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6일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
신명기 30:19-20, 요한복음 1:4, 고린도전서 15:45

[총회를 참석하고]

향린교회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 92회 총회가 지난 주 경주에서 4일 동안 모였는데, 전국여신도회 회장으로 봉사하시는 이병희장로와 함께 서울노회를 대표하여 참석했습니다. 미국장로교 총회에 총대로 2번을 참석한 경험이 있지만, 기장 총회에는 처음 참석하였습니다. 저는 작년에 기장 총회를 대표하여 미국장로교 총회에 초청해외 총대로 참석하고 조직이나 제도에서 미국장로교단에서 배울 만한 부분을 정리하여 총회 회보에 발표한 적이 있지만, 이번 기장 총회에 참석하면서 보다 많은 차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회의 진행입니다. 미국 총회는 매우 매끄럽게 진행이 되는 반면 저희는 그러지 못한 점입니다. 국회를 보더라도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가졌지만, 아직 여러 가지 점에서 미숙한 점이 드러나듯이 교단의 총회 또한 그러했습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법규가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회의 진행은 약간의 관행만 바꾸면 보다 원활하게 회의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어떤 습관이나 선입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바꾸기 힘들 듯이 수 십 년에 걸쳐 굳어진 총회의 관행을 바꾼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보면 미국장로교 총회는 비용절감을 위해 1년마다 모이던 총회를 2년마다 한번 모이고 있지만 기장 총회는 매년 보이고 있으며 참석 인원에 있어서도 미국장로교 총회는 2백만이 넘는 교인에 총대 수는 약 500명 정도이지만, 기장 총회는 교인 수에 있어서는 그 10분지 일인 20만정도이지만, 총대 수는 오히려 이보다 많은 700명을 넘고 있습니다. 그래 미국 장로교인들은 장로나 목사로 평생 교회를 섬겨도 총회 총대로 가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 총대가 되는 일을 개인의 큰 명예로 생각합니다만, 우리는 대여섯 번은 보통이고 열 번 이상 참석하는 분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총대숫자를 대폭 줄이자는 제안도 했었지만, 이는 소귀에 경 읽기와 같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 민족의 단점과 유래]

이는 단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권력이나 명예에 집착하는 민족인가를 보여주는 예 중의 하나입니다. 해외에 사는 한인교포들이 모여 사는 도시마다 다 한인회가 조직이 되어 있는데 한인회장 선거로 인해 미국법정에 고소고발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한인주소록에는 교민들이 모여 만든 각종 회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지역별로 모이는 00도 향우회, 중고등학교 대학교 출신별로 모이는 동창회, 성씨별로 모이는 종친회, 직종별로 모이는 00협회, 이것도 이익이 된다 싶으면 작은 지역별로 또 나뉘어져 있고 회장을 뽑는 선거 때만 되면 서로 싸웁니다. 이런 일들은 미국 내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끼리끼리 정신은 본래 농촌사회에서는 두레라고 하여 상부상조의 협동정신을 키우는 좋은 정신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조직들이 시간이 흐르면서부터는 대부분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사조직화 되면서 회원끼리의 반목과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요즘 민족순혈주의에 대한 비판이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여러 민족이 살아가고 있는 미국에서 살아보면 우리 민족의 배타성은 너무나 심각합니다. 언어의 수나 민족구성에 있어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다양하고 큰 나라인 중국 사람들도 외국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넘어 집단적으로 매우 잘 협력하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그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어떤 학자는 우리 민족을 ‘독 안의 게’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올라서려고 하면 올라서지 못하도록 밑에서 계속 잡아당긴다는 것이지요.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도 우리 민족의 이런 부정적 성격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장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예로 스스로의 하는 말을 잘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생각하면서 내가 오늘 하루 동안 한 말 가운데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긍정적인 말과 남을 비난하고 불평하는 부정적인 말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인 용어가 훨씬 많았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성품보다는 약소민족으로서 당한 아픔의 결과입니다. 멀리 고려 이조시대를 올라갈 것도 없이 근세 100년의 역사가 어떤 역사입니까? 한마디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파행의 역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청일,노일전쟁이라는 외국군이 우리를 먹이로 삼아 우리 땅에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은 일본에 한반도의 식민지 지배를 허락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그어 분할점령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300만이 넘는 우리 혈육이 죽는 끔찍한 전쟁을 치렀고, 그 이후 60년 이상 서로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민족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600만이 살해당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형제간에 나뉘어져 미워하며 살아오고 있지는 않지요.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생사를 모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백년해로를 약속한 남편과 아내가 죽음으로 이생과 저생을 달리한 경우는 있었지만 60년 이상 생이별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 우리 민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콩으로 메주를 쓴다 하여도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매우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인간상을 만들어내었고, 죽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문장에 쓰이는 보통수식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배가 고파 죽겠다. 배가 불러 죽겠다. 죽고 싶다’ 등등 조금만 화가 나면 ‘너 죽을래?’ 그래 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경우 이를 직역하여 I like to die, Do you want to die?로 쓰다가 자살의 위험이 있다 하여 정신과 의사를 보내기도 하고, 살인 미수죄로 경찰에 고발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스운 얘기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너무나 가슴이 쓰라립니다.

