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0일 성령의 역사(3) 스테파노 죽음의 현재적 의미
시 31:9-16, 행 6:8-15

[파죽지세]

대나무란 처음 두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데 여기서 파죽지세(破竹之勢)라는 말이 나왔고 이는 제어하기 힘든 넘쳐나는 기세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하는 약속과 더불어 승천하시고 나자 그 약속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중에 성령 강림을 체험하게 되고 그들은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대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성령의 역사가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예루살렘 지도층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담대해지게 되면서 초대예수공동체는 계속 성장하여 나갑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6장 스테파노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의 성장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파죽지세의 모습입니다.

이때 이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4장 23절 이하에 보면 “과연 헤로데와 본티오 빌라도는 이 도성에서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작당하여 주께서 기름 부어 그리스도로 삼으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렀습니다. 주님 지금 그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우리를 살피시고 주님의 이 종들로 하여금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성도들은 당시의 지역 통치자인 헤로데와 본티오 빌라도 로마 총독이야 말로 예수를 죽인 원흉이라며 직접 그 이름을 거론하며 세상 권세에 담대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외적인 정치적 핍박에 대해서는 이렇게 담대하게 비판하고 저항하면서 내적으로는 가진 것들을 함께 내어 놓는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저는 여기에 성서가 말하고 예수 복음이 증언하는 진정한 하느님 축복의 내용이 있다고 봅니다.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거야 말로 모든 정치인과 경제학자와 종교인들이 꿈꾸는 하느님의 나라 유토피아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 말을 어느 만큼 사실로 이해해야 할는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4장 4절에 의하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은 남자 장정만도 5천명이나 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최소한의 가족단위를 4인으로 한다면 2만 명이 넘는 신도를 말합니다.

2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예루살렘 성내 거주 인구수나 집단생활의 현실성을 감안한다면 너무 과장된 숫자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신앙운동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가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도 1907년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평양의 길선주목사를 중심으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우리에게는 한국교회에 내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the slain)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습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사실 몇 개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회개운동을 전 도시가 그러한 것처럼 보는 것은 착각이나 거짓이 아니라 하나의 증언적인 고백입니다.

이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는 초대예수공동체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뒤집으면 모두가 부자였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부자는 남보다 많이 가질 때에 부르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서로서로가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나눌 때 일어납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게 되면 내 것은 여러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의 총합계가 됩니다. 이것이 모두가 부자되는 하늘나라 나눔의 방식입니다. 나누면 분명 줄어들어야 하는데, 나눌수록 많아지는 것이 하늘나라 수학방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초대공동체가 당시의 존재하던 유대율법 민족공동체와 확연히 구별되는 점입니다. 그래 이 자기 것의 포기와 나눔으로 하나 되고 모두가 부자 되었다는 서술은 2장 42절, 44절, 46절 5장 32절 34절 35절에서 계속 반복되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 마지막에서 자기 소유를 포기한 대표적 인물로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바친 바르나바를 언급하고 이 바르나바의 인기를 탐낸 아나니아와 삽피라의 죽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부 또한 땅을 팔아 재산을 바쳤는데, 일부는 빼돌리고 그것이 전부인양 거짓으로 드림으로 인해 두 사람 모두 베드로의 꾸중을 듣고 그 자리에 거꾸러져 숨지고 맙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생겨난 후의 모습을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 모든 신도는 한 덩어리가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여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5장 12-14절) 이 짧은 구절 안에 많은 변화가 시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집단이 너무 똘똘 뭉쳐 다른 사람들이 그 모임에 끼지 못할 때에 그 집단이나 모임을 狂的(광적)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이 구절을 보면 초대예수공동체 구성원들의 종교적 열정이 그 정도로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솔로몬 행각이라는 예루살렘 성전내의 설교단을 점령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접근을 하지 못할 만큼 그 세가 엄청 불어나 있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백성들의 칭찬은 높아만 가고 신도들이 계속 늘어갔다고 하는 부언의 설명은 이제 이 자리를 빼앗긴 기성 예루살렘 종교집단의 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낳게 합니다.

