. 광주항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그날 아침 밖을 나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 온 병원을 샅샅이 찾아 다녔지만 아들의 시신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날 이후 6,7년을 하루같이 이곳에 나와 찾아온 사람들의 소매 자락을 붙들고 아들의 시신을 찾아달라고 애곡합니다. 아직도 실제 죽은 숫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시 광주에서 새 세상이 왔다고 행동에 앞장을 섰던 사람들 그래서 총에 맞아 죽은 다수의 사람들은 당시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들어온 농촌지역 젊은이들, 넝마주의, 구두닦이, 고아들과 같이 별다른 삶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연고자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광주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수십 채의 시신을 트럭에 실어 곳곳에 암매장했다는 얘기입니다. 올해도 한겨레 사설은 이들의 양심적인 증언진술을 공개로 채집하는 특단의 조치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만 암매장한 채 묻혀있는 사람들의 원한도 풀리겠지만, 전두환군부정권의 지시를 따라 양민을 도륙한 군인들 또한 공포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 미국에서 목회할 때에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 중대장 출신의 한 장교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심각한 공포와 불안 증세를 갖고 있어 대인관계가 매우 불안정하였고, 아내마저 미 CIA의 끄나풀이 되어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고 나에게 얘기하는 정신착란 현상까지 보였고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의 폭발로 인해 어린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친척들의 얘기에 의하면 본래 품성이 매우 착했고 군 생활도 잘 했는데, 광주에 투입되고 난 이후 그런 증상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아까 우리가 화면을 통해 보았듯이 시민들을 무슨 명태꾸러미 엮듯이 엮어 끌고 가면서 몽둥이로 개돼지 패듯 마구 후려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금 그 장면을 본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아직 시민들이 무장 항쟁에 돌입하기 전인 항쟁 이틀째, 부상자를 싣고 병원으로 달리던 택시기사가 부상자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그 기사를 대검으로 살해한 공수부대원은 지금 살아있다면 제 나이보다 몇 살 어린 나이일터인데 그가 지금 제 정신을 갖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광주의 희생자는 단지 죽어간 시민들뿐만이 아니라 명령에 따라 폭력을 휘두르고 살상을 저지른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암매장한 곳을 파헤치는 진실규명은 죽은 이들의 억울한 영혼을 회복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과거의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저들의 양심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518과 민중의 정치적 해방 전통]

우리가 오늘 518광주민주항쟁을 기억하는 것은 이 사건이 단순히 27년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중해방전통의 하나의 큰 흐름 속에 우뚝 솟아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을 시작으로 1905년의 항일의병투쟁, 1919년의 31만세운동, 1929년의 광주학생항일운동과 원산노동자총파업, 해방 후 대구 10월 사태와 호남의 추수폭동, 1948년 제주도 4,3항쟁과 같은 해 10월의 여수, 순천반란사건, 1960년의 419학생의거, 1979년의 부산, 마산사태와 그리고 1987년의 6월대항쟁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사건의 산맥 속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교수는 518을 조명하는 논문 [응답으로서의 역사](민주주의와 인권 2006 6권 2호 144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518이야 말로 가장 전형적이고 두드러진 의미에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엄청난 사건이었다거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주체성의 집약된 표현이고 실현이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주도하고 다수가 공조하는 것도 아니었고 주체가 따로 있고 객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주체로 일어났습니다. 처음 불씨를 당긴 학생들은 물론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택시기사들, 그들에게 밥을 먹인 시장의 상인들, 헌혈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친 술집 여인들, 그들의 팔에서 피를 뽑은 의사와 간호원들, 누구 하나 객체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518은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출애굽과 정치적 민중해방 전통]

그리고 이러한 민중해방의 역사적 사건은 한반도 안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수천 년 인류역사 곳곳에서 일어났던 운동이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서 또한 그러합니다. 출애굽의 해방 이야기, 가나안 정착시기로 일컬어지는 왕조 이전의 원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의 운동이야기, 그리고 왕조가 형성된 후에 권력의 집중화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예언자들의 정의로운 외침은 바로 이러한 해방의 전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뒹굴고 표범과 숫염소가 함께 뛰어놀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새 나라를 향한 이사야의 꿈을 나사렛 회당에서 다시금 선포함으로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를 이어가는 초대교회의 흩어진 나그네들의 이야기가 담긴 성서이야기는 단순히 교세확장운동의 이야기가 아니라 민중해방이라는 투쟁의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구약 출애굽의 이야기와 신약 마르코 복음서의 이야기는 모두 그러한 투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한 예입니다. 우선 이집트에 내린 10가지 재앙이야기는 하느님이 자기 백성에게 행한 여러 가지 위대한 행적들에 관한 구전전승들로부터 생성된 하나의 민담이야기이라고 구약성서학자 김이곤 교수는 말합니다.([출애굽기의 신학] 김이곤 112쪽) 이집트 땅을 뒤흔들었던 저 재앙들은 당시의 최고의 권력 그리고 영생의 신으로 추앙받았던 파라오에 대한 민중의 경멸이자 조롱이었습니다.

