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생명평화묵상
시편 62:1-12; 마 5:1-16

이날 하늘뜻펴기는 25분 동안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음의 순서로 몇 가지의 종교적 상징물로 뜻을 전했다. (이 주일의 동영상은 이를 절반의 길이로 편집한 것이다.)

이날 침묵으로 진행된다고 하는 얘기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교인들은 내가 침묵을 깨고 어떤 말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도록 하여 침묵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시켰다.

밑에 첨가된 명상의 글은 본래 발표용은 아니었고, 나 자신이 주중에 묵상한 글이다. 단상에서 난 이 글들을 읽으면서 묵상했다. 교인들에게 이 묵상의 글을 미리 나눠주는 것은 각자에게 임하는 하느님의 뜻을 제한한다고 여겨 이제야 공개한다.

이후 교인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들었다. 나도 처음이었지만, 교인들도 처음 하는 침묵 하늘뜻펴기(설교)였다. 오래전부터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고 이를 인간의 글로 제한하고 이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음을 알았고 더구나 남한교회의 지나치게 설교 중심적인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보아왔다. 하여 침묵으로 설교하는 시도에 대해 여러 차례 고민하여 왔다.

그러던 차 아프칸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21명의 공포와 그 가족들의 울부짖는 기도 그리고 이미 살해당한 두 분의 생명의 고귀함과 그 가족들의 고통을 글로 말로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 침묵 하늘뜻펴기를 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발상에서 나온 우연한 시도가 아니었고 오랫동안 고민하여 오던 새로운 하늘뜻펴기 형식을 향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날의 상징물들과 순서:

(제단 중앙에는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테이블이 있고 이 위 오른쪽으로는 십 여 개의 초가 촛대에 미리 꽂아져 있다.)

1. 이중 가운데 있는 두 개의 초에 불을 붙인다.
2. 이 두 개의 초에 검은 리본을 건다.
3. 초 중앙에 기도하는 손(나무 조각)을 놓는다.
4. 예수님의 광야 묵상 그림을 오른쪽 옆에 세워 놓는다.
5. 초들 왼쪽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나무 조각상을 올려 놓는다.
6. ‘사랑’이라고 새겨진 제단용 자그마한 스톨을 이 조각상 앞에 붙인다.
7.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조각상을 놓는다.
8. ‘화평’이라고 새겨진 제단용 스톨을 앞에 부친다.
9. 부활의 예수 십자가 조각상을 놓는다.
10. 네 개의 손이 펼쳐진 나무 조각상을 놓는다.
11. 네개의 손에 '기독교인' '이스람인' '불교인' '유대인' 이란 작은 표를 달았다.
12. 그 위에 지구의를 놓는다.
13. 그 옆에 있는 한 개의 초에 불을 켠다.

-묵상의 단편들-

[고요함의 지혜]

밖이 소란함은 안이 소란한 것이요, 밖이 고요함은 안이 고요한 것이다.

왜 이렇게 세상은 소란하며 그에 따라 나의 마음 함께 춤추는 것은 어쩜인가? 마음이 고요해야 주위의 고요함을 알 수 있다. 깊은 바다 속은 세찬 바람에도 결코 흔들림이 없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존재하는 고요함을 주시하라. 숨은 쉼이다. 나의 쉼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쉼 또한 주시하라.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많은 지식일까? 남보다 먼저 아는 빠른 정보일까? 좀 더 과학적인 분석인가? 아니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지혜일까?

생각 속에 길을 잃다. 현대인의 병이자 나의 중병.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생각들은 모두 ‘내가 중요해!’ 라고 말한다. 비판과 이성의 이름을 들먹이지만 ‘나’로 인해 내 마음은 가득 차 있다. 생각의 부자! 생각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라.

마음의 가난함은 생각을 덜어냄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무지가 아닌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곧 분리가 없는 상태이다.

근원적 어리석은 무엇인가? ‘나 = 생각’ 이라는 믿음이다. 근원적 나와 나의 생각을 구별할 줄 알게 될 때 진정한 깨달음이 온다. 佛家에서 화두를 깨친다는 말과 상통한다.

[슬퍼하는 사람들]

우리는 보통 나 개인과 내 가족들의 문제로 인하여 걱정하고 슬퍼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슬퍼하는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하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슬픔 그 자체가 행복일 수는 없다. 오늘 슬퍼하는 자가 동시에 행복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는 미래적 행복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는 단순한 위로인가? 종교적 아편에 불과한가?

이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야훼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시다. 이 자비는 함께 아파하시는 자궁 속의 태아와 하나 된 생명의 창조주로서의 자비이다.

이 하느님의 아픔을 이해할 때 자기에게 임하는 미래의 행복은 오늘 나에게 온다. 행복이 순간순간 달라지는 현실적 욕구 충족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신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타인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은 상대방이 달라고 할 때 순순히 내어준다. 그 물건들에 함께 매여 있는 속세적인 자기를 함께 내어줌으로 ‘순수 자기’ 혹은 ‘내면적 자기’를 찾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는 겉을 털어내는 裸木(나목)이 될 때 비로소 我無(나-무)가 된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무엇이 옳은 일일까? 신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다 옳은 일이고 사람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인가? 오지에 봉사하는 일은 옳은 일이고, 휴가를 즐기는 일은 옳지 않은 일인가?

