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 성령의 역사(9) 안티오키아 교회의 지도력
민 13:30-33절 행 13:1-2, 13-15(다함께 행 13:1절)

지난 시간에는 오늘의 사도행전 본문 안티오키아 교회 이야기를 아프칸 피납 사태와 연계하여 선교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다음 주에 있을 장로후보자 선출을 앞두고 ‘교회의 지도력’이라는 관점에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현재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다가 보석으로 출감하여 불구속으로 재판 중인 이시우작가의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이란 사진첩을 보면서 철조망 사진 밑에 쓴 그의 짤막한 글귀에 문득 저의 시선이 멈췄습니다.

“진보란 주인으로서의 성장이며 보수란 관성으로서의 정체입니다.”

향린 교회는 갈릴래아 민중 예수 정신과 개신교의 개혁정신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개혁하고자 노력하는 교회이며 또 그러함으로 진보 교회의 요람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출석하는 교우들이 모두 이 진보와 개혁이라는 교회의 정체성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만약 향린교회가 이 진보와 개혁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면 동네의 가까운 교회로 적을 옮길 분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 교우들의 향린교회로 오기까지의 신앙여정의 글을 읽어보면 모두 이런 교회의 진보와 개혁이라는 정체성 하나 때문에 거리를 상관하지 아니하고 파주나 인천 등지에서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가 아닌 도시교회로서의 미래를 생각할 때, 아니 교회의 참 됨을 생각할 때, 이 진보와 개혁이라는 정체성을 계속 지켜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로 과연 필요한가?]

그리하여 장로선거가 있게 되면 진보와 개혁을 화두로 평신도목회를 지향하는 향린교회가 꼭 장로를 계속해서 뽑아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이 있게 되는데 이는 당연한 질문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의 의도가 장로제를 폐지하자는 의도보다는 장로제가 보다 교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기 위한 내부 성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대답으로 이시우씨의 글 곧 ‘진보란 주인으로서의 성장’이라는 말을 되새겨 보고 장로제가 바로 그러한 주인으로서의 성장을 위한 제도임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로제는 평신도목회의 가장 중요한 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 장로제가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교단 혹은 교파는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발생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각기 다른 조직성 특성이 있습니다. 성공회나 감리교는 천주교에 가까워 감독의 일인체제 제도입니다. 침례교는 목사 안수마저 개교회가 할 수 있을 정도로 개교회위주입니다. 장로교는 이 중간 형태로 노회라는 한 지역 안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함께 하는 집단지도체제입니다. 장로라는 본래 희랍어는 문자로는 ‘늙은 사람’이고, 그 뜻으로는 ‘지혜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본래는 현재의 목사와 장로를 모두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장하면서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로 나누어져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로 구분이 되었고 교회의 대의 결의기구인 당회 노회 총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500년 전 유럽에서 일어난 중세 가톨릭에 대항한 기독교 개혁운동의 한 주류를 담당한 사람이 칼뱅입니다. 그는 장로교의 시조로 일컬어집니다. 그가 주도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한 개혁운동은 단지 교회내의 개혁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제네바 시 전체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당시는 성속의 구별이 없이 교회의 지도자가 곧 시의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기독교왕국(christendom)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가톨릭과 같을 수 있지만, 가톨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톨릭은 교황의 일인체제이지만, 칼뱅이 추구했던 시의회는 집단지도체제였습니다. 이 집단지도체제가 장기집권이 되면 또 다른 독재가 되겠지만, 임기를 통해 교체가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바람직한 지도 체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도 교인이 50명 정도라면 굳이 장로를 두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를 교인 전체가 함께 모여서 논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많아지면 우선 전체가 모이는 일이 힘들어지고 논의 자체도 생산적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대표를 뽑아 이를 맡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장로제는 필요하고 더욱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는 다른 교회에는 없는 목회운영위원회가 있어 이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분도 계십니다만, 이는 2년 임기제로 되어 있고 부서장과 신도회장이라는 직능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어 일 주도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장로들이 갖는 봉사나 헌신 그리고 주인의식과는 현저한 차이가 납니다. 집사와 장로의 차이를 보여주는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요.’ 라는 표현을 집사들은 쉽게 하지만 장로들은 쉽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집사들은 자신이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 그렇게 말하지만, 장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주인의식을 갖고 있어 그런 말을 쉽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식들을 모아놓고 ‘우리 집은 사랑이 없어.’ 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집사와 장로는 누구나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차이입니다. 본인이 난 장로가 안 되도 주인의식을 갖고 향린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굳이 장로가 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평생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더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를 해보니까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불완전한 동물이라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습니다. 이시우씨의 ‘진보란 주인의식으로서의 성장’이란 이 말을 곱씹어 볼 때, 저는 향린교회에서의 장로제는 보다 강화되고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유?]

