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성령강림주일 : 성령의 역사(1) 나눔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에 37:1-6; 행 2:1-4; 43-47

[전투적 신앙 자세?]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은 형제나라 북한과의 50년이 넘은 적대적인 분단과 이 땅을 지배하려는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어 지난 백여 년의 짧은 현대역사를 돌아보면 평화로운 시기는 거의 없었습니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항일독립전투와 만주사변, 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같은 커다란 전쟁을 계속 치러왔고 국내적으로도 수많은 민중항쟁들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 우리나라 국민 성품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매우 전투적인 자세로 변했습니다. 저도 요즘은 운전을 할 때나 물건을 살 때나 조금만 틈을 주면 뒤에서 끼어들기에 나도 모르게 전투적인 자세를 가질 때가 많아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술 문화도 그렇지요. 술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여가를 즐기기 위한 매우 여유 있게 담소하며 나누는 음식인데, 우리는 이것 또한 전투적입니다. 폭탄주. 이게 뭡니까? 외국 사람들이 들으면 데모할 때 불붙여 쓰는 화염병의 일종으로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투적인 자세는 교회의 신앙 안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모든 교인이 주여! 삼창을 하고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대는 통성기도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전투적인 신앙의 형태입니다. 물론 사람이 다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그런 죽기살기식의 전투적 기도를 하게 될 수밖에는 없겠지만, 왜 우리나라 사람만 그런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러한 전투적인 신앙과 덧붙어 다니는 용어 하나가 성령이라는 단어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런 통성기도를 잘 하게 되고 방언기도도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전투적인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적이고 좀 뜨겁게 믿는 교회에서는 이 성령을 너무나 남발하고 있고 성령이 임하면 몸이 뜨거워진다고 하여 부려 감정을 고조하는 흥분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고 이러한 종교적 흥분상태인 엑스타시를 경계하는 진보적인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 곧 향린교회 같은 곳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교인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남한교회의 지나친 성령운동의 잘못 때문이기는 하지만 잘못하면 하느님의 거룩한 영으로 일컬어지는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여기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성령의 바른 이해]

우선 호칭에 있어 성령은 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인 삼위일체에 따라 하느님 예수님과 같은 분이시기에 하느님 예수님 하듯이 성령님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분은 다르면서도 하나라고 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설명하기나 이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예수님의 인성 보다는 신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인 교인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거부가 있고 성령님을 어떤 한 개인을 보호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로 낮춰 이해하고 가르치는 보수교회에서의 보이지 않는 거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고백은 성령님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그냥 영적인 분, 하느님보다는 하위에 속한 어떤 영적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 자신과 꼭 같은 인격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받았느냐? 혹은 예수님을 받았느냐? 라고 말할 수 없듯이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잘못된 말입니다.

물론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교회 내에 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래 어떤 교단은 물로 받는 세례 외에 성령세례를 따로 받아야만 진정한 기독인이 된다고 가르치고 이 성령세례의 기준을 방언기도와 병 치유 기적에 둡니다. 방언기도가 터졌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지거나 그 사람의 말씨가 확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병 치유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이런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비신자들보다 더 높다고 하는 통계가 나온 적도 없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일시적인 성령운동에 너무나 쉽게 현혹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성령강림절을 맞아 성령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졌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든지 여러분들은 오늘의 성서 말씀을 통해 성령운동에 대한 분별력 있는 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능력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난 도무지 너희들을 알지 못한다. 이 악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거라.” 진정한 신앙인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붙잡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은 있더군요. ‘알도 스스로 깨고 나오면 생명이 되지만, 남이 깰 때까지 기다리면 계란 후라이밖에 안 된다.’ 여러분 스스로 성서의 말씀을 깨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민족과 민족의 담을 허물어 하나 되게 하신다.]

첫 번째로 성령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오순절 다락방에서 일어난 방언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선 성령강림절은 본래 유대인들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오순절에서 출발합니다. 오순이란 한자말은 50일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해방을 기념하는 과월절로 부터 오십일 째가 되는 날에 보리의 첫 수확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이러한 구약성서의 감사 전통에 따라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따로 모여 이 절기를 지켰던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졌다는 이 성령강림의 비유 언어들은 인간의 힘으로 거역할 수 없는, 일시에 몰아닥치는 어떤 강력한 신적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성령충만이라는 단어를 설명한 말입니다.

이때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행한 방언은 외국어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 안에는 지중해 연안과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교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의 지역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언어가 소통되는 역사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은 상대방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이는 오늘 사도행전 2장에서 말하는 방언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로 불통이던 사람들이 말이 통하게 되는 소통의 역사가 열린 반면 오늘 특히 남한 교회에서의 방언은 그 반대로 불통과 단절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창세기 11장에서 일어난 바벨탑의 심판이 끝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온 인류가 한 가지 말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래 온 인류가 함께 모여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서고자 하는 죄악입니다. 그래 야훼 하느님은 이들의 교만을 보시고 서로의 말을 다르게 하여 사람을 흩으시는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외국어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민족 간의 불통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이해와 소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인간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신다.]

