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18일 예수와 정결법 그리고 오늘
레위기 1:1-4; 마르코 7:1-15

[정결의 근거: 거룩함]

모세가 미디안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을 보고 호렙산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지금 저는 신발을 신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만, 거의 대부분의 남한교회에서는 이 제단을 올라설 때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습니다. 이는 이곳이 여러분이 앉아 있는 곳과 다르다는 구별의 상징입니다. 지금도 많은 농촌교회에서는 아예 예배당을 들어갈 때부터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교회도 많습니다.

힌두교나 이슬람 회당을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게 되어 있는데, 바닥이 더럽다 보니 양말까지 벗는 경우가 많고 종아리가 보이는 반바지 차림 혹은 치마차림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정통파 유대인 회당을 들어갈 때는 키파라는 작은 모자를 써야 합니다. 워싱톤 DC에 가면 건물이 크고 독특한 몰몬교의 회당이 있어 관광객이 들르곤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다 잘못하여 한 관광객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 제단까지 올라간 일이 있었는데, 부정이 탔다 하여 그 넓은 제단의 카펫을 다 갈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인간사회 안에 신의 영역을 두어 이를 구별하고 경외하는 문화나 관습 자체를 옳다그르다 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이 너무 고착화되어 어떤 차별이 일어난다면 이런 관습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남한교회에는 이 제단은 거룩하기에 목사나 장로들만이 올라오도록 허용하고 여성들은 아예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보수교회에서 여성장로를 뽑지 않는 이유도 여성들이 제단 위에 올라오는 것을 꺼리는 거룩의 기제도 숨어 있습니다.

예전 우리나라에도 마을마다 성황당이라는 곳이 있었고 동네 입구에나 중앙에는 큰 나무나 이상한 돌에 띠를 두르고 이를 신의 영역인 거룩한 곳으로 지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종교학에서는 이를 토템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함의 구별은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도 있습니다. 7일이 모두 창조의 날이요 주일이지만 일요일을 흔히 주일이라고 구별하여 부릅니다. 이 주일은 24시간이지만 가장 거룩한 시간은 오전 11입니다.

거룩한 장소나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소리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남한 교회들은 목사가 ‘다함께 묵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땡! 하고 탁상종을 울리면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에게 기독교를 전해준 서양의 교회에서 이렇게 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이는 일제 군국주의의 잔재요 신사참배의 영향입니다. 그런데 이 탁상종소리는 단지 예배의 시작과 끝에만 울리는 것이 아니라 남한교회가 자주 하는 통성기도에도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합니다. 주여 삼창을 외치고 나서 거의 열광적으로 통성방언기도를 하다가도 이 탁상종이 땡! 하고 울리면 수백 수천 명이 일시에 그칩니다. 방언기도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기도이지만 목사가 치는 탁상종소리 앞에서는 일제히 그칩니다. 그러고 보면 이 탁상종소리에도 일종의 거룩함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평상시 목소리하고 설교나 기도시의 목소리가 다른 분도 많습니다. 쉰 목소리를 보다 권위 있고 거룩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목소리가 쉬어서 나오면 기도 많이 해서 목소리가 쉬었다고 보고 은혜롭게 듣는 분도 많고 통성기도할 때 보면 쉬잇! 쉬잇! 하여 성령의 바람을 상징하는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개신교회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거룩의 향기도 있습니다. 절에서 향을 피우듯이 개신교를 제외한 성공회를 비롯한 가톨릭과 동방교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예배 시작 전 향을 피워 신의 임재를 상징하기도 하고 또한 그림이나 조각물을 통해 거룩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하고 듣고 판단하는 이성의 기능만을 주시지 않고 느끼고 표현하고 사랑하는 감성과 오성의 기능을 주셨으니 이 모든 기능을 통해 신을 경험하고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거룩의 다양한 기제가 신을 경험하거나 찬양함으로 인간의 생명력을 더 풍부하게 하고 창조성을 키우는 일로 나아가지 않고 반대로 인간의 자유로운 개인적 삶을 억압하고 이를 획일화시켜 이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회 구조적으로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기제로 악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시대와 정결법]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토라라 일컬어지는 모세 5경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사건은 히브리민족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받는 사건이지만, 종교적으로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과 백성들이 맺는 계약 사건입니다.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너희야 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 계약에 따라 성막과 기구들이 만들어지고 제사의 종류와 종교적 절기가 만들어지고 이를 이끌어가는 사제집단이 생겨납니다. 레위기에는 자세한 제사법과 정결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법들은 단지 종교 규정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지켜나가야 할 제반 사회 규정들이 더 많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법은 오늘날의 헌법과 같이 당시 유다사회를 떠받들고 가는 법률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본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 처음 제정할 때의 법 정신은 사라지고 규정만 남게 되는데, 이스라엘 민족 또한 그러했습니다.