[모래 위에 지어진 남한의 기독교]

이런 부정적 영향은 사랑과 화해 일치를 생명으로 하는 교회에도 미쳐 우리나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이 장로교 안에 수십 개 거의 백 개 가까운 장로교단이 존재하고 있어 다른 나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스운 것은 이 백 개의 가까운 장로교단들이 9월 초에 모두 총회로 모이는데, 모두가 다 92회 총회입니다. 마치 유명한 식당을 찾아가면 모두가 원조라고 붙여놓은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같습니다. 아니 ‘이 집은 원조는 아닙니다만, 맛과 질에 있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식당입니다.’ 라고 간판을 달면 어떻습니까? 우리 민족 그리고 나 개인의 성품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이 집단이기성과 배타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는 새로운 세기를 향한 우리 민족의 커다란 과제입니다.

태국 출신의 아시아교회협의회 총무와 점심을 나누면서 기장 총회의 인상을 물었더니 첫 번째 답이 총대 가운데 여성과 청년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병희장로께서도 총회에서 공개적으로 지적하였지만, 적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760명 총대 가운데 15명이 여성입니다. 이는 2% 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30대의 청년총대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청년이 교회에서 장로로 선출이 될 수 없으니 장로와 목사만 참석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총회는 매번 여성 30% 청년 10%를 목표로 한다고 말합니다. 이 구조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구체적 논의는 없이 구호만 외치고 있습니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교단이 이러하다면 다른 교단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한의 교회가 이미 몇 년 전부터 감소하고 있고 이에 대한 이유로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 교회 재정의 불투명성, 담임목사의 세습, 물질축복 일방적인 반지성적인 설교, 병 고침과 방언, 일방적인 성령은사운동, 성속의 지나친 구별로 인한 사회적 정의에 대한 상실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칸 피랍사태와 이해할 수 없는 종교인납세 혜택으로 인한 문제는 단순한 감소가 아니라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늘어나는 위기 상황으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네티즌을 중심한 젊은이들의 반기독교정서는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있습니다.