신약 성경에는 여러 교회들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그 가운데는 아예 책 이름으로 되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고린토교회 필립비교회 에페소교회 등 입니다. 그 외에도 스미르나교회 혹은 라오디게이아 교회와 같이 그 이름만 전해지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그 이름은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곳에 교회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다마스커스 혹은 요빠, 가이사리아 지역에도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말할 때는 대체로 건물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만,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였을 때에 비로소 교회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너희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 는 말씀에 교회의 근본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많은 교회를 두고 인기투표를 한다면 아마 1위는 안티오키아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오면서 이방 지역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 예루살렘 모교회의 파송을 받아 바르나바가 초대 목회자로 왔고, 이 바르나바는 선교의 큰 꿈을 갖고 당시 교회가 기피하는 사울을 동료 목회자로 청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한 일 년 동안 말씀을 가르치고 나니까, 비로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 교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11장 26절) 그 이전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왜 안티오키아 교인들을 향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시작했을까? 그러면 그 이전에는 뭐라고 불렀을까? 아마 ‘유대교의 이단자들’ 혹은 ‘유대교의 개혁파들’ 혹은 ‘갈릴래아파들’ 이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티오키아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래 주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시작했을까요?

성서에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면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의 흉년이 들어 형제들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각각 힘닿는 대로 헌금을 하여 보낸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눔이 있을 때에 세상은 비로소 신앙인으로서의 인정을 하게 됩니다. 기도와 나눔은 한마디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입니다. 신과 하나 되는 기도 그리고 이웃과의 나눔이 있을 때에 비로소 참 신앙이 이루어집니다. 올해도 저희 교회에서는 40년 만에 큰 물난리를 겪고 있는 북한의 배고픈 형제들을 위해 나눔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한에도 물난리를 겪은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정부나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지만 북한 동포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움의 포로가 되어 죽게 놔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무서운 얘기를 너무나 쉽게 내 뱉는 황폐해진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집니다.

두 번째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오늘 본문 13장 1절 첫머리에 있습니다. ‘그 때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와 교사 몇 사람이 있었는데...’ 이 말은 예루살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쓴말입니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를 설명한다고 하면 뭐라고 시작을 하겠습니까? ‘그 때에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와 원로들이 있었으니...’ 예언자와 교사가 있었다는 말과 사도와 원로들이 있다는 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 말은 예루살렘 교회에는 어떤 조직과 질서가 있었다는 말이고 안티오키아 교회는 지금 막 생겨난 교회로 사회를 향한 하느님 나라의 비전과 말씀 배움의 열정으로 가득 찬 교회임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루가는 예루살렘 교회를 조직을 우선하며 현재에 안주하려고 하고 관성으로서의 정체가 일어난 기성교회로 보고 있는 반면 안티오키아 교회는 사회를 향한 구원과 변화의 열정으로 가득 찬 교회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두 번째 이유가 됩니다.