이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게 되고 혹 술 취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 요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으리니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는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우리 또한 성령 충만하여 예언이나 계시나 꿈을 꾸기를 바랍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 하느님의 지시하시는 새로운 길로 들어선 변화된 인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요엘 선지자의 말씀에서 정말 중요하게 관심을 기울려야 할 단어는 아들과 딸이 함께 예언하고 젊은이와 늙은이가 함께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이 함께 예언을 한다는 이 대목입니다. 이 시대에 여성은 사람의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가부장적인 성차별의 폐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성차별은 특히 종교의 영역 안에 강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에서 여성은 신부나 주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되기 힘들고 불교에서는 주지스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왜 여성은 호주나 호상으로서의 자격이 없고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아내나 딸은 앞에 나서 문상을 오신 손님들과 더불어 맞절을 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집안의 제사를 드릴 때에도 정작 음식은 만들지만, 조상들에게 절을 할 때는 여자는 빼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성당에서 이 요엘의 말씀을 따라 여성을 신부로 임명하고 주지스님을 비구니로 부른다면 이는 종교계를 뒤집는 혁명이 될 것입니다. 농경시대에 있어 노동력이 없는 한 풀 간 늙은이들은 심한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연봉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이 황금만능의 시대에 아무런 경제적 능력이 없는 늙은이가 젊은이와 똑같다는 말 또한 자본주의의 근본 체계를 뒤집는 혁명적 선언입니다.

제자들이 외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남종과 여종 또한 주인들과 같이 예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노예제의 폐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당시 로마라는 거대한 세계를 떠받들고 있는 것은 노예제였습니다. 로마시민들은 정치와 군사를 비롯한 핵심을 잡고 있었고 다른 모든 일은 노예들이 담당했습니다. 로마시민의 3분지 2가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날이 되면 이들 또한 자유인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노예제 폐지를 선포하는 것이고 노예제 폐지선포는 곧 로마를 뒤집는 혁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담대히 선포하는 열두 사도들의 복음은 단순히 개인이 만사형통하는 복을 얻거나 병이 고침 받는다고 하는 그런 속 좁고 옹졸한 축복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세상을 뒤집는 엄청난 혁명의 선언이었습니다. 오늘의 말로 옮긴다면 장애인들과 외국인 노동자들과 동성애자들과 북한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나 구별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남종과 여종이 함께 꿈을 꾼다고 하는 고대 사회의 노예제도 폐지를 선포하는 요엘 선지자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다면 무엇이라 선포하겠습니까?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기반을 부수는 노예제도 폐지와 맞먹는 그런 혁명적 선언은 무엇에 해당할까요? 아마도 요엘 선지자는 오늘의 로마인 미국을 향해 외국에 세워진 모든 군사기지를 철수하고 자국 내의 모든 무기 공장과 핵연구소 등을 문 닫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충만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영역 안에서만 이해되지만,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충만은 우리들의 성별 세대별 계급별의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을 깨트리고 한 사회를 뒤집는 엄청난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인류가 함께 하나 되는 하느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실제로 말로만 외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또한 엄청난 혁명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이 십자가에 죽인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대부분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례를 통해 죄의 용서함과 하느님의 구원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종교적인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인들의 깨달음에는 아직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기도와 소유에 하나 되게 하신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 그 날에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은 삼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성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초대교회 신자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과 기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방언이나 치유와 같은 기적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진짜 기적은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 놓고 필요한 만큼 나누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하느냐? 혹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오늘의 성서 본문은 매우 분명합니다. 물론 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삶에 대해서는 저부터도 고민합니다. 당장 나의 전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살아 갈수는 없습니다. 뜻에 맞는 사람들이 공동체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핏줄을 함께 나눈 가족끼리는 자기 것을 크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많은 것들을 공유하며 살아갑니다. 이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을 조금씩 넓혀가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4촌 8촌도 가족으로 여기고 가까운 친구도 가족으로 여기고 교회 내의 가까운 사람도 가족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가족의 개념을 호적에 새겨져 있는 핏줄로부터 벗어나 점점 더 넓게 확대해가며 그리고 나의 가진 것을 조금씩 조금씩 나누며 살아가는 것은 실제 가능한 일입니다. 회개한다고 하는 것이 삶의 방향을 트는 일이라면 180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30도 60도 90도 조금씩 방향을 트는 일은 여러분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들꽃향린교회의 서정호집사님을 많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자신은 몇 년 전 딸이 대학을 들어가는 그 시점에서 돈을 벌어 재산을 늘리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사회봉사하는 일에 쓰고 있고, 갖고 있는 재산도 나누는 일에 쓰고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석가탄신일에 몇 몇 교회가 함께 하는 ‘정의평화를 위한 기도인한마당’ 체육대회에도 음식과 선물을 가져와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오징어젓과 무말랭이 무침을 만들어 조금만 봉지에 넣어서 나누어주고 조그마한 수건을 만들어 참석한 모두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돈으로 따지자면 그리 큰돈은 아닙니다. 그런데 음식박스를 구하기 위해 새벽에 시장에 나가 생선 장사들이 버리는 냄새나는 스치로풀 통을 주어다가 이를 비누로 깨끗이 씻어서 말려서 음식을 담아 오신 것입니다. 저는 그 정성이 너무나 지극해 보였습니다. 그분에게는 그 자리에 참석한 백 명이 넘는 신도들이 모두 자기 가족인 것입니다. 약간의 돈을 주면 간단하게 살 수 있는 통을 얻기 위해 새벽에 시장에 나가 부산을 떠는 일을 남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자기는 기쁨으로 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말이 향린교회는 빨리 분가선교를 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강남향린교회가 했는데, 왜 그보다 훨씬 큰 향린교회가 하지 못하느냐?고 저에게 도전 아닌 도전을 하면서, 만약 향린교회가 분가를 한다면 없는 돈이지만 자기가 천만 원을 헌금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술 취해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했고, 이 일에 최영숙장로님과 김정태집사 윤영수집사가 증인입니다. 전 이런 분이야말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적인 경계를 허물고 넓히는 일은 단지 물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생명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중한 병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인간의 영역을 나의 몸이라고 하는 사적 영역을 깨고 너에게도 내가 있고 너에게도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공동체의 몸을 생각한다면 내가 죽는다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내가 꼭 살아야한다고 하는 그래서 기껏 더 살면 1년 혹은 5년 10년을 더 살려고 하는 애탄 몸부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저에게 스스로 하는 말입니다.

