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성만찬주일 연합예배-
기뻐하며 그 밭을 사리라
예레미야 31, 31-34 ; 마태오 13, 44-46

김 경 호 목사


[남북정상회담과 동아시아의 평화]

지난 주간에 한반도의 새 역사를 열어가는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관계가 크게 앞으로 전진하는 계기가 된 것을 매우 기뻐합니다. 이러한 합의 사항이 성실하게 진행된다면 한반도에 드리워졌던 전쟁의 먹구름은 사라지고 평화와 상생의 새 기운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낡은 잣대를 들이대고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오늘 정상회담을 분석하는 것은 저의 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한 가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비판자들은 핵을 폐기하겠다는 구체적인 선언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조치들이 무용지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북이 핵을 개발하게 된 원인은 미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체제를 인정받고 북미수교를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미국은 그동안 북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해 각종 규제와 경제 제제로 북을 옥죄어 왔습니다. 이 결과로 유럽과 상당한 무역을 하던 북이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오늘의 경제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에 북은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협상카드로 핵무기를 만들고, 미국이 대화에 응한다면 6자회담의 진전 결과에 따라 핵무기를 폐기하겠다며 회담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6자 회담의 성과가 북미 수교를 향해 여하히 순항하느냐가 북이 핵을 제거하고 나아가 전체 한반도를 비핵지대화 하는 열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남북정상회담에서 핵폐기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도무지 맥락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북으로서는 어렵게 만든 협상카드를 대화 당사자인 미국과는 상관없이 남북회담에서 폐기하겠다고 약속을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국제정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반증합니까? 세계가 돌아가는 기운을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낡은 조각으로는 새 부대를 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상회담 전날 늦은 밤에 을지로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시간까지 계속 차가 막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뉴스를 보니 그날 밤 곳곳에서 정상회담 반대 데모하는 사람들 때문에 막혔다고 합니다. 이 백성의 무지와 몽매를 어이할까 답답합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체에 미칠 중대한 변화의 길목에 서있습니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냉전의 기운을 걷어내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올 호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기회를 잘 살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마음을 불어 넣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며”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 언약, 새 마음을 창조해 주신다고 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과 삶을 주어(32:39)”, “그들의 마음속에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주어(32:40)” 하나님께서 강제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개입하셔서 새 마음을 창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은 하나님도 어찌 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영역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창조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돌작밭과 같이 굳어진 마음을 갈아엎고 우리들의 마음에 개입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고 돌이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퍽이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의 마음 밭을 어느 날 불현듯 바꾸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향린공동체의 길]

향린공동체는 외로운 싸움을 해왔습니다. 이것은 마음 밭을 바꾸는 싸움입니다. 얼마 전 기독교 사회운동을 같이 하던 목회자에게 깜짝 놀랄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연히 대추리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가 말하기를 “그런 것은 '향린'자 들어가는 교회들이나 할 일이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마음을 함께 하던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갈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진보적 기독교도 분화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앞장서서 투쟁하던 분들 중에 상당수가 정치권으로, 장관, 국회의원으로, 장관급 위원장으로, 하다못해 위원회 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정치판에 들어가서 그분들이 하시는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에는 자유롭게 양심을 대변하던 분들이 이제는 여권에서 하는 만큼을 벗어나는 말이나 행동은 금기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진보라고 하는 기독교 사회운동 진영에 분화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범여권의 입장을 넘어서는 것들은 선을 긋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그런 일은 '향린'자 들어가는 교회들이나 하는 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역으로 이것이 향린공동체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가장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말해야 합니다. 기독인이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요? 그 정도를 1에서 10까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면 기독교는 항상 10을 말해야 합니다. 정치인은 현실적인 것을 감안해서 6-7정도에서 타협안을 내놓고 선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실을 감안해서 처음부터 6-7정도의 안을 내놓으면 안 됩니다. 다소 실현 가능성과는 동떨어질지라도 가장 원칙적인 입장을 이야기해야 하며, 늘 10을 다 말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래디컬(radical)하다는 말은 과격하다는 뜻이지만 근본적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항상 어느 정파 어느 정당이든지 하나님의 정의의 입장에서, 가장 근본적인 입장에 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이런 선택은 고독한 투쟁이고, 모두에게 욕먹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과격하다고 따돌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과격하기로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상으로 과격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까지는 향린의 세 교회가 이런 원칙에 입각해서 움직여 왔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세 교회 목회자나 지도자들이 모여서 상의 하고 입장을 같이 하자고 한 적이 없지만 묘하게도 서로 같은 입장을 견지해왔고 한자리에 섰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향린공동체에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고, 원칙에서 벗어난 길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향린공동체는 이 시대에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서 있는 자리는 매우 중요한 위치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소금이 맛을 잃을 수도 있고, 기독교가 양심의 자리를 지켜갈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는 부를 위하여 인간을 무한 경쟁의 장으로 몰고 가는 신자유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해야 하며, 외세에 의존하고 외세에게 우리들의 미래를 맡기려는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천명해야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우리 향린 공동체가 이러한 것을 천명하고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전통을 아름답게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미리 맛보는 기쁨]

오늘 신약의 본문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밭을 사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공이 언제 가장 기쁘겠습니까? 밭에 보물을 캐내어 사용할 때일까요? 아니면, 온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샀을 때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 밭에 보물이 숨겨졌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일까요?

