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가능성이다


창 28, 10 - 19 ; 요한복음 15, 15 - 17


나 성 국 목사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별설교라고 하니까 마음이 무겁습니다. 작별은 그것을 듣는 사람보다 고(告)하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아프고 무겁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불현듯,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강단에 설 기회가 많지 않아서 이 가운데는 제 설교를 처음 듣는 새교우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향린으로 오기 전에 최영선 권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향린』지 편집위원인데, 나목사가 부임하기 전에 향린으로 오는 뜻과 이유가 무엇인지 원고를 부탁한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향린지 편집위원이라고 해서 “웬 젊은 분이 권사가 빨리도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와서 직접 뵙고 보니, 젊기는 한데 나이는 많으셨습니다. 그 때 향린지의 부탁을 받아서 썼던 글을 며칠 전에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과연 내가 처음 올 때의 생각처럼 3년을 보냈나? 처음 했던 생각과 달라진 것은 없었나? 하는 생각으로 글을 다시 보았습니다. 다음은 2004년 향린지 가을호에 “향린의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묶인 저의 글입니다.

[나는 왜 향린으로 가려는가?]

누가 저더러 당신 왜 향린교회로 가려는가? 묻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라고 대답합니다. <진정이냐!>고 되묻습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어느 때나 삶의 위협을 예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정성을 묻는 것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그렇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목회지를 옮긴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사실로 말하면, 나는 목회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고 다짐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 보기 위하여 가는 것이라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미래를 정직하게 열어놓는 친구들한테 가는 것입니다. 제 아버지도 목사이시지만 저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이 달갑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래도 저는 그의 <종>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저는 영원히 주눅 든 목사로 살아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종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친구>로 부르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공동번역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15:15, 표준새번역)

나를 친구로 부르신 예수, 저는 그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끝없는 쥐구멍찾기일 테지만, 그래서 앞으로도 사양하고 싶지만, 예수님의 <친구로 살아가기>는 끝없는 자유와 상상력의 해방을 일으킵니다. 얼마나 <거룩한 전복>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죄인의 친구로 살다니! 친구가 무엇입니까? <야, 자>트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과 야, 자 트며 살다 가셨습니다. 그렇게도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엡2:14) 이런 생각에 저는 친구들이 불러 밖으로 나가려고 안달이 난 아이처럼, 하느님과 향린 친구님들의 부르심에 안달이 나 있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불러 친구의 사랑을 나누는 곳, 그것이 교회의 코이노니아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팍스’라는 이름으로 침략이 자행됩니다. 나의 ‘샬롬’은 사물화(私物化)된 영혼구원으로 물러나버렸고, 교회의 ‘샬롬’은 교회 밖의 ‘팍스’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 <예수님의 친구로 자유하게 살기>는 동시에 모든 원수 되게 하는 것들과 <투쟁하며 살기>입니다. 우리를 친구 되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 함께 피리 불며 함께 춤추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 바로 그런 것들과 싸우며 살기가 신앙의 한 축입니다. 하기야 우리는 <서로 원수로 살기>로 작정하고 남북 간에, 동서 간에 눈을 부라리고 사는데, 여기에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평화가 깃들겠습니까?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엡6:12)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울로 사도가 말한바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이란 세상의 지배자들과 탐욕의 자본이 그 이익을 위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공포와 증오와 적대감과 경쟁,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하느님의 형상인 우리들의 참사람됨을 가로막는 사랑의 원수들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원수 되는 것들과 투쟁하며 살기>는 자본주의형 인간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내일 일에 대한 걱정”은 하느님께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내게 이런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향린은 기독교 평화통일개혁 세력의 최전선입니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제 아무리 크다 한들 그 영향력은 교회 문 밖을 벗어나는 순간 사라집니다. 자기번식과 성장 외에는 역사적 의미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향린은 비록 소(小)하지만 역사적 의의에 있어서 강(强)합니다. 한국사에 남을 교회를 꼽으라면 그것은 대형교회가 아니라 향린교회일 것입니다. 향린이 구현하고 있는 신학(神學), 향린이 실천하고 있는 운동은 우리 사회와 민족의 운명과 직결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향린의 신앙 활동이 활발하면 활발할수록 그만큼 우리 사회는 더 건강하고 정의로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더 큰 열정과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전도와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복제와 번식에 여념이 없는 교회들이 부채질해대는‘뜨거움’이 아니라 진정, 사람과 삶에 대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추구에서 나오는‘진짜 열정’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공동체의 은혜를 충분히 누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한반도의 진보와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모색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향린에서만 누릴 수 있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런 뜻있는 교회에 몸담고 싶은 훌륭한 자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건강한 진보를 담보해 낼 수 있는 뜨거운 영혼들이 향린을 통해 새로운 도전과 신앙의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축복이 그리워 향린으로 갑니다.】