일전에 언급한 리차드 도킨스라는 미국의 무신론을 주창하는 과학자가 쓴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은 현재 1993년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 이후 인문서적 최대의 태풍이라고 말할 만큼 엄청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유적답사기 마냥 그냥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닌 논문에 가까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까다로운 내용의 책이고 그리고 부피도 600쪽에 달하여 값도 비쌉니다. 그런데 이 책이 이렇게 많이 팔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남한사회의 반기독교 혹은 반종교적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남한의 개신교가 서구 기독교의 천년의 성장을 단 100년 만에 이룩했다면 이제 앞으로의 남한 교회는 서구 기독교가 지난 백 년 동안에 보여준 쇠퇴를 2, 30년 사이에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경제수치를 갖고 현재 세계 몇 위이고 앞으로는 몇 위가 될 것이라는 핑크빛 무드에 빠져 있습니다. 목사님들마저 설교 단상에서 이런 얘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한 동네에서 집안대대로 별 볼일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한 친구가 어쩌다가 권세가의 도움으로 갑작스레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는 자신이 뭔가 된 것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우쭐거리며 저자 거리를 활보합니다. 이때 동네사람들이 겉으로는 머리를 숙이지만, 돌아서서는 침을 뱉으며 꼴 볼견이라고 비웃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난하다고 얕잡아 보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예전 동남아시아의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도 이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지만, 이번 태국총무도 기장 총회의 여성과 청년의 부재를 지적하며 넌지시 이런 우리의 수치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네 교단 총회의 여성과 청년의 숫자를 보니 지금의 성장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갔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 저는 4년 전 향린교회에 부임하자마 이를 고치려고 서울노회에 당회 이름으로 헌의안을 올렸지만, 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총회 안에 이를 시정하기 위한 양성위원회가 새로 설립이 되었으니 그 결과를 두고 볼 일입니다만, 개 교회가 젊은 사람이나 여성들을 장로로 선출하는 일이 쉽지 않아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장로후보자 선출을 위한 1차 투표가 있을 예정입니다만, 이런 점들을 감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사참배 죄책고백 선언]

그러나 이번 총회에서 한 가지 고무적인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경남노회가 헌의한 일제시대에 장로교 총회가 결정하고 시행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회개하는 안을 통과시키고 폐회예배시에 죄책고백문을 읽고 내년 삼일절기념주일예배시에는 교단내의 모든 교회가 신사참배 회개의 시간을 갖도록 결정한 일입니다. 물론 그간 기장 총회는 1938년도 신사참배 결정은 일제의 강압으로 인한 잘못된 결의였기를 이를 무효화한 결의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결의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넘어서서 이를 공식적으로 고백하고 죄책고백문을 낸 것은 장로교단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물론 지난 5년 전 홍근수목사님 때에 향린교회 당회는 이를 서울노회에 헌의안으로 내었지만, 기각이 된바 있어 저로서는 감회가 깊었습니다.

또 저는 개인적으로는 저희 조부님에 의한 신사참배 죄책 고백을 하기도 하였지만, 이번에도 교단의 창시자 중의 한사람이자 저 개인적으로 지금도 매우 존경하는 김재준목사님에 대한 뼈아픈 지적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신학교가 창설되는 1940년은 이미 신사참배 결정으로 인해 이를 반대하던 여러 학교들이 문을 닫고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났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가 민족자본에 의해 세워지고 서양선교사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자주적인 신학교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초대 교수진에 일본인이 포함되어 있고 당시의 사회정치적 정황 곧 일제의 피식민지로 그리고 내선일체가 이미 굳어진 억압적인 상황에서 조선신학교가 현재 우리가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민족자주적인 신학교였다고는 말할 수 없고 그래서 신사참배의 강압에서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타당한 견해입니다.

