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시편 51, 1- 13 ; 로마서 8, 35 - 39

(시무임기를 마치면서 교우들과 함께 나눈 하늘뜻) 이 충 언, 임 승 계 장로


이 충 언 장로

[회개와 화해의 삶]

오늘 드리려는 말씀이 다소 무겁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용서해 주시고 경청해주실 때에 성령님께서 함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솝 이야기 한 편으로 하늘 말씀을 열어 보겠습니다.

“먼 길을 가던 당나귀가 짐이 너무 무겁고 힘에 부쳤던지 함께 가던 말에게 짐을 좀 나눠서 져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마 곡식 한 자루 정도의 무게를 부탁했겠지만 말은 편하게 가던 길이 힘들어지는 것이 싫어서 거절합니다. 당나귀는 오래지 않아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탈진하여 죽습니다. 그 결과, 말은 당나귀가 졌던 짐을 더 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귀 시체까지 떠메어야 했죠. 그제야 말은 "친구가 짊어졌던 짐에다 죽은 친구까지 메고 가게 되었다"며 후회합니다.”

이기심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화를 불러온다는 교훈이지요. 우리의 현실에서는 가난한 이웃, 소외당하는 이웃, 병의 고통 속에 있는 이웃, 억압 받는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을 깨닫게 합니다.

이 시간에는 회개와 화해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유태인들은 죄의 용서를 빌 때에는 우리들이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유태인은 모두 한 가족이며 운명공동체라는 생각 때문에 혼자 지은 죄일지라도 함께 죄 지은 것으로 본다는 거죠. 누군가 도둑질 했다면, 나는 훔치지 않았어도 하느님께 잘못을 빌어야 하는데, 나의 자선이 부족해서 그 사람이 도둑질을 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에서 이지요.

오늘 여기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2000년 전처럼 우리들 듣는 데서“독사의 자식들아!”하고 외치신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가슴에 내리꽂히는 아픔으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옆을 둘러보며) 나를 빼놓지는 않을까요?

주님 말씀을 구경꾼 입장에서 듣는다면 “나는 아니다”고 생각하며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일이 될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참회의 기도라고 합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게 만든 간악한 죄를 범한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고 자기 죄를 참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의 배경을 보지 않고 읽으면 인간의 죄된 본성을 근원적인 차원에서 깊이 통찰하고, 죄로 인해 하느님께로부터 소외된 영혼의 고통을 호소하며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을 간구하는 참으로 매우 고결한 시로 느껴집니다. 구원이라는 명제와 연관된 것으로 말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지만, 그 시작은 회개로부터 라고 생각합니다. 회개는 우리 손에 들려 있는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자기를 비웠다고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탐욕스럽고, 편한 것만 찾고, 내가 만든 정의로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교만한 마음을 갖기도 하고 내 취향과 사상과 다르다고 분노하고 증오하며, 자기 기준을 절대화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세례요한, 베드로가 우리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들 역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하죠. 믿지 않는 사람들이 회개 하겠습니까? 우리 향린의 형제자매들은 회개를 어떻게 생각 할까요?