첫 번째 재앙,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은 이집트의 생명줄을 야훼 하느님이 쥐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개구리 모기 파리 우박과 같은 재앙들은 이미 이집트의 신들조차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재해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재해들을 움직이는 분이 다름 아닌 야훼 하느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홉 번째 재앙 어둠이 임한 재앙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집트의 최고의 신 태양신 '아몬 레‘ 조차 히브리인들의 신 야훼 앞에서는 무력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이집트의 장자들과 모든 가축의 맏배들이 죽는 마지막 재앙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 과월절의 기원을 설명하는 자유와 해방의 기억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명절 안에 정치적 해방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열 번째 마지막 재앙이 내리던 그날, 히브리 노예백성들이 모세의 영도 아래 이집트를 떠나는 그날 밤을 성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파라오는 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너도 이스라엘 백성도 어서 떠나가거라... 그들은 빵 반죽이 부풀기도 전에 그릇째 옷에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나섰다.”(출 22;31이하) 시간적으로 매우 촉박한 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일러준 대로 이집트인들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을 내라고 하였다. ... 이렇게 그들은 이집트인들을 털었다.” 수백 년 대대로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주인에게 가서 내가 떠날 터이니 갖고 있는 보석들을 내놓으라고 하면 선선히 내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또 장자를 잃고 통곡하는 주인집에게 가서 내가 떠날 터이니 보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실상 강도 이상의 매우 비인간적인 처사입니다. 따라서 이 기록만으로 본다면 출애굽은 히브리 노예들의 무장 항쟁 투쟁을 통한 승리의 사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훼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은 광야 40년의 삶의 과정을 거쳐 가나안에 들어와 평등한 사회공동체를 형성했고 후에 왕을 세우게 됩니다만, 이 왕들은 계속 하느님의 사자 예언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습니다. 일반인들의 눈으로 보면 사실 구약성서는 종교 서적이라기보다는 한 민족의 정치사회역사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종교고전학자인 도올 김용옥박사는 구약무효를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종교)과 땅(정치)의 합일]

구약성서에서 정치적 해방 전통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특히 예수님의 복음 운동에서 정치적 해방 전통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난 주 정용섭목사의 저의 설교비평 반론에서 설명하였듯이 우선 오늘날 우리가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듯이 2천 년 전 성서의 역사에서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정치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기관은 산헤드린이었습니다. 여기 71명의 회원들은 모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리고 성전의 제사장들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복음서가 씌어지고 얘기되어질 당시 66년부터 70년까지는 로마지배를 거부하는 유대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가 읽혀지고 초대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로마적인 정치적 언사들은 모두 삭제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반로마적인 정치적 발언을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이사 황제의 것은 가이사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씀인데, 이도 얼핏 들으면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라는 말씀으로 들려지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 모든 것이 창조주 야훼 하느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었기에 실상 가이사 황제의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반로마적인 발언입니다.

남아공 흑인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워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투투 주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유럽의 선교사들이 와서 성서를 펴들고 기도하자고 해서 기도를 하고 눈을 떠 보았더니 자신들의 손에 있던 땅문서는 모두 서양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대신 성경책만 쥐어져 있었다.’ 이는 가이사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 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책망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곧 그때는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니 너희는 예수께서 부탁하신바 그대로 땅을 보는 나의 증인이 되라는 얘기입니다. 땅의 일을 통해 하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어제 보수교회를 다니는 청년 한명이 신앙면담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하느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고 있는데 실제로는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들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직종은 3가지입니다. 목사, 선교사, 신학교교수. 이게 맞습니까?’

지나친 성속의 구분이 오늘의 교회 젊은이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세상 밖에 거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려면 땅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땅의 일은 속된 것으로 가르치어 하늘만 쳐다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내가 가는 길이 바른지를 확인하기 위해 때때로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저 눈을 감고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다 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고 여기에 교인들은 현혹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현혹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혹되도록 자신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하거든요. 생각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성전숙청과 민중의 정치적 해방 전통]