[신약시대의 정결법]

오늘 마르코복음 본문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시비를 거는데, 사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종교적 관습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위생에 관련한 일종의 생활습관일 따름입니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으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물이 귀한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이런 규정에 굳이 억매이지 않고 배가 고파 먹은 것뿐입니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비난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치는 사람의 계명이라고 지적하시면서,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역공을 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이라는 이름하에 세세한 법규 613개를 명문화시켜 놓았습니다. 율법 613개 중 긍정적인 계명은 248개이고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은 365개입니다. 248은 인간의 몸의 마디마디와 부분부분의 총합을 상징하고 365는 일년입니다. 곧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몸의 일부와 같이 지켜야 할 법규란 뜻입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그중 하나일 따름이고 이도 본래는 마음의 순결함을 의미했고 특히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기 전이나 기도하기 전에 손을 씻는 예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적용됨으로 거룩함이 오히려 죄의식을 심어주는 부정적인 기제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장면에서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갖고도 시비를 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안식일에는 손으로 비비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본래의 안식일법의 의미를 회복시켜 주셨지만, 법이 문자에 매이게 되면 이는 사람을 죄인으로 억압하고 사람들을 편 가르게 하고 끝내는 노예종교인들을 만들어 냅니다. 지배자들은 이를 악용하여 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민중들을 억누르게 됩니다. 정결법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 속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지만, 세월이 흘러 고착화되고 보니 예수님 당시에는 부당한 사회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마르코복음과 정결법]

마르코복음은 이점에서 처음부터 예수의 복음활동과 정결법체제와의 대립각을 분명하게 세워 나가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출신지에서부터 대립각을 분명히 세웁니다. 마태오나 루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예루살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과 함께 광야에 거하시는 장면에서 그 얘기가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르코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출발하였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복음서 독자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거룩의 땅이지만 갈릴래아는 본래 이름이 ‘이방인의 땅’이었고 사마리아와 더불어 부정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예수의 주변에는 부정한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과 어부를 포함한 노동자들이 모여들고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가르치시는데, 그 회당 안에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악령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말해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교의 부패와 무능력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이를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데, 이것 또한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기에 정결법에 어긋난 일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그 날 저녁시간에 동네사람들이 많은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데려오고 예수께서는 이를 모두 고쳐주십니다. 이는 단순한 병 고침의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제와 장소를 눈여겨보면 이는 당시 사회의 근간인 정결법 체제에 도전하는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데, 그 장면도 보면 손을 대시어 고쳐주시는데 정결법 규정을 정면으로 어긋나는 범법행위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얘기가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얘기 속에서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셨다.’고 함으로 예수님은 당시의 죄의 용서가 선포되는 예루살렘 성전 종교 체제에 대해 정면 도전을 하십니다. 이후 율법학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로마의 앞잡이인 세관 레위를 제자로 부르고 그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고 그래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게 되는 이야기는 모두 당시의 지배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의 이야기들입니다. 이어 5장에 가서는 무덤가에 사는 군대라는 악령을 들린 사람 하나를 고쳐주는데, 여기서 물속에 빠져 죽는 이천 마리의 돼지 떼에 비유되는 군대귀신 이야기는 로마군대의 멸망을 암시하고 이는 당시 식민정치체제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리고 이어 12년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 고침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물론 한 여인의 믿음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치료비로 전 재산을 날렸다는 이야기를 통해 의료체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소생시킨 이야기도 단지 예수의 신적 능력을 말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죽은 자를 만져서는 안 되는 당시의 정결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얘기입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앞 절인 6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 병자에게 손을 대는 행위는 정결법에 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을 단지 치유기적을 행하는 능력자로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란 구별되어진 자들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그들은 정결법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일반 민중과 자신들을 구별하고자 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는 바로 그들이 더럽다고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눔으로 이에 도전하고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에는 베풀어준 것을 돌려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루가 14:13)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단지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과 자비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질서에 반대되는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질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동과 말씀들은 당시 유다사회의 질서와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 흔드는 혁명적 행동이자 발언들입니다.