제사장 그리고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고발하여 죽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부활의 주로 그리고 역사의 미래를 주관하는 메시아로 고백하는 예수공동체 신도들을 계속 그 상태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강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예수공동체 신도들이 성전제사에 참여하면서 안식일법이나 할례와 같은 최소한의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는 한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고 보다 어려운 문제는 이제는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 잘못 다루었다가는 오히려 자신들의 위치가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 회유도 하고 매질도 하여 협박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5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백성들이 자기들을 돌로 칠까 두려워하여 그 이상의 폭력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 호시탐탐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내부로부터의 분열]

그런데 언제나 위험은 밖으로부터의 박해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분열에서 온다는 말과 같이 날로 성장하던 초대 그리스도인들 공동체 안에 분란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리스말을 하는 유다인들과 본토 유다인들 사이에 과부들의 식량배급 문제로 인해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같은 유다인이요 같은 소수개혁파 예수공동체에 몸담고 있으며 내 것 네 것이 없었지만, 식량배급을 놓고 출신 배경에 따른 차별이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편협성, 네 편 내편 가르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초대공동체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일에 어떤 안도감을 느낍니다. 만약에 초대공동체가 그런 사소한 내분이 없이 모두가 정의로운 예언자와 같고 모두가 사랑의 천사와 같았다면 우리는 심한 좌절감과 패배를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 받아 거듭난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어딜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증이 되는 얘기이고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도 자기성찰의 훈련을 매일매일 반복해서 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외부로부터 박해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초대예수공동체가 사소한 일에 있어 지역 편 가르기로 인해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저와 같이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다 온 사람들이나 부모님 중의 한 사람이 그리스말을 하는 사람들을 해외파라 하여 본토인들이 차별을 둔 것입니다.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은 매우 유치한 행동입니다. 같은 장애인이라도 외국 사람들은 혜택이 없습니다. 지금도 세계화를 외치는 남한도 정부 중요 관료들을 뽑을 때 무엇을 중시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인물이나 능력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안배가 더 우선시합니다. 이는 매우 유치한 일입니다.

[스테파노는 집사가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인간적인 유치함이 드러나 내부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열두 사도가 모두를 모아놓고 말하기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제쳐 놓고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운데서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내시오. 이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사람의 그리스파 지도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이 일을 두고 오늘날 집사직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라고 봅니다. 우선 여기 사도행전 6장에는 집사라는 말이 등장하지도 않고 집사로 안수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에게 식량 배급하는 봉사 일을 맡긴 것입니다. 여기 봉사라는 헬라어 단어 디아코니아에서 영어 deacon이 나왔고 이를 한자말로 번역하면서 일을 붙잡았다는 의미의 執事(집사)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는 단지 식량배급에만 쓰인 단어가 아니라 베드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도 쓰이고 있습니다.(4절) 그러니까 사도는 말씀전하는 디아코니아. 그리스 출신 일곱 사람은 식량 배급 디아코니아를 담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봉사를 뜻하는 diakonia가 deacon이라는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았고 집사는 목사 장로와 같은 하나의 직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러다보니 집사만 마치 봉사자이고 다른 사람은 봉사자가 아니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에서는 보통 교회에 출석한지 2,3년이 되면 서리집사라고 하여 임시 집사직을 줍니다만, 이 또한 성서의 정신에 어긋난 한국교회만이 행하는 일입니다. 본래는 안수직이지요. 그리고 서양 감리교에서는 집사 장로라는 칭호 또한 목사에게 붙습니다. 목사된지 7년 이상이면 정회원이라 하여 장로라 부르고 7년 이하는 집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장로교에서는 이 장로와 집사가 모두 목사가 아닌 일반 신도들에게 주는 하나의 직분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로 인해 남한의 감리교와 침례교는 세계감리교단이나 침례교단의 근본정신에 어긋나서 장로직을 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남한에서 이 직분은 모두 사회적 신분으로 바뀌어져 정치인들의 명함에 박히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비신자들이 한국교회의 장로나 집사 권사를 어떤 자리로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타파하는 방법은 장로집사권사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함으로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얕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집사라는 한자 단어가 매우 절묘한 번역입니다. 목사 의사 판사 학사 할 때의 ‘사’자는 스승 師(사)자 아니면 선비 士(사)자입니다. 그런데 집사의 사자는 일 事(사)자인데 우리말로는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절묘한 번역입니다.

[새로운 세대를 향한 복음의 사도들]