본문의 말씀은 그 기쁨의 때를 그것을 발견 했을 때, 기뻐하며 돌아가서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산다고 하고 말합니다. 모두 기쁘겠지만 가장 기쁜 시점은 그 보물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비록 우리들에게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더라도, 그 나라의 실체가 우리 손에 있지 않을 지라도, 아직은 우리에게 피부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지라도, 그 나라를 찾아내고 발견한 순간 우리는 가장 기쁩니다. 여러분은 기쁘십니까? 보수신앙을 가진 분들은 굉장히 기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 진보적 신앙을 가진 분들은 별로 기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참으로 현실 속에서 해야 할 일도 많고 속 터지는 일도 많이 보기에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제게 크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 나라가 임한 감격이 아닙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이 우리를 벅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미리보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그것 자체가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듣지 못한 세상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 일입니까? 만약 우리가 자기 울타리에 갇혀서 세상과는 담 싸고 오직 종교적 영역 안에서만 우리의 기쁨을 찾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사는 것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보물을 발견한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기쁨으로 보다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기쁨이 충만해져서 충만에서 충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늘 이야기하고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마전 판소리 심청전에서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보면서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쑥 나와 버렸습니다. 제가 그 대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심황후(沈皇后) 이말 듣고, 산호주렴(珊瑚珠簾)을 걷어버리고, 보선발로 우르르르, 부친(父親)의 목을 안고, 아이고 아버지. 심봉사(沈奉士) 깜작 놀라. 아니, 아버지라니, 뉘가 날더러 아버지여. 에이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 무남독녀(無男獨女) 외딸 하나, 물에 빠져 죽은지가, 우금(于今) 삼년(三年)인데, 뉘가 날더러 아버지여.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인당수(印塘水) 풍랑중(風浪中)에, 빠져 죽던 청(淸)이가, 살아서 여기왔소. 어서 어서 눈을 떠서 저를 급(急)히 보옵소서.

심봉사(沈奉士)가, 이 말을 듣더니, 어쩔 줄을 모르는구나. 아니 청이라니, 에잉 이것이 웬 말이냐. 내가 지금 죽어, 수궁에 들어 왔느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죽고 없는 내 딸 청이,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이냐.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어디 내 딸 좀 보자. 아이고,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제. 아이고 답답하여라. 두 눈을 끔적, 하더니 만은 눈을 번쩍 떴구나.

이게 모두, 부처님의 도술(道術) 이것다. 심봉사(沈奉士) 눈 뜬 훈(熏)김에, 여러 봉사들도, 따라서 눈을 뜨는데,

<자진모리=단계면>

만좌(滿坐) 맹인(盲人)이 눈을 뜬다. 어떻게 눈을 뜨는고 하니, 전라도(全羅道) 순창담양(淳昌潭陽), 새 갈모 떼는 소리로 짝 짝 하더니마는, 모두 눈을 떠버리는구나. 석달 동안 큰 잔치에, 먼저 나와 참여하고, 내려간 맹인들도 저희집에서 눈을 뜨고, 미쳐 당도 못한 맹인, 중로(中路)에서 눈을 뜨고. 가다가 뜨고, 오다가 뜨고, 서서 뜨고, 앉아 뜨고, 실없이 뜨고, 어이없이 뜨고, 화내다 뜨고, 울다 뜨고, 웃다 뜨고, 떠보느라고 뜨고, 시원히 뜨고, 앉아노다 뜨고, 자다 깨다 뜨고, 졸다번뜻 뜨고, 지어(至於) 비금주수(飛禽走獸)까지, 일시(一時)에 눈을 떠서, 광명천지(光明天地)가 되었구나.

이것이 꿈이냐. 이것이 생시(生時)냐. 꿈과 생시, 분별(分別)을 못 하겠네. 지팽이 너도, 고생 많이하였다. 이제는 너도, 너 갈데로 잘 가거라. 피르르 내던지고, 얼씨구나 얼씨구나, 좋네 지화자자, 좋을시구. 천하맹인들이 좋아라 춤을 추고 노닌다.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은 물론 기쁨이지만 더욱 기쁜 것은 개평으로 눈을 뜨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눈을 뜨면 개평으로 모든 봉사들이 눈을 덩달아 뜹니다. 한사람이 제대로 서면 그 주변은 개평으로 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밭을 바꾸신다는 것이 자칫하면 주술적으로 들릴 수 있겠습니다 마는 어느날 불현듯이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민족의 마음을 송두리째 바꾸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서 외치며 그 시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향린 공동체 하나의 깨어있음은 모든 한국기독교를 깨어나게 하는 몸짓이요, 우리 향린 공동체 하나의 일어섬은 한국 사회 전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며, 우리 향린 공동체 하나의 눈 뜸은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개벽입니다. 이 세상에 나가 새로운 말을 선포하고 희망을 심으십시오. 주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