‘나는 안다’고 생각하는 일이 오히려 옳고 그름을 분간치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옳고 그름이 보이지 않을까? 왜 ‘나는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할까? 에덴동산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기 위하여 그 열매를 따 먹는 순간이 바로 인간 죄의 시작, 모름의 시작임을 알린다.

옳은 일을 행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으로 채워 진 마음이 진정 행복한 마음이 아닐까? 일이란 행하고 나면 언제나 자기 후회도 생기고 ‘왜 그렇게 했냐며?’ 핀잔하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마련이니까?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다. 비가 올 때 우산을 받혀주기보다는 자기 우산을 접고 함께 비를 맞아주는 마음이다. 아니면 차라리 우산을 주고 그 자리를 떠나든가.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생각을 품고 그 사람들의 풍속을 나의 것으로 삼고 그냥 하나가 되는 마음이다. 하느님이 예수가 되고자 하실 때에 그 무엇 하나 신적인 것을 소유하였던가?

병 고침의 능력 그건 예수만이 한 능력은 아니었다. 제자들도 함께 한 능력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었다면 예수의 눈에는 십자가만이 있었고, 제자들에게는 영광만이 있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깨끗함이란 아무 더러움도 흔적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위기의 순간. 낭떠러지에서 발이 비끗하는 순간. 눈길의 개를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자동차가 미끄러질 때, 우리는 생각을 잃는다. 그때가 바로 내 마음이 가장 깨끗한 순간이다. 순간순간을 종말적으로 살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은 항상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행복이란 별게 아니지. 버리면 되니까. 떠오를 때마다 버리면 되니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평화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평화는 철저히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나의 필요가 아닌 상대방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철저히 인간의 편에 서시었고 그것도 예루살렘 귀족이 아닌 갈릴래아 민중의 입장에 서신 것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문화권에 들어갈 때는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는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 품목에는 쌀도 있고 의약품도 있고 옷가지도 있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나라 안에는 통 털어서 불과 몇 대밖에 없다는 최고급 관광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나? 그리고 여성 모두가 얼굴과 발을 가린 채 조용조용 움직이는 재래시장에서 어깨 팔다리 드러내는 차림으로 나타나 아이스콘을 들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 것은 웬 마음인가? 봉사는 섬김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물건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종교를 존중하는 섬김이다.

남북 나눔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과거가 나의 과거이고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며 그들의 의식수준이 나의 의식수준이라면 나도 꼭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여기서 참 평화가 온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낮아져야 한다. 못 배운 사람보다 낮아져야 하고 없는 사람보다 더 낮아져야 한다. 스승 예수께서 구유에 나셨으니 우리는 그 보다 천한 곳 쓰레기더미에서 나야 한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런데 옳은 일이란 과연 어떤 일일까? 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은 모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그래서 들어보니 두 사람 다 옳은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들도 신앙의 박해를 받는다고 하는데...

개인에 대한 소득세도 종교 박해라고 말하는 목사도 있다고 하니 원 참...

종교적 확신과 자기 신념으로 본다면 예수도 옳았고 바리새인도 옳지 않았을까?

일로 따지면 서로가 다 옳을 수밖에 없다. 전쟁터에 나서는 양쪽병사들의 호주머니 속에는 같은 성서가 들어 있지 않은가?

먼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도 옳았고 바리새인도 옳았지만, 주림과 목마름의 대상은 달랐다. 예수는 억압의 체제 속에 살아 온 갈릴래아 민중의 자유를 위해 일했고 바리새인들은 신의 이름으로 내려온 종교적 전통의 고수를 위해 일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서로가 상충할 때 누가 더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 판단의 기준은 민중의 삶이다.

[생명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

자기 생명의 고귀함을 정녕 알았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 또한 고귀함을 알았으리라.

부디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들이 되기를 ...

그래서 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기를 ...

모든 사고와 재난에는 늘 구원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보낼 따름이다.

씨앗은 땅에 묻히는 어둠의 세월과 썩어져 주위와 하나 되는 죽음의 고통과 껍질을 깨고나오는 생명의 아픔을 통해 수많은 분신들을 자기 몸에 주렁주렁 매단다.

평화는 대립을 넘어서는 것. 너와 나의 다름 곧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것. 그래서 하나 되는 것. 인간도 하나 되고 민족도 하나 되고 나라도 하나 되고 세계도 하나 되고 그리고

....

방글라데시에는 장마 비가 넘쳐 천명이상이 죽고 천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생겼다고 하는데 ...

아프칸에 인질로 잡혀 있는 우리 형제자매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방글라데쉬의 이재민과 에이즈 환자로 태어나 고통 속에 죽어가는 보스니아의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 모두 하나의 촛불이 되어 참 생명으로 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