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와 아직 아닌 시간 속에서
이사야 66, 7-14 ; 마태오 25, 1-12

정 미 현 목사



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성령의 지혜로운 인도하심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대강절 이 기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선포할 기회를 주신 목사님과 장로님과 교인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혹시 70년대에 유행하던 “캄벳(전투)”이라는 미국 텔레비전 영화 시리즈를 기억하시는지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미군과 독일군이 싸우는 것을 소재로 한 것인데, 미군은 항상 영리하고 승리하는 것으로, 독일군은 우둔하고 패배하는 것을 다룬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미국 개척 시대에 미국 기마병이 인디언을 상대로 싸우는 내용을 다룬 것도 있었습니다. 더럽고 무식한 인디언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역시 깔금하고 정돈된 미군 기마병이었구요. 미국의 헐리웃의 영화가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흑백논리적 이원론적 도식이 이런 텔레비전 영화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즉 미국은 선이고, 나머지는 모두 악으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미군과 미군 기마병은 아군, 상대방은 적군으로 여기는 단순한 이원론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 매체에 우리가 길들여져서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는 해방 이후 미국 기독교의 영향 하에서 반공주의의 성향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면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과 아울러 북한에 대한 무분별한 적대감을 오히려 강화시켰습니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 내에서 생겨난 적과 아군, 친구와 원수, 악과 선에 대한 단순한 구분은 나를 주체로 생각하여 나와 다른 생각이나 이념이나 모습이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적대시 하는 형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단순 논리가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여야 하는 21세기 우리의 지구촌에서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이와 유사한 이원론적 구분이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대한 내용과 두 유형의 열처녀의 모습은 수많은 기독교 예술품의 주제가 되었고, 유럽 교회의 문을 장식하는 부조에 가장 많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임할지 모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어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여 줍니다. 그리고 기다림에 대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등불을 준비하는 두 유형의 여인들의 모습으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두 유형의 처녀들에게 먼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신랑을 기다린다는 점입니다.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비유되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내용 가운데 한 가지 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로 비유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성평등 언어를 사용하여 번역된 독일의 한 성서는 ‘어리석은 이’라는 단어 대신에 ‘순진한’, ‘소박한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대신에 ‘약삭빠른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저도 오늘의 설교 말씀에서 그 표현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순진한 처녀들도, 약삭빠른 처녀들도 모두 등불을 갖고 있습니다. 전제 조건이 같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잠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도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갑자기 신랑이 한밤중에 도착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자세, 가장 기본적 덕목을 꼽으라고 한다면 기다림입니다. 그 기다림에 대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 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처녀의 비유로 단순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주어진 시간 안에 잘 이용하라는 말씀과 아울러서, 우리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형제, 자매를 돌보고 대하는 것을 주님 대하듯 하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매듭짓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행하는 행동에서 주님을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이 모두 연결되는 가운데, 다음의 점을 특별히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 준비된 상태의 기다림.

한국 기독교의 100여년 되는 비교적 짧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국한시켜서 선전한 많은 무리들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금지된 것에 더 흥미를 갖고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 수 없다는 말씀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속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 날과 그 시각을 우리의 생각대로 계산해 낼 수도,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간섭하려할 때 우리는 교만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준비된 상태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언제 어떤 형태로 임할지 모르는 하나님 나라를 맞을 수 있도록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뜻일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체적 한계로 졸음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상태로 기다림의 고삐를 늦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길 권하신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어렸을 때 선교사들로부터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도록 배웠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구름 타고 하늘 올라가신 것처럼 구름 타고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구름 끼고 꾸물꾸물한 날에는 호미자루 모두 내팽기치고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하늘만 쳐다보았다는 것이죠.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구름 타고 막 오실 것인데, 농사짓고 이러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영접할 준비하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더랍니다. 지금 우리는 성서를 그렇게 문자적으로 읽고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웃을 수밖에 없지요. 물론 이렇게 성서를 대하는 것이 성서의 말씀을 더욱 소중히 새기려고 애쓰는 순박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그 이상의 복음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형태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십니까? 준비된 상태의 기다림이라는 것은 가시적으로 우리에게 임할 그 스펙타클할 모습을 상상하고 쫓아다니라는 것이 분명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가시적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지금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의 덕목은 독일의 불름하르트라는 신학자가 말했듯이 "기다리며, 서두르고, 서두르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하여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맹목적인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서두르는 역설적 긴장관계 속에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2. 기름을 마련한다는 의미

