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9일
- 오키나와 평화기행 보고 -
함께 하는 제자의 길
레위기 19, 13-28 ; 루가복음 14, 25-27

김 지 수 집사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을까?

저는 오늘 오끼나와에서 만난 저의 새로운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향린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오끼나와에 평화기행을 가기 전까지, 저는 오끼나와가 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상당히 먼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오끼나와에 미군 기지가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름다운 바다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기대를 가지고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공항에서 나와 이어진 첫날의 빡빡한 일정은 우리가 관광을 온 것이 아니라 평화기행을 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주변에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과 오키나와의 새로운 음식들은 그런 힘든 일정을 즐겁게 감수할 수 있게 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첫날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를 맞이해준 오끼나와 기독인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었을 뿐 아니라, 과도하다싶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점심식사 후 우리가 방문했던 곳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사망한 이들과 관계된 장소들인 히메유리 자료관, 아부찌라 가마, 한국인위령탑과 평화의 초석 등 이었는데, 우리를 안내해준 분은 이동 중에 버스에서도 오끼나와의 역사와 방문하는 장소들과 관계된 것들을 계속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끼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은 6만명이 죽었는데, 오끼나와 주민은 12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오끼나와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로 없었던 저에게는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하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지만, 그 많은 내용을 다 소화해내기에는 벅찰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첫날의 낮일정이 끝나고 숙소였던 기노완센터에 들어와서 저녁식사를 한 후에는 ‘오키나와 교회의 역사와 현황’이라는 제목으로 니시하라 교회의 우후쿠즈쿠 미노루 목사님이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이분은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 발음인 오오시루라고 하지 않고 우후쿠즈쿠라고 소개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오끼나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2005년 류큐 대학 조사팀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중 40.6%는 자신들이 오키나와인이며 일본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답했고, 21%만 그들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36%는 일본인과 오키나와인 양 쪽 모두 다 해당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즉 오끼나와인들의 다수가 일본인들과 자신들은 다른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24.9%는 오키나와인들의 류큐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합니다.