오늘 본문의 일곱 사람을 오늘날의 집사직의 출발로 보는 것은 성서단어 해석에 있어서도 잘못된 것이지만, 실제 내용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안수를 받고 나서 스테파노의 얘기가 나오는데, 식량 배급을 하였다는 얘기는 한 구절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아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을 행하고 있었다.’고 6장 8절에서 말하는데 이는 5장 12절에서 12사도들이 한 일과 똑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곱사람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필립보 또한 사도행전 8장에 가면 유대 남쪽 광야지역과 북쪽 사마리아 지역자로 복음 전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되고 니골라오는 바울의 편지 속에 전도자로 나옵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도 밑에서 사도를 돕는 봉사자가 아닌 사도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7이라는 숫자는 비유다세계 쉽게 말해 성서에서는 이방인이라 일컬어지는 곧 당시의 그리스 문명화된 로마세계를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 5천명을 먹인 급식이야기를 통해 12개의 부스러기 광주리가 남았듯이, 이방인 4천명을 먹인 급식이야기에는 7개의 부스러기 광주리가 남았다는 복음서의 기록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이 일곱 지도자들은 단지 식량배급을 위한 보조자가 아닌 초대예수공동체내의 소수파 그리스말을 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새로운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직접 제자인 12 사도들의 제 1세대의 복음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제2세대의 사도들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을 때, 갈릴래아 출신 1세대는 예루살렘과 유대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유대를 벗어나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려면 유대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할례가 갖는 혈통민족주의라는 폐쇄성을 탈피해야 했고 안식일법과 정결법이 갖는 세세한 규정과 문화적 관습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지역성을 타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세대의 사도들로서는 깨기 힘든 한계였습니다.

[운동발전사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그리스파 과부들이 차별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이 유대 땅 밖으로 나아가기 위한 국제적 감각을 지닌 새로운 지도자 선출이었습니다. 이때 일어난 일을 성서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는 신도들의 수효가 부쩍 늘어났으며 수많은 사제들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전에도 신도들이 계속 늘어났지만 부쩍 늘어났다고 강조하고 있고 거기에 수많은 성전 사제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놀라운 보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았기래 수많았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사제들은 어떤 사제들이었을까? 그렇다면 이 ‘수많은 예루살렘 제사장들’이 예수의 세례를 받았을까? 그들 또한 재산을 내어놓았을까? 그 정도로 예수공동체는 탄탄했을까? 저는 이 ‘수많은 사제들’이란 당시의 율법과 전통 그리고 성전에 매인 폐쇄적 종교성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유대교안의 새로운 개혁파들이었다고 봅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그들은 유대교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앙운동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예수파를 눈 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이들 또한 그냥 한번 일어났다 사라지고 말 개혁운동인가? 아니면 이 율법의 폐쇄적 전통과 할례로 국한하는 혈통적 유대민족주의를 타파하고 진취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정한 혁신 그룹이 될 것인가? 이때 그들은 예수파들이 자신들의 소수파인 그리스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젊은 리더를 세우는 것을 보고 신뢰가 생겨 이 운동에 동참한 것입니다.

성서의 내용에 따라 그 접근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영성적인 방법, 심리적인 방법, 교리적인 방법 사회과학적인 방법 등등.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지도자의 등장 그리고 사제들의 동참들은 모두 이러한 사회운동적인 시각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해석이 되는데, 제가 아는 한 지금까지 아무도 이러한 해석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거의 모두가 스테반집사라고 말하고 있고 제사장들의 동참은 마치 스님이 목사가 되었다는 식으로 종교적 회심의 차원에서만 해석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도올선생이 강의를 하면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복음서를 글로 보지 않고 복음서 소리꾼이 말로 하는 것을 들어서 알았다고 하는 사회운동적 시각을 강조하고 이것은 신학자들이 다루지 못한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 이 소리꾼 얘기는 30년 전 제 학사 졸업논문에서 주제로 다루었던 부분이고 이 논문의 심사를 황성규목사님이 하셨으니까 증인도 계십니다. 사실 이 복음서전승의 소리꾼 역할에 대해서는 도올선생이 알지 못하는 다른 얘기도 있지만 오늘의 하늘뜻펴기와는 다른 주제이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도올선생의 강의는 한 시간 반을 조금도 졸릴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재미가 있고 새로운 역사적 사실도 잘 전하시긴 하지만, 어떤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새겨듣기를 바랍니다.

[스테파노의 중요한 업적]