[지도자들의 다양성과 일치]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나옵니다. 예언자와 교사인 안티오키아 교회의 지도자 5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의 배경과 출신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등장하는 바르나바는 키프로스 출신입니다. 안티오키아 출신도 아니고 예루살렘 출신도 아닙니다. 외부 출신이요 섬 출신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도 집사도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힘써 봉사하다가 지도자로 발탁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니게르라는 말은 니그로 흑인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는 인종차별적인 용어가 아닌 피부가 검은 사람이다. 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아프리카 동북부의 이디오피아 지방 출신이 아닌가 성서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세 번째는 키레네 사람 루기오. 키레네는 아프리카 북부 지방입니다. 그리고 루기오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로마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영주 헤로데와 함께 자라난 마나엔입니다. 영주는 이전 번역에는 분봉왕이란 말로 한 지역을 여럿으로 나누어 통치를 한 왕이라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12장에서 나타난 대로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던 악한 왕입니다. 이 헤롯왕의 직접 형제는 아니지만, 같은 유모 밑에서 함께 자란 왕족 출신인 이복동생 마나엔이 안티오키아 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으로 사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안티오키아 교회의 지도자 5명, 한 사람도 비슷한 사람이 없습니다. 제각기 출신 배경도 다르고 피부 색깔도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를 넘어 주 안에서 하나된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이방인 구원과 사회 선교라는 한 뜻을 세우고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안디오키아 교회의 특징이었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왜 여성장로 뽑기 힘든가?]

저는 여기서 우리 교회 당회 구성원들의 다양화가 추구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도 기장 총회의 미래가 어둡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청년층과 여성층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성장로를 뽑는 일에 애를 먹는 목사님들과 얘기를 해보면 제일 첫 번째로 하는 얘기가 여성들이 표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남성들에 비하면 여성들이 교회 봉사나 헌신을 더 많이 하는데 왜 표를 얻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여성들이 왜 표를 주지 않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여성들이 일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서로 간에 부딪히는 일이 많습니다. 그건 부부나 가까운 친구들이 자주 다투는 예와 같습니다. 친하면 사소한 의견 차이에도 다툼이 됩니다. 친하다는 말은 이미 사랑을 주었다는 말이고 사랑을 주다보면 기대가 있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사랑의 상처가 남게 됩니다.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일을 하다 보니 서로 간에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남성들은 여성에 비하면 일도 별로 하지 않고 또 몸으로 하는 대신에 말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자존심이 강해 속을 내어 놓지 않고 속을 내어놓지 않으니까 가까워질 기회가 없고 가까워지지 않으니까 서로 부딪힐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여성에 비하면 훨씬 권력지향적이고 명예지향적이다 보니 아예 처음부터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일을 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성들은 일을 통해 가까워지기에 자신들의 단점이 쉽게 노출이 되는 반면에 남성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남성들은 술에 취하면 헛소리는 잘해도 자존심이 강해 속내는 드러내지 못합니다. 어려서부터 남자는 울면 안 돼! 그래 넌 장군감이야! 너무나 강한 남성상을 심어 놓아서 자신의 약한 면을 드러내는 일을 못합니다. 그래 남성들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속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래요. 어떤 남자 교우가 10년을 다니면서 말이 없어 참 입이 무거운 교인이다 생각하고 교인들이 집사로 뽑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라 아는 게 없어 말을 안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결점이 많다 저는 이런 얘기는 믿지 않습니다. 성에 따른 결점의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잘 드러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입니다. 지금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히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총리 이하 장관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여성에게 기회가 없을 따름이지 능력의 차이는 아닙니다.(이럴 때는 아멘 좀 하세요!) 올해는 이미 늦었지만, 내년부터 장로선출 투표를 할 때에는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잘 새겨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뭐예요? 불확실한 가운데서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믿음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자기가 어디로 가고, 거기 도착하면 무엇이 있는지 그런 사전 지식을 갖고 갔습니까? 모르는 가운데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의 손길을 믿고 미래에 자신을 맡기는 행위 그것이 믿음입니다.