옆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오끼나와는 일본 본토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고, 오끼나와의 옛 왕국인 류큐국은 타이완이나 중국과 더 가까이 지낸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류큐국을 병합하면서 새롭게 지어준 이름인 오끼나와는 한자로 충승(沖繩) 즉, 화할충 줄승 자를 써서 일본 본토에 이어진 하나의 줄에 류큐제도가 들어가 있음을 강조한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노루 목사님은 오끼나와의 역사와 함께한 오끼나와 교회의 형성과정 그리고 그들이 가진 고민들에 대해서 심도 있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이 강연은 저녁 7시 40분에 시작해서 한 시간 정도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예정 시간을 넘겨 두 시간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게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끼나와에서 제가 만난 분들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힘든 것을 마다하지도 않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둘째날 일정이 계속되면서 저는 제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의 해답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둘째날에는 오끼나와에 있는 대표적인 미군기지인 후텐마 해병항공대 기지와 카데나 공군기지를 둘러보고, 후텐마 기지의 이전을 둘러싸고 주민들과 일본정부가 대립하고 있는 헤노코 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옆에 보시는 항공사진에 나오는 후텐마 기지는 우리가 묵었던 기노완시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거주지와 너무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서 럼스펠드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항공기지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오끼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1972년부터 2005년까지 미군의 비행기나 헬기의 추락 및 낙하 사고는 모두 41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저녁에는 일본그리스도교단 오끼나와지구의 분들과 교류회가 있었습니다.교류회가 끝난 후에도 오끼나와 지역의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을 계속 가졌는데, 우후자또 교회의 타이라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에서 저는 제 의문점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타이라 목사님은 자신이 헤노코의 미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나서게 된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부친이 베트남에 갔었던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타이라 목사님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저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저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베트남에서 시작할까하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타이라 목사님의 부친은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구호물자를 가지고 베트남을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호물자를 가지고 간 타이라 목사님의 부친에게 베트남 사람들이 한 이야기는 구호물자를 가져다주어서 고맙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를 도와주려면 오끼나와의 미군기지에서 베트남으로 폭격하러 오는 비행기들을 막아달라고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타이라 목사님은 오끼나와의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운동이 오끼나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 속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타이라 목사님의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오끼나와가 남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남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곳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후텐마 기지와 카데나 기지는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전체를 폭격했던 전폭기들이 발진했던 기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6년 미군 작성한 후텐마기지 사용계획에는 한반도에서 분쟁 발생 시 후텐마 기지에서만도 하루에 최대 300대의 전투기와 수송헬기, 공중급유기 등이 작전을 수행하여 한반도에 미 해병대를 투입하고 한반도 전역을 폭격할 계획이 세워져 있습니다. 즉 오끼나와 기노완 시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면서, 기노완 시민들을 항공기 소음과 추락의 위협 등으로 괴롭히고 있는 후텐마 기지는 우리 한반도와도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끼나와의 분들은 이런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우리를 멀리서 관광 온 사람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눌 이웃이자 예수님의 제자로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날 주일에 저는 기노완센터 내에 있는 시마시 전도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토시 목사님이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는데, 성서본문은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하신 부분이었습니다. 설교에서 사토시 목사님은 옆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웃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셨는데, 이웃은 옆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도와주는 사람이야 말로 참 이웃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저는 사실 오끼나와 평화기행을 떠나기 전에는 오끼나와 사람들을 저의 이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를 맞아주신 분들은 우리를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역사를 조사해 보니, 과거 류큐국은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류큐국의 수도 나하의 슈리성 근처에서는 고려인들이 만든 것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기와가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도 교류가 있었음이 드러났고, 조선과는 사신을 주고받으며 조공무역을 하는 관계였는데, 표류한 어민들을 서로 보호주고, 고향에 돌아가게 해준 사례들이 조선왕조실록에만도 수십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사이좋은 이웃국가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부터 군량미 징납을 강요당했던 류큐국은 그에 대해 소극적으로 협조하는 입장이었고, 명나라에게 일본의 침략을 알려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와 그들의 역사가 많이 얽혀 있고 비슷한 점도 많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 고통을 겪기도 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류큐국이 완전히 없어지고 오끼나와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편입되어 일본의 내지 식민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태평양 전쟁 때에는 우리 동족들이 군인으로, 노역자로, 위안부로 오끼나와에서 고생을 하기도 했었고, 한국전쟁 때의 연관은 앞에서도 이야기 드린바와 같이 밀접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과 상황 속에서 오끼나와와 한반도는 이웃이었고,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둘 다 약소민족으로서의 서러움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기에 이웃으로서 서로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에는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이웃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결론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끼나와에 계신 분들을 제 이웃으로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오끼나와를 다녀온 이후에는 우리를 이웃으로 대해주시는 그곳 분들에게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면, 좀 더 밝은 서로의 미래를 만드는데 약간이나마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고민에 향린교우들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제자의 길을 가려면

정 다 미 교우

너무 긴장되는 자리이지만, 이 떨림의 시간들이 제 기억에서 오래오래 남아 저를 계속 채찍질 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오끼나와를 가기 전엔 그저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시리라, 누군가가 내 삶을 뒤흔들지 못하게 막으면서 사는게 평화라고, 그게 내 삶이 평화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 두려워 외면만 해왔습니다. 내 삶에서 제자의 길을 가기엔 너무 버겁다며 애써 외면하며 그저 숨어만 있었던 저에게 오끼나와는 저를 복잡한 일상에서 탈출시켜줄 여행지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끼나와에 도착한 후 평소엔 이야기도 나눠보지 못했던 교우분들과의 낮선 시간들이 점점 익숙한 시간들로 변해가고,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들이, 지금도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헤노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가슴속에 숨겨오던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던 중 우후자또 교회를 방문한 후부터 마음에 큰 파도가 일었습니다. 제가 가게 된 우후자또 교회는 사시끼 교회에서 50명이 되면 분가하자고 하였으나, 이미 40명이 되자 분가한 교회로, 헤노코마을의 미군해상기지 저지투쟁에 앞장서 계신 타이라 나쯔메 목사님께서 계신 교회였습니다. 작고 예쁜 가정집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분가할 지역을 찾다 교회가 없던 이 지역에 세우기로 하고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던 중, 이 지역에 교회가 생기기를 오랫동안 기도해온 집 주인이자, 장로님인 분이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기꺼이 대여를 해주셨다고 합니다.