세례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으라고 했습니다. 또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한다"고 하면서 "속옷 두 벌을 가졌으면 한 벌은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으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세리는 정한대로만 받고, 군인은 착취하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가르친 회개는 이웃의 존재와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을 떠나 이웃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함께 나누며 사는 것, 부당한 이익을 챙기지 않고 정직한 생활, 협박이나 속임수나 폭력을 쓰지 않고 직책에 합당한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하늘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과 자비를 인식하고 내 가던 길에서 돌이켜 서고(메타노이아) 하느님께 돌아와 용서와 은혜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며 함께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울부짖자 베드로는“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했기 때문에“하나님께 회개하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려면 먼저, 우리의 죄성과 죄과를 깨닫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죄는 직관적으로 볼 수도 있고, 성경과 7 종죄 및 죄의 원형을 통해서도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은 정직한 기록입니다. 다윗의 범죄 같은 부끄럽거나 잘못한 일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의 잘못도 발견하고 회개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은 옳은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 살지 못한다면 위선이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늘 자신을 돌아보고 매순간 기도하며 회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올바르게 살던 인간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타락해서 죄 앞에 무릎 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교만, 투기, 분노, 음란, 탐욕, 인색, 게으름이라는 죄의 동기를 유발하는 인자, 즉 죄성의 씨앗 일곱 개가 들어 있어서 언제라도 싹이 튼다면 우리를 잘못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곱 가지 종죄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을 교인들에게 대단히 교육을 많이 시킵니다.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주의 기도대로 늘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창조된 사람은 자유의지도 갖고, 생물들의 관리를 하나님께서 맡겼습니다. 그런데 교만하여져서 자기 뜻대로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은 반역죄를 지은 것이지요. 구원의 역사를 요한 계시록까지 읽어보면 하느님은 애초에 우리를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 뜻을 가지셨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이웃에 대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바벨탑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어 인간의 힘을 과시하려고 자연 파괴를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기록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제 맘대로 하고자 한 죄, 이웃과 하나 된 삶의 관계를 파괴한 죄, 창조질서와 자연을 훼손한 죄의 원형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화해는 동전의 양면처럼 회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또, 화해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화해를 사랑의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나 할머니, 나를 보살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하루 종일 병아리처럼 계속 따라다니며 뭘 물어보기도 하고, 먹을 것 달라고 하던 기억이 나시죠? 사랑받는 것을 느끼고 그 사랑 응답으로 계속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 안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 되게 해주시므로,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어려운 처지이거나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 입장에 놓였을 때, 급한 대로 돈이나 권력, 지식에 집착하며 인간의 뜻으로 행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교육에 관한 태도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고
변명하면서, 힘 있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것은 형편 봐가면서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요? 마음의 갈등이 생기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 하는 것을 하느님께 구하는 것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열두 살 때 저 혼자 좋아하던 여자 아이가 있었죠. 처음 보았을 때, 초록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그 뒤부터 어쩐지 초록색이 좋더군요. 그 아이 주변의 물건이나 관계있는 모든 것이 좋아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대상뿐만 아니라 그 주변과 관계된 모든 걸 사랑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즉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듯 똑같이 이웃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차면 찰수록 하느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그 분과 일치되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하는 부모 마음이면 싸우던 형제자매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화해에는 용서다 따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성전에 갈 때, 이웃과 다툰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와 화해하고 나서 성전에 제물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화해하려면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용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적 이웃 사랑은 이해관계의 기대나 추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서 끝나버리거나 한계에 봉착합니다. 참된 이웃 사랑은 조건 없는 하나님 사랑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화해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민족화해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위로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며 주님의 평화로 지켜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남북이 625전쟁으로 서로에게 잔혹한 상처를 입힌 상태에서 화해하고 하나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풀어가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 분야에서 교류와 지원을 확대해 가면서, 서로를 믿을 수 있고, 민간 분야의 협력과 상호 왕래도 자유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화해의 시대에 어쩌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는 월남한 실향민들의 상한 감정을 이해하고 위로해주어 북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데 함께 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맺음말을 드립니다. 화해의 시작은 회개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회개는 하늘의 열쇠입니다. 또,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줍니다.

삶에서 진정한 회개를 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절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의인으로 자처하는 대신, 항상 시편51편의 운율과 정신으로 살 것입니다. 다윗처럼 죄를 각성하여 고백하며 매일 회개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러면 모래알처럼 많은 죄 어떻게 일일이 고백하고 전부 회개할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눈앞의 작은 일부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사람들 사이에 막혔던 언로가 트였듯이 그리스도의 자매 형제인 교우들과 먼저 터놓고,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애써 못 본 척 하지 않고 어색하더라도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네줍니다. 8억의 인류가 굶고 있다는데....식탁의 음식을 남겨서 버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마련한 사회정의와 통일을 위한 행사에도 잘 참여하고, 구역과 작은 공동체 활동 그리고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을 자주 갖고 적극 참석합니다. 일터와 삶터 주변에 봉사와 생명환경 활동의 場을 펼치고 계속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물질이나, 뭔가를 이웃에게 주려고 애씁니다. 줄 것이 바닥나도 줄 수 있습니다. 관심과 염려, 축복의 말, 그리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 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돌려주시고,
너그러운 영을 보내셔서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내가 주의 길을 가르칠 것이오니,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라고 찬양 노래를 부르면서 말입니다.







임 승 계 장로

제가 교우님들의 뜨거운 지지와 사랑으로 장로 임직을 받았으나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소중한 임기를 마쳤습니다. 목회에 적극 참여하고 교우님들, 특히 새 교우와 주변부에 머무는 교우님들과 어울려 동질성과 애정을 확인하면서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지난날이 후회스럽습니다.