오늘의 스테파노의 이야기는 이렇게 초대예수공동체와 유대예루살렘 종교와의 폭넓은 사회운동적인 시각을 갖고 접근할 때 그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순교를 했고 바울로도 순교를 했습니다만, 초대예수공동체의 첫 번째 순교자는 스테파노였습니다. 스테파노란 말의 뜻은 왕관인데 결국 그는 순교의 왕관을 쓴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스테파노는 베드로나 바울로보다 더 큰 일을 한 사람입니다. 개혁의 물꼬를 튼 사람은 당시의 지도자인 베드로도 아니고 신약성서의 많은 글을 남긴 바울이 아닌 스테파노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나 바울로에 비해 스테파노의 업적은 너무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서를 보십시다.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아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을 행하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5장 12절에서 사도들을 설명한 글과 똑같습니다. 자 그러면 스테파노가 행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이란 무엇일까? 6장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지만, 5장 사도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여러 동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악령이 들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몰려왔는데 그들의 병도 모두 고쳐졌다.’(16절) 스테파노 또한 악령을 쫒아내고 병을 고쳤다는 얘기입니다. 일단 여기서 스테파노 얘기를 잠시 중단하고 병고침의 얘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니 예수님 때로부터 지금까지 복음에는 병 고침의 기적이 항상 함께 붙어 다닙니다. 지금도 신앙으로 병 고침을 받고자 기도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간혹 낫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낫지 못합니다. 누구는 낫고 누구는 낫지 못하는가? 왜 하느님은 차별하시는가? 별다른 답은 없지만, 가장 쉽게 듣는 답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계속 두들겨라 언젠가는 열릴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 많이 하면 하느님이 감동받을 것이다. 그래서 부흥회로 철야기도회로 열심히 쫓아다니고 때로는 집을 팔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간혹 나았다는 사람이 나옵니다. 얼마나 더 살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하여간 당시는 기도로 나았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 있고 많이 바치는 사람에게만 기도의 효과가 생긴다면 이야말로 업을 쌓는 공로사상이지요.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공로로 넘어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이요 교회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면죄부판매에 해당하는 것이고 부적을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병고침의 성서적 이해]

예나 지금이나 병은 많습니다. 병이 없다고 하는 자부하는 사람도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으면 없었던 병이 생겨납니다. 병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병은 시한부선고를 받은 암만이 아닙니다. 당뇨 허리디스크 관절 통증 혈압 모두가 병입니다. 감기도 병이고 두통 노이로제도 병이고 종기를 비롯한 갖가지 피부병도 다 병입니다. 예수께서 고치신 병은 이런 병인가? 예수 믿어 낫는다는 게 이런 병인가? 사도행전에도 성령충만한 사도들이 나면서 앉은뱅이도 고치고 심지어는 베드로의 그림자만이라도 비추면 낫는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병은 모두 고쳐졌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두통 치통 무좀 하나 없이 죽을 때까지 모두 병치레 한번 없이 살았다는 말인가? 아니 병이 없었다면 죽는 일도 없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나았는데 얼마 후에 재발했는가? 정말 성서에서 말하는 병이라는 게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런 육체의 병을 말하는 것일까? 그 이상의 어떤 의미는 없는 것일까? 예루살렘 근처에서 몰려든 모든 사람들의 병자들과 약령 들려 고생한 모든 사람들의 병이 고쳐졌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아니 사실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라는 것이 반드시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그런 사실일까? 아니면 다른 사실일까?

경상도 지방에 내려오는 민요 중 담방구노래가 있습니다.

“구야 구야 담방구야 우리 글게 왜나왔노
조선 사람 병이 많아 병곤치러 내나왔제.”

이 노래를 들은 권정생 선생이 이 노래에 나오는 병이란 무슨 병이냐고 노래를 불러준 누이실댁 할머님께 여쭙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 답이 “병이란 딴 게 아니라 실픈 눈물이제. 조선 사람은 하도 설움 많아서 눈물 거둬 줄락꼬 왔다제만, 어디 그걸로 다 씻겠나” 그러면서 또 하나의 담방구를 입에 뭅니다. (권정생 <죽을 먹어도> 아리랑나라 56쪽)

여기서 조선 사람의 병을 조선 사람의 설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전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병 고침의 기적 이야기 또한 모두 당시의 약자 민중들이 당하는 설움과 한의 아픔의 치유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성서적이라고 이해합니다. 12사도가 행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 그리고 스테파노가 행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은 모두 약자 민중들의 억울함을 대변하여 당시 민중의 삶을 옥죄이고 있었던 율법의 세세한 규례들과 성전 제사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통한 새로운 개혁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저들의 억울함 분함 권세 앞에 숨죽이며 지내야 했던 저들의 고통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썩은 곳을 도려낼 때 민중들의 병은 고침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스테파노의 설교에 나타난 개혁의 외침]

7장 전체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는 스테파노의 설교의 핵심적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아들 12명이 모두 할례를 받았지만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버렸다. 할례의 무용함을 논증합니다. 둘째 요셉을 통해 이집트로 이주한 조상들 가운데 모세가 나오고 그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였다. 그러나 조상들은 모세의 율법 곧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고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별들을 섬기는 죄악을 범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조상의 전통이란 바로 그런 우상숭배이다. 셋째, 조상들이 광야에 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증거의 장막을 주셨다. 그리고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지극히 높으신 분 야훼 하느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사시지 않는다. 결국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신적 거룩성을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70인 최고회의 민족 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당신네 조상들처럼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율법을 받고도 그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스테파노는 당시의 썩어빠진 유대종교를 깨고 새로운 종교개혁운동을 불러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스테파노로 인해 예수공동체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 박해를 피해 공동체는 유대땅 밖으로 번져갈 수 있었고 동시에 유대교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인 신앙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이 일 후에도 열두 사도들은 계속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여전히 유대종교 안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후에 가면 결국 바울로와 베드로가 할례 문제로 다투게 되는 장면도 볼 수 있게 되고, 바르나바와 바울로와의 갈라짐도 성서에는 마르코 때문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런 개혁성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합니다.