작년 임보라 목사님께서 하늘뜻펴기에서 말씀하셨지만 타이라 목사님께서는 길고 긴 미군기지 저지 투쟁 속에서 스킨스쿠버, 구조, 수영 등의 여러 자격증을 따시고, 노아라고 이름 붙인 큰 차에 가득 장비를 싣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바다로 향하신다고 합니다. 수영을 전혀 못하던 교인들 또한 투쟁 과정 속에서 8명가량이 스킨스쿠버 자격증 등 각종 자격증을 땄다고 합니다.

그날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10명 남짓의 인원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인상 깊었던 것은 타이라 목사님이 어린이들을 위한 설교를 해주신 후, 한 아이, 한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도를 해주시던 모습입니다. 자그마한 아이들은 익숙하게 목사님 곁으로 가 축도를 받았고, 그 축도가 끝나니 어른들을 위한 설교를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예배 후에는 교인분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들의 모습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나아가는 것이란 무엇인지, 그 분들은 작은 실천에서부터 보여주고 계시다는 생각에 십자가를 벗으려는 제 모습이 겹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참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최근에 목사님께서는 깊은 바다 속에서 저지투쟁을 하던 중 저지투쟁을 막으러 바다에 들어온 이들이 산소통과 연결된 호스를 잠궈 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수면으로 오르시다 폐에 출혈이 생기는, 목숨을 잃으실 뻔한 큰 일도 당하시기도 하고, 계속되는 미행 등으로 8개월 된 예쁜 아기와 사모님은 다른 곳에 피신해 계신 상황이라고 합니다.

예배 후 이런 저런 이야기와 함께 저희를 또 데려다 주신 사키마 미술관은 사키마 선생이 미군기지안에 속한 가족묘를 미군에게 되찾게 해달라고 요구를 하셔서 반환된 땅에 세우신 미술관으로, 이미 타계하신 마루끼 부부가 오키나와 전쟁의 아픔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림을 관람 후에는 기지가 한눈에 보이는 옥상에서 마음을 정돈할 수 있는 곳까지 마련해 둔 곳입니다. 거기서 내려다본 미군기지는 참으로 고요했고, 거기에서 바라본 목사님의 얼굴엔 확신이 차있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대단하세요, 두렵지 않으세요?" 라고 여쭤보았을 때 목사님은 그러시더군요. "자신도 두렵다고…… 무섭다고…… 그런데 이것만큼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모든 것을 내어두고 실천으로서 평화를 만들어 가시는 목사님을 보면서 문득 얼마 전의 제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제가 오끼나와에 가기 얼마 전 보던 TV프로에선 자기가 가진 것을 한 켠에 미뤄두고 더 힘든 이들을 위해 봉사를 하는 이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삶이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가진 것이 너무 없고, 작아서 누구에게도 베풀 수 없을 것 같던 제 소유물들이 내놓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어찌나 크고 많던지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구나 하는 답답함에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었습니다.

그런데 TV를 보며 들던 부끄러운 감정이 타이라 목사님께 들켜버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선뜻 저희도 함께 그 길을 가겠노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 모습에, 또 확신에 찬 목사님의 모습에 눈물만 흘렸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어서 한국의 미군기지 상황을 궁금해 하시며 제주도의 상황은 어떠하냐고 물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바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

저는 그 말씀에 머리를 큰 망치로 맞은 듯한 얼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생각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목사님께서는 저희를 숙소에 내려주시고 급히 또 가셨습니다. 가시는 뒷모습 또한 어찌나 확신에 차있으시던지, 저의 그 복잡한 감정들을 얼굴에 들어낼 수 가 없었습니다. 타이라 목사님과의 만남은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모든 나의 고민들이 해결되리라, 주님이 다 알아서 주시리라 생각했던 저에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는데,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라 하셨는데, 나는 가진 것을 버리고 제자의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나, 나는 그 길을 떠날 용기는 없이 바램만 가지고 살지 않았나 다시 한번 돌아보며, 오끼나와에서 만난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잊지 않고, 이제는 제 삶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 주저하지 않는 것, 이 외에도 수많은 다짐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말씀 속에서 나아가야겠지요.

아직도 저는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조금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시간이 앞으로의 주님을 따라갈 긴 여정에 힘찬 발걸음이 되기를, 그리고 오늘의 주님의 말씀이 긴 여정 속에서 저를 돌아보게 하는 채찍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의 그 길에 향린의 가족들께서 큰 힘이 되어주시리라 믿고 오늘 저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