“나는 나이여야 한다.”는 다소 경직된 자세로 살면서‘향린 화폭에 나는 어떤 장로로 그려질까?’하고 조바심하면서 소극적으로 살아온 것 같습니다. 장로 임기를 마치니까 경험에서 교훈을 배웠지만 이미 때가 차서 이 교훈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늦기 전에 이치를 깨달아 실천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족한 사람이 오늘 하늘 뜻 펴기를 하려고 하니 두려움이 앞설 뿐입니다. 저는 평소에 평신도가 펼치는 하늘 뜻 펴기를 들으면서 담당자가 너무 잘하고 또 잘하려고 젖 먹는 힘까지 쏟는 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담당자는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평신도가 목사님처럼 하늘 뜻 펴기를 잘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잘하면 좋지만, 어딘가 서툴고, 가끔은 실수도 하고, 떠듬떠듬 해야 듣는 사람들이 같이 채우고 다듬고 만들어 간다고 생각 합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어떤 화두를 가지고 서야할까?’하고 고민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소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향린공동체의 모습을 되새기고 성찰하면서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가자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향린의 분위기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습니까? 아니면 그저 그렇습니까?

향린교인 개개인은 향린교회의 모습을 보는 관점에서는 시각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향린교회는 작으나 큰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교회입니다. 모든 교인이 하나님 앞에서 비교적 평등한 교회입니다.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이 땅에 정의를 심어가는 교회입니다. 교인 간에 교회를 보는 시각차는 있지만 향린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에는 대개는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하기 위해서 모험을 걸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조직화 되고 교육을 받았지만 기회 있을 때마다 편안하게 안주하려 했고, 애굽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했고, 야훼와 지도자를 불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모진 시련과 길고도 힘든 수련 과정을 거쳐 가나안에 당도합니다.

여기서 안주한다는 것과 모험한다는 것 두 가지 측면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안주하는 것은 안전하고 평안하나 비교적 결과물이 적거나 없습니다. 기쁨과 신앙생활을 그것에만 의존할 때 평온함을 느끼나 오래 집착하면 영적 통찰력과 현실적 적응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모험은 위험하고 불안하나 많이 얻거나 많이 잃습니다. 아브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미지의 모험에 나서 별처럼 많은 믿음의 후손들을 두었습니다. 문제는 평온함에 젖어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새로운 생각을 담을 수 없고 비워지지 않아 결국은 흐르지 않는 물처럼 부패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단순한 생각과 의도를 변화로 착각합니다.

굳어진 생각은 아집과 독선이 될 수 있고 자신의 덫이 될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시중에 유통된 가짜 참기름을 진짜 참기름으로 알고 많은 사람이 속아서 사다 먹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건 후 순수 참기름과 가공된 가짜 참기름을 사람들에게 맛을 보게 하고 진짜 참기름을 선택하도록 했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가짜를 진짜 참기름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가짜 참기름의 맛에 길들여져 진짜로 인식된 것입니다. 사람은 왜곡된 인식의 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광야에서 안주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계속하여 희망을 심어주고, 때로는 채찍을 가하면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생활화 하고 쟁취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목표를 향해 광야에서 고난의 과정을 겼었던 것처럼 지금 향린 공동체도 시험을 받으면서 모험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척 힘들어하면서 머뭇거리고 쉴 그늘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54년이라는 긴 여정을 행군해왔으니 지칠 때도 됐습니다. 창립정신이라는 화두에 식상할 때도 됐습니다. 힘들면 햇빛을 피해 그늘에 앉아 피로도 풀고 담소하다가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달콤한 휴식에 취해 몸이 무거워 냉큼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런 때가 가장 무서운 시험으로 묘사됩니다. 힘들지만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하고 우리의 처지를 드러내시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도움으로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다시 모험의 길로 나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안일함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나갈 때 모험의 길로 나설 수 있습니다.

하긴 너무 빨리 가는 것도 무리를 주어 아주 못 가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경륜을 통하여 지혜를 얻은 선배 어르신 분들이 잠시 제지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우리 교회가 제지받아야 할 만큼 빠르게 나가본 적이 흔치않다고 봅니다.

어느 원로 장로님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를 보시곤,‘교회가 너무 빨리 가면 안 좋아. 임 장로가 잘해봐’하고 몇 차례 권면을 하시곤 했습니다. 사실 그때마다 제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제가 그런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셨는지, 아니면 저에게 가능성이 안보이셨는지 요즘은 그런 권면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를 염려하고 섬기시는 마음에서 저에게 권면을 하신 것입니다. 그분 장로님께 항상 빚진 마음입니다.

저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이 주는 안도감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사회를 새로운 빛으로 바라보고 들어가 거기서 머물면서 정의를 일구어내야 합니다.