[우리의 정결법]

과거 우리나라에도 유다의 정결법에 해당하는 법이나 습관들이 있었습니다. 양반 중인 상놈으로 구별되는 사회체제 그리고 이를 떠받드는 족보가 그중 하나입니다. 족보는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법이었고 양반이라 하더라도 족보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과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여인들과 첩의 자녀들은 족보의 기재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족보는 단지 한 씨족의 구성원들을 설명하는 가계보가 아닌 사회적으로 보면 당시의 부당한 양반지배체제를 유지케 하는 일종의 정결법이었습니다. 이 족보문화 혹은 족보체제는 동학난에 이은 이조의 멸망 그리고 일제의 지배와 6.25 그리고 도시중심의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거치면서 거의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과 같은 나라는 이런 문중에 근거한 족벌문화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정치문중이 형성되어 있고 그리고 멸시받는 하층 계급에는 혹카이도나 오끼나와 사람들, 조센징, 부라꾸민이라는 백정 계급이 상존하고 있으며 이들은 어딜 가든 호적을 통해 자신들의 뿌리가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일본이 도덕적인 면에서 배울 만한 점이 많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차별의 정결법 체제가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정결법 체제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돈 많은 재벌문중이 만들어지고 있고 이들은 권력자의 문중과 결합함으로 새로운 족벌계급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집단문화를 소위 일컬어 강남문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돈깨나 번 사람들은 모두 강남으로 이주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정수복교수가 쓴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란 책을 소개했습니다만, 그가 말하는 문화적문법이란 “그 문화를 공유하는 구성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거의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 있으면서 구성원들의 행위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하는 문화적 의미체계를 말한다.” 이를 종교적 용어로 바꾼다면 정결법입니다.

기독교사상 11월호에서는 <개신교인의 문화적 문법>이란 특집을 내었는데 그중 이국헌목사께서 <강남신자들의 신앙적 문법>이란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여기서 이목사는 강준만교수의 정의를 인용합니다. “강남의 문화적 코드란 욕망 경쟁 구별짓기 등인데 이것들은 물질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특권주의 등 강남만의 독특한 문화적 문법을 드러내고 있고 이는 강남신앙이라는 독특한 신앙체계를 형성해내었다.”

물론 강남에 산다고 다 강남신앙인은 아니고 오히려 강북에 살지만 강남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면 강남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강남은 습지와 논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변두리였습니다. 이것이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의 건립이 이루어지면서 한국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떠올라 여의도를 거쳐 오늘의 강남이 형성되었고 여기에 아파트와 교육중심의 학교들, 그리고 고속터미널과 대형백화점들과 코엑스와 올림픽경기장이 들어서면서 한국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몇몇 남한의 대표적인 초대형교회들이 폭발적으로 뜨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한때 향린교회도 강남이주를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고 했는데, 아마 향린 또한 그쪽으로 이사를 갔다면 그쪽 문화의 영향권 안에 들어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강남교회들의 성장 배경을 이목사님은 이렇게 봅니다. 이들은 대부분 외지인들로 강남의 엄청난 사회적 현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성공하기까지 그들은 엄청난 고통과 방황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투기와 교육열풍 등 이른바 강남의 법칙을 구현하기 위해 저들이 겪은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바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남의 교회들이 있었다. 질주하는 욕망의 본성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해방과 휴식을 경험할 수 있는 특이점이 있고 여기에 문화적 콘텐츠가 개발되었다. 현재 강남의 이미지는 욕망 폐쇄성 보수성 개체성 현실성들인데, 이것들은 금욕과 절제, 개방성, 공동체의식, 내세 등을 강조하는 기독교정신과는 다른 이미지이다. 강남신앙을 다음의 5가지로 요약합니다.