[소수자를 존중하는 다양성]

안티오키아 교회의 특징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 나라 원칙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래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이 다양성은 배움이 다르고 얼굴이 다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성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소수자 존중의 원칙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소수자의 다양성이란 새로운 사람을 중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뒤에 있는 자가 가장 앞선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그 맥이 닿아 있습니다. 부부가 닮아가듯이 서로 다른 사람들도 10년 20년 함께 믿음생활하다 보면 서로 닮아갑니다. 당사자들은 서로간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비슷합니다. 다양성은 기존에 물들지 않는 새로운 사람이 존중받고 우선시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개혁은 결코 기존사람들에게서는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부임당시부터 얘기하는 것이지만, 신도회가 너무 방대하니 조금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통 50명을 넘고 희청 같은 경우는 150명도 넘습니다. 장남은 50부터 80대까지 아버지 아들이 함께 있습니다. 신도회가 단지 친목모임이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떤 활동을 하고자 하면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소속교인은 많지만 실제 활동하는 교인은 15명 정도입니다. 제가 나누자고 하면 지금도 얼마 안 되는데 어떻게 나누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일하는 사람이 열 명이라고 해서 반으로 나누면 5명으로 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각 그룹이 다시금 열 명으로 늘어납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를 일컬어 사회학에서 부르는 명칭이 있습니다. 그 법칙에 따르면 어느 집단이고 실제 활동하는 사람은 20%입니다. 열 명씩 일하는 두 신도회를 합치면 20명의 활동교인이 될 것 같지만, 다시 열 명으로 줍니다. 나도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미나 꿀벌과 같은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일 열심히 하는 놈들만 모아 놓으면 또 그중에서 80%는 논다는 것입니다. 올해에도 제가 목회운영위원회에서 신도회를 나누자는 얘기를 했는데, 아마 진행이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성을 유지하려는 기존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개혁을 말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개혁이지 자신의 개혁은 원치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픔 없이 개혁은 일어나지 않는데, 스스로 그 아픔을 감당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 온 사람을 존중하고 그들을 키워내려는 구조 이것이 50년의 기존의 역사 속에서 새로움을 만들어 내야 하는 향린교회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새로 태어난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 점에서 기존의 신앙공동체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갈릴래아 예수의 민중정신의 실현을 통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의 완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은 할례를 받은 유다민족에게만 있다고 하는 두터운 종교적 교리의 틀과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혈육의 기존 틀을 깨고 세상을 향해 사람을 향해 열린 자세로 나아간 것입니다. 사회의 기존 틀을 바꾸려면 우리 안의 교회의 기존의 틀 자신의 사고의 틀부터 바꿔나가야 합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당할지도 모릅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시기 바랍니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두 눈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생각을 한 후에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저는 제 기억을 되살리기 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기억력이 약화되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향린의 미래를 향한 비전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의 일을 다시금 바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은 우리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과거는 과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이 있는데 그것은 과거에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단 하루 아니 한 시간의 미래가 남았더라도 하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바꿔나가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참 된 부활신앙이란 죽음 후에 임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이 기억하는 지도자]

끝으로 개인의 지도력에 관련한 말씀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초창기 안티오키아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르나바입니다. 초대목회자였고 오늘 5명의 지도자 가운데 가장 첫 번째로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언급된 사람이 사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사도행전 4장과 8장에서 각기 따로 따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서로 만나 함께 목회를 하고 선교여행을 떠날 때까지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할 때는 언제나 바르나바가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선교지인 비스디아에서부터 이 두 사람의 이름 순서가 바뀝니다. 그 중요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도행전을 바울중심으로 기술하는 저자 루가의 개인적인 의견도 있을 것입니다만, 어쩌면 4,50년이 지난 후대 교회 사가들의 공통된 견해였을지도 모릅니다.