그 길은 험난한 길입니다. 참 재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야만 할 길입니다. 주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선배님들이 갈고 닦아온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길은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고 위로하면서 가야 합니다. 함께 가지 않으면 가는 사람의 발걸음도 무겁고 남아있는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눈높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신앙관이 다르니 힘을 모으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타깝게도 목회정책과 선교의 방법과 속도를 두고 공동체간에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소통이 안 되어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손잡고 눈높이를 맞추어 살아도 뚝딱하면 한 세상인데 같은 교인 끼리 얼굴을 찡그리며 살아서 되겠습니까? 영성이 먼저냐 실천이 먼저냐를 두고도 티격태격 하곤 했습니다.‘누구는 영성은 괜찮은데 실천은 안하고, 누구는 실천은 잘하는데 영성이 모자란다.’는 말에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도 없을뿐더러, 실천 없는 영성이 참된 영성일리 없고, 영성 없는 실천이 바람직한 실천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가끔은 절제된 분노를 표출하곤 합니다. 예수님도 감정이 있어 눈물을 흘리시고, 성당에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사의 의자를 내동댕이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사이에 싸움을 피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화해를 위한 싸움이어야 합니다. 싸우다 그만 지쳐버려서 서로 바라보고 싱겁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싸움을 한 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문제는 싸워야 할 사람들이 싸우지도 않고 화해도 안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싸웠으니 이젠 싸움을 멈추고 서로 소통하고, 서로 이해하며, 눈높이를 맞추어 화해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물론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강을 따라 개구리 세 마리가 큰 나뭇잎 위에서 여행을 했습니다. 폭염에 지친 한 마리가 ‘너무 더워 도저히 못 견디겠다.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쳤습니다. 한동안 강물은 유유히 흘렀습니다. 지금 나뭇잎 위에는 개구리 몇 마리가 남아 있을까요? 누구 한분 맞춰보세요. 예, 맞습니다. 아직도 나뭇잎 위에는 세 마리가 그대로 있습니다. 큰 소리만 치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물속에서 혼자서 맞이할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말 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잠시 실천을 제대로 못하는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중앙위원자격으로 평통사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월례회와 시위현장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참여 횟수가 뱀 꼬리 가늘어 지듯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직장에서 아파트에 도착하여 차를 주차하고 시간에 쫓겨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지하철을 이용하여 마포에 있는 사무실에 갑니다. 그곳엔 그 방면에서 전문가들만 모입니다. 비전문가인 제가 발언할 기회도 또 그럴 필요성도 거의 없었습니다. 머리수라도 채워 운영위원회가 잘 돌아가고, 홍 근수 목사님과 강 정구 교우님을 뵈어 내공을 얻고, 광주나 안동에서 오신 위원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된다면 참여의 의미가 있을까하고 참여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랑이야기, 자식이야기, 복권이야기, 진학이야기, 먹는 이야기, 영화이야기 등등 참 즐겁게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지하철에 오르기 전 식당에서 위원들과 나눈 이야기는 미국 이야기, 북한 이야기, 황새울 이야기, 무기감축 이야기 등등 모두가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 치고는 너무나 대조가 됐습니다. 그 경중의 간극이 너무나 커 보였습니다. 저는 어느 한 쪽이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나에게 묻곤 했습니다. 나의 이야기만 해도 모자란 인생에 왜 나는 나의 이야기를 숨겨둔 채 남의 이야기만 듣고 말할까?

남에게 파이 한 조각씩을 나누어 주는 척 하다가 정작 자기 파이는 챙기지도 못하는 것 아닌가? 왜 남들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의 파이나 챙기면서 집 앞에 있는 교회에 나가 적당히 은혜 받고 축복받는 것을 마다하고 향린 교회에 다니는가? 향린교인이 또한 장로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있을까? 옳은 것들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씁쓸하게 씹어보곤 했습니다. 저는 자주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파트에 차를 주차하고 지하철로 향해야할 발걸음을 머쓱한 표정으로 무겁게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후 빠지는데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저희들이 사건의 현장에서 실천을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개성과 경험이 다른 개개인은 독특한 영성으로 배태되기 때문에 획일화된 선교정책에 모두가 동참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친교하고 봉사하면서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선교에 지지를 보내고 기도해준다면 사회선교에 참여한 것입니다. 입으로 밥을 먹어도 입이 밥을 먹었다고 하지 않고 내가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지체로서 한 지체가 일하면 모든 지체가 일을 한 것입니다. 각자가 받은 은사를 조화롭게 활용하여 다양한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는 사회를 향한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어가는 과정에 동참해야 합니다. 평화소모임도 개성 있는 영성들이 개발되는 작은 신앙공동체가 된 후 다시 교회공동체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향린공동체는 광야에 있습니다. 어차피 이곳은 편히 쉴 곳은 아닙니다. 오직 잠시 쉬어서 오수나 즐기고 또 다른 그곳을 향하여 가야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신앙공동체 안에서 함께 맛보는 감동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진심과 열정으로 바람을 일으켜 향린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