[남한 교회의 정결법]

1. <물질적 기복주의> 본래 자본주의적 가치가 기독교정신과 일치한다는 기독교경제관은 칼뱅의 사상을 사회학적으로 승화시킨 막스 베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를 해석학적 툴로 이용해 오히려 하느님을 잘 믿을 때 물질 축복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현실적 구원론을 기독교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2 <보수적 근본주의> 이는 체제의 안정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자신의 아파트값이 내려가거나 안정되기를 원치 않는다. 요동을 치면 칠수록 자신들은 좋다. 학교 평준 하에도 반대한다. 현재적 신앙에 지극히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신학적 해석이나 기독교의 진보적 정신을 환영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분명 가난한자와 억눌린 자 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왔다고 하는데, 이를 모두 심리적 가난과 심리적 스트레스로 환원하고 말았다.

3. <현실적 이원주의> 이는 기독교현실주의와는 다른 관점이다. 기독교현실주의는 윤리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정신을 통한 인류사회의 구원, 곧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현실에 입각한 신앙의 책임을 말하지만, 강남교회들의 현실주의란 현실적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현세와 내세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신앙의 목표를 현세에 집중하도록 하여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는 별로 들려지지 않는다.

4. <폐쇄적 특권주의> {근대적 공간의 한계}라는 책에서(삼인, 2002) 최병두교수는 강남으로부터 시작된 남한사람들의 공간사회학의 핵심 코드를 아파트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개발이익 창출과 투기라는 경제의 상징이 되었고 황폐화된 주거환경에 따른 자연적 심미감을 박탈시킨 주범이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분은 강남의 한 목사님께서 교회를 이전하게 된 이유를 강북의 푼돈이 아닌 강남의 몫돈을 위해서였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습니다. 푼돈과 몫돈의 차이. 이것이 강남과 강북의 차이이고 여기에 특권계층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자기교회만이라는 강남신자들의 폐쇄적 특권주의는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기독교 공동체 주의를 약화시켰다. 사도 바울로가 꿈꾸었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교회는 사라지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5. <문화종교주의> 체제 유지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지만 삶과 욕망의 향유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강남의 정신은 정신적 보수성과 생활의 자유주의로 분열되어 있다. 많은 신자들이 특별한 문화모임에 참석하듯 교회에 출석한다. 휘트니스클럽과 취미교실에 다니고 전시공간과 아트페어를 즐기며 동질 구룹간의 정보교환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 교회출석도 그 목록 중의 하나에 들어있다. 신앙은 강남 신자들이 향유해야 할 문화 목록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 삶 전체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결국 강남신자들은 강남정신을 기독교정신으로 극복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정신을 강남정신으로 재해석했다. 그로 인해 기독교의 종교적 기능은 상실되고 문화적 기능만이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강남교회는 종교적 권위로부터 문화적 권위로 이양되어 강남문화에 종속되는 현상을 낳고 말았다. 일종의 현대판 문화의 정결법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남한 사회의 정결법]