선교를 떠나기 전에는 바르나바가 중심이었지만 선교가 시작하면서부터 그 중심은 바울로 옮겨갑니다. 설교를 해도 바울이고 기적을 베풀어도 바울입니다. 그러다가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부터 바르나바는 사도행전의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저는 선배 바르나바의 역할을 너무 축소하고 삭제해버린 루가에게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력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바르나바가 더 훌륭하냐 혹은 바울이 더 훌륭하냐 하는 그런 비교가 아닌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 중요성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 바르나바와 바울의 역할 분담 속에서 우리는 교회를 섬겨나가는 자세를 보게 됩니다.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바르나바는 지금까지의 앞선 역할 대신에 뒤에서 내조를 합니다. 바르나바가 나이가 더 많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선배입니다. 그러나 그는 후배 바울을 앞세우고 자신은 그 뒤에 섭니다. 참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믿음이 여기에서 그 빛을 나타냅니다. ‘나는 지금 나 바르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나타내고자 선교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전파하는 종이다. 내가 어떻게 보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남들이 바울만 알아주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여기에 향린교회를 섬겨가는 선배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본이 있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구약에도 있습니다. 모세 밑에는 두 명의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가나안을 건너기 전에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정탐꾼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갖다온 12명 중 열 명이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우리가 가 보았더니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사람들은 키가 다 장대 같습니다. 성곽도시들은 정말 굉장합니다. 거기는 거인족인 아나킴 말고 또 다른 거인족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올라가면 다 죽습니다.” 이때 몇 사람이 이를 부추깁니다. “아니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그때 내 말대로 그냥 애굽에서 살았어야지. 노예로 있어도 고기는 먹었잖아.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먹을 물도 없이 얼마나 고생이냐?” 백성들이 술렁거립니다. 이때 같이 정탐을 갔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들은 이미 우리의 밥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야훼께서 우리의 편이시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렇게 외치며 백성의 동요를 잠재운 믿음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여호수아가 아닌 갈렙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갈렙이 더 선배였습니다. 이때는 여호수아보다 갈렙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후에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지명합니다. 이후 갈렙은 그 이름이 성서의 이야기에서 사라집니다. 역사의 추가 여호수아에게로 옮겨 간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부하 직원이 자신의 상사가 되었을 때, 그 밑에서 일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한국인의 경우는 대부분 자존심 내세우며 그만 둘 것입니다.

먼 훗날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끝나갈 즈음 갈렙의 이름이 다시 등장을 합니다.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나를 파견하던 그 시절처럼 나는 여전히 건강합니다. 야훼께서 그 때 약속해 주신 이 산악지대를 이제 나에게 주십시오. 저 큰 성에 아나킴이 살고 있지만, 야훼의 약속대로 나는 그들을 몰라낼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세력이 살던 헤브론 성을 공격할 때, 아무도 그 성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갈렙은 노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던졌습니다.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축복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갈렙은 결코 여호수아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었던 인생의 선배요 신앙의 선배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기에 기꺼이 자기 후배에게 머리를 숙였을 뿐만 아니라, 그 모두들 기피하는 헤브론 전투를 기꺼이 나섬으로 가나안 정복에 분수령을 장식한 것입니다. 그는 이때까지 여호수아의 그늘 아래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여러 면으로 볼 때 선배였지만, 무려 45년 동안을 그의 배후에서 그를 조용히 도왔습니다. 후대 사가는 헤브론을 점령하자 ‘이로써 전국에서 전란이 멎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수 15:15) 이 헤브론 성이 바로 훗날 법궤가 앉혀지고 성전이 세워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렙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저는 다음 주 장로를 선정함에 있어 장로로 뽑히신 분보다 먼저 이 교회를 섬기시는 신앙의 선배 분들에게는 적지 않는 고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갈등을 이겨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아픔은 바르나바가 겪었던 갈등이요, 갈렙이 겪었던 갈등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를 맞아 바르나바와 같이 바울이라는 후배의 가진 은사가 잘 발휘될 수 있도록 그 길을 여는 사람이 되고 갈렙과 같이 여호수아를 도와 일하고 그 누구도 기피하는 헤브론 성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살신성인의 신앙을 보이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좋은 건물과 프로그램이 있어도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 정신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 교회의 영광은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세상은 여호수아와 바울의 영광을 기억하지만 하늘에서는 갈렙과 바르나바의 희생을 기억한다고 하는 것을.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