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공동체 주일 강단교류
하나님의 참된 교회
예레 7, 1-7 ; Ⅰ고린토 6, 19-20

김 경 호 목사


지난 주일에 매우 감격스러운 예배가 있었습니다. 들꽃향린교회의 창립 3주년을 맞아 이젠 완전히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분가선교의 성취를 감사드리는 연합예배를 강남향린교회 당에서 드렸습니다. 그간 두 교회가 모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예배 시작 전에 1,2층을 가득 메운 모습에 예배 시작 전부터 가슴 뿌듯한 감격이 넘쳐왔습니다. 그 예배를 통해서 큰 감동을 받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보이는 교우들도 여럿이 있었습니다. 그 예배는 양 교회 모두가 그동안의 불안감과 위축되었던 마음을 일소하고 이젠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두 교회 모두 합하면 분가 당시보다도 예산도 두 배요, 교인의 숫자로도 분가이전 보단 훨씬 많은 숫자가 된 것을 확인하고 분가가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삼년 전에 분가선교를 할 때, 많은 분들께서 우려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적은 교회가 그나마 분가하면 그나마 두 교회가 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는데 그것은 역시 인간적인 기우에 불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역사하셨고 불과 삼년 만에 우리는 두 배의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당시에 염려하시던 분들에게 “아닙니다. 3년 정도 지나면 지금 있는 강남향린교회가 두 개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 드린 그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제가 두 배가 되었다 어떻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단지 보이는 열매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성과는 단지 물리적인 숫자로 셈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가선교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향린에서 강남향린이 분가한 것이나, 강남향린에서 들꽃향린이 분가한 것은 교회 성장주의를 거스르는 일대 사건이었기에 교회에 큰 변화의 모델이 되어서 한국교회 전체를 변화시킬 싹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물리적 변화를 넘어서는 큰 질적인 변화의 그루터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향린교회에서는 임승계 장로님, 김정태님 오후 행사에 박종권님께서 참석해 주셨고, 화분을 보내 축하해주셨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중세에 기독교 권력이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제 출신이었으나 예수의 정신은 없어지고 어마어마한 교권과 교회당의 크기, 사람의 머릿수, 재정의 규모로만 모든 것을 가늠하는 교회로는 예수정신이 이어질 수 없다고 보고 수도원에 들어가 구걸을 하는 탁발운동을 하며 가난하고 청빈한 예수의 마음을 이어 나가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성 프랜시스는 수도원에 머물면서 낮에는 걸인들 가운데 끼어 함께 구걸하며 생활하기도 하고 자신의 옷을 그들에게 벗어 주기도 자신은 누더기를 걸치기도 했습니다. 당시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물론 세상이 바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주류의 교회에 비해 이러한 수도원 운동을 하는 분들은 그야말로 전체에 비해 0.001%도 되지 않는 매우 적은 무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제와 신도들은 자신들이 면죄부를 팔아먹은 주류교회의 전통을 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성 프랜시스의 청빈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탁발운동을 한 분들은 비록 한 줌 뿐이 되지 않은 무리였지만 중세의 현실 역사를 뒤집고 많은 사람들의 정신 속에 오히려 주류로 자라잡고 고백되어 집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역사는 숫자나 건물의 크기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의가 있느냐 하는 그 의의 분량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대부분의 독일기독교는 히틀러에 동조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학살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게 한 유대인들에 대한 복수’라며 이를 부추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님을 비롯한 숫자로는 아주 적은 무리지만, 그들이 히틀러의 잘못을 지적하며 별도로 고백교회를 선언하고 그들의 신앙 양심을 지켰습니다. 물론 본회퍼 목사님과 양심을 지킨 분들이 죽임을 당하고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독일교회가 자기들의 교회 전통으로 삼는 것은 히틀러에 동조했던 주류의 세력이 아니고, 당시 숫자로는 1%도 안 되는 작은 무리였지만 죽음으로 신앙양심을 지켜간 고백교회의 정신을 자신들의 정신적인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일본 기독교도 일제시대에 “전쟁을 신성한 싸움”으로, 아시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황국신민으로서 이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고백교회 운동처럼 조직적으로 이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대세의 흐름에 따를 뿐이었습니다. 독일교회는 소수이지만 지금 자기들의 정신적 기반을 순교자의 피위에 세울 젖줄이 있지만, 일본은 불행하게도 그런 젖줄이 없습니다.