물론 기장은 1953년도 미국선교사의 영향권에 있었던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밀려나와 성서의 학문적 비평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해 새롭게 창설된 교단이기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적이 없었다는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기장 총회는 그 출발을 갈라서기 시작한 1953년도를 초대창립총회로 하지 않고 이미 1915년 장로교 창립총회를 그 출발로 하고 있기에 그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차라리 기장 총회가 차라리 분리시점인 1953년을 창립기점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고 있으니 죄책고백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공동체라는 점에서 그 잘못이 타인에게 있다고 보기 보다는 나에게 있다고 보기에 이는 정당한 것입니다.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에 이번 기장 총회는 이런 점에서 민족적인 교회로 다시금 자리매김을 다짐하는 귀한 은총의 자리였다고 하겠습니다.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번 총회의 주제는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인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환경문제를 고려한 제목이었습니다. 주제 강연을 한 김창락교수는 생명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살고 있는 또는 살아 있는 현상, 작용, 힘을 가리켜 생명이라 한다. 생명은 받은 것이다. 생명은 공짜로 주어졌지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엄숙한 명령이 붙여져서 주어졌다. 나의 생명이 어느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생명이 무한대의 연쇄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나의 생명은 나 개인이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키워야 하는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 의무는 단순히 나 하나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도 포함해야 한다.”

한마디로 교회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공동체입니다. 생명과 연계하여 우리는 교회가 오늘 이 세상에 제시하는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나 이웃과의 건강한 관계 나아가서는 전쟁 같은 국제적 차원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연재해라는 세계 우주적인 차원도 충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충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종교적 영적인 의미에서 충족이 되지 않을 때에 인간은 결코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의식주나 전쟁 기아 그리고 환경에서 별다른 문제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자살률이 높은 것은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신명기 30장 본문 말씀은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민족을 끌고 나와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외치는 말씀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중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는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시내산에서 하느님의 법을 받은 이래 지난 40년 동안 계속 얘기하였던 말이지만, 지금 모세는 자신은 이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에 유언을 남기듯이 매우 비장한 각오로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부탁은 노예생활로 부터 해방과 자유를 주신 야훼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몇 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자발적인 기쁨의 순종이 아닌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곧 율법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율법의 완성은 곧 생명회복선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변질을 바로 회복하고 율법의 근본정신인 은혜를 깨닫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제사장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쳤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구원은 임했다고 선언하시면서 단지 율법은 구원받은 자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하느님의 은혜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의미이고 율법의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은 인간의 문자가 아닌 그 안에 하느님의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본래의 모습 곧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생명이란 단어를 매우 좋아합니다. ‘예수를 통해 생명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예수를 통해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이며 그의 살과 피는 곧 영생의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천국 혹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면 요한은 ’영원한 생명‘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영원한 생명이란 개념은 양적으로 무한히 연장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질적으로 참으로 충만한 삶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임하는 기쁨의 삶을 말합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흥겨움 곧 기쁨이 없습니다.(요한복음 2장) 예수님은 여기에 포도주 곧 흥겨움과 기쁨을 공급하는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여기서 안다는 말은 머리로 아는 지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너와 나의 구별이 없이 하나 되는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와 아버지의 하나됨의 관계를 말합니다. 히브리말의 안다는 말은 하나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되는 관계를 안다고 말합니다. 부부가 하나 되면 기쁨이 절로 납니다. 우리도 참 진리를 알아 예수님과 하나 되면 절로 기쁨이 옵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마치 가시나무 기운에 눌린 꽃나무처럼 세상의 근심 걱정이 믿음의 기쁨을 누르고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이 기쁨을 죽음 후에 천국에서나 누릴 수 있는 저 하늘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은 ‘지금 여기’ 누릴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항아리 속에 물은 이미 포도주로 변해있습니다만, 우리는 내가 부어넣은 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노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력을 잃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현실입니다.

[생명을 주는 존재]

사도바울로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부활을 증거 하던 중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순히 한 개체의 생명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로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 있는 존재가 아닌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 사실 이는 신적 존재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자기를 부르는 그분에게 모세가 묻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 원문에는 신을 뜻하는 4개의 단어에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습니다. 거룩한 이름이기에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이 신의 이름에 대해 신학자들의 해석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어떤 모음을 붙이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이름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여호와라고 불렀지만, 요즘은 야훼 혹은 야웨라고 부릅니다. 이 ’나는 나다‘라는 말은 예전 한글번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원문을 ’야웨 아셀 야웨‘로 읽고 그 강조점은 자유하신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예흐예 아셀 예흐예‘로 읽고 이는 ’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자‘ 곧 생명의 근원으로 강조하여 설명합니다. 20세기 초에 ’자유‘라는 단어가 인간 세계사의 물음이자 주제였다면 이제 21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생명‘이란 단어가 인간 세계사의 물음이자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명제가 성립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명제 인간학은 신학이다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금세기에 이르러 우리의 중심 화두는 생명입니다.