저는 이 글을 다시 꺼내 읽으며 저의 처음 판단과 다짐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의 다짐대로 향린에서 <예수 안에서 함께 친구 되어 자유하기>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향린은 혼인잔칫집처럼 새신랑과 새색시를 만나는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첫날밤을 지내는 신혼들처럼 서로의 영혼이 아무런 가식이 없이 만나는 정직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향린이 친구 되기를 위하여 손을 내밀 때, 누가 가장 뜨겁게 그 손을 잡았습니까?

마태오복음 22장 4절의 비유를 보면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칫상도 차려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을 갈러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정작 그 잔칫집을 가득 채운 것은 가난한 사람과 불구자와 소경과 절름발이였다고 성서는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오늘의 한국사회도 정작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밭을 사러 가고 장사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의 공백을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잔칫집의 주인공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한국사회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한국사회가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과 더불어 친구 되기를 원하고, 그 분들의 손을 친구의 손으로 굳게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허다한 부자 교회들과 번듯한 건물들을 뒤로 하고, 광화문의 거리에서, 여의도의 거리에서, 그리고 평택 대추리의 들판에서 평화를 외치고, 정의를 외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거리의 영성”이라고 이름붙이고 싶습니다. 그 영성은 사위가 다 조용한 산사나 신비가의 명상에서 나온 영성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현장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영성,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는 이 길 위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길 위에서 나온 종교입니다. 성서의 원초적 신앙은 성전이나 신비가들의 명상 속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에서, 길 위에서, 역사의 현장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른 종교가 번뇌와 고통이라는 내면적인 요구에서 시작했다면, 기독교 신앙은 전혀 다른 바깥 세계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신비한 힘이 광야에 있는 한 인간에게 덮쳐옴으로써 구약의 역사는 시작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본문에서 야곱이 밤을 지낸 광야는 삶의 한 복판입니다. 쫓는 자도 없이 쫓기는 불안의 시간입니다. 야곱은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아버지를 속였지만, 당도한 것은 광야였습니다.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곳”입니다. 명칭을 붙일 수 없는 땅입니다. 좌표를 잃어버린 곳입니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방향없음’에 이르렀습니다. 그저 “한 곳”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떻습니까? 길을 잘 못 찾고 헤매는 사람들을 우리는 “길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역사의 방향에 대한 길치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70년대, 80년대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는 사람이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고, 이미 지나왔어야 하는 길을 지나지 않고 구시대의 악법을 그래도 놔두고 있습니다. 역사의 길치들이 많은 사람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오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길치”와 대비시켜 “역사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때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창28:12)” 꿈을 꾸었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어머니의 품에서가 아니라 광야의 바람 속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시(詩)대로 꿈은 “꿈이 아니고선 되는 법이 없을 때” 얼어붙은 저 하늘을 깨고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이 광야의 막다른 곳을 열어젖히는 꿈! 하늘로 오르는 층계를 보는 꿈! 그것이 야곱이 꾼 꿈이었습니다.

저는 묻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 향린교회는 민중들을 위해 이러한 꿈을 꾸고 있습니까? 역사의 길치들이 민중들의 삶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을 때, FTA로 내몰고,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환경착취로 내몰고 있을 때, 삶이 휑한 광야같이 돌베게를 베고 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향린은 이 역사를 위하여,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그것은 길이 아니다! 그것은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 아니다! 라고, 그래서 저 위로 나있는 하느님 나라의 층계를 보여주는 꿈, 바로 그런 꿈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향린은 바로 이런 하느님 나라의 꿈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이제 교회와 신학이 그런 대안적인 비전을 만들어 내기에는 사회가 너무 전문화되었다고, 복잡해졌다고, 맞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기독교가 예전처럼 노동운동이나 통일운동에 앞장 설 수 없습니다. 전문적인 지식도 부족하고, 조직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신학이 영원히 포기할 수 없고, 또 교회와 신학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은, 가치에 대한 꿈입니다. 방향에 대한 통찰입니다. 저는 향린이 이런 꿈과 통찰의 샘물이 되어서 방향을 잃고 고뇌하는 많은 청년들과 이 시대의 민중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열심히 성서를 읽고 공부하며, 서로의 전문적 지식을 나누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십니다.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13절) 장차 이 뒤로 야곱의 이름이 붙어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불릴 그 하느님의 현현이었습니다. 그의 하느님이 나의 하느님이 되고, 그이 역사가 나의 역사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역사는 계승되며,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통해 이루어졌던 하느님의 역사가 이제 야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이어받는 정신은 장남인 에서의 경우에서 보듯, 서열이나 연륜이나 먼저옴이나 나중옴이 아닙니다. 그 정신을 자기 것으로 하며, 그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이 순간 여러분을 통해 현현해 오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느끼십니까? 이 순간 나 자신의 열정과 결단을 통해 이루어 가실 교회의 미래와 하느님의 나라를 보십니까?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복음교회의 최태용목사는 신앙은 무용무용(無勇無用)이라고 했습니다. 용기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존재의 용기이고, 창조의 용기이고, 시도함의 용기입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문이로구나."(16-17절)