최근의 설문연구조사에 의하면 스스로를 하층이라고 답한 사람이 4명중 한명 꼴로 나타났고 이 수치는 3년 전에 비해 5%가 늘었습니다. 이는 국가 전체의 경제지수는 높아졌지만, 빈부의 양극화 현상과 이제 맞물려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점점 더 심화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국내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계 경제 수치는 지난 세기에 비하면 훨씬 높아졌습니다. 식량도 늘었고 유아사망률도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15억에 달하는 사람들-대부분은 여성, 어린이, 원주민들-은 하루 1달러(천원)도 안 되는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부자 20%가 세계 재화와 서비스의 86%를 소비하고 있고, 최상위 1%의 연간수입은 하위 57%의 수입과 맞먹고 오늘 하루만도 24,000명의 사람들이 배고픔과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선택에 관심하고 있지만, 세계 3분지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당장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교통이 발달하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경제로 묶어지면 그런 인간의 불행은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는 정치인들과 재벌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1990년대 IMF를 맞았을 때, 구조조정은 장기적 이익에 필요한 단기적 고통일 따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에게서 부자들과 다국적 재벌기업으로 재분배하는 과정일 따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장에는 스스로 자율성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어 정부나 시민단체가 시장을 규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시장을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우상숭배입니다. 삼성이든 한화이든 재벌들은 스스로 규제하는 힘이 없습니다. 정부의 규제나 시민단체와 같은 밖으로부터의 감시가 없으면 이 재벌기업들은 총수의 가족이나 몇몇의 특별계층들만을 위한 특수 이익집단으로 탈바꿈합니다.

환경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눈과 숨을 제대로 뜰 수 없는 황사현상을 하루가 멀다 하고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 천연자원의 고갈, 생명 종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장 큰 원인은 거대한 기업들이 경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직접적인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제 3국의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지구 전체를 죽음으로 내어몰고 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가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이긴 하지만 나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 십자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처음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할 때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자기들을 하늘나라로 들어 올려 가실 것을 믿고 모여 있었습니다. 세상을 무서워하며 자기 한 몸 구원받자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찬 바람과 불길 같은 성령으로 충만케 되자 어찌 되었습니까? 다락방에서 내려와 집의 문을 열고 스승 예수를 살해한 사람들이 활보하는 거리 한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 부활의 복음을 외쳤습니다. 이 복음은 민족과 민족의 담을 허무는 방언의 역사였고 여성과 남성, 젊은이와 늙은이, 종과 주인의 차별의 벽을 허물고 모두가 예수 안에서 하나 되어 가진 것을 나누는 대 혁명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사도행전의 성서말씀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인간혁명이 일어날 때, 이는 가능한 일이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에즈키엘 선지자는 들판에 죽은 뼈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뼈들에 힘줄이 이어지고 살과 가죽이 붙어 한 몸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몸이 움직인다고 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먹고 싸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소명을 깨닫고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소명을 에즈키엘은 몸에 하나님의 입김인 성령을 부어 넣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맞아 성찬식을 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영을 우리 안에 부어넣는 일입니다. 하늘의 소명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래 눈이 띄어져서 함께 이 떡과 잔을 나누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새로운 하늘의 가족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하늘의 가족으로 손을 맞잡고 어깨를 맞대고 성과 나이와 인종과 계급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없애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공과 풍요라는 세상 안에 횡행하는 사탄의 불의한 체제에 맞서 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회복되는 나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거룩한 영 곧 성령님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성공과 풍요로움은 소유가 아닌 나눔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고백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