이 때 한국기독교 역시 일본의 전쟁에 부하뇌동하고 교회 종까지 떼어내 군수물자 징벌에 앞장섰고, 일제 말기에는 교회 안에 신사를 별도로 마련하거나 신사가 있는 쪽을 향해 참배하도록 했습니다. 예배 전 후에 일본 신사에 절하고 예를 표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각 교단이 그렇게 할 것을 결의하고 예를 행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압력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사참배에 저항하고 순교한 소중한 피흘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에 열린 교단 총회에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교회가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양심의 소리는 다수의 목소리에 묵살 당했습니다. ‘너희가 교회를 아느냐? 교회를 지키기 위한 순교적 충정 아니었다면 교회가 과연 생존했겠느냐?’ 며 벌떼처럼 일어나 발언조차 못하게 주저 앉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소영웅주의에 물들은 자,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자로 낙인찍었습니다. 과거 역사를 정리하고 순교자의 피를 우리들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해방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작은 교단인 복음 교단이 2006년에 죄책고백을 하고 2007년에 기장이 한 것을 빼놓고는 교단적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죄책 고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마다 자기 교단의 정신적인 지주로 여겨온 분들에 대한 죄책을 고백하고 그들을 딛고 넘어서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신사참배에 대한 죄책고백은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들이 지킨다고 하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당에 신사를 세우고 절하며 지킨 교회당 건물이 그들이 지킬 내용입니까? 그들이 지켜낸 교인의 머릿수가 지켜야할 교회의 본질입니까? 교회 소유의 재산이 지켜야할 교회입니까? 그들은 평화와 정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고 아울러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복음의 편에 선다는 것은 어디 추상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빌딩이니 조직, 기독교의 전통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내적인 정당성을 지켜나가는데 있으며,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지키고, 하나님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말씀이지 웅장한 교회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할 것은 하나님의 정의이지 수많은 인파가 모이는 교세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할 것은 힘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오늘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더불어 존경하며 사는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지가 세상을 지켜가는 것이며,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 없는 정신이 우리의 가정을 지켜나가는 것이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가 지켜야 할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성전설교입니다. 오랜 순례 끝에 성전에 도착하여 그 땅에 입 맞추고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이다”고 감격에 찬 탄성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는 찬물을 끼 얻습니다.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마침내 성전에 도착하여 성전을 보고 안위를 받는 사람들에게 “속이는 말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이어집니다. “참다운 성전은 무엇인가?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로의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리리라”

고린도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고전 6:19)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고후 6:16).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바로 세상의 아픔에 반응하는 곳입니다. 신학은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가 당하고 있는 아픔을 해석하고 올바른 방향의 희망을 주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픔을 느끼지 않으면 신학은 소설이 되고, 설교는 독백이 됩니다. 세상이 겪는 아픔과 무관한 신학과 설교는 그들이 아무리 학문적이고 아름다운 말들을 나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르시즘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그 시대에 대해서,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니다”를 말해야합니다. 교회는 자체로서의 완성품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설명하신 하나님나라 그 자체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라는 종말에 이를 때까지 중간시대를 살아가는 전략으로 선택된 곳입니다. 마치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대신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자기 완결적 구조에 머물러 교회 자체를 위한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지 교회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즉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조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경과 사항으로 요청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나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스스로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며, 자기 조직이나 소유,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청중의 숫자를 목표로 삼거나, 그것을 힘의 근원으로 삼기 위해 존재할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교회가 그 모인 울타리 안의 청중만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만을 위해 봉사한다면, 아무리 복음화와 전도를 외쳐도 그런 교회는 이미 예수와 상관없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준 사건이듯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개인이나 교회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론, 선교론은 교회성장이나 자기 발전적 전략을 연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는 십자가 사건처럼 자기희생적 결단을 실행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란 자기를 비우거나 자기를 죽이면서 세상에 보냄 받기 위한 운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가 속한 지역사회와 민족공동체, 나아가 전 세계적 민중과 연대하여 가장 의미 있게 자신을 던져 내놓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교회론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론은 종래의 성장이나 발전을 고려하는 교회론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당장의 눈앞에 나타나는 영광이나 성과를 기대하지 않고 가장 의로운 죽음, 십자가의 자리에 서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회론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설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워지는 자리이며 지금은 죽더라도, 그 열매와 결과는 하나님의 몫으로, 또한 먼 역사의 몫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결과를 미리 예단하거나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를 따라 자기 소멸의 길을 갈 뿐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자기 죽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 계획 없이 그냥 죽는 죽음은 아닙니다. 우연히 당하거나 예상치 못한 채 맞이하는 죽음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서있는 십자가의 표지는 우리가 집단이건, 개인이건, 그냥 죽음에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십자가는 가장 능동적으로 어차피 다가올 우리의 죽음을 가장 값있는 죽음으로, 가장 뜻있는 죽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냥 죽음을 당하는 것은 죽음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의미 있고 의로운 죽음의 자리를 먼저 찾아, 거기서 최선을 다해 의미를 살려가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방법(선교)’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사건이 살아있는 교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한다. 우리는 그것을 몸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교론, 교회론은 ‘십자가의 선교론’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선교의 방법입니다. 이렇듯 십자가를 지는 교회는 그 당시에는 고통이지만, 오히려 새로운 사건을 창조하고 민중의 자각을 일깨워가게 됩니다.