이렇게 현재 우리 사회에는 화해와 사랑의 공동체 정신을 파괴하는 편 가르기 문화적 정결법이 형성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 사이를 편 가르게 하는 정치적 정결법도 있습니다. 이는 국가보안법입니다. 이 국가보안법은 북조선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어 이는 남한을 무너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악의 화신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북한은 단지 사탄의 대명사일 따름입니다. 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수많은 민주인사들과 학생 무고한 시민들이 엄청난 고난을 겪었고 우리 교회에만도 김낙중선생님과 홍근수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교우들이 옥고를 치루셨고 지난 주 강정구교수께서는 1심의 구형을 그대로 인정받는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이 결과는 예정된 것이기도 했기에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판사의 판결문에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여럿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현행법이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자기가 북조선을 ‘반국가단체’로 확신하고 있다면 강정구교수에 대해 유죄를 내릴 뿐만 아니라 그날 당장 법복을 입은 채로 남북총리가 만나고 있는 회담 장소인 워커힐 호텔로 찾아가서 북쪽에서 온 빨갱이 일당을 구속하라고 소리를 치고 남한의 총리부터 구속시켜야지요. 그는 현행법을 말하지만 동시에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눈을 감는 사람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미친 사람이란 자기 안의 생각과 밖의 현실이 상충을 극복하지 못한 분열의식의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강정구교수님을 유죄로 하는 몇 가지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는데,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동의하지 못해 이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그는 학문적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이 속으로 혼자 알고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이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는 이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난 이런 자유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회의 발전을 향한 공동체적이고 공개적인 것인데, 학문적 결과를 사적 소유물로 이해하고 이를 혼자서만 알고 있으라는 유아적인 해석에 저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사회 다수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자유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의가 필요 없지요. 발언 뒷면에 담겨 있는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 나타난 말만 꼬투리를 잡아 죄인으로 모는 것은 마치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발언을 문제 삼아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당시 지도자들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 강정구교수께서 미국을 표기하면서 아름다운 미(美)자를 쓰지 않고 쌀미(米)자를 썼다고 이를 이적행위로 규정했습니다. 어디 헌법에 미국을 표기할 때는 아름다울 미자를 써야 한다는 규정이 있나요? 이건 하나의 사회적 관습일 따름입니다. 사실 처음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미국(美國)으로 United Kingdom of England를 꽃부리 영의 영국(英國)으로 번역한 사람은 상당한 사대주의자라고 봅니다. 다른 나라들 불란서나 독일 러시아의 경우는 발음을 따라 나라 국명을 정했는데, 유독 미국과 영국은 발음을 따라 부르지 않은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국이라고 말할 때의 미자는 사실 아름다울 미(美)도 아니고 쌀 미(米)도 아니고 갈 바를 알지 못해 왔다갔다한다는 혼미할 미(迷)자를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미국은 국제표기를 따라 USA 혹은 US라고 부르고 영국은 UK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미국에 쌀 미자를 쓰고 있는데 도대체 이것이 왜 이적행위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름다울 미를 주장하는 사대주의에 사로잡힌 판사가 오히려 한민족주체성을 파괴하는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셋째 이번 남북총리회담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서해5도의 NLL북방경계선을 언급하면서 강정구교수께서 이는 ‘남의 집 앞마당에 주인의 허락 없이 줄을 긋는 행위’라고 한 논문에 썼는데, 이와 비슷한 표현이 노동신문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동신문이 먼저였는지 강정구교수의 글이 먼저였는지 잘 모르지만, 도대체 이 문장은 강정구교수의 독창적 표현법도 아니고 우리나라 속담에 가까운 누구나가 쓰는 일상적 표현법입니다. 그게 같다고 북과 내통한 증거물로 본다나요. 너무 어이가 없더군요.

넷째 강정구교수의 반미적인 글이 남남갈등을 조장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지금 한 두 명입니까? 지금 대선을 앞두고 모든 정치인들과 언론이 부추기는 일이 남남갈등입니다. 유력한 대선주자들은 일제의 천황에게 목숨을 바치겠다는 혈서를 쓴 일본 육사출신에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억압한 독재자였던 박정희를 추모함으로 더 극심한 남남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생산물이라고 하는 것이 갈등 없이 생기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갈등은 창조로 가기 위한 필연적인 길입니다. 새가 태어나려면 껍질을 깨는 아픔이 있어야 하고, 아이가 태어나려면 산모의 고통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문제는 과거지향적인 소모적이고 부정적인 갈등이냐? 아니면 미래지향적인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갈등이냐?를 판가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족화해와 통일을 향한 갈등이냐 아니면 분단고착과 미움을 증대하는 갈등이냐?를 구별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기초적인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서울고등법원의 부장판사로 있는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잘못된 사회적 규범인 정결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결국 이 때문에 십자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안에 서로를 구별 짓고 자기만의 아성을 쌓아가는 개인 신앙의 정결법을 허물어야 할 뿐만이 아니라 이 남한교회의 정결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강남신앙’도 경계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이라는 정결법이 철폐되도록 애를 쓰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마땅한 행동이라고 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는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자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거룩함은 단지 성속을 구별하는 일차적 단계를 넘어 평화와 정의, 생명을 중심하는 가치관과 사회적 약자를 그 중심에 두고 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