스테파노에게 있어 개혁은 단지 할례나 정결법과 같은 그런 규례의 변경 정도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만군의 여호와 하느님사상입니다. 군대의 장으로 적을 무찌르고 승리하는 하느님, 높임 받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나타난 하느님은 인간 가운데 오신 낮아지신 임마누엘 신의 모습입니다. 예수는 그것도 가장 밑바닥에서 남을 섬기는 종이 되는 모습을 신앙의 최고의 가치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치를 따랐던 초대예수공동체는 이웃을 내 몸과 사랑하는 섬김을 몸으로 실천했고 세상의 모든 물질은 힘센 몇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평등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할례나 안식일 법 정결법의 사소한 법 규정에만 매여 있는 유대전통과는 갈라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갈라섬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람이 바로 스테파노였습니다.

물론 스테파노를 통한 개혁운동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 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때로 부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부터 유대교 안에 이미 개혁을 향한 요구와 보이지 않는 저변의 운동들이 있어왔습니다. 민중들이 함께 했고 유대교 안의 사제그룹도 함께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는 시대적인 부름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개혁의 폭약은 준비되어 있었고 뇌관도 있었지만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뇌관에 불을 붙여야만 했는데 그 일을 스테파노가 한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죽음의 현재적 의미]

오늘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이하면서 20년 전 1987년 6월 이 땅에 노도와 같이 밀어닥친 민주화의 요구는 일순간에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1960년 419의거 이래 30년 가까이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목사님과 같은 수많은 혁명적 사상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민중혁명의 화약은 준비되어 있었고 이는 시대적인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스파크를 일으켜서 뇌관에 불을 붙여야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종철열사와 이한열열사의 죽음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치 스테파노의 죽음이 예수복음운동사의 세계사적인 방향을 틀었듯이 그들의 죽음 또한 우리 한민족의 역사의 방향을 틀었던 것입니다.

박종철열사나 이한열열사가 이 자리에 선다면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20년 전에 가졌던 민주와 자주와 해방과 평등 그리고 평화통일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포기하지 말고 더 힘차게 앞으로 뻗어나갈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스테파노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면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이야 말로 역사의 주인입니다. 율법이니 할례니 정결법이니 안식일법이니 성전제사니 하는 종교적 규례에 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들은 본래 스스로 존재하시는 야훼 하느님의 자유하시는 영을 우리 인간이 잘 보존하고 키워가도록 준 보조자입니다. 이것들은 주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느님 아래 있던 것들인데,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보다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보다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의 주인으로 하늘나라 기업의 상속자인 아들과 딸로 자주와 주체의식을 갖고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가득히 채움 받아 경쟁과 물질의 세속적 가치를 뛰어 넘으십시오. 세상 악마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우리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게 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이 승리요, 상대방의 것들을 많이 빼앗는 것이 성공이요 많이 가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divide and conquer 지배자들의 분리지배전략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십시오. 자기보다 상대방을 낫게 여기십시오. 서로 경쟁하지 말고 가진 것들을 함께 나누며 사십시오. 정치인들이 노래하는 3만 불 소득에도 속지마시고 세계 경제10위권 진입 운운에도 속지 마십시오.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한다는 개발논리에도 속지마시고 국방비 많이 늘려 신식무기 많이 만들고 전쟁기지 많이 만들면 평화가 보장되고 안보가 이루어진다는 환상에도 속지 마십시오.

힘센 자 편에 함께 하면 그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노예적 환상에서 깨어나십시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세상의 논리이거늘 어찌 그걸 깨닫지 못하시오. 힘을 기르시오. 자기 힘을 기르시오, 그러려면 우선 강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길이 없다면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하십시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얘기는 우리 겨레가 만든 독특한 전래동화입니다. 남매를 둔 어머니가 고개 넘어 잔칫집에 일을 갔다고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에게 음식을 빼앗기고 나중에는 팔다리와 몸뚱이까지 차례로 먹히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밀가루를 묻힌 호랑이의 손과 발을 어머니의 것으로 혼돈하지 마십시오. 꾸며서 내는 목소리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예수 십자가를 지는 스테파노의 변혁의 영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