한동안 국민사회를 온통 지배했던 서구 교회는 현재 텅텅 비어 있습니다. 웅장하게 지은 교회당들이 관광객들의 구경거리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2년에 한 번, 일주일씩 계속되는 ‘교회의 날’이라는 집회를 갖는데, 이 때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운집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이 종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득권에 안주하며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면한 사회문제에 등한했던 기성교회에 대해 거부하거나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공격적으로 전도해도 한국교회의 절대 기독교 인구는 이미 줄고 있고, 더욱이 젊은 세대에게 급속히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세로 주어진 역사의 몫을 감당한다면, 어느 날 광화문에 수십만의 인파가 촛불을 켜들고 모여드는 것처럼 떠나갔던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순수하게 이 역사의 제물이 될 각오로 한반도에 주어진 역사적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고자 한다면 그 때라야 비로소 부활의 기쁨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향린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다 자기도 향린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래 봤자 향린교회가 3-4백 명의 작은 공동체인데 자기가 교인이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다 수용하려면 수만 명 되는 교회여야 가능할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중 몇 사람은 제가 교적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실제 향린교회 등록 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오고가며 집회에 한번 참석했다던가 인터넷을 통해 보았다던가 하는 모든 사람들이 향린교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의 주장대로 향린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향린교회의 역사의 몫입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이 Potential insider(잠재적 내부자)라는 사회적 현상임을 나중에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교회가 되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행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잠재적 내부자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이 교회의 교인이 되는 일은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 받아라”하고, 매일 달콤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니 다른 교회와는 달리 좀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신앙생활 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듯이 끝까지 올바른 길을 가고 예수의 얼굴을 닮은 교회를 만들어 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뒤에 숨겨진 칠천 명, 아니 칠천만 명을 내어 놓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교회들,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회들이 한국에는 많이 있습니다. 숫자로 볼 때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교회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교회들이 건강하고 참 좋은 교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같이 담임목사를 벼슬인 듯 세습이나 하고 온갖 부정과 비리로 상식이하의 길을 간다면 수십 년 후에는 아무도 내 놓고 ‘우리 아버지가 그 교회 장로였고, 우리 어머니가 그 교회 권사였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장대하나 그들이 도덕성을 정당성을 상실한다면 지금은 내부에 사람들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Potential outsider(잠재적 외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역사의 평가는 모든 것을 뒤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당히 행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올바르게 행한다면 눈에 보이는 백여 명이 우리의 숫자가 아닙니다. 이 안에 이 자리 사이사이에 하나님의 백성 칠천 명이 함께 하고 있고, 칠만 명이 함께 하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이 흐름이 마침내는 기독교 전체를 그리고 이 세상의 물결을 바꾸어 갈 것 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어느 곳일까요? 번듯한 집을 지어 놓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안심할 수 있을까요? 시설이 그럴듯한 교회에 다니면 일등교인이고, 셋방살이 임대교회에 자리 잡은 교회는 삼류교회일까요? 우리들 하나하나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어떻게 지켜 가시겠습니까? 어떤 계획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가시겠습니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