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1일(새 날, 새 인간, 새 세상)
이사야 65, 17-25; 루가 6,41-49

[목표지향 무엇이 문제인가?]

몇 년 전 IMF 사태가 일어났을 때, 국민들에게 희망을 던져준 세계적인 두 명의 운동선수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박찬호이고 또 한 사람은 박세리입니다. 박찬호는 지금도 선수생활을 잘 하고 있지만 박세리선수는 그간 슬럼프에 빠졌다가 올해는 부상으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선수가 되었습니다. 한때 골프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며 소렌소탐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지적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세리보다 나이가 많은 소렌소탐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선수로 활약하고 있지만 박세리선수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차이는 개인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민족문화의 차이라고 말하겠습니다.

2년 전 박세리 선수가 슬럼프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한 스포츠 심리학자는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박세리는 지금 목표를 상실한 인간이 되었다. 이제까지 그의 목표는 LPGA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를 목표로 세리를 엄하게 훈련했다. 어린 세리를 밤에 공동묘지를 혼자 다니며 담대함을 키우게도 했다. 세리는 잘 해냈다. 그리하여 명예의 전당에 필요한 27점을 획득했다. 아시아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그 이름이 기록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리 자신에게 있다. 그녀는 지금 행복한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LPGA 명예의 전당. 그 목표에 도달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도달해야 할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제가 아는대로 소렌소탐은 골프 이외에 두세 가지의 취미와 특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손가락이 아예 부러져 골프를 못하게 되더라도 소렌소탐은 자신의 생애를 의미 있고 기쁘게 꾸려나갈 수가 있습니다. 반면 박세리는 골프 하나만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고 모든 것을 올인한 사람입니다. 소렌소탐은 항상 말합니다. 골프를 즐기라고. 그래서 소렌소탐은 슬럼프가 왔을 때에 극복하였지만, 박세리는 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물론 올해에 분명히 재기하리라고 믿지만, 이는 박세리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남한 민족의 전반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황우석교수의 논문조작 사건도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닌 세계 최고라는 목표지향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현대 사고구조가 만들어낸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목표가 분명하여 이 목표를 향해 매진하고 올인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 목표가 갖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목표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이 그 목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외면적 관심에만 집중합니다. 그래서 목표를 향한 과정을 즐기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목표를 무시합니다. 이로 인한 폐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한국계 신입생들의 비율은 8%에 이릅니다. 미국 안의 인구비율로 본다면 0.5%밖에 되지 않는 한국소수민족으로서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중 80%가 낙오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적응을 하지 못해 학교를 옮기거나 낙제를 하거나 전공을 바꿉니다. 이 또한 예가 없는 놀라운 일이어서 하버드 대학에서 그 원인을 자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론은 창피스럽게도, 한국계 학생들의 목표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대학공부를 통해 인생에 그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목표가 부족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목표는 변호사가 되거나 의사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목표는 하버드를 들어가겠다고 하는 목표나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외면적인 목표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세상의 잣대로 보는 외면적인 목표는 정도의 차이일 따름이지 그 근본은 같습니다. 문제는 내면의 목표입니다.

[내면의 목표가 우선이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나름대로 목표를 세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 하나는 외면적 목표를 세우기 전에 먼저 내면적 목표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올 한 해 동안 나의 내면의 목표는 무엇이고 이 내면의 성장을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귀를 기울일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건 목사님으로서 하는 이야기이고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제게 중요한 것은 외면적 목표’라고 주장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신앙이 중요한지는 알지만 그러나 그건 제 삶의 외면을 어느 정도 달성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분과 논쟁하지는 않겠습니다. 교회에 계속 나오시기를 바라기에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저는 여전히 삶의 진정한 성공은 내면에 있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니고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살았던 수많은 지혜자들의 결론이고 오늘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입니다.

예수께서는 내면의 목표를 세우는 것을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에 비유하고 계시고 외면에 치중하는 사람을 기초 없이 맨 땅에 집을 짓는 사람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겉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쩌면 기초 없이 집을 지은 사람의 집은 더 화려할 수 있고, 더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홍수가 밀려올 때, 인생의 커다란 위기에 닥쳤을 때 이 두 집은 엄청난 차이가 드러납니다. 한 집은 건재하지만, 다른 한집은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주보 속에 부서를 하나 선택하도록 하는 종이를 드렸고, 오늘 예배가 끝나면 바로 부서별로 모여 앉을 것입니다. 물론 이 와중에서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품고 참가하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교회에 주인의식이 없는 분은 언제나 그 신앙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달란트 받은 자의 착각]

달란트의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 그리고 한달란트를 받은 종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을 이를 땅에 묻었습니다. 그는 이를 땅에 묻을 때 자신에게 무어라고 말했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섯달란트도 받았고 두 달란트도 받았는데 나는 겨우 한달란트를 받았다.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 그리고 혹 내가 이를 잃어버린다면 어찌 할 것인가?’ 그는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자신의 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따져봅시다. 그 한달란트가 자신의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이를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무시이자 경멸이었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30배 60배를 결실하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시였습니다. 다섯달란트의 사람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한달란트에 충실했을 때, 그때 하느님은 두달란트도 맡기고 다섯달란트도 맡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처음 들어오는 직원에게 중책을 맡기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말입니다.