여기서 우리는 과연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계셨는지를 마르코복음서에 기록된 성전숙청이야기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4개의 복음서에 다 등장하는 이야기는 몇 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전숙청이야기는 4개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그만큼 예수 복음 활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4개 복음서는 각각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께서 채찍을 드셨다는 얘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이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이 성전 숙청 이야기를 다른 세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애 맨 앞에 두었습니다. 이점에서 요한복음서는 ‘성전의 벽을 허물라’는 극단적인 요청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을 거부하는 혁명적 관점이 너무나 뚜렷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숙청을 하신 배경은 이러합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13세 이상 유대남성들은 최소한 1년에 3번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성전세를 내고, 제물을 드립니다. 성전세는 성전에서만 따로 사용되는 성전화폐를 사용해야했는데, 이때 환전상들이 제사장들의 권력을 배경으로 폭리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용 제물인 비둘기나 양들도 제사장이 흠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만을 드릴 수 있었는데, 여기에도 엄청난 비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민중들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에 분노하시어 성전숙청을 단행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일로 그 성전제사가 깨끗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시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실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제사장 이하 수많은 성전에서 일하고 지키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예수 한명을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북서쪽 외곽에는 경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안토니아라는 로마 치안군 요새가 있고 거기에는 500명 이상의 군인들이 과월절 폭동을 대비해서 초긴장상태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 예수님 혼자서 이 일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서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이 없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또 물건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이게 무슨 좁은 골목길도 아니고 어떻게 혼자서 그 넓은 뜰, 폭이 300미터요 길이가 450미터에 해당하는 그 큰 면적에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 까지도 금할 수가 있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물건이란 성전 제사용 물건을 말하는데, 이는 곧 제사를 금지시켰다는 말인데, 이것이 상징적인 언어라면 이해가 가능하지만, 만약 실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라면 이는 군중폭동이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성서학자들은 여기에 대해 단순히 상징적인 기록으로 편자 마르코의 삽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과(Sanders, Haenchen 등) 사실적인 이야기로 보는 학자들로(Schweizer, Brandon, Meyer, Theissen, Borg, Crossan 등) 나누입니다. 물론 어느 쪽이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지 않으니 1대 3이라는 다수결로 판단을 내려 마르코의 첨가로 볼 수 있고, 복음서가 거짓을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마르코복음이 가장 먼저 씌어졌으니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서에는 성전숙청을 이렇게 민중봉기에 가깝게 이해하도록 은근히 몰아가는 구절이 앞뒤로 있습니다. 11장 11절 앞절에는 “이윽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셨다. 거기서 이것저것 모두 둘러보시고 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아로 가셨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금 성전에 들어가 숙청하십니다. 이는 마치 거사를 앞두고 하루 전날 미리 정탐을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끝 절에는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하고 나무라셨다. “그때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없애 버리자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군중이 예수의 가르치심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군중들이 예수 편에 서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일행은 다시금 성 밖으로 나갑니다. 잘 방이 없어 나가신 것인지 아니면 체포나 살해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성전숙청과 로마, 광주항쟁과 미국]

예수님의 성전 숙청이 단순히 종교적 개혁사건이냐 아니면 로마정부가 위협을 받을만한 정치적 민중봉기 사건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성서에는 로마정부가 여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이를 근거로 예수를 황제를 거부하는 정치적 범죄인으로 로마정부에 고발을 했고 끝내는 로마 군병들이 주도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기에 이는 분명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용섭목사는 저의 설교 비평에서 ‘예수는 로마정부에 대항하라고 선동하지 않았다.’고 저를 비판하였습니다. 저는 반론에서 성서에 그런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자주의의 위험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에게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1919년 3월 1일 이 땅에 살았다면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사건에 어떤 태도를 취하셨을까? 교회마다 찾아다니면서 일제에 협조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유관순에게 너는 너무 어려서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구나. 그런 만세운동은 신앙적인 일이 아니고 정치적인 일이니 하지 말라고 충고하셨을까요?