그에게는 드디어 “길없음”이 끝났습니다. 거기가 바로 새 길이 되어 야곱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길은 끝나고 하느님이 집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제국주의의 길이고, 상품의 길입니다. 그런 길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의 길은 하느님의 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집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문이로구나!” 하는 이 멋진 감탄사가 우리 공동체에서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그의 삶의 가능성을 다 하였습니다. 선과 악에서 그는 모든 가능성을 하느님 앞에서 경주했습니다. 오늘 제가 설교 제목으로 잡은 “너는 가능성이다” 라는 제목은 안병무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낸 책의 제목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혹시 표절할까봐 박영숙 선생님께 제목으로 사용해도 좋은지 간접적으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1996년 안병무 선생의 마지막 산문집입니다. 말년의 노학자가 그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젊은 세대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정언명령은 “너는 가능성이다!” 였습니다. 그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사람의 삶의 행로는 나선형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그것도 일정한 구간을 가다가 어떤 '난관'을 만나게 되면 더 진전하지 않고 그 구간에서 빙빙 돌 듯 머뭇거린다. 그러므로 그 구간이 한 마당이 된다. 그런데 그 마당에서 그 삶이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다음 마당을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새 마당을 열려면 지금의 마당을 끝내야 하는데 그게 겁날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마당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습성의 노예가 되어 점점 고착화되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그 구간의 금을 차고 넘어서면 한동안은 여름날 곡식 자라듯 진전한다. 그럴 때의 삶은 보람차게 느껴지며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 또 다음 막을 열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곤충이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듯, 나무에 해마다의 연륜이 또렷하듯 내 삶을 점철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가능성이다!”

이 멋진 선각자의 금언(金言)처럼 우리 모두는 가능성입니다. 역사의 새 마당을 열어갈 하느님의 가능성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떠남의 인사로 게시판에도 썼습니다만, 제가 교우 여러분들께 드리는 마지막 향린찬가입니다.

향린은 무지개였습니다.
형형색색 다양한 개성과 빛깔이었지만,
예수와 역사 앞에 서면, 우리는 하나였습니다.
자기를 잃지 않은 우리였습니다.
나지만 우리이고 우리지만 나였습니다.
말 그대로 향기로운 이웃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역사의 짐 앞에
우리는 작은 어깨들을 함께 기대었습니다.

자신 역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건만,
소리 높여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은 짐짓 모른 체,
향린의 교우들은 모두 정신의 작은 영웅들이었습니다.

남들처럼 교회가 축복의 통로이기를 바라는 마음
없지는 않았지만, 향린은 그렇게 예수를 가둬놓지 않았습니다.

향린은 길이었습니다. 나에게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이 자유와 평등과 자기다움을 삶의 목적에서 지우려 할 때,
향린은 자유를 재촉했습니다. 자기다움을 촉구했습니다.
진정 영혼을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향린은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향린의 권사님들,
그 세련되심과 투정과 농담의 한없는 매력이라니!
그 눈빛들 속에 계신 삶의 깊이로 저를 환송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향린의 어르신들은 늙는다는 것이 멋이고,
삶의 수확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영원한 청년성은 어디서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향린은 삶의 가능성입니다. 인격의 거듭남과 새로운 만남과
삶의 갱신을 요구하는 힘찬 가능성입니다.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이 생(生)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지, 결단하여 보라 촉구합니다.

자유와 성령으로 펄럭이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봅니다.
예수님의 웃으심, 예수님의 함께가심, 예수님의 사랑하심이
오늘 제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파 송 사 -

불을 끄고 별을 켜십시오.
그대의 어둠은 별을 켜기 위한
하느님의 장치입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두려워 말고 평안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가능성이고
삶은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