자본주의적 특성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무엇을 마련한다는 것을 많이 사서 모으고 가득히 채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쉽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래서 많이 가진 것, 크고 높은 것, 거대한 것이 부러움의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말씀에서 마련한다는 의미는 문자적으로 적합한 물질을 갖추어야 됨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우리의 마음가짐의 가다듬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며칠 후에 하나님의 사랑이 몸으로 드러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고 맞게 됩니다. 성탄절의 의미가 자본주의적 상업주의 속에 퇴색해 버린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랑을 맞을 기름을 마련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흔히 서양에서는 선물을 사야 되는 스트레스에 사람들이 지친다는 소리를 많이 듣곤 합니다. 또한 서양의 어린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산타클로스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서양의 선진국에서만의 현상인지,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모습이 이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두움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다리는 것이 대강절의 의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이전부터 유태교 공동체는 이 전통을 소중히 간직하여 왔고, 예수 탄생 이후, 교회는 이 전통을 아름답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주어지게 되었을 때 우리의 기쁨이 더욱 크게 되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저 무감각하게 있다가 성탄을 맞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즉 기다림이 없이 성탄을 맞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기다림이란, 우리 안에 가득한 아집과 욕심을 먼저 덜어내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마음 안에 가득한 걱정, 염려, 근심도 모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것이 가득 차 있으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들어 설 자리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련한다는 것을 이런 점에서 채움이 아니라, 오히려 비움이라는 역설적 의미로 해석함이 옳을 것입니다.

3. 나눔의 의미

아울러서 우리가 이 본문을 한번 뒤집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순진한 처녀들과 약삭빠른 처녀들의 태도입니다. 이들이 기름을 나누어 같이 사용할 수는 없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약삭빠른 이들의 어림짐작으로는 기름이 모두에게 충분하지 않고 그래서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나누고자 하는 자세가 애초부터 이들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함께 나누지 않았던 이들만이 선별되어 문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문밖에서는 고통과 아픔으로 여전히 신음하는 순진한 처녀들의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마련한 기름으로 잔치가 열린 문안으로 이미 들어갈 수 있으니 만족스럽고 기분 좋다고 즐기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요?

자유 시장 경제 체제 속의 경쟁관계에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모습에서 이 두형의 처녀들의 모습을 연관지어보려 합니다. 그것은 특정 엘리트 집단과 다수의 순박한 민중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모든 정보와 노하우와 경제력을 지닌 사람들이 이 약삭빠른 처녀들로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반면에 정보와 경제력, 교육수준 그 아무 것도 제대로 지니지 못한 채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육체적으로 더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혹은 경제력 때문에 기름을 제대로 준비할 여유가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삶의 상황과 구조악이 이들을 그렇게 몰아갔는지도 모릅니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지구화된 전 세계를 휩쓴 오늘날에 전 세계적으로 소수의 부유층과 특권층이 더 부유해 진 반면에, 더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우리가 주목할 부분입니다. 1995년 유엔이 주최한 베이징 여성대회 이후, 특정 여성 엘리트들이 나라마다 주요 요직을 차지한 반면에 빈곤의 여성화, 여성의 빈곤화가 전 세계적으로 극도로 확대된 모습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50여 년 동안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아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북한의 우리 동포들이 제대로 기름을 준비할 수 없는 이 순진한 처녀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때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만 기름 준비 잘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름을 잘 준비하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 임하신 것 같이 땅에 임하게 될 날에 대한 줄기찬 기다림의 신앙의 고삐를 늦추지 말라는 것이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되는 내용이 다른 부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신비스런 만남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당부로 이 말씀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이셨던 눌린 자와 억압된 이들에 대한 철저한 연대감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각 종교간의 협력을 위해서도 소중한 본문입니다. 모든 종교가 선을 행하는 이러한 행위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며,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자를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는 일에 대한 강조가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을 설명하는 대목에 나온다는 것이 특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만이 하늘나라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만족하거나 자족하고 있을 수만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가야 합니다. 나와 다른 이들은 못 들어가게 만드는 이기적 배타의식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옹졸한 소수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 나라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타자를 나의 기준으로만 심판하는 태도도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기계적 이원론은 화해와 상생의 조화를 추구해야 할 21세기의 우리의 교회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판의 궁극적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하려는 오만함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곳 그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한국인들은 이승과 저승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 밭에 새겨진 전통 종교적 사상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뒤에 만나는 저승의 개념으로 전락해 버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그러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 건설할 수 있는 그러한 왕국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지만, 아직 여기에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 실현되게 될 것을 우리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통하여 그 점을 거듭 간구하게 됩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는 기원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여기가 거기가 된 것 같이, 거기가 여기가 되게 하여 달라는 기원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러한 기도만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 땅에 임하실 것을 믿는 확신과 희망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과제들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죽은 뒤에 돌아갈 본향을 그리워하는 것으로만 축소되어 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다림은 우리 각자에게 믿음을 통한 행함을 촉구하는 메시지와 떼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을 이제 2007년도에 다시 기다리면서, 우리들이 각자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자기 비움 안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충분히 체험할 준비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빛을 받아 우리는 우리보다 더 어두운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 빛을 되 쏘이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대강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교회력이 시작되어 기독교인에게는 이미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사건을 다시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독일 기독교는 그들의 통일에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라이프치히의 중앙에 위치한 니콜라스 교회는 정치적 밤 기도회를 꾸준히 준비하면서, 통일을 대비했었습니다. 서울의 중구 복판에 있는 향린교회가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이 한반도에서 그런 역할을 담당하게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임하는 자리 그 어디에서나 환한 그 빛이 충만히 비추이게 되며, 우리 사회의 지극히 작은 자들이 그 빛 뿐 아니라, 그 빛의 열기도 함께 체험하게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