1980년 5월에 전라남도 광주에 살고 계셨다면 어떤 행동을 하셨을까요? 물론 폭력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결코 반대하셨겠지만, 시민들이 총에 맞아 죽어 가는 위기 상황에서 이건 정치적인 일이니 관여하지 말자 그리고는 교회 안에 들어가서 기도만을 하셨을까요? 정치와 종교는 평화시에는 그 경계가 비교적 확실하지만, 국가의 운명 혹은 국민의 생명이 달려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그 경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한 본훼퍼목사님의 신학적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로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셨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마르코복음서에 기록된 성전숙청 얘기를 토대로 예수와 로마의 관계를 추론해볼 때 그 해답으로 광주민주항쟁과 미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나라와 로마의 관계는 오늘날 남한과 미국과의 관계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군대주둔이라는 군사적 측면이 같습니다. 예루살렘과 서울 중앙에 군대가 거주했습니다. 로마가 유대인 세리들을 통해 세금을 걷어드린 모습이나 미국의 초국적자본이 국내기업이나 은행의 주식을 통해 이익을 거두어 드리는 경제적 측면이 같습니다.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이 되면 로마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였듯이 남한의 대통령들은 당선이 되면 첫 번째로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는 모습이 갖습니다. 로마어를 말해야 지식인으로 인정받듯이 오늘날 영어를 말해야 지식인으로 인정받습니다. 문화적인 예속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유대와 로마, 그리고 남한과 미국의 관계는 2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래서 성전숙청과 광주항쟁을 등식에 두는 오늘 저의 이해는 현실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매우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복음서 안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오늘 남한의 기독인들만큼 유리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여간 복음서가 그러하듯이 미국이 광주항쟁에 어떻게 개입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올해 518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하는 국제 학술대회에서 시카고대학의 한반도 전문가 부루스 커밍스교수는 “광주항쟁은 천안문사태의 한국판이다. 미국은 천안문시위 진압에 대해서는 계속 얘기하지만 봉기 진압에 미국이 직접적으로 연류 된 광주에 대해서는 침묵에 가깝다.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위선과 기회주의, 미국적 민주주의 이상에 대한 배신 등을 가장 혐오스럽게 드러낸 것이었다.”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미국의 배신은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도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100년 전 1905년 미국의 육군사령관 테프트는 일본의 해군사령관 가츠라와 만나 각각 필리핀과 한반도를 식민 지배하는 밀약을 맺습니다. 1945년 일제 패망 전에 미국은 이미 38선의 분단을 계획했고 러시아가 남하하자 곧바로 이를 제의했고 그때 이후로 우리 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리어 서로가 서로를 원수로 여기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면 약한 나라들을 마구 짓밟는 미국의 오만한 태도에도 분노를 느끼지만, 미국 앞에만 서면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남한의 위정자들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낍니다. 한미 FTA 재협상은 없다고 그렇게 큰소리치다가도 미국이 해야 한다고 하니까 슬쩍 말을 바꿔 우리가 이익이 되면 하겠다고 합니다. 저는 도대체 줏대도 없이 강대국의 입김에 의해 왔다갔다 하는 얼빠진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존을 맡기고 산다는 것에 대해 너무너무 속이 터집니다. ‘안한다고 계속 버티다가 이익이 되면 하겠다.’ 우리가 먹을 것만 주면 행복해하는 돼지냐 하는 것이지요. 전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차라리 배고픈 철학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조그마한 모욕적인 언사에도 참지를 못합니다. 교통사고나면 소리치고 싸우는 민족은 우리나라가 유일한 민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민족의 자존심은 어떻게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매우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골 해부를 좀 해보고 싶습니다.

[518 그리고 그 이후]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말합니다. “518이 아무리 두드러진 서로주체성의 분출이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오직 이어질 때 역사가 되고 역사가 이어지는 것은 역사에 응답할 때입니다.” 이 역사의 응답이라는 것은 고통 받는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김대중씨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한국이 경험해온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해온 행동들을 아시아 네트워크를 통해 각국에 퍼뜨리는 것이 한국의 책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남한은 북한을 설득하고 이끌어 들여 아시아 평화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518의 정신이 광주를 넘어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에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야만 숨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518의 역사에는 바로 그렇게 세계에 내세울만한 자랑스러운 자유와 해방의 민의 주체적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518에 하루 앞서 56년간 끊어졌던 남북의 철로가 뚫렸다는 일이 우연 같아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투철한 역사인식을 갖는다면 이미 87년 6월의 민주항쟁을 불러들인 518의 민주항쟁의 자유와 민주의 투쟁은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넘어 세계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귀중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500명 이상의 제자들 앞에서 보여 진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그 부활을 오늘의 삶에서 이루어내고 퍼트리지 못한다면 그건 개똥이가 부활했다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오늘의 삶에서 이루어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갈릴래아라는 척박한 현장에서 다시금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라고 외치며 이 일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을 동역자로 삼아 돈과 쾌락과 세상 권세의 악령에 사로잡힌 더러운 귀신들을 쫒아내는 인간회복 운동을 벌이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런 의미에서 믿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삶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듯이 또 다른 예루살렘 성전 숙청을 향해 나아가는 십자가 죽음의 삶이기도 합니다.

광주 YMCA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던 박용준씨의 유언으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하느님,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는 무엇입니까? 너무 가냘픈 존재올시다.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올시다. 주님,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더 큰 고통과 번뇌와 시련을 듬뿍 주셔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시요 ... 모든 것 용서하시고 세상에는 관용과 사랑을..."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견사]

예수의 기도 2. (문익환목사)

누리의 큰 마음이시여
뜨거운 불길로 타오르시옵소서
평화로 다스리옵소서
누룩으로 번져 나가시옵소서
고운 이슬로 오시옵소서
큰 뉘우침으로 얼싸안아 주시옵소서
찢어진 깃발로 펄럭이시옵소서
큰 슬픔으로 분단의 비극에서 건져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