저도 미국에서 식당 매니저 일을 하면서 10여명의 젊은이들을 써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누가 인생에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때 시간에 충실하여 내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빗자루를 들고 작은 일에 충성했던 젊은이는 분명히 성공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그저 시간만 적당히 때우고 주급만 받아가기에 열중했던 젊은이는 지금도 그렇고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향린인이 가져야 할 내면적 목표]

저는 교회의 선교나 봉사를 부탁드리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를 위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만약에 이것이 여전히 부담스럽고 이를 외면적 실천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는 그런 분들을 위해 내면적 목표를 제시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진정 공동체라는 자각을 위해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이 향린교회에서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되는 한분을 머리에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 차이가 세대 차이에서 오든 이념의 차이에서 오든 교회경험의 차이에서 오든 지식의 차이에서 오든 경제의 차이에서 오든 직업의 차이에서 오든 교인수첩을 펴들고 나와 가장 멀리 있다고 여겨지는 한분을 마음으로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그분을 눈여겨보며 그분의 생각과 삶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시간에 그분을 모습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여러분은 그분 또한 나와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과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듯이 그분 안에도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듯이 그분도 똑같은 분량만큼 사랑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느님의 온전하심을 따라 너희도 온전하라.’ 부탁하셨던 예수님의 본 뜻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일년을 보낸다면 제가 분명히 장담하는 것은 여러분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하느님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 있을 것이고 여러분의 삶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풍성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실리시어스라는 신앙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좋은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자기의 내부에서 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코이라는 일본 잉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잉어는 자신이 사는 환경에 따라 자라나는 크기가 다르습니다. 이 잉어를 작은 수족관에 넣어 두면 5-8센티미터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1미터 이상 자랍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어떤 환경에 두는냐에 따라 그 신앙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자신의 삶에 가두어두면 5센티정도 자랍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직장이나 친목그룹에 두면 15센티정도 자랍니다. 그러나 민족을 품고 이 세계를 생각하면 여러분의 믿음은 1미터를 넘어 계속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전 여러분이 큰물에서 노는 잉어가 되기를 바랍니다. 단지 고여 있는 연못에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유유자적하는 잉어가 아닌, 흐르는 강물 속에서, 포효하는 파도 속에서 그 물살을 역류하고 떨어지는 폭포 속에서 조차 힘찬 꼬리짓을 통해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커다란 잉어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전 여러분이 교회의 교인만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회인이 되고 민족의 문제를 고민하고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는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단지 내 민족의 이익만을 꾀하는 국수적인 민족주의자만이 되기를 원치도 않습니다. 세계와 우주의 문제를 고민하는 세계인 우주인까지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이 이렇게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처해있는 작은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교회에서 빗자루를 들거나 변소 청소를 하는 일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의 꿈, 우리의 꿈]

이사야 선지자가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은 참으로 큰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다시는 울음소리가 나지 않고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평안의 세상만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은 아기도 없고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노인도 없고 백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없는 장수의 세상만도 아니었습니다. 제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고 제 손으로 가꾼 포도를 따먹는 정의의 나라였던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꾼 과일을 남이 따먹는 것도 보지 않는 세상, 군사적 침략과 자본의 침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전쟁 없는 세상만도 아니었습니다. 외국 군대의 철수만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가 꿈꾼 세상은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세상이었습니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 되려면 위장소화체계 아니 몸의 전체 구조가 송두리째 바꿔져야 합니다. 이사야는 강대국이 그냥 멸망당하는 세상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상은 조금 있으면 또 다른 강대국이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예 강대국과 약소국이 존재하지 않는, 남을 지배함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인간의 야만성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군인이라고는 눈을 비비고 찾아보아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어쩌면 실현가능성이 없는 꿈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현실을 현실로 보는 꿈이 진정 하느님에 뿌리를 둔 참신앙의 꿈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2006년 1월 1일 이 아침에 향린교회 성도 여러분이 모두 이 이사야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만들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사는 아파트 값이나 저축통장이 커지는 기쁨보다 여러분 자신 안의 잉어가 자라는 것을 더욱 기뻐하는 참 세상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