[한반도의 생명을 위하여]

92회 기장 총회는 그 총회를 마치면서 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죽임의 문화가 온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오늘 우리는 온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죽임을 넘어 살림을 일궈내기 위한 결의를 다지고자 한다.’ 결론에 이르러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7가지 과제를 명시했습니다. 1. 온 생명의 존속을 위협하는 개발을 억제해야 한다. 여기에 관련하여 하나를 말씀드리면 어제 김태준집사님댁에서 모인 목회운영위원회에서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차 없는 주일로 정하기로 하고 교회마당을 아나바다를 비롯한 작은 축제의 장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2. 경제적 성장과 세계화의 폐해를 극복해야 한다. FTA를 비롯한 경제 자유시장 정책은 자연생태계 훼손, 양극화로 농민과 같은 사회적 취약계층의 몰락 위험성을 가져온다. 3. 비정규직의 증가는 빈곤화를 심화시키고 사회적 연대성을 해친다. 4. 양성평등의 문화와 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 (처음부분에서 언급하였지만 말은 이렇게 잘합니다. 그다음이 없어서 문제지요.) 5. 남북정상회담과 대통령선거는 한반도 평화정착과 더 많은 민주주의에 기여해야 한다. 6. 한국교회는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선교의 태도를 신중히 재고해야 한다. 7. 반생명적 죽임의 문화에 기여해 온 우리 스스로를 반성한다.

그런데 이 반성에는 불행하게도 한반도라는 이 작은 땅의 생명을 위협하는 외국군의 주둔 문제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군의 이라크 침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현재 새만금에서 천 만평을 요구하는 미군의 요구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이 없을뿐더러 아직도 이 땅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양심과 진리 그리고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장을 사랑하고 기장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기장이 보다 기장다웠으면 하는 아쉬움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살아있는 교회 죽어있는 교회]

Pulpit 발행인 조디아티목사가 말하는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 있는 교회의 차이점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이 늘 모자라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떠들고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쓰기에 예산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죽어있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이 많아 이름을 알기가 어려워 애를 먹는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본래 이름이나 숫자에 약한 기본에 수염이 점점 하야해지는 저는 본래가 그러한데, 지난 주 신도회장 모임에서는 이런 불평 아닌 불평도 나왔습니다. 신도회가 모이면 열 명 중 여덟 명이 새얼굴이라는 얘기입니다. 오늘도 새 교우 14명이 8주의 교육을 받고 여러분 앞에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분의 얘기에 의하면 이는 살아있는 교회 생명 있는 교회의 모습이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밖을 향한 사회적 활동이 활발하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드리는 자로 가득차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으로 운영되지만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의 판단에 의해 운행된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지만 죽어가는 교회는 지내기가 편안하다. ]

여기에 교회 대신에 신도라고 하여 ‘살아있는 신도 죽어있는 신도’라는 제목으로도 바꿔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 문장만 바꿔보지요. ‘살아있는 신도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지만 죽어가는 신도는 지내기가 편안하다.’ 교회 오면 참 좋다 편안하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 신앙은 죽어가는 신앙이고 반대로 난 교회 오면 마음이 불편하고 다른 신도들의 활동이나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를 들으면 자꾸 마음의 부담을 느낀다는 그런 분이 계시면 그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드리는 침묵의 기도를 통해 여러분의 살아있는 부담감이 감사와 기쁨의 응답으로 바꿔지는 성령의 간섭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